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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감각으로 전해지는 아픔이 있다. 지친 표정으로, 노곤함이 눅진하게 들러붙은 냄새로, 촘촘하면서도 거친 소리의 질감으로 고여 있던 아픔은 실체를 드러낸다. 감각을 자극하는 아픔은 깊다. 공기를 타고 흘러와 온몸으로 스며든다.
『제르미날』에 빠져있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 책의 BGM으로 어울릴만한 음악을 듣는다. 니나 시몬의 ‘Don´t let me be misunderstood’이다. ‘baby’라는 첫 소절이 심장에 느낌표를 찍는다. 가수든 가사든 아무런 정보도 없지만 아픔이 묻어난다.
현재형이든 과거의 흔적에서 온 것이든 라디오 속 목소리가 아픔의 파도처럼 흘러나온다. 삶에서 아픔은 내면에 켜켜이 쌓이는 걸까. 바람이 불면 먼지가 일어나 듯 목소리로, 냄새로, 빛깔로 고개를 내미나. 혹은 내게 담긴 아픔이 무의식적으로 공명을 일으키는 건지도 모른다.
디제이와 게스트가 ‘탄광 목소리’라는 멘트를 주고받는다. 같은 노래를 부른 다른 가수를 일컫는 말이지만 이 목소리도 못지않게 탄광스럽다. ‘귀로 오는 게 아니라 가슴을 치는 목소리’라는 게스트의 표현에 수긍한다. 남성의 것인지 여성의 것인지조차 헷갈리는 음성이 차 안을 가득 메운다. 인간 본성에 근접한 목소리가 있다면 비슷한 느낌일까.
에밀 졸라가 묘사하는 인간은 원초적이다. 육체마저 벗어던진 듯 내밀한 심리가 까발려진다. 심리학계의 능숙한 집도의 랄까. 인간이 두른 몇 꺼풀의 가식도 그를 만나면 적나라하게 파헤쳐진다. 당황은 독자의 몫이다.
졸라의 문체에 적응이 되어가는 중이다.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인물의 심리와 상황 묘사를 극대화한다. 환경과 상황과 등장인물의 삼위일체, 사물들의 짐승화가 다시 등장한다. 돌아온 석탄과 증기! 역시 그는 석탄 묘사의 달인인가. 탄가루가 묻어나는 문장에 매번 감탄한다. 뜨겁고 축축한 장마철의 공기를 분사한다. 인물의 배경은 뜨겁고 그들의 삶은 한겨울 내던져진 알몸인 듯 매섭다. 이번에는 어둠에다 깊이까지 더해진다. 온 세상 어둠을 몽땅 끌어 모아 갱도의 좁은 구멍에 우르르 쏟아 붓는다.
『제르미날』은 노동자계급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소설이다. 작품의 배경은 1860년대 프랑스 북부 광산 지대이다. 광부들과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투쟁과 산업화 시대의 불온을 그린다. ‘제르미날’은 프랑스 혁명력의 7번째 달을 의미한다. 싹이 튼다는 ‘germer’와 탄광의 ‘mine’과 공화력의 ‘al’의 복합어이다. 파종의 달, 싹트는 달을 의미한다. 대중 봉기, 폭동, 폭력, 가난, 기아 등을 내포한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사회 변화의 진정한 잠재력은 무엇인지 세상을 향해 질문한다.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제르베즈와 랑티에의 아들이 이 책의 주인공 에티엔 랑티에이다. 중심인물은 랑티에와 마외 씨의 딸 카트린이다. 그가 탄광촌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제일 먼저 마주치는 인물은 8세 때부터 50년을 탄광에서 일한 노인이다. 한 가지 직업을 50년 하면 이를 바라보는 마음은 어떨까. 대화 중간 중간 추임새인 듯 계속되는 기침이 그곳이 탄광촌임을 자각시킨다. 뱉어내는 침과 함께 피처럼 섞여 나오는 탄가루는 지나온 삶의 흔적이자 부스러지는 생명력이다.
랑티에는 거대한 어둠이 깔린 지역을 가리키며 노인에게 묻는다. 저게 다 누구 거냐고. 노인은 탄광의 주인을 알지 못한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존재, 포식하는 신적인 존재들을 위해 세대를 거듭하며 대대로 석탄만을 캐낼 뿐이다.
소설의 주요 배경인 ‘몽수’는 ‘돈으로 이루어진 산’을 의미하는 가상의 도시이다. 돈을 있게 한 노동자들은 결코 그 돈을 소유하지 못한다. 현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도시명이다. 탄광촌 사람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다. 빵을 먹기 위해, 오롯이 살아남기 위해서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시곗바늘처럼 일터와 집을 오간다. 만 명이 넘는 굶주린 사람들은 정체도 모르는 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며 일을 한다. 불행하게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부와 2부에서는 탄광촌 노동자와 부르주아의 삶이 묘사된다. 그들의 삶은 하루의 시작 시간부터 다르다. 새벽 4시에 깨어나서 탄광으로 향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 주변에는 여유로운 아침 9시의 햇살을 맞는 이들이 존재한다. 졸라는 두 종류의 삶을 번갈아 등장시키며 보색 효과의 선명함을 전한다.
본격적인 서사는 갱도를 받치던 갱목이 무너지는 3부부터 전개된다. 노동자의 죽음은 4부에서 파업으로 이어진다. 랑티에는 이를 주도하는 지도자가 된다. 5부에서 노동자 무리는 거대한 행렬을 이룬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임금 인상이 그들의 유일한 요구이다. 치열한 군중의 흐름에도 회사 측의 양보는 없다. 6부에서는 교착 상태에 빠진 광부들의 궁핍한 삶이 그려진다. 가재도구를 하나씩 팔면서 근근이 하루를 버틴다. 동전 한 닢 쳐주려 하지 않을 살가죽만 남는다. 군대가 개입되면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민중의 물결은 폭력화로 치닫는다. 탄광회사가 있는 몽수에서 무차별한 발포가 일어난다. 광부들의 패배이다.
일부 광부들의 삶은 도돌이표를 찍는다. 여전히 먹을 것은 없고 죽을 수 있는 행운도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다. 마지막 7부에서 무정부주의자인 기계공에 의해 갱도가 붕괴된다. 살기 위해 갱도로 내려갔다 갇힌 사람들이 하나 둘 죽음을 맞는다. 두 주인공 역시 갱도에 갇힌다. 열흘 만에 주인공만 산 채로 구조되어 탄광촌을 떠난다.
깊이 554m, 하강 시간 단 1분. 적치장 4군데, 첫 번째 작업장은 지하 320m 지점. 탄광에서 수직으로 파내려간 갱도인 수갱이다. 원시의 탄광은 고대인들이 언급했던 4원소가 구현된 공간이다. 탄광의 주변을 관통하는 강인 ‘물’, 지하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 ‘불’, 음습하면서도 열기를 훅훅 전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 냉기를 뿜어내는‘공기’, 시커먼 석탄 덩이로 이루어진 ‘흙’. 4가지 기본 원소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인간은 한없이 쪼그라든다.
지하의 광부들이 본능을 드러내는 일은 헐벗은 아담과 이브의 모습처럼 자연스럽다. 고된 노동 끝에 찾아오는 밤은 어린 여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통에 시달릴 생명을 잉태하는 시간이다. 원시의 공간에 포획된 노동자들은 생명의 가느다란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자아실현의 고차원적인 욕구 따위는 없다. 빵이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굶주림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탄광촌 사람들에게 고단함보다 두려운 건 실업이다.
탄광촌 아이들은 10대에 다다르기도 전에 본능을 인지한다. 바닥부터 쌓이는 삶의 바탕을 너무 이른 나이에 체득한다. 탄광촌 노동자들에게 아이들은 생계 수단에 다름 아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대대로 이어지는 노동자의 대열에 합류해야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결혼 역시 생계 수단의 이동과 연결 지어 결정된다.
240번 탄광촌에 거주하는 그들의 일터인 ‘르 보뢰’탄광은 ‘집어삼키다, 탐욕스럽게 먹다’라는 의미의 불어에서 유래한다. 탄광은 탐욕스러운 짐승이다. 짐승의 구불구불한 창자로 매일 새벽 사람들이 먹이처럼 빨려 들어간다.
작가는 탄광 속에 들어간 인간들을 개미로 묘사한다. 개미굴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곤충들에게 여유 있는 햇살은 꿈에서조차 등장하기 어렵다. 땅속에 끌려들어간 말 역시 죽어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말이 태양을 기억해내기 위해 헛되이 애를 쓴다는 문장이 마음을 찌른다. 거대한 개미집에서 노동자들은 고목을 갉아먹는 벌레처럼 대지 곳곳에 구멍을 낸다.
갱은 날마다 왕성한 식욕으로 인간 가축의 고깃덩이를 삼키고 뱉는다. 갱의 하루치 식량은 700명에 가까운 광부들이다. 땀 냄새 훅훅 끼얹어지는 현실감에 숨이 막힌다. 한 사람이 거의 통과할만한 비좁은 공간, 깊은 어둠, 뜨겁다 차갑다 도무지 중간이 없는 온도 차, 갱내 가스로 인해 턱턱 막히는 숨, 운하의 흐름과 인접해있어 중간 중간 고여 있는 물웅덩이, 모래성의 아래 부분을 파내는 것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공간이다.
땅 속 깊이 갇힌 광부의 삶은 상상 그이상이다. 소설 집필을 위한 경험이 묻어난 글이라지만 사진을 보듯 생생하다.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서사를 끌어가는 작가의 필력에 엄지척이다.
삶이 아픔일 때 꿈틀대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소설 속 인물들을 움직인 동기는 오로지 배고픔이었다. 한 번도 다른 삶을 꿈꿔보지 못한 채 대대로 내려앉은 체념의 외피를 걷어내려는 몸부림이다. 변화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과격하거나 온건하거나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혼재해있다. 각기 나름의 입장으로 타당성을 어필한다. 어떤 방식이 옳은가는 2차적인 문제이다. 중요한 건 움직임 자체일 테니까. 작가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들의 혁명은 끝난 것이 아니다. 소설 제목이 의미하듯 변화는 끊임없이 싹을 틔운다.
탄광촌 사람들의 삶에서 석탄의 화학적 구조가 연상된다. 석탄은 나름 규칙적인 면이 보이나 납작하게 눌린 구조를 지닌다. 같은 탄소 성분이라도 다이아몬드와 다르다. 석탄과 다이아몬드. 두 물질은 오로지 구조적인 차이로 인해 전혀 다른 결과물로 존재한다. 이집트의 파라오인 듯 오만하게 군림하는 다이아몬드는 정사면체 구조를 지닌다. 이들의 결정 구조는 상반된 인간의 삶을 닮았다.
900~1300도의 고열과 3만 기압을 견뎌야만 석탄은 다이아몬드로 변한다. 탄광촌 노동자들에게 삶은 그렇게 견디는 시간의 집합체였을까. 내내 석탄으로 살다 끝내 불태워져 사그라지는 삶에 담긴 아픔은 어떤 물리량으로 존재할까. 삶 자체가 아픔이 될 때 그것은 어떤 형태로 전해질까. 석탄 빛깔을 닮은 어둠이 유난히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