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투 네이처 - 삶이 불안할 때 나는 숲으로 갑니다
에마 로에베 지음, 이성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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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뼈마디를 드러낸 나무들이 곳곳에 있다. 아파트 단지 전지 작업으로 잔가지가 제거된 나무들이다. 깔끔하다기보다 순식간에 댕강 머리채를 잘린 듯 음산하다. 괜스레 착찹해진다.

삭막한 풍경을 둘러보다 봄이 그리기 시작한 점묘화를 발견한다. 키 작은 산수유꽃 몇 점이 흔들린다. 가지 위로 내려앉은 노란 햇살 부스러기인 양 반짝인다. 가지 끝에 매달린 풍경처럼 딸랑딸랑 봄을 알린다. 굳어졌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꽃을 발견한 건 우연일까. 평상시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은 필연의 뿌리와 연결되는 게 아닐까. 사소해서 알아차리기 어려울 뿐 거슬러 올라가면 결정적인 계기는 분명 존재하리라. 세상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민 새싹인 듯 자연이 나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내가 자연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리라. 그 계기에는 에마 로에베의 리턴 투 네이처가 있다. 겨울이나 여름, 혹은 가을에 만났더라면 삶의 풍경은 지금과는 또 달랐으리라. 봄에, 이 봄에 자연을 향해 나의 몸을 이끄는 책을 만난 건 우연일까.

 

리턴 투 네이처는 플러그가 뽑혀가는 자연에 다시 인간을 연결하여 서로 윈윈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다. 따로 일정을 잡아 여행하지 않아도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한다. 일상으로 자연을 끌어다 놓는다.

공원과 정원, 바다와 해안, 산과 고지대, 숲과 나무, 눈과 빙하, 사막과 건조지, 강과 개울 등 세상의 모든 곳을 충전 지대로 만들고자 시도한다. 작가의 시각에는 도시와 시가지조차 자연의 일부로 비추어진다.

그녀는 여덟 군데의 특징을 세세하게 살피며 각각의 환경마다 우리가 감각하는 요소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많은 이들의 실험 자료를 토대로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이들의 노력을 목도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작가 에마 로에베의 시도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점은 자연으로의 진입 장벽을 대폭 낮추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해당 장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시간별로 제안한다. 5~10분이 생긴다면, 1시간이 생긴다면, 더 많은 시간이 생긴다면, 그 장소가 가까이 없다면 어떤 행동을 취하면 좋을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나아가 더 생각해볼 것, 그 장소가 지속 가능하도록 사고방식을 전환할 것을 당부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는 책 표지이다. 초록 그림자를 품은 초록 물에서 신선한 산소가 송글송글 나오는 듯하다. 매끄러운 수면이 보드라운 융단 같다. 책날개를 들춰보며 이 장면이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지구 어딘가에는 이런 풍경의 초록 세상이 존재한다는 의미니까. 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정갈해진다.

'현대인의 대부분은 일상의 87%를 실내에서 보내고 있다!' 띠지에 적힌 문구 앞에서 멈칫한다. 이동 시간을 빼면 집 아니면 직장 혹은 스터디 카페가 대체적인 나의 루틴이니 맞는 말이다. 요즘 내 삶의 무대에 자연이 있었던가. 휘리릭 하루를 되감기 한다. 초록은커녕 덜 익은 연두도 없다.

주변의 초록을 찾아라! 이 책을 읽는 동안 수행할 미션을 정해본다. '삶이 불안할 때 나는 숲으로 갑니다.' 부제 앞에서 서성인다. 숲에 가면 불안이 녹아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숲이 없는데 무슨 수로?

'가장 쉽고 깊은 치유를 만나는 자연으로의 여정'이라. 가장 쉽다니까 작가를 한 번 믿어볼까. 작은 기대를 품고 종이의 숲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자연을 접한다는 건 여행처럼 큰맘을 먹어야 가능한 일이라 여겨왔다. 이는 당장 오늘은 어렵다는 의미이다. '쉽다'는 작가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 시험 문제 쉽게 내셨나요?" "그럼! 너무 쉬워서 100점이 너무 많이 나오면 좋아서 어쩌지?" 시험이 끝난 후, 녀석들은 더 이상 교사의 쉽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전문가의 쉬움은 이토록 다르니, 그런 '쉬움'일 수도 있으니까. 쉬우면서 깊은 치유가 과연 가능할까.

마음이 들썩이기 시작한 건 '5~10분이 생긴다면'이라는 문구를 보면서부터다. 어쩌면? 지금 당장 5분이나 10분을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하루 5, 자연과의 만남이 선사하는 깊은 회복력' . 띠지에 적힌 문구를 다시 보며 나는 그 '5' 도전을 해보기로 한다.

정기 인사이동으로 3월부터 바뀐 업무 환경, 정시 퇴근은 꿈도 꾸지 못하는 나날을 보낸 지 두 주 남짓 되었을까. 졸린 눈을 비비며 꾸역꾸역 꿈에만 존재하는 듯한 자연을 한 챕터씩 겨우 넘어가던 날, 새싹처럼 꼬박꼬박 튀어나오는 '5'의 도발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된다. 지난 수요일, 하던 일을 과감하게 접고 직장을 나선다.

 

교문을 나와 왼쪽 주택가의 골목길을 따라 주욱 내려가다 큰 길이 등장하면 횡단보도를 건너 잿빛 도롯가를 조금 걷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탄다. 퇴근 경로이다. 그날은 무엇에 이끌린 듯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른 루틴을 택하고 싶었다.

몇 걸음 걸으니 횡단보도 너머로 지금껏 눈에 띄지 않던 언덕이 보인다. ? 생각보다 코앞에 있는 지형지물에 당황한다. 8년 전, 분명 이 동네에 살았는데, 그때는 없었잖아.

아니, 아니, 없었을 리가 없다. 알라딘의 거인이 산을 송두리째 옮겨 놓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왜 이런 곳을 보지 못한 걸까.

나 같은 무릎 병자도 한 번 올라가 볼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만만한 흙길이다. 고동색의 나무 난간까지 있으니 인간이 다니는 길은 맞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이다. 보통 때라면 결코 가지 않을 곳에 첫 발을 딛는다. 산이라 하기에는 지극히 낮지만 저 위로 나무가 보이고, 흙이 있다는 것만으로 약간의 친숙함까지 느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연을 생각해서일까.

 

생각보다는 실천이지. 호기롭게 '산책'이라 부르며 미지의 장소에 오른다. , 막다른 길이 나오면 되돌아오면 되니까 조금만 가보자. 갈색의 낮은 울타리 옆, 살짝 경사진 흙길을 몇 걸음 올라가니 짚이 깔린 길이 이어진다. 다시 몇 개의 나무 계단을 밟으니 소담스런 공터가 펼쳐진다. 왼편으로는 제법 나무들도 있어 산속에 있는 느낌이 든다.

저 아래 도시와의 경계도 없지만 산으로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공기의 흐름이 바뀐다. 불과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먼지 가득한 도로가 잿빛 강물인 양 흐르고 있건만 무슨 마법이 펼쳐진 걸까. 단오 그네를 떠올리게 만드는 기다란 동아줄, 나무 벤치들, 야트막한 둔턱에 군데군데 자라난 커다란 나뭇가지 사이로 하루를 열심히 달려온 태양이 마지막 존재감을 뿜어낸다.

천천히 걷는 어르신들, 주인과 산책하는 나른한 강아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주변의 풍경들이 슬로우 화면으로 펼쳐진다. 드문드문 산책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흔들리는 나무들도, 사락사락 나뭇잎을 부비는 바람도, 천천히 천천히 나를 스친다.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니 익숙한 지하철역이 보인다. 불과 5분 정도가 지나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내일 비가 올까. 습관적으로 휴대폰 날씨 앱을 하늘인 양 들여다보다 움찔한다.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않고 날씨를 검색하다니. 하늘을 본 게 언제였더라. 구름이 얼마나 많이 흘러 들어와 떠 있는지, 하늘이 무슨 빛으로 펼쳐져 있는지, 바라보지도 않은 채 머리 위 세상을 알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아이러니라니.

미리 안다고 해서 안심이 되는 건 아니다. 의지가 없는 구름은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니까. 예보의 명령에 따르는 구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다. 자연은 그저 자연스럽게 자연의 길을 갈 뿐이다.

일주일 치 날씨를 1초 만에 예측하며 미래를 당겨오는 세상이다. 삶이 점점 촘촘해진다. 이러다 눌러 붙는 어깨 근육처럼 경직되는 건 아닐까. 언제부터 이 조그마한 휴대폰 안에 세상이 담기게 되었을까. 세상이 넓어진 건 맞나. 온라인 세상이 펼쳐지면서 세상이 두 배로 확장된 듯 보이지만 오히려 좁아지는 건 아닐까.

지하철 안에도 온통 휴대폰 속 세상이 들어와 있다. 휴대폰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시각과 청각만 열어둔 채로 네모난 컴퓨터와 휴대폰 속 세상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프라인 세상을 향하는 감각이 점점 둔감해지는 줄 느끼지도 못한 채.

 

다음 날 퇴근길에도 흙길을 걷는다. 닫혀있던 다른 감각 기관들이 열린다. 향긋한 나무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한껏 들이마신다. 언제부터 새 소리가 들렸던 걸까.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어루만지며 달아난다. 산책로로 조성된 장소, 주민들을 위한 운동 공간, 존재하는지 몰랐던 공원이 이토록 가까이 있었다니.

몽글몽글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폭신한 감촉이 운동화를 뚫고 양말을 감싸고 있는 발바닥까지 전해진다. 두 발이 플러그라도 된 양 짚이 깔린 길을 밟으며 충전한다. 양말을 벗고 싶은 마음을 자제한다. 발에 묻을 흙을 무사히 제거할 대책을 마련하는 대로 기필코 시도해 보리라.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흐르지 않았다. 배경은 금세 시멘트 바닥으로 바뀌지만, 고속 충전을 한 듯 피로가 풀린다. 한 달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한 경험이다. 실내화와 실외화의 구분이 굳이 필요할까 싶은 도어 투 도어의 출퇴근길. 딱딱한 바닥에서 바닥으로 이어지던 경로에 흙 내음이 슬그머니 끼어 들어온다.

다른 경로로 5분 산책을 한다. 분명 트인 공간인데 묘하다. 나무와 흙으로 둘러싸인 그곳에만 가면 비눗방울 속으로 들어간 듯 공간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진다.

 

구획이 정해져 있지 않은 흙길은 많은 경로를 가능하게 만든다. 경우의 수가 많다는 건 나의 하루를 다른 빛깔로 채색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뚝 선 나무들은 계절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변신할 터이다. 하루의 산책은 그러데이션처럼 매번 조금씩 다르리라. 나만의 산책길에 펼쳐질 미지의 풍경을 가늠하니 작은 설렘이 새처럼 날아든다.

에너지를 충전하며 하루를 마무리한 지 일주일째다. 이제야 서류나 모니터가 아닌 사람들이 보인다. 새로 바뀐 동료들과 아이들, 앞으로 마주하게 될 그들의 영혼이 나에게 펼쳐 보여줄 세계가 산책길 풍경만큼이나 기대된다. 5분의 쉼표가 부린 마법이다.

진동수가 일치하는 두 개의 진동이 만나면 큰 폭으로 진동한다. 삶의 시작과 자연의 시작이 만나 공명을 일으킨 걸까. 봄에, 새싹이 돋아나는 시작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니 더욱 울림이 크다.

그 계기가 되어준 이 책을 바로 이 시기에 만난 건 그래, 이건 차라리 필연이다. 첫걸음마를 하는 아이처럼 삶을 채워보라는, 삶이 주는 선물이다. 5분 쉼표를 품에 안으니 마음이 간질거린다. 심장에 파릇한 새싹이 돋아 영혼이 향긋해진다.

 

p239, 5째 줄: 사막과 건조지에서 더 생각해볼 것 글씨체를 크게

p275, 밑에서 3째 줄: 강과 개울에서 더 생각해볼 것 글씨체를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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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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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일까. 한 달이 넘게 어떤 글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마음에 변비라도 걸린 듯 혼란스러운 감정과 생각의 찌꺼기가 쌓이고 또 쌓인다. 의도적이지 않은 쌓임의 덩어리는 실체가 없다. 찬란하게 빛나는 육각의 눈 결정이 아니라 무게에 꾹꾹 눌려 뭉뚱그려지다 잿빛 얼음덩이로 그늘진 구석에 숨어들어 간다. 문장이라도, 단어라도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쓴다. 절뚝거리는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키보드를 걷는다. 말을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분절된 문구가 더듬더듬 드러난다.

글은 양방향 화살표인가. 나로부터 나오지 않는 글은 내게 들어오지도 않을 작정인가. 책 속의 글자가 설익은 밥알인 양 심장의 외피를 겉돌다 떼구르르 달아난다. 질척한 감정들 사이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듯이. 책장을 몇 번이나 들춰보다 덮기를 반복한다. 책상 위에 놓인 책 표지를 바라만 보다 근 한 달을 어정쩡하게 날려 보낸다.

다른 이의 말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양옆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종종 주변 풍경을 놓친다. 융통성 없는 시선은 어찌 눈앞만 질주하는가. 키오스크에서 코앞에 버젓이 드러나 있는 메뉴를 발견하지 못한다. 몇 번의 동공 지진 후, "먼저 하세요." 타발적인 양보심을 발휘한다. 생각한 대로 잠시 바뀌어 보이는 글자의 변신술을 경험한다. 방금 들은 말도 기억나지 않거나 헷갈린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이로 인한 인지 장애를 슬그머니 의심해 본다.

 

온 식구의 생일과 전화번호를 또렷이 기억하시는 80대 중반의 친정어머니가 스친다. 당신에 비하면 아직도 팔팔한 50대 청춘이니 세월에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다소 민망하다. 어쨌든 빠르게 녹아내리는 눈인 양 자존감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푸념인 듯 중얼거린 잿빛 시간, 자존감이 바닥을 구르던 시간을 과거형으로 표현한 건 지금은 서서히 벗어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 시작에는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있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자에게 주어진 기간 미션이었으니까. 독서 모임 날짜가 임박해 간다는 건 벼락치는 읽기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리뷰고 나발이고 몽땅 망해버릴 데드 라인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의무감이 슬럼프의 등을 밟고 올라선다.

'작가의 말' 없이 세상을 향해 던져진 글 덩어리를 접한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존재이니 굳이 '작가의 말'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한 번 펼치니까 느리게나마 읽힌다. 다행이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내용을 기억하려 긴장하지 않아도, 맥락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 내용이다. 단편 모음집이니 짤막한 호흡으로도 감당이 된다. 대하소설이거나 스펙터클다이내믹한 이야기였으면 어쩔 뻔했을까. 질식할 듯 마음이 답답하거나 감성의 온도 차로 인해 유리화된 멘탈에 균열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다.

 

그의 문장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일하면서 듣기 좋은 카페 음악, 생각 없이 틀어만 놔봐~' 음악을 듣는 기분이랄까. 산책하는 속도로 독자를 이끄는 글이다.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피라미드같은 사회 구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 생태계로 비유하자면 생산자의 범주에 포함되는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역도 선수 소녀,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팬, 사회가 요구하는 무난한 삶을 걸어가는 직장인, 가난으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두 사람,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자, 불안을 품고 사는 노인, 교육적 딜레마 사이에서 고민하는 교사, 강박증에 얽매인 남자,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배출한 스타와 팬. 각자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살아가는 아홉 편의 서사 앞에서 마음은 서서히 차분해진다.

사회라는 연극 무대에 서는 소수의 주인공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 1이거나 무대 배경으로 오도카니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이거나 주인공을 비추는 핀 조명이거나 군무를 추는 N분의 1인이거나 은은하게 흐르는 BGM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독백과 외침을 경청하며 공감하게 만드는 흡인력, 김기태 작가의 글이 지닌 힘이다.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대략이나마 따라가고 싶어 최초의 작품부터 출간 순서대로 읽기로 한다. 여덟 번째로 배치된 작품의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2022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 당선작 무겁고 높은부터 시작한 건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 된다.

 

무겁고 높은에서 역도 선수인 고3 송희의 목표는 100킬로그램의 바벨을 버려보는 거다. 들어보는 게 아니라 버려보는 것. 그녀는 버려보기 위해 들어 올린다.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게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전자와 후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발성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무게로부터 벗어나는 행위는 삶의 속성과도 자연스레 중첩된다. 시선의 반전을 꾀하는 작가의 관점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녹록하지 않은 가정 환경이 묘사되면서 주인공을 둘러싼 삶의 무게가 그려진다. 그녀의 독백을 따라가면 삶을 마주하는 진지하고 맑은 용기를 만난다. 묵직하면서 당당한 태도는 절로 내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역도' 대신 ''으로 주어를 바꾸어 읽어도 괴리감이 없다. '앉아서 시작하고 일어서서 끝낸다'던지, '들어보고 싶다기보다 버려보고 싶었다'던지, '내 손안에 있는 내 것. 내 몫의 약속'이라든지. 시린 삶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삶에 대한 열기를 감지한다. 저온 고압에서 만들어진다는 불타는 얼음 '하이드레이트'를 떠올린다.

작가는 노력 끝에 성공한다는 평범한 전개를 거부한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니까. 선발전에서 목표 달성을 하지 못하고 바벨을 떨어뜨린 주인공은 운동과는 무관한 길을 걷게 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목표는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100킬로그램을 깔끔하게 버리고 역도를 그만두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문장의 온도가 고스란히 마음에 스며들어 덩달아 심장이 뜨거워진다.

 

조금씩 마음이 열리면서 문장 길 산책에 약간의 속도가 붙는다. 세상 모든 바다에서는 공연장 안에만 있는 평화를 바라보고, 전조등에서는 뭔가 다른 게 되어볼 수 있지 않느냐는 문장 앞에 멈추며 한 인간의 본질을 가늠한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는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헤아리며 '친한 사이'를 정의해보기도 한다.

'친한 사이'는 어떤 설명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지인들의 얼굴을 영화 필름이 만들어내는 파노라마인 양 돌려본다. 함께 있는 장면이 어쩐지 어색한 사람, 매번 그래왔던 듯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사람, 아무런 느낌 없이 스쳐 가는 사람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마주 보고 앉았을 때 어떤 이질감도 없는 사이,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고 대화해도 부담 없는 사이'로 나만의 정의를 내려본다.

롤링 선더 러브에서는 배경을 제거한 사람에 대하여,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나에게도 던져보며 내가 원하는 것을 손꼽아본다. 지난주, 발령받은 학교에 출근했을 때 교사 연수 중 이루어졌던 아이스브레이킹 활동이 생각난다. 모둠별로 돌아가면서 나의 장점 10개를 말하면서 손가락 접기. 역지사지를 떠올리던 날이다. 예전에 담임 학급의 학생들에게 적어내라고 했던, 열 가지도 없냐며 잘 생각해 보라고 웃으면서 다그치던 인간은 손가락의 개수가 이렇게나 많았나 새삼 깨달으며 반성한다. 지금 복기하며 천천히 꼽아보니 발가락까지 동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아이들은 장점이 없었던 게 아니라 얼마 전의 나처럼 나의 장점을 헤아려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마음속에 여유 대신 불안을 품은 노인의 이야기 태엽은 121/2바퀴에서는 '왜 시도도 안 해봤을까'라는 문장이 맥락과 관계없이 심장에 꽂힌다. 겁이 많아서,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될까 봐.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당겨와서 걱정하느라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흘려보냈던가. 그래서 달라질 수 있었던 삶의 풍경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홀로그램이다. 시도해 보지 않아 결코 알 수 없는 나의 모습이 문득 궁금해진다.

이상적인 수업을 꿈꾸는 교사의 이야기 보편 교양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문다. 충분한 연금 수령액에 도달하려면 십오 년은 더 일해야 하며 그 연금을 실제로 받으려면 이십오 년이 남아있는 주인공. 다행히 나를 비껴갔지만, 젊은 주변 선생님들의 현실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교육은 예전에 끝났어', '제가 뭘 가르쳤다고 하던가요?' 다큐멘터리를 목도 하듯 사실적으로 묘사된 교실 풍경이 너무나 익숙해서 소름이 돋는다. 크고 작은 교실 붕괴를 경험하며 근근이 버텨가는 삶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수업 첫날의 수강생은 교사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수업 마지막 날의 수강생은 교사의 책임이다.' 반은 체념하는 마음이 크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수업을 잘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무모하리만치 열심히 수업을 준비하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첫 학교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어설펐지만, 새로운 시도에 겁이 없던 장면들이 재생된다. 괜스레 코끝이 찡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어떤 실수는 바로잡을 수 없을 뿐이다.'팍스 아토미카에서 묘사되는 강박증을 보며 나를 살핀다. 주인공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정리 정돈에서 약간의 강박을 보인다. 싱크대 수납장에 라면 봉지를 넣을 때 무늬를 맞춘다든지, 책을 높이별, 색깔별로 정리한다든지, 패턴에 맞춰 물건을 종류별로 배열한다든지. 정돈된 환경에서 마음의 안정감을 느낀다. 다른 이에게는 이를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마음이 불편하면 그 방향을 바라보지 않는 것으로 나름 자신과 타협을 본다.

로나, 우리의 별에 대해서는 메모해 놓은 내용이 없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본방 사수했던 예전이라면 달랐으리라. 격하게 공감하며 또 다른 문장을 독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현재의 나로서는 관심에서 벗어난 영역이라 특별한 울림점은 찾지 못한다.

학교를 옮기는 해이다. 매년 가르치는 학생들은 달라지지만, 교수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긴장감이 크다. 나의 관심사는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잘 녹아 들어갈까이다. 이런 이유로 보편 교양에 많은 공감을 하며 덩달아 수업과 학생 지도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다.

마음 군데군데 작은 뾰루지가 나 있는 이미지를 상상한다. 그걸 건드리는 문장들에 반응하게 되는 걸까. 누구에게나 좋은 책은 없다. 고민으로 생긴 뾰루지를 짜주거나 연고를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는 책을 누군가 좋아하게 될 뿐이다.

 

고민이 많았던 이유를 알겠다. 어색한 공간, 어색한 사람들, 어색한 시간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성이며 방황할까 두려운 거였다. 나를 전혀 모르는 집단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집단의 일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걸릴 진공의 낯섦이 묵직하게 다가와서 그랬던 거다.

두려움의 다른 이름은 설렘 아닐까. 작가의 의도든 아니든 이런 생각이 나오는 데 이 책의 지분은 상당하다. 문체일 수도 있고, 문장의 속도일 수도, 서사의 색채나 온도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번갈아 다가오면서 내 고민을 톡톡 건드렸나. 낯선 장소에서 방황하다 친근한 도로로 들어선 듯 안도감이 생긴다.

나에게는 아직도 나흘의 준비 기간이 남아있다. 다행이다. 개학 하기 전에 정신 차려서. 오랜만에 하는 3학년 담임, 과학 기획 업무, 스마트 교육, 달라진 출판사의 교과서 지도, 평균 수업시수 22시간이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명예롭게 퇴직하기 위해 스스로 정한 2년의 남은 기간 동안 신규 교사의 마음으로 열심히 마무리하고 싶다.

사물함의 이름표를 붙이고, 얼굴도 모르는 아이의 이름을 한 명씩 발음하며 책상 이름표를 붙이고, 교실 바닥을 쓸고, 불필요한 물건들을 버리고, 청소 도구함을 정리하고 왔다.

손끝을 맴도는 은은한 온기에 심장이 서서히 데워진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눌려있던 나의 열정은 불타는 얼음이 되어 이제 세상 밖으로 드러날 준비를 하고 있다.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 이건 분명 설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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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공간 일기 - 일상을 영감으로 바꾸는 인생 공간
조성익 지음 / 북스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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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다이어그램에서 나는 우주를 본다. 집합 간의 논리적 관계를 나타낸 2차원 그림을 우주의 미니어처인 양 가만히 바라본다. 가장 매력적인 건 여집합을 정의하는 그림이다. 전체 집합에 속하면서 집합 A에 속하지 않는 모든 원소의 집합. 전체 집합 U에서 우주를 의미하는 'universe'를 떠올리고 집합 A''인 양 놓아두니, A의 여집합은 자연스레 나를 둘러싼 공간이 된다.

여집합은 보집합으로도 불리운다. '()''남는다', '()''보완한다'는 뜻이다. 나는 후자의 의미가 더 마음에 든다. 나를 보완해 주는 대상이라니, 얼마나 든든한가! 온 우주가 나를 돕는 행운을 맞이하는 것처럼 온통 나를 둘러싼 공간의 존재 아닌가! 상상만 해도 오리털 이불로 폭 둘러싸인 기분이다.

, , 집합에서 우주라뇨,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닙니까! 집합 문제를 풀며 머리를 쥐어짜다 쥐가 날 지경인 고3 학생들이 이 글을 싫어합니다. ~ 너무 약올라하지 말도록. 머리를 쥐어짜지 않게 되면 삭신을 쥐어짜게 되니 그럭저럭 공평한 걸로 여깁시다!

처음부터 이토록 한가한 시선을 가진 건 아니다. 지긋지긋했던 함수의 그래프에서 유려한 곡선미를 발견하거나 사칙연산 기호에 인생을 접목하는 건 수학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치열한 점수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우연히 접하는 수학 기호는 삶의 속성을 안은 채 다가오기 시작한다.

 

치열한 삶을 살아가던 시기에 공간의 존재감을 느낄 여유는 없다. 세상이라는 뚜껑으로 들어가는 사인펜처럼 세상과 나 사이의 간극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 시기, 공간이라 여길만한 곳은 학교를 제외하면 집이 유일했다.

어둡고 좁고 시리고 후텁지근한 공간을 메우던 가난은 공간을 비슷한 냄새로 채운다. 안방 문만 열면 바로 바깥인 삶에서의 집은 하루를 통과하고 돌아온 몸을 잠시 뉘는 장소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서로를 보듬는 가족들의 온기가 아니었다면 빠져나오지 못했을 공간, 공간을 인지하게 된 나이로부터 결혼 전까지의 기억이다.

어둠과 넓이와 추위와 더위로부터 벗어나니 36.5도의 온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공간에 놓인다. 20대까지는 몸이 시렸다면, 30대와 40대를 건너는 동안에는 마음이 시렸다. 의무가 대부분인 삶에서 '즐거운 나의 집'은 노래에서나 등장하는 유토피아였다. 여집합과 나 사이에 이도 저도 아닌 틈이 만들어진다. 불안정한 마찰음과 눅진한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가난에서 벗어나도 공간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간간이 저녁 시간에 커피숍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확보하지만 어정쩡하면서 겉도는 상태였다. 책과 커피잔을 배경으로 종종 남겨놓은 셀카를 들여다보면 당시 나의 표정이 읽힌다. 다른 이들은 감지하지 못할 슬픔이 배어있는 눈동자가 조용히 나를 마주 본다. 안간힘을 쓰며 탈출한 공간조차 제대로 누린 것 같지는 않다.

 

건축가의 공간 일기는 인생 공간을 찾는 방법에 대한 레시피이다. 건축가 조성익은 '인생 공간은 어디에나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라며 책 한 권에 희망을 잔뜩 담아 건네준다. 공간을 조각하는 전문가가 공간의 맛을 직접 보고 그 느낌을 실감나게 묘사해 주니 보다 넓은 관점에서 공간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긴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첫째, 좋은 공간에 나를 둘 것, 둘째, 일상 공간을 인생 공간으로 만들 것, 셋째, 내 공간의 목소리를 찾는 것이다. 외국에 있는 유명한 공간보다 숨은 맛집 같은 장소를 안내하고, 그가 대표로 있는 건축사 사무소가 위치한 서교동에서도 자신만의 인생 공간을 찾는다.

앞부분에는 '인생 공간, 동네에서'라는 제목의 지도가 있다. 집과 일터를 포함한 공간을 그린 동네 지도다. 느슨한 공간, 오감 공간, 땡땡이 공간, 스케일 공간, 사람 구경 공간, 아날로그 공간, 몰입의 공간, 소속감의 공간, 산책 공간, 스몰 토크의 공간 등이 펼쳐진다. 군데군데 정체성을 부여하여 삶의 순간마다 머물기 위한 맞춤형 지도에서 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저자가 본문에서 소개하는 공간은 다양하다. 수도원, 교회, 성당, 묘지, 시장, 건축사 사무소, 야구장, 음악감상실, 엽서 도서관, 기차역, 사우나, 술집, 도서관, 정원, 자택, 오두막, 숙박 시설, 빵집, 민박집 등. 그가 안내하는 좋은 공간을 구경하다 보니 여행의 목적으로 삼아도 되겠다 싶다.

 

좋은 공간은 어떤 모습인가. 좋다, 나쁘다는 개인적인 취향이 적용되는 영역이지만 보편적인 조건은 있는 듯하다. 책 속에서 특히 와 닿았던 공간의 정체성을 메모한다.

첫째, 느린 속도로 머무는 공간으로 치유의 역할을 하는 '슬로 스페이스'이다. 절제된 장식, 변화하는 햇빛, 빛의 증폭기로 구성된 공간. 이 모든 조건을 갖춘 공간으로 저자는 수도원과 동네 카페를 제시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했다는 시간 개념 중 의미 있는 한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 시간을 즐기기를 권한다.

둘째, 일하다가 땡땡이를 칠 수 있는 공간이다. 언제든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면서 경외심을 주는 '스케일의 공간'으로 그는 교회와 성당을 소개한다.

셋째, 계절감을 주는 공간, 시장이다. 계절감을 묘사하는 멋진 문장들이 눈에 띈다. '계절감은 시장의 인테리어, 선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 점을 찍어 마음에 저장하는 일, 계절의 초입에 있다는 제철 음식 데이' 같은 문장들이다.

넷째, 시각 이외의 감각으로 경험하는 공간이다. '눈은 분석하지만 몸은 기억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문손잡이가 건물이 건네는 악수'라는 문장을 접하니 건물의 손잡이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다섯째, 시각적 소음이 제거된 몰입의 공간이다. 건축가는 조명을 이용해 공간을 변신시킨다고 한다. 집보다는 조명이 있는 스터디 카페에서 글이 훨씬 잘 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걸까.

 

'좋은 공간에 나를 두고, 공간이 건네는 좋은 목소리를 들으면 우리의 삶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는 문장을 이미지로 상상한다. 근심 걱정이 사르르 녹는 듯 마음이 느슨해진다. 익숙하지 않은 고개가 아직은 어색하게 돌아가지만, 50대가 되어서야 나와 여집합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 듯하다.

의지대로 나의 몸을 둘 수 있는 자유를 마련하는 중이다. , 0.7mm 볼펜, 이면지, 노트북, 마우스, 이어폰, 텀블러 등 필요한 물건까지 풀옵션으로 갖춘다. 지금 여기,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스터디 카페에서 나는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여집합을 바라보게 만드는 책을 만나 구석구석 공간을 바라보며 안정감이 오는 이유를 찾는다. 미래의 삶을 위해 진지하게 공부하는 젊은 모습들을 보면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삶에 비추는 핀 조명인 양 노트북 위로 내리쬐는 조명 아래에서 나의 삶을 글로 옮긴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어폰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공기 청정기 사이로 얼핏 스치는 향을 맡으며, 매끈한 키보드의 감촉을 손끝으로 느낀다.

살짝 열린 오감으로 흘러 들어오는 잔잔한 자극들이 나의 삶을 기분 좋게 보듬는다. 좋아하는 넓이, 질감, 온도, 소리의 진동, 냄새 입자의 출렁임. 다른 자극으로 메워진 또 다른 공간을 찾아 나만의 동네 지도를 만들고 싶다. 촉감이 좋은 이불처럼 만들어진 여집합에 폭 둘러싸이고 싶다. 열심히 여기까지 온 나에게 공간의 물리량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삶의 이벤트를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p48, 11째 줄: 베르그먼 브리그먼

p56. 밑에서 4째줄: 덴진바시스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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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북꾸 에디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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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자주 떠올리는 자연물이 있다. 바다 위로 드러난 순백의 뾰족함 아래, 드러나지 않은 거대함을 가늠한다. 몸체를 지탱하지만, 결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영역 말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바다 밑으로 잠긴 빙하를 인간의 무의식에 비유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나를 지탱하나 결코 의식할 수 없는 영역이니 맥락이 닿는다.

꿈의 해석을 처음 접한 건 20대이다. 오랜만에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내가 좋아했던 것을 떠올린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리라. 당시 매력을 느꼈던 분야는 심리학이다. 자연 과학처럼 실험으로 증명하기에 어려운 면이 많지만, 이 또한 신비주의 연예인을 영접한다고 여긴다.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선물 포장을 벗기는 것만으로 두근거리는 아이가 되어 책장을 넘긴 기억이 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소설판꿈의 해석이다. 프로이트가 언급한 의식, 전의식, 무의식에 관한 이론을 소설로 구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물론 나만의 해석이다. 하루키는 한 존재의 정신 영역 전체를 가시적으로 묘사하려 한 듯하다. 바다 밑에 잠긴 빙산의 부분까지 말이다. 해수면을 기준으로 빙산의 영역을 구분해도 본질은 결국 하나의 덩어리이다. 같은 맥락으로 한 존재는 속성에 따라 구분된 정신세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은 대조적인 두 영역을 상징한다. 첫 번째, 평범한 현실 세계는 의식의 영역이다. 두 번째, 비현실적 세계로 묘사되는 '도시'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두 영역의 경계에는 불확실한 벽이 존재한다. 살아있는 생명체인 양 모양도 바뀌고 견고함도 달라지는 몽환적인 벽이다. 벽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있다는 전의식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출렁이는 바다 밑으로 잠겼다 드러남을 반복하는 빙산의 영역처럼.

처음부터 작가의 빅 픽처가 그려지는 건 아니다. 1부는 10대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에 대한 시적인 묘사로 포문을 연다. 풋풋하고 섬세한 문장이 잔잔한 물결로 흐른다. 소녀를 향한 순수가 고스란히 투영되니 문장을 따라가는 나의 심장도 덩달아 투명해진다. 간결한 시를 느슨하게 풀어나가는 문장이 그림을 그린다. 같은 공간 속에 나란히 앉아 있는 시간, 그들의 세계에는 서로의 이름조차 무의미하다. 기억만이 선명할 뿐이다.

차례 이전에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시 쿠블라 칸이 등장한다. 드러나는 심상이 본문의 분위기와 닮아있다. 몽환적으로 그려진 대서사시의 일부. '땅 아래 암흑의 바다'가 무의식의 정체성과 겹쳐진다. ‘도시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소설에는 안개가 스멀스멀 스며든다. 현실의 색채가 흐릿해지고 주인공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든다. 끝까지 읽고 전체적인 얼개를 그려보면 소설의 진가가 드러난다. 모든 퍼즐이 완성되는 순간, 안개가 싹 걷힌다.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일관되게 ''로 서술된 건 심오한 의도가 담긴 설정이다. 이 책 한 권은 주인공의 정신세계 전체를 상징하니 ''는 나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다. 다만 주인공은 하나의 본질을 가진 두 명이다. 한 명은 의식의 영역에 있는 '', 다른 한 명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 나이면서 내가 모르는 나, 무의식의 존재를 의식과 구분하여 어떻게 묘사한단 말인가.

공간적 배경에 배치한 인물 설정을 보며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한다. 이러한 속성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대상으로 '그림자'를 설정하다니! 나와 떨어지지 않고 늘 함께하지만 온전한 나라고 말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게다가 작가는 그림자를 본체와 분리한다. 그림자와의 분리가 새삼스럽지는 않다. 이미 우리는 피터 팬이 옷장 서랍에 두고 온 늘어진 그림자에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림자의 본질이다.

하루키는 그림자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림자는 뒤에서 나를 따라다니는 존재이므로 무의식의 범주에 넣기 쉽다. 작가는 여기에서 반전을 꾀한다. 대다수가 앞을 볼 때 뒤로 돌아 빛을 등진 채 어둠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림자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그는 분신인 그림자를 의식의 영역에, 진정한 자아를 무의식의 영역에 배치한다.

 

무심코 하는 행동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나도 몰랐던 모습이 진정한 자아를 반영할 때가 많다. 거짓 표정과 말을 지어내도 무의식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최면 요법으로 진실을 알아내는 이유도 대게는 비슷하리라. 진실이 담긴 공간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 있는 마음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종종 멈추어 서서 마음과 꿈과 욕구를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거기에 진실된 내가 있으므로.

'도시'의 도서관에는 오랫동안 축적된 꿈들이 먼지에 덮인 채 있다. 무의식에 있는 ''의 꿈이기에 그 꿈을 읽을 자격은 내게 있다. ''만이 꿈 읽는 이가 되어 오래된 꿈을 펼쳐볼 수 있다. 소녀는 에게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존재를 알려주고 사라진다. 이윽고 40대가 된 ''10대의 설렘을 주고 사라져 버린 소녀를 찾아 도시로 들어간다. 그곳에 소녀가 있다. 모습은 같지만 ''를 모르는 존재이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의식이 필요하다. 첫째,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버리는 것. 둘째, 눈에 상처를 내는 것. 도시로의 입장이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 가정해 본다. 그림자를 버리는 건 가식을 버린다는 의미로, 외부 세상을 볼 수 있는 수단을 차단하는 건 올곧게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목적이라 여긴다. 1부의 주체는 그림자를 ''라고 지칭하는 ''이다. 도시에서 불필요한 그림자는 그림자 쉼터에 있다 시간이 흐르면 죽어버린다.

 

분침과 시침이 없는 디지털시계를 사용하면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도시'의 시계에는 바늘이 없다. 시간은 흐르지만, 오직 현재뿐이며 모든 것이 덮어 쓰이고 갱신된다. 흐름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시시각각 시간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하루를 떠올린다. '도시'의 시간을 상상하니 호흡이 점차 느려진다. 너무 빨리 뛰어온 건 아닐까. 산책하는 심장의 속도로 오랜 꿈들을 꺼내어보며 조금은 천천히 걸어갈 수도 있을 텐데.

작가가 묘사하는 도시를 상상하는 동안 나의 시곗바늘은 느려진다. 일상에서 발생했던 불편한 마음이 섬세한 진동으로 잦아들며 마음이 느슨해진다. 하루키 문장의 매력이 이런 모습일까. 억지스럽지 않고 따라가는 이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면모가 있다. 구멍이 송송 뚫린 듯해도 어느 순간 공기층을 머금어 포근하게 목을 감싸는 털목도리 같다. 시적인 표현 역시 책의 무게에 부력으로 작용한다.

이 책을 읽으며 시간의 상대성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첫사랑 소녀에 대한 기억에서 소년의 시간은 멈춘다. 얼핏 사랑이 주를 이루는 듯하지만 작가가 건네는 메시지에는 사랑을 포함한 인간의 삶이 담긴다. 필요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시'에 시곗바늘이 없다는 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작가는 마음속에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영역, 시간도 손을 대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며 무의식의 영역을 암시한다.

 

1부의 무대는 '도시'이며 주인공은 ''. 내가 도시로 들어오기까지의 배경을 설명하며 현실과 도시가 번갈아 전환된다. 그림자는 아직 정체성을 부여 받기 전이다. 도시로 입장할 때 분리되어 서서히 죽어가던 그림자는 본체를 설득해 탈출을 시도한다. ''는 불확실한 벽 앞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이 도시에 남을 것인가, 저 세상으로 갈 것인가. 결국 ''는 도시에 남겠다는 선택을 하고 그림자만 내보낸다. 새로운 국면의 전환이다.

2부의 무대는 도시 밖 현실 세계이며 주인공은 도시 밖으로 나간 '그림자'. 그는 이제 내가 되어 살아간다. 본체가 도시에서 매일 오래된 꿈을 읽는 동안, 분신인 그림자는 ''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닌 채 ''로 살아간다. 어차피 둘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존재이니. 그는 스스로 그림자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도시의 스위치는 잠시 꺼지고 현실의 전원이 들어온다. 시골의 도서관장으로 일하게 된 ''는 세 명의 인물과 서사를 이룬다. 첫째, 인물이라고 칭하기 애매한 전임 도서관장 고야스 씨의 유령이다. ''는 이미 비현실적인 '도시' 체험자이므로 위화감은 없다. 멘토와 멘티처럼 대화가 오간다. 둘째, 엘로 서브마린 점퍼를 입고 매일 도서관에 드나들며 책을 읽어 치우는 서번트 증후군 소년이다. 셋째, 고야스 씨의 무덤을 들렀다 오는 길목에 있는 카페 주인이다. ''의 마음에 새로운 봄꽃을 피우는 여성이다. 이들 중 나의 시선을 당기는 캐릭터는 앞의 두 존재이다.

 

고야스 씨의 영혼은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서브마린 소년과 먼저 라포를 형성한 사람도 생전의 그이다. 주인공이 그의 무덤에서 한 독백을 듣고 소년은 '도시'를 꿈꾸기 시작한다. ‘서브마린이란 별칭도 잠재적인 사물을 연상하게 만드니 사소한 별칭까지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고야스 씨의 무덤을 찾으면서 카페 주인 여성과의 인연이 시작되니 삶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중심에 죽음의 상징이 있는 셈이다.

죽음 이후 존재의 흩어짐을 생각한다. 물질과 에너지는 동급이며 우주의 에너지는 보존된다니, 육체를 이루고 있던 물질은 분해가 되어 다른 무언가로 변한 다음 흩어질 터이다. 지구 중력장의 영향을 받으며 세상 어딘가를 여행하리라.

영혼도 중력장의 영향을 받을까. 육체처럼 흐트러지거나 다른 무언가로 변할까. 속성이 다르니 영역에 구애받지 않고 우주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까. 문학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유령처럼 지구 어딘가에 붙들려 있을까. 혹은 인간의 가청 진동수를 넘어서는 초음파가 존재하듯 가시 범위를 넘어선 형태로 머물고 싶은 장소를 서성이고 있을까.

소설 속 유령의 모습을 보며 예전에 했던 상상을 떠올린다. 영혼의 모습은 육체의 그것과 동일할까. 나의 영혼은 육체와 얼마나 닮아있을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다른 형상을 지닐까.

 

서브마린 소년은 육체와 영혼의 모습이 확실히 다른 듯하다. 3부에는 '도시'로 들어와 주인공과 역할 분담을 하며 꿈을 읽는 소년이 등장한다. 서번트 증후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신규 때 한 아이를 만났다. 교사 이름과 세계의 수도를 기가 막히게 맞추던 아이였다. 나는 다만 지켜볼 뿐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묘한 시선으로. 지금도 주로 지켜보는 일밖에는 할 수 없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시선으로 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소설 속 ''와 소년과의 대화 장면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현실 세계에서는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말하지 않던 아이가 '도시' 안에서 주인공 ''와 대화를 나눌 때는 더없이 유려한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책을 읽어 탄탄한 의식을 지닌 아이의 영혼은 심지가 굳다. 부족해 보이는 모습은 의식적인 세상에서만 비추어지는 모습이었던 거다.

소년이 마지막으로 주인공에게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마음과 의식은 다른 곳에 있으며 본체나 그림자가 어느 쪽에 있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니 분신을 믿는 건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라는 것. 결국 진짜 '''그림자'가 있는 현실 세계를 향하여 '도시'를 떠난다. 의식과 무의식의 합체를 예상할 수 있는 완벽한 결말이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상대가 나에게는 글이다. 노트북 앞에 앉기 전까지는 어떤 글을 쓰게 될지 모른다. 불완전한 문장이 될지라도 그저 한 발을 내딛는 용기를 낼 뿐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과감하게 한 발을 디디면 낭떠러지 건너편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나타나는 장면처럼. 막연한 믿음이 있다. 빈 문서 1을 앞에 두면 무슨 얘기든 털어놓으리라는 것을. 감정의 미세한 울림을 읽고 글을 준비하고 있는 무의식 속의 나를.

책의 내용에 공감하든 아귀가 맞지 않는 듯 삐걱대든 일단 정독한다. 문장이 좋아도, 문장이 좋지 않아도, 모든 문장을 좋아라 하실 문학계의 도깨비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간중간 과속방지턱을 마주친 듯 멈춘다. 책 밖으로 흘러나와 나에게 닿는 문장들을 메모하며 작가의 세상을 걷는다. 나를 통과하여 이윽고 세상에 없던 단 한 편, 나의 글이 흘러나올 때까지.

나의 향기가 짙게 배어 나오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보며 종종 전율한다. 내가 제일 잘 나간다는 자만이 아니다. '이런 문장들이 나의 무의식 안에 있었구나'라는 의외의 발견에 가깝다. 무의식의 공간에 혼재되어 있다 적당한 시기가 되어 흘러나오는 문장들이 나는 좋다. 나는 무의식의 나를 가장 알고 싶은 최애의 독자니까. 내가 나비의 꿈을 꾸든 나비가 나를 꿈꾸든, 내가 글이 되든 글이 내가 되든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어차피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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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하는 인류 - 인구의 대이동과 그들이 써내려간 역동의 세계사
샘 밀러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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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콜처럼 듣는 노래가 있다. 이 사람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10여 년 전 영상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역사 공부하듯 그의 영상을 탐독하는 중이다. 풍문으로는 일찍이 들었지만, 전혀 새로운 연예인을 영접한 소녀마냥 요즘 나는 한 사람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내는 중이다. 수많은 조회수에 N분의 1로 일조한 인간의 글을 읽고 계신다.

빠른 템포, 강력한 비트에 파워, 파워, 파워, 파워 한 단어만 들리건만 가사 해석을 보니 평범하지 않다. 도입부에 언뜻 지나가는 위버멘쉬의 세계관이 리듬을 타고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자신만의 가치로 나아가는 사람, 삶의 고통을 느끼지만, 매번 자신을 극복하려 애쓰는 사람. 심장에서 빅뱅이 터진 듯 지드래곤은 이렇게 청룡의 해가 끝나갈 무렵에 내게로 온다.

 

생명체에도 빅뱅의 순간이 있었을까. 이미 펼쳐진 상황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온통 상상이다. 까마득한 언젠가 최초의 순간은 분명 존재했으리라. 우주의 탄생이 빅뱅에서 시작되었듯이.

과학에서 우주 탐사는 인류의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며 인간의 본질적인 지적 호기심을 언급한다. 그래, 그냥 궁금하니까. 보이는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도 이런 모습일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할지 그저 궁금하니까.

인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간혹가다 근원적이고도 근원적인 문제를 별생각 없는 듯 툭 질문하는 학생이 있다. 과학적인 매뉴얼을 따라 최초의 생명체까지 거슬러 카더라이론을 말해주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는다.

 

최초의 인류도 근본적인 호기심을 안고 다른 땅을 향해 걸어갔을까. 샘 밀러의 이주하는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인류 역사를 중심으로 느린 빅뱅을 재현하듯 이동하는 인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책이다.

인간이 본래 정주성을 추구한다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주라는 안경을 쓰고 인류 역사를 해석한다. 이주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파란만장한 사건 안에 존재하던 이주민의 모습을 세밀한 시선으로 그린다.

작가가 정의하는 이주민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옮겨간 사람이다. 같은 사람인데도 다른 문화권으로 이동하는 순간 전혀 다른 인간으로 정의되는 경우가 많다. 석고상을 데생할 때 각기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처럼.

 

이주민을 떠올리면 유화물감을 섞는 장면이 연상된다. 원주민과 이주민의 문화가 융화되는 장면이 겹쳐서이다. 바로 섞이지 않고 겉도는 시간을 거치다 서서히 섞여 들어가면 융합된 문화가 재탄생하리라.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조차 무의식의 영역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자리한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이주의 이유는 다양하다. 직관적으로는 경쟁자를 피해, 기후 변화로 인하여, 먹이를 찾아서라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여기에 작가는 모험심, 호기심,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본능을 언급한다. 이주가 본능이라니!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DNA에는 이주라는 카테고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거다.

 

한 달여 전, 인류의 DNA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인터넷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네안데르탈인들도 탄수화물 좋아했네라는 제목의 뉴스이다. 고대 인류 68명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80만 년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에게도 탄수화물을 분해하는 소화 효소인 아밀레이스를 만드는 유전자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탄수화물을 사랑하는 본능이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는 해석이다. 빵을 먹으며 이 글을 쓰는 나의 행동이 꽤 뿌리 깊은 기원을 품어왔다니 묘한 기분이다.

아프리카로부터 이어져 왔다는 인류의 DNA를 상상한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이주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아프리카 땅덩어리의 모양이 인간의 뇌를 닮았다는 우연에 필연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고 싶어진다.

 

언제부터 우리는 기록에 의존하기 시작했을까. ()의 세계는 신비롭다. 언어나 문서가 당연히 없던 과거의 장면,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상상하는 건 그 자체로 매력적인 모험에 뛰어드는 행위이다.

육지 포유류 중 쥐를 제외하면 다른 어떤 동물도 그렇게 온 지구를 돌아다니지 않는다던데, 우리의 이동 욕구는 본능적이라고 여겨도 될까.

DNA의 연결성을 인지하니 멸종이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종족이라니! 네안데르탈인과 나까지도 빵으로 연결된 사이인데, 어쨌길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작가는 이주에 대하여 언제어떻게보다 그랬을까에 집중한다.

 

야간(Yaghan)족은 초기 이주민 중 가장 멀리 이동한 종족이다. 아프리카로부터 남아메리카의 꼬리 끝까지 걸어서 하늘까지 진출할 기세로 나아간다.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2022년에 93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야간족은 멸종된다. 저자는 혈통보다 문화를 잃는 것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고 말한다.

네안데르탈인, 사피엔스, 유대인, 아메리카 인디언,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아리아인, 로마인, 반달족, 아랍인, 바이킹, 타이노족, 아프리카 노예, 황인종, 시오니스트, 난민, 무지개 부족, 이주 노동자, 멕시코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의 문화를 상상한다.

수많은 역사와 함께 꽃처럼 피고 지는 다양한 문화를 목도한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 책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1970년대에서 멈추었다고 말한다. 이주민에 대한 지배적인 역사적 인식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권장하기 위한 목적이라 밝힌다.

 

역사적 인식은 자세히 들여다보았으나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전개로 공중에 떠다니는 꽃가루처럼 나의 의식은 방황을 거듭한다. 역사, 인물, 지명이 워낙 많이 등장하여 경이로운 인내심으로 정신없이 검색하다 보니 맥이 끊어진다. 하아. 배경지식 빈곤자의 한계인가.

끝내 지인 찬스를 써서 중학교 사회과 부도를 득템한다.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부교재이다. 인터넷 검색이 이보다 더 디테일할 수 없는 정보를 제공하지만, 절뚝절뚝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인내심의 배터리는 바닥이 나고 만다. 맘 편하게 대륙별로 펼쳐서 국가와 대도시의 위치를 확인하고 지질한 시골 지역은 온라인 지식백과와 병행하는 절충안을 택한다. 내용은 역사적 흐름 따위는 무시하고 인상깊은 장면만을 발췌하여 흡수하기로 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프리카인들의 이주에 얽힌 이야기이다. 아메리카로 실어 나르던 전형적인 노예선의 그림을 보니 소름이 돋는다. 무늬인가 싶은 그림은 자세히 보면 사람이다.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그림 위로 인간의 탐욕과 잔인함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화물도 이토록 치밀하게 쌓기는 어려우리라. 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그림 앞에서 전율이 인다. 노예 제도는 부당하다며 글자로만 인지하다 이미지로 보니 갑자기 줌인이 된 카메라 속 영상을 접하는 듯하다.

조선 시대 양반 제도가 등장하는 드라마 장면을 이질감 없이 받아들였던 순간을 떠올린다. 꽃미남 도령에게나 눈길을 주었지, 마당쇠나 돌쇠는 BGM처럼 당연하게 여기며 그 역시 존귀한 인간임을 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망각 폴더에 담겨있는 건 그것만이 아니다. 오랜만에 나이아가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여러 나라와 도시 이름에 나의 동공은 흔들린다. 무의식 어딘가에는 나라의 위치가 분명 새겨져 있을 텐데. 여행 노선처럼 이주민의 이정표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 답답해진다.

사회과 부도가 새의 날개처럼 좌우로 수십 번 펄럭인다. 세계 전도를 시작으로 서남아시아, 북부아프리카, 유럽, 동남아시아, 남부아시아, 동부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곳곳을 손가락으로 여행한다.

기이한 현상이다. 분명 훑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지명이 정확한 위치를 검색하고 나서 확인하면 다시 보이니. 투명 망토에 가려져 있다 짠 나타나는 것처럼 발견하고도 신기해서 몇 번을 바라본다.

 

발견에도 저작권이 있다면 목소리가 큰 사람이 권리를 획득하는 걸까. 기실 아메리카 대륙은 콜럼버스의 발견이라고 하기에 애매하다. 이미 그곳에 원주민이 있는데 무인도도 아닌 땅을 발견이라고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세상의 중심은 힘이 있는 자들을 기준으로 정해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북부아프리카 나라들의 경계를 보니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직선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오른쪽 경계처럼 리오그란데강의 굴곡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울퉁불퉁한 땅덩어리를 직선으로 나누었던 정복자들과 그 땅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힘에 밀려 강제적 이주민이 되어야만 했던 삶을 가늠해 본다. 이주 DNA가 본능이라면 그래서 이주가 이루어지는 거라면 그건 자유 의지를 동반하는 행위여야 하건만.

 

남부 아프리카 출신의 쿵족 유목민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왜 농부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세상에 몽곤고 열매가 이렇게 많은데 왜 굳이 심어야 하나요?”라 말했다나.

철새는 자유롭다. 추위를 피해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강제성으로부터는 자유로운 생명체이다.

냉난방이 안 돼요. 냉장고가 없어서 음식이 상해요. 밤에 게임도 못 해요.” 전기가 없다면 어떤 점이 불편한가라는 질문에 오가던 대답이다. 농사뿐 아니라 문명의 발달 역시 인간을 정주하게 하는 요인이다. 만일 과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본능을 따를까. 따뜻한 곳으로 떠나는 철새처럼 자유로운 이주민의 삶을 살았을까.

 

세상에 떠밀려 반강제적으로 이주했다가 자유 의지로 무장한 채 돌아온 사람의 표정이 이와 비슷할까. <홈스윗홈>의 힘찬 비트에 마음이 들썩인다. 즐거운 나의 집, 원하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 지드래곤의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 팬이 아니었으면서도 심장에 부드러운 뭉치가 굴러다닌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으로 랩을 쏟아내는 공연 장면을 몇 번이나 재생한다.

우리가 원하는 곳에 살 권리라는 문구는 읽는 것만으로 설렌다. 장소뿐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하는 중력이 끌어당기지만, 도전과 꿈이 새겨진 DNA가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면 나는 자유로이 홈스윗홈을 향해 떠날 수 있으리라. 세계지도를 펼치고 손가락으로 세계를 누벼본다. 손끝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스며든다.

 

 

p87, 각주 : 프랑스 본토를 의미는 ~ 의미하는

p98, 11째 줄: 사슴나 사슴이나

p231, 7장의 제목 중 메이플라워 호클로틸다 호(마지막 노예선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클로틸다 호가 더 적절한 제목이라고 판단됨)

p276, 10째 줄: 바나라시 바라나시

p414, 8째 줄: 뒤쫏는 뒤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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