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 도시를 그리다 - 우리가 몰랐던 공공미술에 관한 이야기
홍경한 지음, 리모 그림 / 재승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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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니! 조각에 대한 멋진 정의를 들었을 때, 매끈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떠올린다. 바로 그가 이렇게 멋진 말을 한 장본인이라는 걸 아는 순간, 살짝 소름이 돋는다.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구현해 낸 사람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머릿속에만 머물던 이미지를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로 탄생시키는 예술은 멋진 작업이다. ()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으로 향하는 화살표에 인간의 손길이 있다. 울퉁불퉁한 직육면체 비스므레한 덩어리였을 돌 조각을 그토록 멋지게 깎아내기까지 작가는 얼만큼 땀을 흘렸을까. 상상이 현실로 점차 모습을 드러낼 때, 흐르다 자유롭게 날아간 땀의 양만큼 희열을 느꼈을까.

거리가 3차원 캔버스인 양 돌과 나무와 철과 때로는 상상도 하지 못한 물질들로 거대한 예술을 구현하는 조각가들이 있다. 소설 <걸리버 여행기>의 실사판인 양 거대한 조각상들 아래 소인국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온통 예술로 가득한 공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묻을 예술의 향기를 상상한다.

 

공공 미술은 '거리 곳곳에서 마주하는 조각들'을 말한다. 미술 비평가이자 칼럼니스트, 전시기획자인 홍경한은 우리나라에 있는 길섶의 작품 15천여 점 중 38점을 선정하여 소개한다. 그가 작품을 선정한 기준은 심미성을 포함한 예술성, 작품의 가치, 작품에 새겨진 흥미로운 내레이션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조각, 삶과 예술의 하모니, 공공 미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 등 3부로 구성하여 이에 부합하는 작품들을 전시 기획을 하듯 배치한다. 더불어 저자는 큐레이터이자 도슨트 역할을 친절하게 수행한다. 작품에 얽힌 이야기, 조각가들의 의도, 유사한 작품들과 비슷한 맥락의 다른 작가에 대한 안내까지 곁들이니 공공 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미술 비평가와 칼럼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우리나라 공공 미술의 역사를 톺아보고, 공공 미술의 현재를 진단한다. 일방적인 소통이나 사후 관리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공공 미술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통해 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제안한다. 나아가 공공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한다.

 

내용 못지않게 눈에 들어오는 건 소개 작품에 대한 드로잉이다. 리모 김현길의 작업을 통해 사진이 수록되지 않은 아쉬움을 뛰어난 그림으로 채운다. 문장에서 언급된 작품과 작가들의 다른 작품의 실물 사진을 모두 인터넷으로 검색하며 읽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완독하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린 이유다.

조각 예술로 풍성한 일주일을 보낸다. 놀랍도록 실물 이미지와 드로잉의 싱크로율이 일치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덕분에 나의 시간도 수채화로 투명하고 아름답게 채색되는 듯했다.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생생한 색감이 아쉬운 작품도 보이지만 실물 사진과 대조하는 시간도 재밌고 의미 있었다.

조각의 매력은 역동적이라는 점이다. 2D 작품만 주로 감상하다 3D로 보니 입체가 주는 매력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공간과의 어우러짐, 공간과 주고받는 메시지가 더해진다. 개성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작품들을 보며 책장마다 입체 카드라도 삽입된 듯 공간감을 느낀다. 특히 마음에 들어오는 작품을 보며 나의 취향을 새삼 깨닫는다. 예술가의 시선에 공감하다 보니 내 삶의 무대가 보다 넓어지는 듯하다.

 

속도감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감상하며 내 삶의 속도를 가늠하는 시간을 갖는다. 초침의 속도, 분침의 속도, 시침의 속도. 나는 어떤 속도로 살아가고 있을까. 소리 없는 예술 작품이 전하는 공간의 파장을 느끼며 나의 심장은 조금씩 규칙적인 리듬을 찾는다.

심현지의 <물고기>는 색감이 좋다. 커다란 물고기에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색채를 보며 잠시 행복한 동화 속 바다를 상상한다. 서도호의 <카르마>에 대한 해설을 접하고 다시 작품을 본다. 얼핏 보았을 때는 청록색 모기장처럼 보였던 작품이다. 전해져 오는 철학적인 무게감이 마음을 울린다.

저자가 언급한 헨리 무어의 작품 중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누워있는 형상>에서 깔끔한 돌 조각의 매력에 반한다.

노동식 작가의 작품은 부드러운 충격을 준다. 조각의 재료가 솜이라니! 고정관념을 깨뜨린 시도가 경이롭다. 책에 소개된 <민들레 홀씨 되어>는 공들여 쓴 칼럼을 접하는 듯하다. 검색으로 3m 모기향,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오는 장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공간으로 허무하게 사라지는 연기를 사진을 찍듯 붙들어 놓은 발상에 감탄한다.

 

소개된 내용에 대한 의견이 두 가지 있다.

첫째,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의 부제는 '고철에 담긴 비애와 슬픔의 꽃 한 송이'이다. 한데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작품은 20세기 물질문명 사회가 만들어낸 상처를 담고 있다. 이게 왜 상처인지, '아마벨'이란 제목은 무슨 의미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이해가 된다. 아마벨이 비행기 사고로 죽은 19세 소녀이며, 그 비행기의 잔해를 모아 해당 조형물을 만들었다는 설명이 추가되었더라면 '비애와 슬픔'에 대한 이해가 보다 더 깊어지지 않았을까. 작품의 재료가 고철일 수밖에 없는 이유까지 말이다.

둘째, 하우메 플렌자의 작품은 <가능성>으로 제시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칠드런스 소울>에서는 '각 나라의 고유한 문자를 통해~'라는 문장이 언급된다. 저자의 서술 의도는 나라별 고유 문자를 표현한 예술을 소개하는 듯 보인다. 고유한 문자라면 영어로 된 작품보다는 한글로 제작되었다는 <가능성>이 더 적합해 보인다.

 

책의 구성에 대한 의견도 있다.

첫째, 책 표지 디자인이다. 표지에는 본문에 소개된 작품들이 앞과 뒤에 각각 7점씩 배열되어 있다. 한데 앞표지와 뒤표지의 작품 중 6점이 중복된다. 디자인의 의도는 분명 있을 테니 전문가의 작업에 이의를 제기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직관적인 의견을 적는다. 나라면 작품이 38점이나 되니 각기 다른 작품을 수록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둘째, 새드 엔딩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씁쓸함이 남는다.'이다. 덩달아 그리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마무리를 한다. 저자의 시선은 전체적인 시스템을 총괄하는 입장에 있는 듯하니 수긍이 간다. 날카로운 비판은 필요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여운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있다. 보다 희망적인 내용을 마지막에 배열했으면 어땠을까. 그 많은 공공 미술에 참여한 작가들의 마음에는 분명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세상은 분명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미술의 진정한 역할은 삶의 긍정성을 배가하는 데 있다던가. 미술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한다면 덩달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따뜻해지리라 생각한다.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게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을 안겨준다고 나는 믿는다.

공공 미술 조각가들이 진정으로 원한 건 세상과의 소통이리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말을 걸었던 이들의 마음을 상상한다. 그들의 외침이 조금씩 모여 커다란 울림으로 전해진다. 작품뿐 아니라 주변의 공간까지 조화를 이루면서 파동인 듯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일까. 주변의 바람과 햇살, 희미한 대지의 냄새와 함께 3D의 입체 예술을 느끼고 싶다. 여행의 테마로 잡아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 시선은 나를 향한다.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조각들을 감상하니 삶에 입체감이 더해진다. 공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말을 걸고 싶냐고. 이 글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당신에게 하듯 나는 한 글자 한 글자에 마음을 담아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 걸까.

 

 

p127, 밑에서 4째 줄: 토니 오슬로 ~오슬러

p135, 4째 줄: 프리즈마 프라즈마

p144, 밑에서 4째 줄: 전통문화예술중심지 인사동 ~중심 인사동

p271, 7째 줄: 운봉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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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법륜스님 지음 / 정토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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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 걸터앉은 집 뒤편에는 절이 있었다. 공양주로 일하시던 어머니 덕분에 절 문턱을 뒷마당인 듯 자연스럽게 드나든다. 일요일마다 여는 어린이 법회에도 언니, 동생들과 종종 참여한다. '귀의'가 뭔지도 모르고 불렀던 노래 '삼귀의', 제목의 의미조차 이제야 알았더라도 리듬과 가사 만은 익숙한 '사홍서원', 문장의 의미도 모른 채 뭐 준다 길래 260'반야심경'을 송두리째 외웠던 경이가 우수수 딸려 나온다. 뭘 받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지금도 툭 치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 구구단인 양 튀어나온다.

의미를 몰랐어도 상관없다. 그 공간을 마주했던 선명한 감각의 기억으로 충분하다. 밟을 때마다 달가닥거리던 절 앞 마당의 자갈 소리, 소리만큼이나 은은하게 풍기던 법당의 향냄새, 약수터에서 졸졸 흘러나오던 시원한 물맛, 마당을 둘러싼 초록들이 사락사락 햇살을 비비던 풍경. 그 안에는 잿빛 몸뻬를 입고 분주하시던 광명화 보살님, 나의 어머니가 있다. 종교는 없지만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이유에는 어릴 적 경험의 영향이 크다. 공간에 깃든 평화로움과 청량한 고요로 둘러싸인 질감이 어린 나는 그저 좋았다.

 

불교의 시작. 원점이 되는 분은 어떤 생을 살았을까.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은 경전 기록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삶과 말씀을 재조명한 책이다. 법륜 스님은 서문에서 저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분의 삶을 통해 지금 여기 우리 삶의 방향을 점검하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고.

간간이 일화로 들었던 부처님의 말씀보다 이 세상에 계시는 법륜 스님의 말씀을 훨씬 많이 들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유튜브에서 스님의 <즉문즉설>을 찾았으니까. 본질을 꿰뚫는 직설에 속이 후련했다. 지금 하는 고민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상담자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무슨 답변을 하실지 예측이 될 지경이다.

내게 부처님은 아직 멀기만 한데 스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분은 어떤 느낌일까. 575쪽의 지면은 한 사람의 모든 삶과 사상을 담기에는 좁을 터이다. 법륜 스님은 이 좁은 공간으로 어떤 장면을 들여보내셨을까. 신적인 존재에 더 근접했을 듯한 '붓다' 앞에 '인간'이란 말이 붙으니 새삼 낯설다. 두근거리는 호기심으로 환한 빛을 연상케 하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두어 장을 넘기니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낸 좌상이 시선을 붙든다. 목차에 도달하기도 전에 주춤한다. 무릇 부처님의 모습이란 석굴암에 고고하게 앉아 계시는 뽀샤시하면서도 근엄한 본존불이 디폴트였단 말이다. 앙상한 붓다라니! 이질적인 사진 앞에서 잠시 멍해진다.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읽지도 않은 고전의 요약본을 알 듯 어설픈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생로병사, 고행 중 찝쩍대는 악마의 유혹 같은 일화 말이다. 어째서 물음표를 던져보지 않았던가. 고행의 과정을 지났다면 육신의 살이 붙어있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일 터인데. 뱃가죽이 등가죽에 들러붙었다는 문장을 가시화한 듯 생생하다. 상상해 본 적 없는 모습이라 더 인상적이다.

이름도 붙어있지 않은 불상의 정체가 궁금했다. 덕분에 인터넷에 올라온 수많은 불상의 사진을 구경한다. 단식 고행을 하던 해탈 전의 모습이고 작품명은 '고행상(Fasting Buddha)'임을 알았다. 파키스탄의 라호르 박물관 소장본이 유명하며 이를 본떠 수많은 고행상이 만들어진다. 이 책에 수록된 불상은 문경의 정토수련원에 있는 것으로 인도에서 제작해서 들여왔다고 한다. 정토출판에서 출간한 책이니 굳이 출처를 표기할 필요가 없었나 보다.

 

서장에서는 인도의 사상과 역사를 소개한다. 인도 역사에는 전통적인 계급 세습 제도인 '카스트'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기원전 1300년 정도를 시원으로 본다는 기록이 많으며 공식적으로는 1950년에 폐지되었다. 무려 3,250여 년간 존속되어 온 제도이다. 피라미드 형태의 분류도에는 위로부터 제사장인 '브라만', 무사나 왕족인 '크샤트리아', 평민인 '바이샤', 노예인 '수드라'가 차례로 분포한다.

충격적인 건 여기가 바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발아래에는 거대한 지하 세계가 있다.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라 불리는 '달리트'는 닿아서는 안되는 계급 밖의 사람들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꼬꼬무 카스트에는 이들보다 더한 존재가 있다. 인구 등록조차 되지 않는 '불가시천민(Unseeables)'이다. 다른 이가 보아서는 안 되니 밤에 이동하고 이동 흔적을 지우고 다니며 목에 방울까지 매달았다고 한다.

출생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정해지는 제도라니! 누구의 잘못도 아닌 염색체 이상 증후군처럼 말이다. 고려와 조선의 양반 제도뿐 아니라 미국에도 노예 제도가 있었음을 떠올린다. 세계 여러 나라 계급의 역사는 검색할수록 짙은 씁쓸함을 남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을 수직으로 줄 세워서 지배하려는 건 인간이란 종의 타고난 본성인가.

 

태어나보니 노예로 정해진 삶은 가늠해 본다는 말조차 조심스럽다. 이토록 불합리한 제도의 그물이 옭아맨 세상에서 불평등으로 인해 그들에게 쏟아졌을 고통을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안도감만 삼킬 뿐이다. 시험용으로 외웠던 학창 시절의 '카스트'에 고통 따위는 없었건만. 아무런 감흥 없이 밍밍한 껍데기만 잠시 넣었다 뱉고 금세 잊어버린 셈이다.

부처님의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이다. '석가족의 성자'라는 의미로 깨달음 이후에는 '석가모니'라는 존칭으로도 불린다. 카스트 계급은 크샤트리아로 왕족 출신이다. 소위 금수저이시다.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나 놓고 자기가 3루타를 친 줄 안다." 드라마 <스토브 리그> 주인공의 대사다. 이 문장을 떠올리며 부처님의 위대한 점을 발견한다. 냉철한 자아 성찰에 따른 현실 직시이다. 그분은 3루에서 태어나 놓고 스스로 3루타를 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깨닫는 데 머무른다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닐 터이다. 부처님은 망설이지 않고 3루를 떠나 1루로 거슬러 가신다. 고통이 공기처럼 머무는 곳, 매 순간 고통을 호흡하는 이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이 평범한 인간은 알았다 하더라도 이게 웬 횡재냐며 모른 척 머물렀을 텐데.

 

나고 자란 환경에 따라 가치 기준과 생활 관습이 결정되며 한 사람의 인격은 환경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스님 말씀에 동의한다. 이런 이유로 비슷한 상황이 되면 흘러간 일부 역사가 반복되는 패턴을 보이는 걸까.

환경은 인간의 내재적 성향을 발현하게 만드는 스위치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스위치를 켜려면 일단 환경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파도가 두려워 항구에만 정박한 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환경에 자유 의지가 결합 되면 잠자고 있던 불성이 화르르 타오르리라. 불교의 목적은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하니 야! 너두!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탄생과 성장, 출가, 고행과 성도, 전도의 개시,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 위대한 열반에 이르기까지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가 걸어간 삶의 여정과 사상을 천천히 따라간다. 부처님의 여정을 각 장의 앞부분에 지도와 함께 나타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약간 있다. 도시, 나라, 강 등 거쳐가신 경로를 여행기의 노선처럼 보고 싶었다. 생소한 지명이 언급될 때마다 부록에 나온 고대 인도의 16대국 지도를 펼쳐보았지만 몇몇 도시나 중요 나라 외에는 그분의 행적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부록에 붓다의 연표를 수록해 80년간의 삶을 정리해 주신 점은 좋았다.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 부록의 '찾아보기'를 낱말 뜻으로 구성했으면 어땠을까. '찾아보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의 이름이나 도시에 대한 설명은 본문 아래에 각주로 달아서 보다 깊은 이해를 돕고 말이다. 어차피 산스크리트어는 '데바다하''데바닷타'나 도통 발음이 비슷해서 그게 그거 같았다. 찾아보기의 배열이 가나다순으로 되어 있으니 본문을 읽을 때마다 뒷면을 들춰보기는 어려웠다. 지명이나 인명은 그러려니 하고 여기에 의문이 가지는 않았으니까.

문제는 그 외의 요소들에 있었다. 기본적인 명사나 서술어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 보니 책장이 더딘 걸음으로 넘어갔다. 스님의 해설에 언급되는 내용도 있으나 불교 관련 용어가 익숙하지 않아 수시로 인터넷을 검색하여 어학 사전이나 위키 백과를 찾았다. '수계사, 사미, 시봉, 보살행, 화현, 용화, 방일함, 예경, 탐사, 반열반, 사자후, 사견, 탐착, 외호하다, 사뢰다, 반야, 제불보살, 가람, 맑히다, 증장, 청수, 자양하다, 사라나무, 팔부대중, 전단나무버섯'. 최근 이틀 동안의 검색어 목록이다. 덕분에 다소 깊이 있는 공부가 된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불교 공부를 하는 학생의 자세로 새로운 낱말을 배우는 듯 겉모습만 익숙한 몇몇 단어의 진정한 의미도 배운다.

 

첫 번째,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내가 제일 잘 나가' 가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이었던 거다. 더군다나 아()에서 ''의 범위가 1인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였다니! 인간이 우주와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인간 해방 선언을 몰라본 무지몽매한 눈이 트인다.

두 번째, '공양'이다. 사실 '공양'에 대하여 삐딱한 시선을 가져왔다. 차마 말로 뱉지 못한 생각이다. 스스로 음식을 구하지 못하고 어째서 다른 이의 음식을 달라고 하는가. 매번 석연치 않은 마음이었지만 그 어떤 책에서도 시원한 답변을 얻지 못한다. 내가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걸까. 많은 이들은 이를 당연하다 여기는 걸까.

드디어 이 책에서 답을 얻는다. 다른 이에게 나의 먹을 것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구나. 공양은 나의 것을 나눔이로구나. 나의 몸을 만들 음식을 나누는 것, 결국 나를 나누는 수행인 셈이다.

세 번째, '자비'이다. 무조건적인 이해나 용서가 아니라 보다 큰 의미가 있음을 배운다. 고통에 동참하여 모든 아픔을 함께하고 모든 즐거움을 함께 나누려는 자세, 대등한 관계에서의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기희생이다. 자비의 의미를 공부하며 그 예시로 적절하게 언급할 수 있는 보살님 한 분을 떠올린다.

 

스님은 이 책에 친절하고 맑은 거울을 가져다 놓으셨던 걸까. 세상 그대로의 모습을 비춰보고 이제껏 잘못 알고 있던 세상의 이치를 배우며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본다. 부처님에 대한 세세한 일대기라 짐작하고 문을 열었는데 부처님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법륜 스님께서는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셨음을 깨닫는다.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왔나.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몇번 한적이 없었(feat. 어머님께)'을 때는 그러지 못했다. 삶은 자잘한 계기를 몇 번 건네면서 내가 소중한 사람임을 알려준다. 지금 나의 주인은 나다. 또한 나만 소중한 게 아니라 당신도 소중한 사람임을 알아야 함을 마음에 새긴다. 한 장 한 장의 책장이 거울인 듯 나를 비춰본다. 삐져나온 머리카락도 정돈하고 표정도 보고 지나온 나와 걸어갈 나를 상상한다.

실천을 강조하는 불교 교리를 기준으로 놓고 보니 말로만 떠드는 사람, 말없이 실천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잔잔한 마음을 품고 찾아보니 제대로 보지 못했던 몇몇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증발이 되어 사라지기라도 한 듯이.

 

부처님이 지혜와 자비를 갖추신 분이라면, 보살님은 지혜를 구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생애에 담긴 가르침을 따라가며 기시감을 느낀다. 인간은 오직 그 행위에 의해서만 그 성품이 결정된다고 했던가.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그분의 가르침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신 훌륭한 조교가 가까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절의 스님께서 어머니께 '광명화 보살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을 때, 우리 식구는 너무 거창한 이름이라며 웃음을 터뜨린다. 빛나는 꽃이라니! 게다가 보살님이라니! 노모의 은빛 머리칼이 점점 빛을 낼수록 스님의 혜안에 나는 종종 감탄한다.

어머니께 용돈을 드릴 때마다 대부분의 돈이 물건으로 페이백 되어 돌아온다. 명절 때마다, 생일 때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시험이나 소소한 삶의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때로는 별다른 이유 없이 주변에 많은 것들을 베푸신다. "없이 살아서 그렇지 내가 돈 쓰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꽃처럼 피어나는 어머니의 웃음에 "니 엄마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나 모르겠다." 덩달아 구르는 아버지의 웃음소리. 당신으로 인해 나는 나눔의 삶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근접 사진을 보듯 목도하였으며 고통스러운 현실은 반드시 지나가리라는 긍정 마인드를 품게 되었다.

 

몇 개의 단어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연결되어 심장 깊은 데에 놓인다. 나에게는 ''이 그런 부류에 속하는 단어다. -공양--공양주-어머니. 시간과 공간과 감각의 무게 중심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갈 때 불현듯 툭! 첫 번째 단어에 진동이 전해진다. 쓰러지는 도미노를 촬영한 동영상을 거꾸로 재생하듯 연결 고리가 줄줄이 되살아난다.

7년 전의 5월도 그랬다. 야외에서 개최되는 글짓기 대회에 참여한 날이다. 두 시간 안에 '이팝꽃이 피면'이라는 글제로 작품을 제출하는 미션을 받는다. 밥을 닮은 이팝꽃을 떠올리는 순간, 뺨에 닿는 바람이 참 부드럽다고 생각한 순간, 카테고리의 단어들이 후두둑 눈앞에 펼쳐진다.

'공양주로 일하던 / 어미의 소원은 / 이팝꽃처럼 솔솔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내 새끼 뱃속에 담아 / 배불리는 것이었다 // 부처님 공양하고 / 남은 밥 찐 도시락 / 어느 날 삭아버려 / 축 늘어진 이팝꽃 / 자식은 밥을 버리며 / 철없이 투덜댔다 // 30년 뒤 절 마당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이팝꽃처럼 솔솔 / 지어주고 싶었지 / 버려진 이팝꽃은 / 노모의 마음속에서 / 여전히 뜨겁게 / 피어나고 있었다 (제목: 이팝꽃처럼 솔솔)'

가난의 고통은 당신 덕분에 예술로 피어난다. 대회에서 얻은 결과로 나는 글을 계속 써나갈 용기를 얻는다.

 

글을 쓸 때마다 종종 이 시를 언급한다. 시를 짓던 그날의 두 시간이 파일에 저장된 동영상처럼 꺼낼 때마다 생생하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의 가슴은 뜨겁다. 어머니가 담긴 글은 매번 그렇다. 따끔거리면서도 글 안에 새기면 카타르시스에 가까운 희열이 느껴진다.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동시 통역사처럼 문장이 흘러나온다. 글을 쓰는 현재의 모습을 한 손으로 잡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면 고통의 바람이 불어왔던 순간마다 당신이 빛의 꽃으로 피어있다. 덕분에 함께 하는 고통 속에서 덜 춥고 덜 외로웠다.

"몇 달을 점심때마다 곰국 먹는 거, 질리지 않니?" 취업을 준비하는 곰국 마니아에게 묻는다. "엄마! 엄마는 매일 먹는 밥이 질려?" 글 속의 어머니는 이런 의미일까. 매일 먹는 새 밥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존재 말이다.

석가탄신일을 부처님 '오신' 날이라 부른 건 그분이 오시기를 바랬던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으리라. 그리고 이미 내 곁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보여주신 보살님이 오셨던 건지도 모른다. 부처님, 불경, 스님, 절을 떠올리면 이 모든 배경을 뚫고 나의 공양주, 광명화 보살님이 은은한 햇살처럼 심장을 비춘다. 연기설이 사실이라면 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내 곁에 머문 보살님과 몇십 년의 삶을 공유하는 행운을 누렸던 걸까.

p54, 본문 첫째 줄, p55, 밑에서 2째 줄, 3째 줄, p91, 밑에서 10째 줄: 아승지 아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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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리커버 에디션)
무라세 다케시 지음, 김지연 옮김 / 모모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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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골목이 있는 길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바퀴를 따라 삼십 여 년 전의 기억이 묻어 나는 길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대학 병원 뒤 허름한 주택가는 너무 많이 달라져 있다. 널찍한 주차장이 나오는가 하면 커다란 건물과 신축 빌라들이 즐비하다. "여기 어디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20대의 발자국이 그렇게 많이 찍힌 거리이니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정도는 몸이 기억할 법도 한데. 깔끔하게 정비된 동네가 신도시인 양 낯설다.

"엄마, 여기께 살았었어?" 그때의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아이가 뒷자리에서 묻는다. ". 근데 너무 많이 변했네." 가족 식사 후 들른 커피숍이 예전에 살던 동네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수석에서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분주하게 풍경을 스캔한다. "에이, 못 찾겠다." 결혼 전에 살았던 친정집 찾기를 포기한다. 고대 유적지인 양 집터라도 보고 싶었지만 발견하기가 만만치 않다. GG를 선언하자마자 차는 과거의 골목길을 빠져나와 현재의 대로를 달린다.

 

달리는 기차가 들어오는 기차역 풍경이 책 표지를 넘어 앞 뒷면의 날개까지 이어진다. 일러스트의 색감이 좋다. 자그마한 체구에 봄날 여리여리한 꽃잎 같은 겉모습을 지닌 책이다. 불빛을 받으니 낮의 공간을 채우는 별이라도 내려온 양 무늬가 반짝인다. 첫 느낌은 화사한 봄이지만 선뜻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세상의 마지막'이라는 제목의 문구 때문이다. 죽음의 상징일까. 희망 없는 삶만큼 묵직한 단어라 샤랄라한 마음으로 펼쳐볼 수 없었다.

어둠의 아우라가 예상되는 책을 굳이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이웃 나라이기는 해도 외국 소설이니 우리 정서와 잘 맞을까 의구심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책을 눈앞으로 데려오고 이틀 만에 완독했으며 바로 노트북을 두드리는 걸 보면 이건 차라리 운명일까. 몇 주에 걸쳐 책을 읽고 다시 그만큼을 고민해야 느낌이 정리되는 편이건만 기다렸다는 듯이 손끝으로 글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보통의 기다림은 그 자체로 희망을 내포한다. 대상의 존재를 전제로 하므로. 오면 좋고, 오지 않더라도 욕심을 내려놓으면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안타까운 상황은 대상의 부재로부터 온다. '있다'에서 '없다'로 전환되는 순간은 얄궂게도 예고라는 게 없다. 한순간에 훅 다가온다. 사랑하는 이를 마음에 품은 이는 이런 이유로 종종 긴장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무라세 다케시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자신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뒤늦은 회한으로 가슴 아파할 상황은 당신이나 나에게도 예외로 빗겨가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함께하는 지금은 더없이 소중한 순간이다.

 

이 소설은 기차 탈선 사고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이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유령 열차에 올라타서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약혼자를 잃은 여자, 아버지를 잃은 아들,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잃은 소년, 열차를 운전한 기관사를 잃은 아내 등 4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커다란 틀은 옴니버스식인데 각각의 이야기에는 나머지 에피소드 속 등장인물이 조금씩 얼굴을 비추며 연결된다.

판타지 설정이 이질적이지 않아 현실처럼 전개가 자연스럽다. 옮긴이의 주석이 해당 페이지에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읽어왔던 상당수의 책이 주석을 맨 뒤에 부록처럼 수록해 놓아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왔다 갔다 책을 들춰보는 일이 반복되면 맥이 끊겨서이다. 소설은 작가가 펼쳐 놓은 흐름을 따라가는 장르이니 동시통역사를 옆에 둔 것처럼 바로 확인하여 몰입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했다.

 

감정이입이 되어 몰입한 에피소드는 2화와 4화이다. 매번 책을 거울삼아 나의 삶을 비춰보는데 두 이야기가 현재 상황과 가장 근접해서인 듯하다. 부모와 자식, 부부 사이의 관계, 일의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서야 그와의 관계를 돌아보며 아파한다. 유령 기차는 그들의 회한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판타지적인 장치이다.

유령 기차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4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죽은 이가 승차했던 역에서 타야 하며, 피해자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 열차가 사고 지점을 통과하기 전에 미리 내리지 않으면 자신도 죽게 된다. 마지막으로, 죽은 이를 만난다고 해서 현실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단지 죽은 이와 대화를 해볼 한 번의 기회만을 얻을 뿐이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더라도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제대로 된 이별을 위해 기차에 올라탄다.

 

아들의 관점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묘사한 2화에서는 직업의 의미를 근본적인 관점에서 다룬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했던 아들은 직장에서의 불합리한 처우에 밀려나 몇몇 임시직을 전전하다 칩거 생활을 한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후 당신의 흔적을 찾던 그는 변변치 않아 보였던 아버지의 일이 베푸는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평소 당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따라가며 비로소 커다란 사랑의 테두리 안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유령 기차에서 만난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넨 말이 인상적이다. 남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느끼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것, 삶에서 해답을 가르쳐주는 건 컴퓨터나 로봇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이라는 말이다. 나의 부모님과 아이들을 떠올린다. 이제는 부모의 입장에서도 자식을 향한 마음을 헤아리는 나를 발견한다. 몇 년 뒤의 퇴직 이후에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면 좋을까 상상해 본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데 두려움이 더욱 커질 터이다. 두려움과 용기는 같은 말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정박한 배는 부서질 염려가 없다 하던가. 바다에 나가 파도와 맞서며 항해하지 않는 배를 ''라 부를 수 있을까. 바다를 동경하며 항구에만 머무는 안전한 배가 되고 싶지는 않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이제는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치열했던 시기를 지나오면서 지쳤던 마음을 다독이면서 마음이 기뻐하는 일을 하며 나머지 시간을 걸어가고 싶다. 그 시작에는 분명 글이 함께 하리라. 나의 외로움과 슬픔과 아픔을 품고 함께 내 삶을 걸어온 나의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글은 분명 나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과도 연결되리라 믿는다. 그때까지 이렇게 책을 읽고 느낌을 정리하며 조금씩 닻을 올리고 싶다. 바다로 항해할 내일을 꿈꾸며.

 

내일도 오늘처럼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리라 생각했던 아내에게 오늘 아침은 남편의 얼굴을 보는 마지막이 된다. 사고 기차를 운전했던 기관사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다룬 4화를 따라가며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린다. 운전하기 좋은 대로를 두고 굳이 골목길로 핸들을 돌렸던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쪽으로 한 번 가보자 얘기한 적 없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당신도 나와 함께 한 시간을 다시 꺼내어 보고 싶었을까. 하루의 아쉬운 이별이 찰랑거리던 순간들을, 함께 걷던 그 거리를, 삼십여 년을 훌쩍 타임 슬립하여 재연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지. 말로 표현하기보다 은근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소한 순간들이 조각조각 되살아나더니 퍼즐 판을 향해 자리를 잡는다.

 

당신이 운전을 가르쳐주던 주차장 근처의 커피숍에서 나와의 추억을 아이들에게 얘기해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 근처 주차장이 아래위 이중이라, 언덕에 올랐다 출발하는 연습을 했지. 코스도 분필로 그려가면서 연습하고." 운동 신경이 연합 신경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여자친구를 만나 개고생을 했던 남자. 결국 그녀의 손에 운전면허증을 쥐어준, 그 어려운 걸 해낸 사람이다.

"여기가 적당했던 거야?" "엄마 옛날 집 근처라 데려다주기 좋아서." "한 번은 순찰 도는 경찰들에게 걸린 적도 있었지. 엄마가 무면허인 상태였으니까." "오호! 그래서?" 무용담을 듣는 듯 아이들의 눈이 반짝인다. 경찰은 내 기억에 없는 인간이다. 그런 적이 있던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당신은 어찌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말하고 있을까. 차마 나는 기억 나지 않는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미소 지으면서 가만히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순간을 잊고 살았던 걸까. 얼마나 많은 일들을 우리는 함께 지나왔던가. 사소한 오해와 원망들이 먼지처럼 쌓여 보석 같은 장면들을 가리고 있었나. 더께를 한 꺼풀씩 벗기는 마음으로 당신이라는 책을 읽는다. 몇 년 전만 해도 당신이 나의 글에 들어오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늘 같은 모습과 행동으로 머물고 있던 당신을 요즘에야 제대로 본다. 흐릿했던 마음의 거울이 점점 닦여가는 중일까.

밀대로 청소하는 당신이 안방에 오면 침대에 냉큼 올라가서 말한다. "구석구석 닦아주세요, 구석구석.(의역: 당신이 좋아요.)" 정말 문까지 뒤집고 구석구석 밀고 가는 당신에게 농담처럼 말을 건네는 순간이 나는 재밌다. 외출하려는 당신에게, "포도당과 과당과 신선한 비타민을 섭취하고 싶어요.(의역: 포도 사다 줄래요?)" 돌아오는 당신의 손에 꽃다발인 듯 포도송이가 들려있다. 흑백만 보이던 삶에 환한 빛이 켜진 듯 색깔로 물든 삶이 반짝인다, 이런 사람인 당신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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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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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의 나에게 별은 하늘하늘한 꿈이었다. 초등학교 때 별과 행성에 관한 백과사전을 몰입하며 펼쳐보곤 했다. 교과서 밖 지식에 관심이 간 건 천체 분야가 유일했다. 토성의 고리가 꼴랑 세 개라는 지식이 버젓이 담겨있었어도 교과서를 벗어난 미지의 세계는 어린 가슴을 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큰개자리의 알파 별 '시리우스'는 중고등학교 때 가장 좋아하던 별이다.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을 따라 쭉 내려가 수시로 내 마음의 원픽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잊고 있었다. 내가 별을 참 좋아하던 아이였다는 사실을.

20대의 나에게 별은 분홍분홍한 로망이었다. 반은 허세로 구입한 과학 잡지 '뉴턴'에도 고화질의 천체 사진이 많이 등장했다. 사진만 몇 번 들썩이다 일 년 정도 지나 자연스레 관심 밖으로 퇴출되었지만, '뉴턴'과의 첫 만남도 선명한 성단과 성운 사진이었다. 종이계의 비단인 듯 좌르르 광택이 흐르는 사진을 넘겨보던 손끝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또렷하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가슴에 남아있는 로맨틱한 인간마냥.

 

로망에 현실의 바람이 불어온 건 30대이다.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옆 라인의 것을 이용하라며 잠시 아파트 옥상 문을 개방했던 날의 일이다. 당시 꼭대기 15층에 거주하던 나는 새벽이 되기를 호시탐탐 노리다 옥상에 슬그머니 올라간다. 도시의 밤하늘은 어떤 시각에 고개를 쳐들든 도통 음침해지지 않으니 만나기 힘든 기회가 온 셈이다. 오른손에는 손전등을, 왼손에는 동그란 별자리판을 창과 방패인 양 움켜쥐고 드디어 옥상으로 출정하는 나. 오리온자리 발치에 얌전히 앉아 있는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을 때의 전율이란!

더없이 좋았다, 환경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귀신보다 사람의 무서움을 알기에 그제야 현실이 피부에 와 닿는다. 으슥한 어딘가에서 불쑥 무언가 나타날 것 같았다. 게다가 손전등으로 별자리판을 비춰보며 돌리다 보니 새벽의 한기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새벽에 겨울철 다이아몬드의 고도가 높았으니 늦가을 정도였던 듯하다. 정확한 날짜나 시각은 기억나지 않지만 눈 속에 담겼던 밤하늘만큼은 파랑파랑한 현실과 함께 인화한 사진인 듯 선명하다.

 

심채경의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로망과 현실을 동시에 알려주는 천문학자의 에세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별이 아니라 별을 보는 '사람'이다. 별을 보는 사람에 관한 단짠단짠의 글이다. 천문학자라고 낭만적으로 별만 바라보는 것은 아님을 작가는 자신의 삶에 비추어 조곤조곤 서술한다. 대학의 비정규직 행성과학자로서의 어려움과 그 길을 걷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준다. 아이의 엄마로서 마주하는 현실의 무게를 솔직한 일화로 소개한다. 천문학 분야의 사회적 이슈에 관한 의견도 피력한다.

천문학의 역사를 서술하는 3부에서 특히 시선이 가는 건 고대 문헌에 기록된 천문 관측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오감만으로 그토록 정밀한 관측이 가능했던 걸 보면 지적인 능력은 시간에 비례해서 발달하는 건 아닌 걸까. 작가가 말처럼 우주의 본질은 그대로인데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뿐이니까. 작가의 문장을 따라가며 중간중간 공감도 하면서 나의 삶에 천체가 스며 들어오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여정이 좋았다.

 

우주의 A부터 Z까지를 총망라했다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관한 글 앞에서는 움찔한다. 심채경 작가처럼 나 역시 몇 년째 그 책이 책꽂이에 우아하게 꽂아만 놓았기 때문이다. 오다가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책등만 쳐다봐 왔다. 존재 자체로 우주의 비밀이 적힌 책을 득템한 듯 뿌듯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책 표지를 넘길 정도의 궁금증은 아직 없는 상태다. 이 정도는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대작을 성급하게 영접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면 우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히듯 첫 장을 펼치고 싶다.

이소연 박사의 이야기가 담긴 '최고의 우주인'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불합리성을 짚어주는 칼럼을 보는 듯하다. 다른 이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함을 깨닫는다. '창백한 푸른 점'은 고독한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잠시 고개를 돌린 보이저 1호가 촬영한 지구를 지칭한다. 언젠가 내 곁을 떠나게 될 나의 아이가 겹쳐진다. 엄마로서의 저자의 마음에 공감하며 조만간 다가올 미래를 상상한다. 허전하지만 아름다우리라.

 

"내 원체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오. , , ,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빅3 남자주인공 중 하나인 김희성의 말이다. 나머지 두 명도 매력적이지만 가장 눈길이 간 사람은 김희성이다. 이름부터 내 취향이라. 빛날 희(), 별 성()이라니!

프롤로그에서 작가의 문장을 읽으며 위 대사를 떠올린다.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그녀.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을 동경한다는 그녀.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는 문장과 닮아있는 작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에필로그에서도 '뭐라도 되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그리고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된다고, 삶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안갯속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글을 썼다. 그래서 '어떤' 책이 되긴 되었다'는 솔직한 문장 앞에서 별빛 같은 마음이 묻어 나온다. 모든 별이 그렇듯 뜨거운 열정을 품은 마음이다. 덩달아 가슴이 뜨거워진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일정을 만나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하던 나는 100%에 근접하는 J.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그날의 스케줄을 대략 머릿속으로 짜 놓는다. 계획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할 일을 정해 놓은 시각에 무슨 일이건 숨어있다 갑자기 튀어나왔으니. 그게 은근히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한데 이 책에서 섭동에 관련된 현상을 읽으면서부터 요즘은 되레 그 갑툭튀를 기다리게 된다. '섭동'이란 천체의 궤도에 교란을 주는 자잘한 인력들을 말한다. 행성들의 궤도는 섭동으로 인해 매끄러워지지는 않지만 커다란 주 궤도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고유한 결이 유지되는 것처럼. 나 역시 우주 안에 있는 우주의 일부라 그런 걸까.

그게 신기하면서도 경이롭다. 삶의 섭동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똑같은 순간을 맞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오늘은 어떤 변수로 내 삶의 궤도가 변할까. 종이에 박제되어 있던 성도가 머리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보았을 때의 두근거림이 심장 위로 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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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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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쓸 때마다 집 짓는 상상을 한다. 마음을 울리는 문장과 파편적 생각을 건축 자재인 양 '빈 문서 1'의 집터에 가져다 놓는다. 유리창, 나무판, 벽돌, 철근을 닮은 글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어울리는 자리를 찾는다. 기둥을 세우고 벽을 연결하고 문장의 방을 만든다. 출입문과 창문도 끼워 넣는다. 작가가 제공한 건축 재료에 내가 가진 것을 더한다. 글로 만드는 집이다. 몇 번이고 서성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련 없이 허문다.

완성된 집을 보듯 한 권의 책을 본다. 수많은 집을 구경하다 꿈을 꾸게 만드는 집도 만난다. 평면에 박제된 감성을 공간으로 생생하게 펼쳐주는 집이다. 펼치면 크리스마스트리나 산타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서는 3차원 입체 카드를 건네받는 느낌이다. 밋밋하던 공간에 공기 이상의 의미가 다채롭게 담긴다. 공간의 개념이 확장된다. 낯선 설렘으로 두근거린다.

 

공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그 안의 사람은 많은 영향을 받는다. 유현준 작가의 글을 접하면서 공간과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건축에 대한 글로 이런 느낌을 받을 줄이야. 건축은 놀라우면서도 조심스러운 작업인 듯하다. 인간을 담는 공간을 구현하는 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건축가들은 자연과학적 기술력에 인문학적 소양까지 풍부하게 갖추고 건축에 접근해야 하리라. 단순히 물질로 만든 구조물이 아니라 무형의 공간을 유형의 공간으로 변화시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접했을 때 받았던 생소한 느낌이 떠오른다. 한동안 내가 사는 도시의 거리를 지나면서 건물과 그 주변을 해석하는 작가의 문장을 얹어보았다.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는 한결 친숙해진 시선으로 건축물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20명의 건축가가 기획한 30개의 건축물을 소개하는 책이다. 몇몇 건축물은 작가의 전작에서 소개된 건축이라 익숙한 모습에 반가움이 앞선다. 그가 이 책에 수록할 건축물을 선택한 기준은 명확하다. 창의성이 담겨있는지 여부이다. 작가는 새로운 생각을 보여주는 건축물에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유현준의 관점을 따라 그와 시선을 일치시키고 소개된 건축물을 바라본다. 도슨트의 안내를 받아 미술관의 작품을 관람하듯 건축물에 담긴 창작자의 향기를 보다 깊이 들이마신다.

창작물에는 의도가 담겨있기에 창작물을 통해 인간을 알 수 있다. 마야 유적을 보며 고대인들의 문화를 가늠하듯 인공물은 창작자와 그가 담고자 하는 인간을 대변한다. 건축물은 건축가의 의도를 만나 유일한 정체성을 지닌 대상으로 탄생한다. 인간을 감싸 안는 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은 건축물과 공명하며 삶을 이어간다.

 

무심코 지나치던 건축물들을 떠올린다. 건축에 담긴 예술성이 이제야 조금씩 보인다. 책 안에 소개된 건축물들은 여행의 이유로 삼아도 될 만큼 흥미롭다. <인문 건축 기행>이라는 책 제목에 걸맞게 책의 구성은 여행 맞춤형이다. 건축물을 테마로 하는 여행안내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리라 여기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건축물이 세워진 장소별로 구성된 목차이다. 작가는 유럽, 북아메리카, 아시아 등 크게 세 군데의 대륙으로 구분하여 해당 건축물을 소개한다. 둘째, 여행지를 소개하듯 대륙별 지도에 각 건축물의 위치를 표시한다. 전체적인 여행 코스를 계획하기 편하게 만들어 준다. 셋째, 각 장의 마지막 부분에 건축 연도, 건축가, 위치, 주소, 운영 시간, 휴관일 등 개관을 소개하여 세부적인 시간 계획의 수립을 돕는다. 넷째, 각 장의 도입 부분에 그려진 건축물 일러스트와 중간중간의 평면도, 단면도, 조감도 등 도면으로 건축물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 집의 평면도를 그리는 과제를 했던 적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방학 숙제였던 '탐구 생활'이라는 책자 안에 있던 과제다. 창문, 미닫이문, 여닫이문 등 간단한 건축 기호가 나오는 내용이었다. 대문 열고 들어가면 주택 오른쪽에는 주인집이 살았다. 우리 집은 주택 왼쪽에 있는 방 하나, 그 옆에 붙은 부엌이 전부였다. 당시 나는 매우 간단하다며 웃는다. 날 일()자를 닮은 네모 하나만 그리면 되었으니까.

씻는 곳은 부엌문 옆에 있는 야외였으니 그리지 않는다. 수도꼭지 한 개는 초등학교 건축 기호에 없었다. 방에는 미닫이문과 창문 하나, 부엌에는 앞뒤로 여닫이문을 그려 넣는다. 부엌 뒷문을 열고 몇 걸음 걸어가면 화장실이 있다. 여기서 살짝 주춤한다. 주인집과 공용인데 이걸 넣어야 하나. 잠시 갈등하던 초딩. 우리도 사용하니까 퍼즐 판에서 튕겨져 나간 조각인 양 조금 떨어진 거리에 쪼끄만 네모와 여닫이문 하나를 그려 넣는다.

 

이사 다녔던 많은 집은 꽤 오랜 기간 내가 그렸던 평면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집은 그저 비바람이나 눈보라, 추위 등 자연 현상을 피하기 위해 존재하는 구조물 이상은 아니었다. 선사 시대의 움집이나 식물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처럼. 생존을 위한 목적에 예술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 삶 가까이에 머물던 건물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혼 이후 살던 집은 모두 아파트이고 직장 역시 학교이니 말이다. 평수가 비슷하면 우리 집이나 남의 집이나 구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학교 건물도 규모만 다르지 네모네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네모난 집에서 네모난 직장으로 양방향 화살표를 따라 살아온 셈이다. 이런 이유로 유현준 작가가 소개한 건축물들이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 걸까. 정형화된 모양에서 벗어난 다각형과 비정형화된 곡선의 향연은 홀로그램을 보는 듯 몽환적이었다.

 

그런 데서 삶이 가능할까. 마음 한구석 의구심을 품고 건축물을 들여다본다.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면서 건축물의 필요성을 동시에 충족하도록 건축 자재를 변형한다는 건 얼마나 세밀한 작업일까. 더군다나 모래로 만드는 두꺼비집처럼 공간을 비워야 하는 작업이니 말이다. 손을 쑥 빼도 허물어지지 않도록 이리저리 무게 중심을 맞춘다는 건 정교한 기술력을 필요로 하니 만만치 않은 일이리라.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를 현실 세계에 구현하는 건 어나더 레벨의 차원이다. 모형으로 시뮬레이션한다고 해도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변수는 무한에 가깝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한다는 건 얼마나 과감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가. 세상에 없던 공간을 만드는 일이니 작가의 말처럼 건축가는 발명가가 맞다.

 

새로운 공간이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세 가지 사회적 실험이 등장하는 인터넷 영상이 생각난다. '소셜 컨트롤'이라는 제목으로, 공간에 변형을 주어 사람들의 행동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일정 속도로 운전하면 노래가 흘러나오는 도로를 만들어 과속을 줄이고, 식욕을 억제하는 파란색으로 우아한 분위기의 식당을 꾸며 과식을 억제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비트박스 계단이다. 계단 양 끝에 센서를 달아 비트박스 소리가 나게 만든 결과, 계단 옆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든다. 기존의 피아노 계단은 여럿이 이용하면 음이 섞여 오히려 소음으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비트박스 계단은 여럿이 이용해도 주변 사람들까지 즐겁게 만들어 주며 자발적으로 여러 번 오르내리게 되니 건강과 즐거움을 모두 만족시키는 발상이다.

 

비슷한 맥락이리라.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건축물이 결국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도. 눈으로 사진을 찍으며 때로는 감탄하고, 뭉클한 마음으로 새로운 시도의 결과물을 구경했다.

건축 재료의 변화로 디자인의 변화를 시도하거나 재료 자체의 성질을 이용한 건축, 중력을 이겨야 한다는 건축의 본질을 보여준 건축, 기하학을 잘 사용한 건축, 권위를 깨는 비대칭 공간으로 사람을 자연스럽게 품어주는 성당, 주변 환경과 빛을 잘 이용한 종교 건축, 화목하게 어우러져 살 수 있는 복층 세대, 정치 이념을 구조로 보여준 국회의사당, 자연과 협업하며 대화의 상대로 이용한 건축, 파격적인 상상을 현재 기술을 이용해 실현하는 방법을 개척한 건축, 고정 관념을 깬 미술관, 제약으로 발생한 문제 해결의 답을 디자인으로 바꾼 건축, 땅의 특징에 적합한 맞춤형 건축, 주변의 좋지 않은 에너지까지 전환하는 건축 등이 빛처럼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수많은 건축물을 보면서 나를 품었던 공간을 떠올린다. 몇몇 집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househome을 번갈아 가며 들락거리던 기억이 난다. househome의 차이점을 들어보았는가. 전자는 물리적인 구조물을 의미한다. 후자는 보다 더 확장된 개념으로 감정적인 요소까지 포함한다고 한다.

단칸방에 살던 시절, 여름과 겨울을 고스란히 받아냈지만 종종 떠올리면 그리움이 묻은 미소가 지어지는 걸 보면 그때의 공간은 home이었다. 결혼 후, 방이 세 칸이나 되었어도 무거운 심장으로 오갔던 시간들이 머문 공간은 house였으리라.

주어진 상황에서 공간을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물건 버리기와 정리하기.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면서 서서히 물건을 버리기 시작했다. 정리를 시도하니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이 글을 쓰는 스터디 카페에서 집을 떠올리면 마음에 안정감이 드는 걸 보면 나는 분명 home에 거주하는 자다.

 

집을 소유한다는 건 집이 감싸고 있는 공간에 대한 사용권을 얻는 것과 다름 아니다. 어느 공간이든 마음대로 마음을 누일 수 있는 장소에 나의 시간을 누이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만의 공간을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예술이 깃든 건축의 관점에서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전문가로서 소신을 가지고 스스로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해 나가는 저자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언젠가 공간의 아름다움이 뿜어내는 빛을 눈으로 받아들이는 날이 올까. 작가 유현준의 시선에 빙의해서 건축물을 바라보다 나만의 시각으로 공간과 건축물의 조화를 해석하는 어느 일상이. 그런 날을 기록하는 나의 글은 입체 카드인 양 생생한 건축물을 닮아있을까.

 

 

p487, 주석 5: 직사각형이 고 ~이고

p488, 3째 줄: 계 단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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