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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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절로 살아지는 거라 생각했다. 저절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처럼 늘 같은 속도로 나아갈 수 있는, 어릴 적 나에게 삶이란 당연한 것이었다. 나이의 배터리가 점점 충전되면서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았다. 걸음을 떼기 힘들던 때도 겪었고, 주저앉아 엉엉 울던 순간도 지나왔다. 늘 산책 같은 걸음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건조하고 재미없는 이미지로 남아있던 동화이다. 삶의 묵직한 의미를 향해 눈길조차 가지 않던 때였으니. 딱 한 번 읽고 책꽂이에 꽂혔다. 천사의 등장과 구두 정도만 토막토막 기억에 남아있던, 밋밋한 맛을 내던 책이다. 구두를 어떻게 했는지 내용조차 희미했다.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는 것은 더군다나 생각지 못할 영역이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이 책은 어떤 의미를 안겨줄까. 제목 자체로 느껴지는 무게감이 어릴 때와 달랐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걸까. 인간의 본성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세 가지 질문이 담겨 있다. 천사 미하일에게 하느님이 던진 질문은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다.(p58~60)’

지금은 21세기이고, 이 작품은 1881년에 쓰였으니 시대에 맞지 않는 이상향 같은 이야기라 여겼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하며. 그러다 며칠 전에 인터넷을 검색하다 가슴 찡해지는 뉴스를 알았다. 서울에서 중고 컴퓨터 장사를 하는 아저씨 부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부모님이 시골에 계셔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의 집에 컴퓨터를 설치하러 갔다고 한다. 설치가 끝난 아저씨는 돌아가는 길에 학원을 가야할 아이를 차에 태워주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아이가 갑자기 차에서 내려달라고 떼를 쓰더란다. 차에서 바삐 내린 아이는 황급히 근처 건물로 뛰어가더라고. 고개를 갸웃하고 옆 좌석을 보니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 첫 생리였던 거다. 아저씨는 바로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어찌 해야 할지를 의논한다. 필요한 용품을 바삐 챙겨온 부인은 인근 화장실로 들어갔고 나오기 전에 문자로 남편에게 꽃다발을 사오라고 한다. 원래 첫 생리 때에는 아빠가 축하를 해주는 것인데 아이의 아빠는 시골에 있었으니 대신 축하를 해주려는 것이었다. 아이를 할머니에게 데려다준 부부는 컴퓨터 설치비를 더 받았다며 10만원까지 돌려주고 축하의 꽃다발도 건네주었다고. 그 얘기를 전해들은 아이 어머니는 컴퓨터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내내 울기만 했다는 일화이다.

화조차 나지 않는 황당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시멘트 바닥 사이로 생명력을 뿜어내는 자그마한 민들레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사랑이 남아있기나 한 거야 싶다가도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인간의 본성에는 사랑이 있는 걸까 생각하게 된다. 그 옛날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인류로부터 끊임없이 전해져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행동으로 전해지는 그 짠한 느낌말이다. 인간의 DNA안에는 사랑이라는 유전자도 들어있는 걸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표제작 외에도 몇몇 단편이 실려 있다. 출판사마다 단편의 구성이 다른데 <책만드는집>에서 펴낸 책에는 세 편의 작품이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바보 이반>이다. 한 번씩은 다 읽어보았던 작품들이지만 이번에는 뒤의 두 작품에 눈길이 갔다. 두 작품 모두에서는 인간의 욕심이 배경처럼 흐른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마지막 문장이 남기는 여운은 크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정확히 2미터 가량밖에 되지 않았다.(p96)’ 결국 죽음의 순간에 차지할 수 있는 땅이라고는 자신이 묻힐 공간뿐이건만. 땅을 어떻게 사고 팔 수가 있느냐며 아메리카 원주민이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인간의 일생을 영화 필름에 담아 빠른 속도로 돌리면 그 땅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뿐인, 땅을 소유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욕심인 것을. 지구가 탄생한 이래로 땅은 원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인데 그 위에 사는 인간들이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일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소설에서는 땅에 대한 욕심을 묘사하고 있지만, 돈이나 다른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인간의 무모한 욕심은 한계가 있는 걸까.

그 순간 머릿속에는 칼 샌드버그의 시구만 맴돌았다. 사람에게서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 정도 되는 철이 전부라는.(p25)’너무 시끄러운 고독(보후밀 흐라발, 문학동네, 2016.)에 나오는 문장이다. 미국의 생화학자 돌프 M. 바인더 역시 사람의 값어치를 물질적으로 계산하였다. 새 장 한 개 청소할 수 있을 정도의 석회, 장난감 대포 한 방을 쏠 수 있을 만큼의 칼륨, 약 한 봉지 정도의 마그네슘, 성냥 2200개비를 만들 정도의 인, 못 한 개 정도의 철, 설탕 한 컵 분량, 세숫비누 5장을 만들 수 있는 지방이라나. 물질적으로 환산한 사람의 가치는 이 정도로 보잘 것 없는데.

냉장고가 만들어지면서 인간의 욕심은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어차피 내버려두면 썩을 음식이므로 옛날에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먹을 만큼만 남겨두고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배부른 사자는 주변에 먹잇감이 지나가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어차피 잡아봤자 먹지 못하므로 먹잇감을 잡느라 힘을 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간만이 수용할 수 있는 양 이상으로 욕심을 부린다고.

<바보 이반> 에도 욕심에 사로잡혀있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금화를 놀잇감으로 여기고 거들떠보지 않는 이반과 그 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번번이 이반을 골탕 먹이는 일에 실패하는 도깨비들을 보면서, 머리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진짜 바보가 누구인가 헷갈리게 된다.

무소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는다는 것. 옷장을 휘 둘러본다. 매번 옷을 입을 때마다 입을만한 옷이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 나. 구멍 날 때까지 옷을 입기로 하고 더 이상 옷을 사지 않으리라 결심해도 예쁜 옷을 보면 슬그머니 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냉철하게 생각하면 결국 한 번에 한 벌 밖에 입지 못하는 것을 한 번에 열 벌이라도 입을 것처럼 번번이 욕심이 나는 걸 보면 아직 멀었다 싶다.

 

세월이 지나도 울림을 주고 화두를 던져주는 고전의 힘 앞에서 겸손해진다. 인간이란 각각 다르지만, 아주 깊은 심해로 파고 들어가면 결국 공통된 무엇을 담고 있는 존재 같기도 하다. 사랑이거나 혹은 욕심이거나, 수많은 작가들이 수많은 글을 통해 말하고 있는 다른 그 무엇이거나. 표층 해수의 온도는 깊이에 따라 다르지만, 심해는 거의 동일한 온도가 유지된다. 인간의 본성에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묵직하게 자리하는 공통적인 빛깔의 그 무엇이 있는 걸까. 몇 백 년 전의 톨스토이가 2018년을 살아가는 내 마음에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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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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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를 그릴 때마다 원점에 주목한다. 가로축의 값이 0일 때 세로축도 0이 되는가. 원점에서 출발하는 그래프도 있지만 애매하게 시작하는 것도 다수이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지점에선가 제로 상태에서 시작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운동하고 있는 물체의 운동을 분석하려면 그래프는 중간부터 그려질 수밖에 없다.

등속직선운동의 그래프를 그릴 때면 웃음이 나온다. 시간-속력 그래프 때문이다. 일정한 속력으로 운동하는 상황이니 그래프는 가로축과 나란한 모양이다. 이 때 원점에서는 순간 이동하듯 뜬금없이 특정 속력을 나타내는 점을 찍어야 한다. 정지 상태에서 운동 상태로 변화하는 과정은 깔끔하게 편집된다. 그 구간은 등속이 아니니까. 그래프를 설명할 때마다 단서를 붙인다. 어쨌든 출발해서 이미 등속 운동하는 물체의 어느 한 장면을 분석한 것이라고.

소설 쓰는 행위가 다양한 그래프를 그리는 과정이라면 원점을 시작하는 포인트는 작가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어디부터를 출발 지점으로 정해 삶의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는 그리는 사람의 몫이니까. 입체적인 삶의 장면을 그래프로 단순화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지만 바라보는 시각에서의 장면은 어차피 평면이니. 우리는 평면으로 이루어진 장면 장면을 모자이크로 짜깁기한 모습을 입체로 상상할 뿐이다.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수많은 사진들을 모아서 세계 지도를 완성하는 과정처럼.

 

40편의 짧은 소설을 접하면서 2차원 그래프를 떠올린다. 입체적으로 완성된 깔끔한 모습 이전의, 짜깁기하기 전의 초판본을 본 느낌이랄까. 아이돌을 향한 오십대 아저씨의 팬심, 취업을 못한 청년들이 짊어진 일상의 무게, 기혼 여성의 삶과 공간, 자살을 결심한 사내, SNS 안에 투영된 모습과 현실과의 괴리, 반려 동물의 의미, 가족의 상실로 인한 아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삶에서의 착각, 가장의 역할이 주는 묵직함, 아파트 주민의 이기심, 귀농에의 무모한 도전, 폐교되는 시골 학교, 사회적 강자에 대한 상대적인 비애감, 한국 사회의 자화상 등을 통해 주변의 평범한 삶을 짤막하게 그려냈다. 소설 속 이야기들은 다양하지만 굵직한 테마는 두 가지 정도로 가닥이 잡힌다. 가족과 직업이다.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가 그려진 소설들 중 부모님에 관한 것은 특히 자식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당신들도 부모님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부모님께 어떻게 하고 있나, 늦기 전에 더욱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중간 중간에 밀려오는 찡함 위에 얹는다.

직업과 관련된 소설들은 직업을 얻기 위한 청년들의 간절함과 직업을 가졌다 해도 그 고달픔이 자아내는 갈등과 사회적인 장벽을 현실감 있게 그린다. 뉴스에서 종종 접하던 사연들이기에 소설인지 다큐인지 혼동이 될 만큼 씁쓸하다. ‘어찌된 게 이놈의 나라는 한번 눈높이를 낮추면 영원히 그 눈높이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중략) 내 땀과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의 땀의 무게가 다른 나라.(p26)’는 먼 나라 이웃 나라가 아니라 바로 내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대학 졸업을 반 학기 남겨둔 딸의 일상은 요즘 숨 막히도록 바쁘다. 학원에서 토익과 오픽 준비를 하느라 근 9시간을 영어 공부에 매달린다. 오늘 오후에는 면접용 정장을 사러 함께 옷 가게에 다녀왔다. 구멍 날 때까지 옷을 입으리라 결심한 엄마의 옷장에는 정장 비스무리한 것도 없기에. 50%, 80% 할인된 가격이 그 가격이라니! 이거 할인된 가격인가요? 몇 번이나 묻는다. 36만 원짜리 세트는 핏도 좋고 가볍지만 가격이 마음에 안 들고, 22만 원짜리는 가격은 마음에 들지만 다소 무거운 모양이다. 결국 36만 원짜리로 낙찰을 본다. 딸아이가 매장을 나오면서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에휴!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써야 한다니!” 옷이 문제가 아니라 치열한 취업의 문을 향해 걸어갈 딸내미를 생각하니 안쓰럽고 짠하다. 소설 속 인물의 갈등과 비애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한여름, 은행에서 볼 일을 본 후 문을 열고나올 때 확 끼얹어지는 열기처럼 현실이 피부에 직접 와 닿는 느낌이다.

 

웃음이 잔뜩 담긴 소설일 줄 알았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는 제목 역시 뚝 떼어놓고 볼 때에는 오리털 패딩의 모자 털처럼 가뿐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겉표지를 열고 들어가니 의미는 180도 달랐다.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과 땀에서 배우라는 말,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갔고, 결국은 지금 준수가 짓고 있는 저 표정, 그것이 평상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웬만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p26)’ 수많은 좌절과 삶에 대한 쓰라림으로 굳은살처럼 되어버린 표정이었다. 내 아이가 가까운 미래에 이런 표정을 짓게 될까봐 나는 이 문장이 무서웠다. 아무렇지 않은 듯 살다가 커다란 고통조차 감각할 수 없는 3도 화상을 입을까봐 두렵다.

책 표지의 그림이 <아파트먼트 세르파>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표지를 보는 것조차 편하지 않았다. 마음 아프지만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 배달원들의 엘리베이터 이용을 금지시키는 아파트 주민들의 이기심은  아파트에 사니까 아파트만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p143)’라는 답변으로 설명된다. 마음이 차갑고 높고 딱딱한 건물로 화석화되어버린 걸까.

 

소설들의 초반부를 읽을 때에는 뭐 이런 마무리가 있나 싶었다. 쭉 걸어가다 뜬금없이 낭떠러지에 도달한 기분, 도착 지점이 없는 듯해서 찜찜했다. 개운한 카타르시스도 없고 웃기다고 하기도 애매했고, 마냥 슬프지도 않았다. 최규석의 만화 울기엔 좀 애매한이 연상되었다. 그런데, 후반부의 한 문장을 읽는 순간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쩐지 자신이 원고지가 아닌 삶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네.(p211)’ 삶 자체가 애매한 대상이므로 그 단편을 담은 소설 역시 애매할 수밖에 없다. 깔끔한 마무리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삶은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주변 사람들을 통과한다. 그것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소설이란 삶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내어 옮기는 작업이니 시작도, 마무리도 어쩐지 어정쩡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소설가란 그가 생각한 시점을 원점으로 하여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중간 즈음에 그래프 그리기를 멈출 수밖에 없다. 다만 앞으로 그려질 누군가의 소설 속 그래프의 선은 보다 부드럽고 촉촉했으면 좋겠다. 낮은 곳에 있는 삶이 그대로 투영되는 소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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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진 옷장을 정리하며 - 힘들고 아픈 나를 위한 치유의 심리학
게오르크 피퍼 지음, 유영미 옮김 / 부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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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 불이 났다. 운동장으로 대피했다가 연기가 너무 많아지자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장 가까이에서 불을 접했던 기억이다. 불이 시작되었다는 화학실 쪽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얼떨결에 운동장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시뻘건 불꽃은 보이지도 않았다. 불이 나면 잿빛 연기가 엄청나게 많이 난다는 것을 그때 절감했다. 우리들을 대피시키시던 가정선생님의 얼굴도 생각난다. 임신하셔서 배가 많이 부르셨는데. 소방차가 뿌린 물은 생각보다 많아서 화재가 진압된 후 교실로 복귀하러 올라가던 언덕길에는 장마 진 것처럼 물이 콸콸 흘렀다.

몇 달 동안 중앙 현관의 안쪽 공간이 교무실이 되었고 교실이 불탄 이과 반 선배들은 강당에 조립식 칸막이를 치고 수업을 받았다. 64일이었다. 날짜가 잊히지 않는 것을 보면 머릿속에 강하게 새겨진 날이긴 한데 마음의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누구도 다치거나 죽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날의 기억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여겨왔던 일이 순식간에 닥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을 뿐이다.

 

비교적 가벼운 트라우마는 개에 대한 기억이다. 개를 키울 수 없는 이유는 개털이 날려서도, 목욕을 시키거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도 아니다. 무서워서다.

어릴 때 세 들어 살던 주인집에서는 개를 키웠다. 어느 날 개집과 건물 벽 사이에 개가 들어가 앉아있었다. 무언가를 먹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개를 쓰다듬고 싶었던 걸까. 어쨌든 나는 개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때 새끼손가락을 물렸다.

개를 무서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 후로는 아무리 앙증맞은 강아지라도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개만 보면 몸이 과도하게 소스라치는 반응을 보였다. ‘몸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늘 피드백을 해준다.(p27)’는 말이 맞았다. 몸이 개 때문에 놀랐던 기억을 끌어내고 먼저 반응했다.

몇 년 전에야 가까스로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친구가 머리와 다리를 붙들고 있는 동안 두어 번 만져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감촉에 놀랐다. 개에 대한 트라우마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머리를 쓰다듬어본 이후로는 두려움이 많이 줄었다.

 

트라우마라고 여길만한 기억은 중학교 3학년의 수요일 오후에 겪은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게 일어났던 일은 아주 많이 놀랐다는 것뿐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8년 가까이 묵직하게 가라앉아있다 때때로 나에게 작용했던 것 같다. 알약을 먹고 나서 한참 지난 후에야 약효가 퍼지는 것처럼 느리게 영향을 미치던 트라우마였다. 원인도 모른 채 특정 상황에 과민해지던 이유를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동네 초등학교 옆길을 지나치는데 차를 탄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학생! ***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지?” 친절하게 설명해드렸다. “잘 모르겠는데 잠깐 같이 타고 가면서 설명해줄 수 있을까?”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아저씨가 중간에 한 번 내려서 어딘가로 전화를 할 때에도, 인적이 드문 도심의 천변으로 갈 때까지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까지의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바보스럽게 컸다.

가는 장소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아저씨는 갑자기 차를 세웠다. 조수석의 의자를 뒤로 젖혔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지고 있던 검은색의 둥그런 보온 도시락 통을 품에 꼭 안았다. 아저씨는 내게서 그 도시락 통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게 방탄조끼라도 되는 듯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아저씨가 눈을 감으라고 화를 냈던 것 같은데 이 부분은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간 중간 암전이 되는 것처럼 기억이 조각나있기 때문이다. 눈앞 1cm 직전까지 다가왔던 아저씨의 얼굴만 선명하다.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왜 그러시느냐고 말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느 순간 아저씨가 행동을 멈추었다. 잠시 운전석에 앉아있더니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차 밖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다시 차 안으로 들어왔다. 한숨을 푹 쉬더니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눴던 얘기는 뜬금없게도 진로에 관한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문과를 택할지 이과를 택할지 고민이라며 아저씨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청주에 사는 24살의 문과를 택했다던 남자였다. 16세의 나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집에 갈 때까지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차에서 내리는 나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던 아저씨의 마지막 말이 기억난다.

심리적인 시간 감각이었던 걸까.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처음 차를 탔던 장소에서 내렸다. 집까지 어떻게 걸어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식구들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특별활동이 늦게 끝났다고 거짓말을 했다. 엄마의 음성이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높은 산에 올라간 것처럼 귀가 멍했다. 내 목소리가 TV 속 영화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윙윙 울렸다. 그날의 느낌은 몇 년 동안 종종 생생한 느낌으로 떠올랐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깨진 것은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몇 년 동안 느끼지 못하는 사이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에 대하여 과민 반응을 보였다. “너는 스스럼이 없는 것 같아도 어느 정도 가까워지려고 하면 벽이 느껴져.” 대학교 때 같은 과 남자애가 말했다.

커가면서 그것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인한 반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던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도. 내 자신이 순진하다 못해 얼마나 바보스러웠던 지도. 객관적으로 판단해보면 성폭행이나 인신매매나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던 일이었다. 그 때만 생각하면 종종 아찔했다. 어떤 의도로 나를 차에 태웠는지, 무엇이 그 아저씨의 행동을 멈추게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나를 멀쩡히 돌려보냈던 것을 보면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극적인 경험은 아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뻔한 일이었다. 몇 년 동안 계속되던 트라우마는 8년 쯤 지나 그날을 밖으로 꺼내어 가까운 이에게 털어놓은 이후부터 서서히 극복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가장 불신하던 남자라는 존재에게. 역시 사랑은 위대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일은 극복이 가능하다.(p120)’라 했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공감한다. 말로 표현을 하자 놀라울 정도로 무게감이 줄어들었다. 이제껏 미련하게 이 일을 왜 안고 힘들어했나 싶을 정도로 별거 아닌 일로 보여서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우리를 압박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상황은 근본적인 수용을 통해서만 제어가 가능하다. 그것을 통해서만 견딜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출구를 찾을 수 있다.(p90)’ 그날에 대한 말을 하면서 그 일을, 그 안에 있던 인물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객관적인 거리감이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길을 찾아갔던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회복 탄력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것은 생존에 대한 강한 본능에 속하는 영역인 걸까.

 

위기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준다. 평범한 일상에서 때때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직시한다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p283)’ 오랫동안 남자에 대한 불신과 스킨십에 대한 두려움으로 힘들었지만 그날의 트라우마는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가족을 못 볼 수도 있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자 그렇게도 춥던 집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곤충의 탈피가 일어나 듯 훌쩍 컸다. 가족이 소중해졌고 가난하지만 내가 살던 공간의 소중함도 깨달았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매순간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마지막 순간 나를 돌려보내주었던 20대 청년의 근본적인 양심을 생각하면 그래도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인 것 같기도 하고. 그 날 쏟아졌던 옷장은 이렇게 느리면서도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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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2-18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라우마에 대한 불쾌한 기억이 너무 많으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해요. 트라우마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감정 상태‘로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을 먼저 버려야해요.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대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나비종 2018-02-18 08:03   좋아요 0 | URL
독일 사람이 쓴 책이지만 실증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트라우마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극복 방법을 상세하게 적어놓았더라구요.
cyrus님께서 하신 말씀도 책에 있었습니다. 공감했던 내용이었구요.^^
 
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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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망설인다. 독후감을 쓰거나 시를 짓거나 일상을 산문으로 표현할 때마다 종종 갖게 되는 마음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빈 오선지로 흘러가는 시간 위에 나의 글을 한 편 두 편 음표로 그려 넣는 일이 어떤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걸까. 글쓰기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있을까.

 

활자화되어 회자되는 글이 아닌지라 내가 글을 잘 쓰는 건지, 인터넷 서재에 올린 나의 글을 읽는 소수의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받을까에 대한 궁금함이 늘 있다. 이 정도면 최악은 아니야, 나쁘지는 않아 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찡했다. ‘예술가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신의 작품을 참고 견디는 사람’(p143) 이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이. 전공과는 동떨어져 제대로 된 기본 형식도 갖추지 못한 글을 쓰고 있는 내게 이 책 안에 적힌 많은 문장들이 격려의 말을 건네주었다.

 

톡톡 튀는 김중혁만의 유머러스한 문장들이 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 감탄이 나오는 기발함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이 보다 의미 있게 다가온 것은 서툴게나마 나의 글을 쓰는 어깨를 따스한 안마로 토닥여주는 문장들 때문이었다. 마음 한 구석 가끔 지치는 나에게 계속 걸어가도 괜찮다며 속삭이는 듯한. ‘시간이 쌓이면 언젠가는 잘하게 될 테니’(p5) ‘세상에서 오직 나 혼자만 아는 이야기’(p60)리드미컬한 글’(p113)로 써보라고 한다. ‘특별할 필요가 없다. 오래 하다 보면 특별해진다.’(p286), ‘우리의 임무는 세상을 정리정돈 하는 게 아니다. 더 어지럽게, 더 헝클어뜨려서 더 많은 것들이 생겨나게 하는 것’(p188)이라며.

 

<Intro>에서 관찰의 중요성을 말한 저자의 생각에 공감한다. 리뷰를 쓰고, 시와 글을 쓰면서 나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관찰력이 길러진 점이었다. ‘남들과 똑같은 걸 보지만 결국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봐야 한다. (중략) 다른 곳에서 봐야 하고, 더 오래 봐야 하고, 더 많이 움직이며 봐야 한다. (중략) 너무 빨리 보지 않고, 천천히 봐야 이해할 수 있다.’(p10~11)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일상과 사물의 미세한 모습을 관찰했다.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대상을 관찰하니 현미경으로 플랑크톤을 들여다보듯 꿈틀거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조차 내지 못하는 존재를 관찰하니 망원경으로 은하수를 들여다보는 듯 숨 막히는 별들이 안개꽃처럼 펼쳐졌다. 세상은 좀 더 섬세했고, 무수히 많은 색채들로 채도를 달리하며 존재했다. 삶이 이전보다 풍성해졌다.

 

글을 쓰다 보니 내안에서 얼어붙은 화석으로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분리시키는 일이고, ‘나를 바라보는 나가 대화하는 일’(p136)이었다. 내가 쓴 글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현실을 껴안는 일’(p285)이었다. 글을 통해 현재의 나를 힘차게 껴안을 수 있었다. ‘글을 쓰는 일은 좌표를 찍는 일이랑 비슷하니까,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p23)이라는 말처럼, 글을 쓰면서 나의 삶에 선명한 점들을 찍어 나갔다. 부유하며 떠도는 듯 종종 방황하던 내게 그건 매우 의미 깊은 일이었다.

 

올해 목표 중 하나로 매일 글쓰기를 정했다. 오늘이 211일이니 42일째다. 정전기로 빗에 들어붙는 머리카락처럼 나태함이 슬금슬금 들러붙는 순간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일임을 느끼지만 아직까지는 11글이 지켜지고 있다. 매일 글을 쓰다 보니 삶이 촘촘해지고 때론 느슨해지고 말랑말랑해진다. 시나 산문이나 독후감이나 뭐를 쓰든 삶의 모습이 반영되어야 하기에 평범한 눈으로 모든 순간들을 무심코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글쓰기는 나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이 책을 읽고 힘을 얻는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책 제목은 무엇이든 쓰면 된다는 말을 담고 있다. 그래서 좀 더 씩씩하게 써보려 한다.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글을 올릴 때에는 지금처럼 엔터키 위에 있는 손가락이 차마 내려앉지 못하고 어정쩡한 대기 모드가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엔터키를 눌러보려 한다. 이렇게 쓰다 보면 어딘가로 갈 수 있겠지, 무엇이든 변화하겠지, 삶을 꼭꼭 씹다보면 무슨 맛이든 나겠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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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1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8-02-11 22:31   좋아요 1 | URL
피로 회복을 시켜주는 비타민 C 같은 책이었습니다.^^

cyrus 2018-02-12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쓰기를 ‘나‘를 제대로 보는 방식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이게 꼭 좋은 점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타인이 내 글을 어떻게 보는지 살피는 것도 중요해요. 타인이 내 글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도 나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타인이 내 글을 보지 않는다면 내가 타인의 글을 보면 됩니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기 위한 글쓰기‘에 지나치게 몰두해서 나 이외의 글을 외면할 수 있어요. 여기 북플에는 글 쓰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나를 바라보는 글‘을 쓰는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타인이 나를 바라보면서 쓴 글‘은 보지 않으려고 해요. 그 글이 자신을 향한 비난의 화살처럼 느껴지니까요.

나비종 2018-02-13 00:19   좋아요 1 | URL
나를 바라보는 글쓰기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거라 생각합니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면서 쓰는 글은 그보다 먼 거리와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구요. 이 때 타인의 글이 내게로 향한 비난으로 느껴지는 건 ‘다름‘과 ‘틀림‘에 대한 혼돈에서 비롯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다른 관점에서 그대의 옆 모습은 이렇습니다 얘기해주는 것일 뿐인데, 거울 속에서 정면만을 보아왔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습과 다른 말을 해주니 스스로 틀린 건가 생각하게 되는 거죠.
저는 다름을 틀림으로 자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기저에는 낮은 자존감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야가 좁아지고 마음이 쪼그라들어 나를 조금만 건드려도 움찔하며 쉽게 상처받기 때문이 아닌가 하구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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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만의 일타삼피로 포털 메인 화면까지 바뀌었다. 지구와 가까워져 14% 더 크게 30% 더 밝게 보이는 슈퍼문, 한 달에 뜨는 두 번째 보름달 블루문, 붉은 색으로 보이는 개기월식 블러드문. 2018131일 오늘밤 일어난다는 천문 현상이다. 수도꼭지의 냉수와 온수 표식처럼 블루와 블러드는 정반대의 색깔을 상징한다. 실질적으로 달은 붉은 빛으로 보이겠지만, 보이는 것과 상징하는 것이 합치되는 데다 커다랗고 밝기까지 하니 사뭇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지금 내 머릿속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잠시 웃는다. 정반대의 개념이 마구 들어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상황이랄까.

 

묘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커다란 양팔 저울이 머릿속에 들어앉은 기분이다. 정반대 개념들이 양쪽 접시에 가득 들어앉아 균형을 이룰만한 무게감으로 영점을 오락가락한다. 혼란이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평정심을 갖게 된 것도 아니다. 깊은 바다 속을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올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 들까? 해수는 깊이에 따른 수온 분포를 기준으로 혼합층, 수온약층, 심해층으로 나뉜다. 혼합층은 태양 복사 에너지의 영향으로 가장 온도가 높으면서 바람으로 인하여 물이 섞이기 때문에 수온이 일정하다. 중간에 있는 수온약층은 수온이 갑자기 도약하듯 낮아지는 층이며, 빛도 도달하지 않고 일정한 온도의 고요를 간직한 층이 심해층이다. 내 사유의 깊이는 지극히 얕은 혼합층이었는데, 수온약층을 지나 가장 묵직한 심해층을 마주하고 온 기분이다.

 

정반대의 출발은 책의 두께로부터 시작한다. 본문만 124, 옮긴이의 말까지 확장해도 고작 142쪽이다. 하루 정도면 가뿐히 읽을 줄 알았다. 그런데 첫 장부터 만만치 않다. 마지막 장을 덮는 데 일주일 걸렸다. 주인공을 따라 신화작인 인물들, 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 작가와 철학자, 이와 관련된 일화를 지나오면서 나의 삶이 좀 더 풍족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몰랐던 인물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이름을 알았다 해도 왜 이 시점에서 이 인물이 언급되었을까 궁금하여 검색을 하다 보니 더욱 걸음이 느려졌다. 글자를 읽은 시간보다 의미를 곱씹은 시간이 훨씬 길었다.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p7)’ 라 말했다는 괴테의 단 한 줄부터 몇 십 분이 걸렸다. 마음에 방점이 찍힌 부분은 흑점권리이다. 흑점을 지니는 것이 권리라니! 흑점에 의미를 부여하니 이토록 묵직할 수가 없는 거다. 강한 자기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 태양 중심으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열을 차단하여 상대적으로 주변보다 검게 보이는, 실제로는 4,500도의 온도를 지닌 뜨거운 방패이다. 삶의 뜨거운 어둠을 간직하려면 자신을 태워서 주변을 밝히는 태양 정도나 되어야 한다는 말로 해석했다.

 

제목 앞에서도 한참을 서성였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p18)’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가득한 상황을 묘사하는 이 문장을 보니 시끄럽다고 표현한 제목이 이해된다.

1인칭 시점에서 삼십오 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해온 한탸의 삶을 담담하게 그렸다. 처음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정반대의 개념이 겹쳐진 순간들을 수없이 만났다. 그 문턱마다 쉼표를 찍어가며 의미를 곱씹었다.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면서 파괴 행위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p23)’ 했을 때,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p12)’ 했을 때, ‘시궁창을 철벅이며 걷다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제껏 한 번도 보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이 불쑥 시야에 들어온다.(p38)’ 했을 때, 4장에서 예수를 미래로의 전진으로 노자를 근원으로의 후퇴로 비교했을 때,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근원으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미래로의 후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p70)’ 했을 때, 폐지 압축기를 작동시키는 녹색 버튼과 붉은색 버튼으로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면서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p44)’ 이라 했을 때, 6장에서 괴물 같은 거대 압축기를 작동시키면서 책을 함부로 대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무엇보다 그들이 낀 장갑에 나는 모욕을 느꼈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으니까.(p89)’ 라 했을 때.

 

종이로 된 책의 의미를 생각한다. 전자책보다는 종이 냄새가 나는 책을 좋아한다. 주인공처럼 종이의 감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종이의 근원을 생각하면 망설여지는 느낌이 있다. 종이는 나무를 재료로 만들어졌으니 종이책을 만들려면 그만큼 나무의 생명을 파괴해야 한다는 점이 생각나서이다. 자주 가는 커피숍 화장실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화장지 하루 한 장을 아끼면 일 년에 나무 한 그루를 살릴 수 있다는. 나무의 죽음으로 책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니, 먹이사슬처럼 여겨야 하는 걸까. 세상은 이렇게 정반대의 작용들로 채워져 있는 지도 모르겠다.

 

작가에게 삶의 의미는 어떠했을까. 마지막 8장에서 앞서 나온 정반대의 개념들이 중첩되는 결론을 발견한다. ‘전진이 곧 후퇴인 셈이지.(p119)’ 라 생각한 주인공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순간에 들고 있던 책은 의미가 깊다. 삶과 죽음의 일체를 말하며 과거 지향적인 예언자로 불리던, 낭만파를 가장 순수하게 표현했다는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의 책. 인터넷 자료로 그를 찾아보며 자연스레 주인공의 삶과 죽음을 떠올린다. 전진을 의미하는 녹색 버튼을 누르며 삼십오 년 동안 애착을 갖고 일하던 폐지 압축기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은 먹먹한 장엄함으로 물컹하다. 책 속에 등장하는 개념인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전진이다.

인간의 몸은 모래시계라는 생각이 든다. 위에 있던 것이 밑으로 가고 밑에 있던 것이 위로 가며, 두 개의 삼각형이 서로 통한다.(p124)’ 라는 말을 다시 음미한다. 모래시계를 계속 작동시키려면 손으로 직접 들어 방향을 바꾸어주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여 전진하거나 후퇴하듯이. 나는 이 모래시계라는 말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자리를 바꾸게 할 수 없을 것이다.(p131)’ 라 독백하며 인간의 탄생 직전, 자궁에서 웅크린 생명의 자세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순간은 죽음과 삶이 중첩되는, 지극한 불행인 동시에 지극한 행복이었을, 모래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프라하의 봄이후 이십여 년 간 출판이 금지되었어도 끝내 조국을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작품을 썼다는 작가. 책의 저작권에 대한 설명을 보니 1980년이다. 40여 년 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뭉클한 깊이감을 주다니! 고전의 가치가 이런 것이구나 싶다.

저자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한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려다 5층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주인공 한탸의 죽음이 다시 떠오른다. 작가의 죽음, 그것은 지극한 불행이었을까 지극한 행복이었을까. 문득 그의 죽음 역시 삶과 겹쳐지는 상황이라는 스친다. 자유를 상징하는 비둘기의 삶을 위해 죽음을 맞이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감히 지극한 행복이라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슈퍼 블루 블러드문. 내 일생에 다시 오지 않을 지도 모를 천문현상이 일어나는 날이다. 1월의 마지막 날, 삶과 죽음의 의미가 깊게 담긴 책에 대한 느낌을 정리한다는 사실이 뭉클하면서 묘하다. 다시 모래시계를 돌리며 출발하는 절묘한 순간이 시작되는 느낌이랄까. 이 얇은 책이 담고 있는 심해를 갓 빠져나와 새로 호흡하는 기분으로 달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p51 1째 줄,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난 셸링과 헤겔 셸링은 17751월에, 헤겔은 17708월에 태어났다던데...

p51 마지막 줄, 중성자와 양자 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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