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저절로 살아지는 거라 생각했다. 저절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처럼 늘 같은 속도로 나아갈 수 있는, 어릴 적 나에게 삶이란 당연한 것이었다. 나이의 배터리가 점점 충전되면서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았다. 걸음을 떼기 힘들던 때도 겪었고, 주저앉아 엉엉 울던 순간도 지나왔다. 늘 산책 같은 걸음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건조하고 재미없는 이미지로 남아있던 동화이다. 삶의 묵직한 의미를 향해 눈길조차 가지 않던 때였으니. 딱 한 번 읽고 책꽂이에 꽂혔다. 천사의 등장과 구두 정도만 토막토막 기억에 남아있던, 밋밋한 맛을 내던 책이다. 구두를 어떻게 했는지 내용조차 희미했다.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는 것은 더군다나 생각지 못할 영역이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이 책은 어떤 의미를 안겨줄까. 제목 자체로 느껴지는 무게감이 어릴 때와 달랐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걸까. 인간의 본성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세 가지 질문이 담겨 있다. 천사 미하일에게 하느님이 던진 질문은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다.(p58~60)’

지금은 21세기이고, 이 작품은 1881년에 쓰였으니 시대에 맞지 않는 이상향 같은 이야기라 여겼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하며. 그러다 며칠 전에 인터넷을 검색하다 가슴 찡해지는 뉴스를 알았다. 서울에서 중고 컴퓨터 장사를 하는 아저씨 부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부모님이 시골에 계셔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의 집에 컴퓨터를 설치하러 갔다고 한다. 설치가 끝난 아저씨는 돌아가는 길에 학원을 가야할 아이를 차에 태워주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아이가 갑자기 차에서 내려달라고 떼를 쓰더란다. 차에서 바삐 내린 아이는 황급히 근처 건물로 뛰어가더라고. 고개를 갸웃하고 옆 좌석을 보니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 첫 생리였던 거다. 아저씨는 바로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어찌 해야 할지를 의논한다. 필요한 용품을 바삐 챙겨온 부인은 인근 화장실로 들어갔고 나오기 전에 문자로 남편에게 꽃다발을 사오라고 한다. 원래 첫 생리 때에는 아빠가 축하를 해주는 것인데 아이의 아빠는 시골에 있었으니 대신 축하를 해주려는 것이었다. 아이를 할머니에게 데려다준 부부는 컴퓨터 설치비를 더 받았다며 10만원까지 돌려주고 축하의 꽃다발도 건네주었다고. 그 얘기를 전해들은 아이 어머니는 컴퓨터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내내 울기만 했다는 일화이다.

화조차 나지 않는 황당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시멘트 바닥 사이로 생명력을 뿜어내는 자그마한 민들레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사랑이 남아있기나 한 거야 싶다가도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인간의 본성에는 사랑이 있는 걸까 생각하게 된다. 그 옛날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인류로부터 끊임없이 전해져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행동으로 전해지는 그 짠한 느낌말이다. 인간의 DNA안에는 사랑이라는 유전자도 들어있는 걸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표제작 외에도 몇몇 단편이 실려 있다. 출판사마다 단편의 구성이 다른데 <책만드는집>에서 펴낸 책에는 세 편의 작품이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바보 이반>이다. 한 번씩은 다 읽어보았던 작품들이지만 이번에는 뒤의 두 작품에 눈길이 갔다. 두 작품 모두에서는 인간의 욕심이 배경처럼 흐른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마지막 문장이 남기는 여운은 크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정확히 2미터 가량밖에 되지 않았다.(p96)’ 결국 죽음의 순간에 차지할 수 있는 땅이라고는 자신이 묻힐 공간뿐이건만. 땅을 어떻게 사고 팔 수가 있느냐며 아메리카 원주민이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인간의 일생을 영화 필름에 담아 빠른 속도로 돌리면 그 땅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뿐인, 땅을 소유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욕심인 것을. 지구가 탄생한 이래로 땅은 원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인데 그 위에 사는 인간들이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일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소설에서는 땅에 대한 욕심을 묘사하고 있지만, 돈이나 다른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인간의 무모한 욕심은 한계가 있는 걸까.

그 순간 머릿속에는 칼 샌드버그의 시구만 맴돌았다. 사람에게서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 정도 되는 철이 전부라는.(p25)’너무 시끄러운 고독(보후밀 흐라발, 문학동네, 2016.)에 나오는 문장이다. 미국의 생화학자 돌프 M. 바인더 역시 사람의 값어치를 물질적으로 계산하였다. 새 장 한 개 청소할 수 있을 정도의 석회, 장난감 대포 한 방을 쏠 수 있을 만큼의 칼륨, 약 한 봉지 정도의 마그네슘, 성냥 2200개비를 만들 정도의 인, 못 한 개 정도의 철, 설탕 한 컵 분량, 세숫비누 5장을 만들 수 있는 지방이라나. 물질적으로 환산한 사람의 가치는 이 정도로 보잘 것 없는데.

냉장고가 만들어지면서 인간의 욕심은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어차피 내버려두면 썩을 음식이므로 옛날에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먹을 만큼만 남겨두고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배부른 사자는 주변에 먹잇감이 지나가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어차피 잡아봤자 먹지 못하므로 먹잇감을 잡느라 힘을 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간만이 수용할 수 있는 양 이상으로 욕심을 부린다고.

<바보 이반> 에도 욕심에 사로잡혀있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금화를 놀잇감으로 여기고 거들떠보지 않는 이반과 그 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번번이 이반을 골탕 먹이는 일에 실패하는 도깨비들을 보면서, 머리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진짜 바보가 누구인가 헷갈리게 된다.

무소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는다는 것. 옷장을 휘 둘러본다. 매번 옷을 입을 때마다 입을만한 옷이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 나. 구멍 날 때까지 옷을 입기로 하고 더 이상 옷을 사지 않으리라 결심해도 예쁜 옷을 보면 슬그머니 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냉철하게 생각하면 결국 한 번에 한 벌 밖에 입지 못하는 것을 한 번에 열 벌이라도 입을 것처럼 번번이 욕심이 나는 걸 보면 아직 멀었다 싶다.

 

세월이 지나도 울림을 주고 화두를 던져주는 고전의 힘 앞에서 겸손해진다. 인간이란 각각 다르지만, 아주 깊은 심해로 파고 들어가면 결국 공통된 무엇을 담고 있는 존재 같기도 하다. 사랑이거나 혹은 욕심이거나, 수많은 작가들이 수많은 글을 통해 말하고 있는 다른 그 무엇이거나. 표층 해수의 온도는 깊이에 따라 다르지만, 심해는 거의 동일한 온도가 유지된다. 인간의 본성에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묵직하게 자리하는 공통적인 빛깔의 그 무엇이 있는 걸까. 몇 백 년 전의 톨스토이가 2018년을 살아가는 내 마음에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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