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이 발발한지 2년 뒤 1941년 6월 히틀러의 독일군은 소련을 침공했다. 파죽지세로 진입해 들어가던 독일군은 그해 9월 레닌그라드 포위작전을 실행한다.

이미 대공포시기에 갖은 이유로 엮어 처형하고 총살하고 고문하고 수용소로 보내는 등 군 장성과 지휘관들을 솎아낸 스탈린에게 히틀러의 독일군은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적이었다. 스탈린은 전쟁 개시 초반에 모든 걸 포기했었다. 그때 스탈린을 제거할 수도 있었지만 각료들과 군은 그를 다시 불러내 앞에 세웠다.

이후 레닌그라드는 872일간 인구 250만명이 57만 5천명으로 줄어든 채 견뎌냈고 마침내 연합군과의 공조로 2차대전의 승전국의 도시가 됐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가 1917년 10월 혁명으로 노동자의 나라가 되자 이 도시는 페트로그라드가 되었다가 레닌 사후 그를 기리는 도시 레닌그라드가 되었다. 레닌의 꿈이 영영 무너진 후 소비에트에서 다시 러시아가 되자 이 도시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미하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바로 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줄리언 반스가 이미 썼듯이 그는 윤년을 특히 두려워했었던 모양이다

촉망받던 음악가였던 그는 스탈린이 장악한 나라에서 언제 죽음을 맞이할 지 모를 요주의 인사가 된다.

체포될 상황을 염두에 두고 간단한 짐을 담은 가방을 꾸려놓고 베란다에서 잠을 청했다지 않나.

간당간당한 삶을 이어가던 그에게 2차대전 발발은 구원이었을까? 자신이 살던 고향 레닌그라드가 적에게 포위당한 채 하루하루 옭아들어오는 공포 속에서 교향곡 7번, 일명 레닌그라드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탈출행렬에 나서 레닌그라드를 떠난 후 곡을 최종 완성하고 전쟁의 폐허속에 잠긴 조국과 고향을 위해 교향곡은 연주된다. 미국을 위시한 유럽에서도 그 곡은 전쟁의 비참함에서 인간이 되고자 한 인간들의 희망처럼 퍼져나갔고 결국 이 곡은 연합군의 연대를 강조하는 데도 역할을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어찌됐든 조국을 구하는 영웅의 역할을 떠맡았다.

 

그러나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서도 스탈린의 저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의 음악은 금지곡이 되었고 교수직에서도 쫓겨났다.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의 전쟁에서 승자는 쇼스타코비치였다. 스탈린은 1953년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레닌그라드가 포위당한 후 벌어진 참사는 인간의 조건이란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M.T. 앤더슨은 작가이며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현대사와 레닌그라드 포위상황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다만 이를 다루는 것과 쇼스타코비치를 다루는 데 있어 균형이 좀 어긋나 있다. 쇼스타코비치를 알기 위해서는 이책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줄리언반스의 소설에 나왔던가, .... 쇼스타코비치가 말년에 겪었다는 틱장애 같은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언급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들도 함께 들었다. 대충의 느낌, 분위기라도 알며 읽기 위해서. 

그렇잖아도 음알못인데 쇼스타코비치 음악에 대해서 다룬 대목들이 내게는 그다지 만족할만한 것이 아니어서 다른 책을 통해서 보충해야 한다.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또 한가지, 번역도 대체로 만족스럽긴 한데 걸리는 부분이 있다.

뭔 넘의 '일기작가'들이 그렇게 많나. 아마도 일기 자료들을 인용하며 쓴 말인 것 같은데 굳이 '작가'를 붙인 건 정말 일기작가라는 특정 작가들이 있는 것인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악보가 들어있는 마이크로칩을 조심스럽게 미국으로 옮기는 '배달원들'의 존재는?
자꾸 저 '배달원'이란 단어를 읽을 때마다 마이크로칩이 든 택배상자를 든 택배 아저씨를 떠올리게 되는 이 망극한 상황은 어쩌란 말인지. 그런 아주 사소한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흥미롭게 읽었다.

포위된 채 872일간 살아간 레닌그라드의 사람들 이야기가 워낙 강해서 다른 이야기들을 압도한다.

쇼스타코비치가 참여한 레닌그라드 교향곡 초연은 1942년 3월 볼쇼이 극장 오케스트라 연주로 쿠이비세프에서 열렸고, 이후 6월과 7월 영국과 미국에서 연주되어 라디오방송을 통해 세계시민들은 음악을 들었다. 정작 주인공인 도시 레닌그라드에서는 연주할 수 있는 음악가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가족 중에 굶어죽거나 병들어죽지 않은 이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듯 레닌그라드 라디오방송국 오케스트라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굶주리고 병약해져서 그들이 연주를 위해 다시 모였을 때 트럼펫 연주자는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폐에 힘이 들어가지 않네요."

 

 

 

1942년8월 9일 레닌그라드 라디오 방송국 오케스트라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 연주.

 

거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죽어도 시체를 옮겨 묻어줄 힘이 남아 있지 않던 사람들, 식인이 횡행하던 .. 말을 입에 담는 게 참담한 겨울을 보내고 음악을 듣기 위해 기꺼이 표를 구입했다.

M.T. 앤더슨의 [죽은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을 읽는 일은 바로 이 평범해보이는 사진에 담긴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 인간의 일을 읽는 일이다.

 

세상은, 현재는, 역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죽음 위에 세워져있다.

우리의 지금. 남북한이 다시 만나려고 하는 지금.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이들의 죽음이 있었나.

다시는 인간의 조건을 시험하게 되는 그런 상황에 처하는 그런 날을 만들지 않기를 .. 

러시아를 가본적이 없고 레닌그라드, 즉 상트페테르부르크도 가본적이 없는데, 레닌그라드를 알고난다면 그곳 거리 어느 한곳 회한없이 볼 수 있을까.

작년이 러시아10월 혁명 100주년, 올해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어쩐지 소설은 잘 안읽히고 역사서나 인물평전 들이 더 읽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올해 우리는 한국전쟁 종전의 해를 맞게 될 것인가. 1950~2018.

 

 

 

 

 

 

 

 

 

 

 

 

 

 

 

솔로몬 볼코프가 쓴 [증언 : 쇼스타코비치 회상록]에 대해 앤더슨은 신뢰하지 못한다고 밝힌다.

볼코프가 진짜로 쇼스타코비치의 회상을 받아적었다는 말을 믿을 수 없고 따라서 교차검증해서 크게 문제되지 않는 내용 정도만을 인용했다고 한다.

그러니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이나 다시 읽어야겠다. .

나의 능력은 정말 놀라워서, 작년에 분명 읽은 이책이 어쩜 이렇게 완전 처음 읽게 될 책같은지.

기억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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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을 계획을 잡고 있었는데 때마침 문학동네에서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김희숙 역)

범우사판으로 읽었던 때가 언제였던가. 언제나 그렇듯 거의 처음 본것처럼 읽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새번역본도 나왔겠다 아주 기분좋게 처음 읽는 것처럼.. 처음 읽는 거나 마찬가지처럼 독서할 수 있게 됐다.

'자유'란 개념이 이 소설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더 나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 전체와.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소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하루키는 음악과 책에 대한 나름의 생각과 평을 소설에 직접 써넣는데. 때로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단독글로도 손색없고(가령, [1Q84]에서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같은..), 때로는 단 한장면에서 맥락없이 생각났다는 듯이 끌어오기도 한다. 그게 또 그럴듯하게 어울리며 분위기나 주제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후자인데 [악령]의 키릴로프처럼 '자신이 자유롭다는사실을증명하기 위해 권총자살하는 남자'.

바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는 "자신이 신이나 통속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임을 증명하려고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는 인간이 많이 나'온다는.(2권 전이하는 메타포, 214~215)

'내'가 자유롭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일탈하기 전에 세상이, 현실이란 것 자체가 충분히 궤도를 벗어난 상태라서 '나'는 그 궤도를 벗어난 현실에서 오히려 제대로 있고 싶다. '나'까지 일탈하면 그야말로 수습이 불가능해진다.

하루키에게 [악령]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특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각별한 소설이라서 꼼꼼히 읽어봐야겠다.

스메르자코프. 하루키가 강하게 끌린 인물. '바로 이거'라는 느낌을 받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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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어야 했지만, 손에 쥔 건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사흘걸렸다. 내딴에는 열심히 읽었다. 이 소설을 2013년 여름에 읽었다. 그리고 페이퍼를 남겼다.

(http://blog.aladin.co.kr/mysty/6539608)

어설펐다.

 

하루키와 이시구로의 역사에 대한 생각을 비교해보고 싶어서 찾아 읽었던 책인데, [창백한 언덕 풍경][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우리가 고아였을 때] 등 전쟁과 관련된 작품들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남아있는나날]을 다시 읽으니 왜 하루키가 아니라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의 수상자가 됐는지 수긍하게 된다.

(하루키를 좋아한다지만 그가 노벨문학상을 탄다는건 상상이 잘 안된다. 이후 진짜 그가 늘 소망했던 '종합소설' 같은 작품이 나온다면 모를까.. 근데 그게 잘 상상이 안된다._)

예전에 읽을 때 알았을까? 이번에 다시 읽으니 기가막히게 구성을 잘 쓴 소설이었다. 1인칭 화자의 회상이라는 도구도 이만하면 정말 잘 쓰는 축에 속할 것이다.

소설이 전개될 수록 스티븐스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앞에 서술된 진술들이 바로바로 부정당하며 스티븐스가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이 밝혀진다.

그 절정이 예전 포스팅에서도 썼던 '아치 밑 자리'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스티븐스 클로즈업에서다.

아, 정말이지 그장면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다시 홀을 가로질러 아치 밑 내 자리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한 시간쯤 흐른 뒤 마침내 신사분들이 자리를 파할 때까지, 내가 자리를 떠야 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거기에 그렇게 서 있었던 시간이 지금까지 두고두고 내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처음에는 약간 울적한 기분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서 있는 사이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주 깊은 승리감이 내 마음속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이 감정을 어디까지 분석해 보았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오늘날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면 그다지 설명하기 힘든 것 같지는 않다. 그 때 나는 극도로 힘든 시간들을 거의 마무리한 직후였다. 그날 저녁 내내 '내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느라 애써야 했고, 게다가 내 부친도 자랑스러워하셨을 정도로 잘해 냈다. 그리고 홀 건너편, 내 시선이 머물고 있는 문 뒤, 방금 막 내 직무를 수행하고 나온 바로 그 방에는 유럽 최고의 실력자들이 우리 대륙의 운명을 논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그때 거기에 서서 그날 저녁의 사건들, 즉 그 시각까지 있었던 일들, 그리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되씹어 보자니,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성취했던 모든 것들의 요약 판인 양 느껴졌다. 그날 밤 나를 고무시켰던 그 승리감을 나로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p.282) 

 

 

그런데 마지막에 이시구로는 왜 스티븐스에게 독백을 하게 했을까.

물론 선창에서 만난 상대가 있었지만 급작스럽게 스티븐스는 그 남자에게 얘기하듯 꺼내지만 실은 한번도 하지 않았던 독백이자 고백을 한다. 전문가적 실존이 아니라 사적인 실존으로서. 집사라는 가면을 벗고 가면 밑의 배우 자신을 드러내면서.

달링턴 경에게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들을 모두 바쳤다고. 그래서 남은 게 별로 없다고 토로한다.

달리 방법이 없었을까...

이 고백과 체념. 그리고 새로운 각오. 새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한 '농담의 기술' 연마.

나는 마지막의 이 고백이 급작스러웠고 아쉬웠다. 다른 길은 없었을까.

스티븐스는 새로운 각오를 하지만 아마도 남은 게 별로 없는 그로서는 농담도 시원찮을 것이며, 최고의 집사였을 때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실수들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는 잘못된 선택을 했던 인물들이 나온다. 반성이나 후회없는 뻔뻔함이 있다.

최근에 하루키를 다시 보면서 느낀건데 생각보다 하루키의 상처랄까.. 내면의 어둠이 더 심한 듯하다.

그저 제스처만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보다는 역사로부터 얻은 내상이 깊은 편. 물론 그 내상을 소설에 어떻게 담아내느냐의 문제와는 별개로. 아마도 아버지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전쟁 당시 중국에서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게 느껴진다. 마치 하루키가 샐린저에게 느꼈던 것처럼.

 

하루키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전쟁소설'이라고 평했다.  하루키는 샐린저가 전쟁에서 받은 깊은 트라우마를 콜필드라는 젊은 분신에 의탁해 쓴 작품으로만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전쟁소설이라고 했다.

'전쟁의 트라우마는 곧 이노센스의 트라우마이다.' (2010년 인터뷰)

 

하루키가 내상을 입은 사람들. 자기에게도 들어앉아 있는 상처를 발견하는 내부로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에 담고 있다면 이시구로는 내상을 입은 줄도 모르는 사람들 또는 내상을 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끝내 드러내는 이야기를 하고있는 듯.

하루키에게 역사는  중국에서 상관(시스템으로 바꿔도 된다)이 내린 명령, 잘들지도 않는 칼로 사람의 목을 쳐야 했던 일을 겪고나서 돌아와 입다문채 살아가는 사람들로 상상할 수 있다면 이시구로는 그보다는 평범하다. 직접적인 행동이 아니라 동조하거나 그 길이 옳다고 믿었을 뿐인 사람들을 얘기한다. ........ (이시구로의 작품들을 좀더 봐야할 것 같다.) 

 

이시구로가 54년생이고 하루키가 49년생이다. 하루키가 고작 다섯살 더 많다. 난 어쩐지 세대가 다를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시구로가 젊은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런 비교가 얘기가 되는지 좀더 생각해봐야겠다.

너무 늦은 시각이다. 머리가 멈춘듯하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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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4-25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님의 이 페이퍼!
그런데 왜 노벨문학상이 이시구로는 되면서 하루키는 안 되는 건지
님의 생각을 더 알고 싶은데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종합소설...?
저도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탄다는 게 잘 상상이 안 가요.
그런데 그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죠.
기껏해야 너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노벨문학상의 전례를 보면
그런 작가에겐 잘 안 주잖아요.
그에 비하면 이시구로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매번 후보 지명이 되고 있다는 말이죠.
<해변의 카프카>가 이스라엘 문학상인지 뭔지 탓는데 그게 또 노벨상의 전초 격이라고 하더만요.
그런 걸 보면 건강하게 잘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받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ㅋ

포스트잇 2018-04-25 14:43   좋아요 1 | URL
네. 어려운 문제죠.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게 늘 쉽지 않은데,
앞으로 하루키 관련 페이퍼에 지적하신 주제들에 대해서 쓰려고 합니다.
하루키 소설은 늘 조금씩 아쉬움이 있어요. 종합소설은 하루키가 늘 쓰고 싶다고 하는 소설인데요, 19세기 소설, 특히 발자크 소설처럼 세속적인 전체 시대상이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소설을 지칭했습니다. 19세기 소설의 자기완결적 소설도 같은 맥락인것같고요. 하지만 하루키가 정말 이런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지, 정작 그의 소설들을 보면 아닌것 같거든요. ...
요즘 들어 부쩍 역사에 대해 발언을 하는 내용이 실제 하루키의 소설에 반영되는지 그것도 의심스럽고요.
이중 플레이를 하는거 아닌가 싶고, 그게 아니면 문학이란 직접적인 발언이 담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연구대상입니다. ^^



 

'맑은' 아침을 맞기가 요즘은 쉽지 않다.

매일 미세먼지 지수를 확인해야 하는 요즘 드디어 세상은 SF적 환경재앙이라는 클리셰를 떠올려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게 중국이라는 나라를 생각하면 딱히 SF에 최적화된 요소는 아니다. 그냥 산업화의 고도를 올려가는 거대 나라를 이웃으로 둔 지정학적 운명에 불과한 것일지도. 우리의 잘못도 많고. 급격히 SF에서 후진국(에코산업 면에서) 신파로 넘어가는 꼴이라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2010년에 신초샤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생각하는 사람》마쓰이에 마사시 편집장과 2박 3일에 걸쳐 나눈 인터뷰를 오늘 겨우 다 읽었다. 일주일을 붙잡고 있었다. 다른 책은 거의 읽지 못하는 형편.

문학동네 가을호(2010)에 번역되었던 건데 나오자마자 읽었었고 이번에 다시 읽은 것. [1Q84] 출간 후 가진 인터뷰.

굉장히 흥미로운 인터뷰. 예전에 읽을 때도 꽤나 흥미롭다고 여기며 읽었는데 새삼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다.

하루키에 대해서 많은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인터뷰다. 그 이후는 또다른 이만큼의 긴 인터뷰를 통해 하루키의 변화나 또는 변함없는 것들을 알게 해 주겠지. (작년에 가와카미 미에코와 한 인터뷰, [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도 속히 번역되어 나오길 기대해본다.)

 

 

 

 

[1Q84]는 조지오웰의 [1984]에서 나온 거지만 하루키의 단편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1983)의 아이디어를 팽창시켜 쓴 소설로 볼 수 있다.

인터뷰에서 밝힌 "1Q84의 세계는 원시적인 세계에 가까워.. 우리에게 낯익다고 생각하는 일을 여기저기서 바꿔 써나가는(패러프레즈) 세계라서.. 그런 세계에서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원초적 힘을 가져야" 한다. 사랑도 까다롭고 골치 아픈 사랑이 아니라(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사랑의 연대기>같은 세계의 사랑이 아니라) "그 근원에 있는 단순함을 전적으로 믿고 그것을 다치게 하려는 어떤 것에도 몸으로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진, 근육이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은 또 얼마나 흥미로운 말인가.

이 믿음이 [기사단장 죽이기]까지 이어지는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더 중요하고 흥미롭다고 여겨지는 말은 바로 이 뒤에 이어지는 

"그런 의미에서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1Q84]는 20세기 현대문학, 예를 들면 사르트르적인 것에 대한 나 나름의 대항명제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는 말.

흐흐흐흐흐흐흐 

 

1984년이 하루키에게 중요한 연도가 된 또는 서른여섯(삼십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의미있는 이유도 이 인터뷰에서 알 수 있다. 

개인, 시스템으로부터 도피하여 하나의 개체로 서고자 했던 싸움이 점점 역사, 사회, 시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아니면 하루키가 원하는 방법을 찾아냈는지, 하루키가 카포티나 셀린저, 카버 등을 논하며 썼던 용어 '스트럭쳐'를 갖게 됐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아주 아주 흥미로운 인터뷰였다.

 

조지 오웰의 [1984]도 나는 아직 완독을 못했다. 읽다가 중단한 이후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다시 읽어봐야 하고(이 역시 한번 읽었던 이후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도 읽어봐야 할 듯 싶고(이 책도 읽다가 중단된 상태고)

미국 현대소설에도 꽤나 관심깊게 읽던 하루키지만 코맥 매카시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국경 3부작도 읽고 싶고,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와 [1Q84]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주 출간 예정인 [발터 벤야민 평전]이 나오면 그것부터 읽을 계획이다.

발터 벤야민도 꼭 꼼꼼히 읽어보고 싶은 인물 중 하나였는데 곁다리만 계속 긁어오던 중이었는데 이번 평전을 계기로 이 사람도 어떤 사람인지 꼭 밝혀내겠다.

 

 

아, 그리고 하루키 때문에 읽어야 할 또다른 책 한권, 엘러리 퀸의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148페이지 읽는데 일주일 걸리는 속도로 이 책들을 다 읽으려면 몇 년 걸리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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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4-20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네요.
저도 1큐84는 1권만 완독한 상태인데 못 읽을 건 아닌데
왜 완독이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ㅠ

와, 그런데 하루키는 인터뷰를 하면 2박3일을 하는군요.
어디서 했을까요? 호텔? 아니면 자기 집?
그나저나 그 인터뷰 전문이 2010년 <문학동네>에 나왔다구요?
진작 좀 가르쳐주시지. 알았으면 샀을 텐데..ㅠㅋ

포스트잇 2018-04-20 20:47   좋아요 0 | URL
전 분명히 2010년 9월 9일자 포스팅에서 문학동네에 인터뷰나왔다고 썼답니다.^^

인터뷰 장소는 가나가와 현 아시가라시모군 하코네마치라고 아마 전통 료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코네신사 근처에 있는듯한데 고독한 미식가가 찾기도 한 유명지인 모양입니다.
전 1Q84를 재밌게 읽긴 했지만, 정작 조지오웰의 1984는 아직 읽지 못했네요ㅠ. 이번엔 기필코 읽어보려고요.. 필독서라는 소설들을 읽지 못하고 나이만 들었습니다..
 

근래들어 가장 충격적으로 오싹했던 장면. ... 무서운 오싹함이 아니라, 아니 일견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쩐지 가련하고 '슬픈' 무서움이랄까.

 

어느 봄 맑은 날.

아버지는 초등학생 또래의 아들을 앉혀놓고 일본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수더분한 아들은 다소곳이 앉아 그 마음이 어떨지 가늠하기 어려운 표정없는 얼굴로 책을 보고 있다.

열어놓은 마루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얇은 커텐을 살짝 건드려도 좋다.

무심히 고개들어 마루너머 봄꽃이 드문드문 핀 정원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한참을 말없이 그자세로 있다.

고요함에 아들 역시 고개를 들고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 밖을 바라보고 한낮의 침묵에 바람소리마저 들릴 듯하다.

아버지는 문득 젊은 날 징집되어 끌려갔던 중국의 한 도시 이야기를 꺼낸다.

와세다대학 국문학부 대학원 시절 징집되어 한창 전쟁중인 중국으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때 얘기를 들려준다.

아들의 표정없는 얼굴이 창백해지고 바람에 커튼이 높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어느 봄날 맑은 날 오후.

 

아들은 이날 아버지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슬펐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날 아버지가 해줬던 이야기가 아버지가 목격했던 일인지 아버지가 직접 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가만히 듣고 있던 네덜란드 출신의 아시아 연구가 이안 부루마에게 하루키는 "어쩌면 그게 원인이 돼서 지금도 중국요리를 못먹는지도 모르겠다"고도 말한다.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말투라기보다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듯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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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더 물어보지 그랬냐고 하자, 무라카미는 "묻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건 아버지에게도 마음의 상처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도 마음의 상처인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사이가 좋지 않다. 아이를 만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161)

 

하루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피 속에는 그의 경험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유전도 있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사놓고서는 읽지 않고 있던 히라노 요시노부의 [하루키, 하루키](2012)를 며칠전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중요한 책을 왜 읽지 않았는지 곁에 두고도 보석을 알아보지 못한 것과 같다.

일종의 현존하는 작가에 대한 평전이랄 수 있는데 '하루키 스스로 자신을 말하게 하다'는 원칙 하에 집필된 책이다.

2011년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 나온 하루키에 관한 모든 연구서, 하루키의 소설, 에세이, 대담, 인터뷰, 어딘가에 기재된 기사를 찾아내 구성했다. 하루키의 사생활이나 근거없는 소문 추측성 글에 대한 하루키측 태도가 워낙 강경하기도 해서 필화 비슷한 사건도 있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 덕분에 더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맛이 있었다. 물론 하루키 자신이 인터뷰나 기고글에서 한 말을 전적으로 믿어야 하는건 아니지만 어쨌든 하루키 자신이 말한 거니까 액면 그대로 혹은 배면에 있는 의도나 의미까지 읽는 건 독자의 몫인 것이다.

 

히라노 요시노부의 글을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하루키에대해 더 알게 됐다.

본격적인 연구서라기엔 분량에 아쉬움이 있어서 평점 별 네개를 줬다.

하루키가 밝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루키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점들이라 생각한다.

[태엽감는 새 연대기]

[1Q84]의 덴고 아버지.

[기사단장 죽이기]의 아마다 도모히코.

그림에 무엇을 남겼는지 끝내 말하지 않는다. '내'가 그림은 죽은자들을 위한 진혼이라고 풀이하지만 섣부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미 내부에서 무언가가 망가져버린 사람들.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구조'. 오쓰카 에이지는 하루키가 결국엔 '성숙하지 못한 남자들'에 대해 쓴다고 비판한다.

아니, 하루키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루키가 조지프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었든,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를 읽었든 하루키는 성장소설은 쓰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서른 여섯살의 남자. 하루키에게 1984년. 서른 다섯살(우리 나이로 서른여섯). 하루키의 남자들은 나이먹지 않고 자라지도 않을지도.

 

하루키는 아버지와 관련된 이 기억과 자신에게도 전해졌을지 모른 유전에 대해 앞으로 얼마나 더, 또 어떻게 다룰지 모르겠다. 더이상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이제 됐다고 여겨서일지 아니면 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여겨서일지, 어떤 길일까.

관찰하고, 기다리고, 쓴다. 하루키가 소설을 쓰는 방식.

 

가즈오 이시구로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도 생각해볼 일이다. 나는 왜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에 불쾌해했을까.

 

히라노 요시노부의 책을 읽으면서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의 <벌꿀파이>를 새삼 이해했다고 할까.

[기사단장 죽이기]는 또 <벌꿀파이>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건가. 하루키의 반복. 변주.

아직도 하루키에 대해 다 읽지 못했고 알지 못했구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백 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에 수록된 <5월의 해안선>도 새삼스럽게 읽었다.

 

5월에 개봉할 이창동 감독의 <버닝> 때문에 <헛간을 태우다>를 최근에 읽었다. 예전에 읽었는지 기억에 없다.

새삼 느낀 건, 하루키가 폭력에 관심이 참 많았었구나, 하는 생각.

변함없이 똑같은 하루 하루가 흐르지만

 

밤의 어둠속에서, 이따금 나는 불에 타 허물어지는 헛간을 생각한다.

 

          (『반딧불이』, <헛간을 태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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