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최근에야 읽었다.

이 소설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동명 영화로 먼저 접했고 그게 아주 오래전 일인데 지금까지도 인상깊었던 영화로 남아있다.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한 주인공 스티븐스는 문제적 캐릭터로 생각을 많이 하게 한 인물이었기에 오래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꼭 원작을 봐야한다고, 숙제처럼 내 마음속에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보리 할아버지, 미스 켄턴을 연기한 엠마 톰슨과 스티븐스의 앤소니 홉킨스 사이의 로맨스는 역시나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어요.

로맨스가 이루어지기에 스티븐스는 지나치게 (자신의 연정에 대해) 억압적이었다고 봐주길 기대했으려나? 

작품해설에서 김남주는 '억압'했다고 봤으나 나는 진짜로 무심했던 거 아닌가 싶은데.

 

아니, 스티븐스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계속해서 위대한 집사로서의 품위와 명예를 지켜온 삶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는 진술로 소설 전체를 본다면 무심해 보이는 진술 속에(화자는 스티븐스이니까) 실제 품었던 연정을 읽어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생했고 60년에 영국으로 이주했으니까 일본에서는 고작 6살까지만 살았다. 딱히 일본작가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영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내가 신기해한 건 영국 신사계급을 수발드는 삶을 살아온 늙은 집사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이었다.

영국에서 살아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의 삶이 투영될 수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흥미로운 점이다.

모시는 주인에 대한 충성, 집사로서의 임무를 완벽하게 해내는 삶.

물론 주인이 잘못된 인식과 판단하에 명예롭지 못한 일에 이용당했다고 해도(그것도 "세월이 입증"했다) 

"내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에게도 응분의 가책이나 수치를 느끼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맹목. 보려하지 않는 비겁함.

달링턴 경이 나치에 이용당하고 있던 날 밤, 스티븐스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황을 똑바로 인식하라고 말하는 젊은 기자 카디널을 물리치고 회동이 벌어지고 있는 방 밖 "아치 밑 내 자리로 돌아"가 서 있었던 장면은,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인 듯하다.

 

나는 다시 홀을 가로질러 아치 밑 내 자리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한 시간쯤 흐른 뒤 마침내 신사분들이 자리를 파할 때까지, 내가 자리를 떠야 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거기에 그렇게 서 있었던 시간이 지금까지 두고두고 내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처음에는 약간 울적한 기분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서 있는 사이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주 깊은 승리감이 내 마음속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이 감정을 어디까지 분석해 보았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오늘날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면 그다지 설명하기 힘든 것 같지는 않다. 그 때 나는 극도로 힘든 시간들을 거의 마무리한 직후였다. 그날 저녁 내내 '내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느라 애써야 했고, 게다가 내 부친도 자랑스러워하셨을 정도로 잘해 냈다. 그리고 홀 건너편, 내 시선이 머물고 있는 문 뒤, 방금 막 내 직무를 수행하고 나온 바로 그 방에는 유럽 최고의 실력자들이 우리 대륙의 운명을 논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그때 거기에 서서 그날 저녁의 사건들, 즉 그 시각까지 있었던 일들, 그리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되씹어 보자니,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성취했던 모든 것들의 요약 판인 양 느껴졌다. 그날 밤 나를 고무시켰던 그 승리감을 나로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p.282)

 

 

아, 씨바... 잘쓴다.

작가가 아마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장면 중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실제로 보지 못하는 자도 있고, 알면 괴로워지기 때문에 애써 외면하는 자도 있다. 그렇게들 산다.

정의를 세우는 것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무너지면 사회는 피폐해지며 그 피해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가장 심하게 받게 된다. 왜 그걸 모르는 걸까.

권은희 같은 사람의 소중함을 사회가 깨달아야 한다.

이명박 같은 이를 대통령으로 뽑으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하락했나. 지금 그토록 어렵게 가꿔온 민주적 상식이 어처구니 없이 모멸당하는 걸 보면 심상치 않다. 나는 위기를 느낀다.

 

 

 

 

 

 

 

 

 

 

 

 

 

 

 

 

영화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알라딘 10주년이라고? 그렇구나. 나는 아마 2004년에 시작하지 않았나? 손놓고 있다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신경썼던 것 같다.

돌아보면 알라딘을 시작하기 전에 나의 '화양연화'는 끝났다. 끝났기 때문에 알라딘을 시작했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3년까지가 그나마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늘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과 두려움, 불안을 안고 살았지만 지나서인가... 그마저도 아련할 뿐이다.

그러니 어쨌든 견디며 지나보내야 하는 것인지. 아련해지도록.

 

<일대종사>(왕가위 감독)를 보다가 양조위(엽문 역)의 내레이션에서 픽 웃었다.  

나이 40에 인생의 봄은 끝나버렸다는(정확히 기억안나지만 가장 인상적인 내레이션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은 40살로 끝난 것 같았다.

지금은 가을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겨울만 계속될 것이다. 

이후 삶은 ... 아직 대책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둠을 더 안온하게 느끼는걸까, 오히려?

마이클 코넬리의 [클로저]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숨을 고르게 된다.

 

보슈는 새벽은 황혼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벽은 항상 볼품없이 찾아왔다. 마치 태양이 뭔가 어설프고 서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에 황혼녘은 좀 더 자연스럽게 찾아왔고 달은 태양보다 인내심이 많았다.

인생이나 자연이나 항상 어둠이 더 오래가는 것 같았다.   (p.399)

 

어둠이 기다리고 있잖아.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어둠은 찾아온다고.  (p.448)  

 

 

 

 

 

 

 

 

 

 

 

 

 

 

아, 씨바...,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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