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들어 가장 충격적으로 오싹했던 장면. ... 무서운 오싹함이 아니라, 아니 일견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쩐지 가련하고 '슬픈' 무서움이랄까.

 

어느 봄 맑은 날.

아버지는 초등학생 또래의 아들을 앉혀놓고 일본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수더분한 아들은 다소곳이 앉아 그 마음이 어떨지 가늠하기 어려운 표정없는 얼굴로 책을 보고 있다.

열어놓은 마루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얇은 커텐을 살짝 건드려도 좋다.

무심히 고개들어 마루너머 봄꽃이 드문드문 핀 정원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한참을 말없이 그자세로 있다.

고요함에 아들 역시 고개를 들고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 밖을 바라보고 한낮의 침묵에 바람소리마저 들릴 듯하다.

아버지는 문득 젊은 날 징집되어 끌려갔던 중국의 한 도시 이야기를 꺼낸다.

와세다대학 국문학부 대학원 시절 징집되어 한창 전쟁중인 중국으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때 얘기를 들려준다.

아들의 표정없는 얼굴이 창백해지고 바람에 커튼이 높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어느 봄날 맑은 날 오후.

 

아들은 이날 아버지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슬펐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날 아버지가 해줬던 이야기가 아버지가 목격했던 일인지 아버지가 직접 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가만히 듣고 있던 네덜란드 출신의 아시아 연구가 이안 부루마에게 하루키는 "어쩌면 그게 원인이 돼서 지금도 중국요리를 못먹는지도 모르겠다"고도 말한다.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말투라기보다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듯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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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더 물어보지 그랬냐고 하자, 무라카미는 "묻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건 아버지에게도 마음의 상처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도 마음의 상처인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사이가 좋지 않다. 아이를 만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161)

 

하루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피 속에는 그의 경험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유전도 있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사놓고서는 읽지 않고 있던 히라노 요시노부의 [하루키, 하루키](2012)를 며칠전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중요한 책을 왜 읽지 않았는지 곁에 두고도 보석을 알아보지 못한 것과 같다.

일종의 현존하는 작가에 대한 평전이랄 수 있는데 '하루키 스스로 자신을 말하게 하다'는 원칙 하에 집필된 책이다.

2011년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 나온 하루키에 관한 모든 연구서, 하루키의 소설, 에세이, 대담, 인터뷰, 어딘가에 기재된 기사를 찾아내 구성했다. 하루키의 사생활이나 근거없는 소문 추측성 글에 대한 하루키측 태도가 워낙 강경하기도 해서 필화 비슷한 사건도 있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 덕분에 더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맛이 있었다. 물론 하루키 자신이 인터뷰나 기고글에서 한 말을 전적으로 믿어야 하는건 아니지만 어쨌든 하루키 자신이 말한 거니까 액면 그대로 혹은 배면에 있는 의도나 의미까지 읽는 건 독자의 몫인 것이다.

 

히라노 요시노부의 글을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하루키에대해 더 알게 됐다.

본격적인 연구서라기엔 분량에 아쉬움이 있어서 평점 별 네개를 줬다.

하루키가 밝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루키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점들이라 생각한다.

[태엽감는 새 연대기]

[1Q84]의 덴고 아버지.

[기사단장 죽이기]의 아마다 도모히코.

그림에 무엇을 남겼는지 끝내 말하지 않는다. '내'가 그림은 죽은자들을 위한 진혼이라고 풀이하지만 섣부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미 내부에서 무언가가 망가져버린 사람들.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구조'. 오쓰카 에이지는 하루키가 결국엔 '성숙하지 못한 남자들'에 대해 쓴다고 비판한다.

아니, 하루키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루키가 조지프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었든,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를 읽었든 하루키는 성장소설은 쓰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서른 여섯살의 남자. 하루키에게 1984년. 서른 다섯살(우리 나이로 서른여섯). 하루키의 남자들은 나이먹지 않고 자라지도 않을지도.

 

하루키는 아버지와 관련된 이 기억과 자신에게도 전해졌을지 모른 유전에 대해 앞으로 얼마나 더, 또 어떻게 다룰지 모르겠다. 더이상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이제 됐다고 여겨서일지 아니면 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여겨서일지, 어떤 길일까.

관찰하고, 기다리고, 쓴다. 하루키가 소설을 쓰는 방식.

 

가즈오 이시구로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도 생각해볼 일이다. 나는 왜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에 불쾌해했을까.

 

히라노 요시노부의 책을 읽으면서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의 <벌꿀파이>를 새삼 이해했다고 할까.

[기사단장 죽이기]는 또 <벌꿀파이>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건가. 하루키의 반복. 변주.

아직도 하루키에 대해 다 읽지 못했고 알지 못했구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백 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에 수록된 <5월의 해안선>도 새삼스럽게 읽었다.

 

5월에 개봉할 이창동 감독의 <버닝> 때문에 <헛간을 태우다>를 최근에 읽었다. 예전에 읽었는지 기억에 없다.

새삼 느낀 건, 하루키가 폭력에 관심이 참 많았었구나, 하는 생각.

변함없이 똑같은 하루 하루가 흐르지만

 

밤의 어둠속에서, 이따금 나는 불에 타 허물어지는 헛간을 생각한다.

 

          (『반딧불이』, <헛간을 태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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