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날개옷"
서평: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
, J.L. 곤잘레스 저, 이후정 역(컨콜디아사, 1991)
들어가면서
곤잘레스의 “세 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겪는 문제 상황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두 가지 점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고 본다. 첫째는 전통적인 자유주의/근본주의 또는 카톨릭/프로테스탄스 사이의 대립에 의한 혼란, 둘째는 전통적인 신학으로 대처할 수 없는 현대의 새로운 상황들이다. 그는 초대 교회에서 현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이외에 세 번째 다른 신학 유형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성서와 그 메시지를 다르게 읽을 수 있게 하고 오늘날의 혼란들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의미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p.24) 우선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후에 저자의 분석과 주장이 얼마만큼 설득력이 있는지, 또 저자의 의도는 성공적으로 성취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내용 요약
[제1부 세 가지 유형-그 고전적 정형(定型)]
곤잘레스는 제1부에서 2세기 말~ 3세기 초경에 기독교 교회에서 정통으로 여겨진 세 가지 주된 신학적 관점에 대해 설명한다.
[제1장 지역과 인물]에서는 각 유형이 형성된 지역과 중심인물의 측면에서 각 유형을 설명한다.
유형A는 로마화, 라틴화된 도시 카르타고에서 형성되었다. 대표적 인물은 라틴계 신학의 시조 터툴리안이다. 유형A 신학의 특징은 만유의 지배적인 질서인 자연법과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스토아 철학”과 우주의 궁즉적인 법인 계시, 곧 하나님의 법을 중시하는 “법률주의”를 통해 도덕적인 측면에 주된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선구자로는 로마의 클레멘트와 헤르마스, 제2클레멘트가 있다.
유형B는 가장 헬라적이고 다양한 철학적, 종교적 조류들이 혼합된 지적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에서 형성되었다. 대표적 인물인 오리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유형B 신학의 특징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감각세계 너머의 ‘불변의 일자’, 곧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영향을 준 선구자로는 필로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있다.
유형C는 안디옥을 중심으로한 소아시와 시리아에서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카르타고보다 덜 로마화되고 알렉산드리아보다 덜 헬라화되었으며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과 관련된 곳이었다. 대표자인 리용의 이레니우스를 통해 알 수 있는 유형C 신학의 특징은 목회적인 관심과 하나님의 미래로 인도되는 역사가 중심주제였던 점이다. 선구자로는 신약의 대부분과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데오빌로가 있다.
[제2장 하나님, 창조 및 원죄]에서 저자는 이단들과 이교의 도전과 박해 속에서 각 유형의 신학이 형성된 맥락을 살핀다. 이교의 다신론에 반대한 논쟁의 맥락과 영지주의와 마르시온 같은 이단 사상의 이원론이 물질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그리스도의 성육신, 몸의 부활 등의 신앙의 핵심을 위협하는 것을 막으려했던 의도와 그 방식들을 통해서 각 신학 유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형A의 터툴리안은 마르시온에 반대하여 신론과 창조론과 원죄에 대한 신학을 형성한다. 마르시온이 은혜를 강조하여 율법의 역할을 멸절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터툴리안은 재판관과 법제정자로서의 하나님, 모든 존재에 대한 완전하고 완료된 질서로서의 창조를 강조한다. 그리고 역사는 율법을 어긴 죄의 결과일 뿐이고 죄가 유전된다는 원죄관을 형성한다.
유형B의 오리겐은 플라톤 주의에 근거해 이교 다신론과 영지주의에 반대하는 신학을 형성한다. 그로인해 유형B신학에서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一者, 절대적 초월자이다. 그리고 오리겐에게서 창조는 원래의 영적인 창조와 타락에 의한 물질 창조의 이중창조였다. 죄는 一者에 대한 명상과 교통에서의 이탈이고 원죄는 둘째 창조에 의해 모든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죄인임을 의미했다.
유형C의 이레니우스는 아버지이시고 창조의 역사와 역사의 인도에 있어서 세상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이는 그의 관심이 실천적이고 목회적임을 보여준다. 그에게서 창조는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고 역사는 죄의 결과가 아니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과 더 가까운 교통으로 성장하게 하려던 신적 질서를 앞지른 불순종이고 원죄는 인간의 유대성 즉, 아담 안에서 모두가 범죄한 것을 의미했다.
[제3장 구원의 길]에서는 구원의 길과 목표를 세 유형이 각각의 방식으로 형성하는 것을 보여준다.
유형A의 터툴리안은 인간의 곤궁은 보상해야할 법적인 빚으로서 회개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회개의 새로운 법을 전해주는 율법수여자가 된다. 세례는 죄인을 씻는 행위로서 기독교 생활의 시작을 의미하고 그 효과는 의식에서 끝난다. 성찬은 세례의식에 충실하겠다는 결심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양분을 포함한다고 봤다. 최종적 완성은 하나님의 질서와 법이 회복된 나라이다.
유형B의 알렉산드리아적 관점에서 인간의 곤궁은 하나님을 명상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능은 一者의 관상으로 돌이키게 하는 조명을 제공하는 것이고 결국 세례와 성찬은 영적 실재를 상기시키는 상징의 역할을 한다. 오리겐에 의하면 최종적 회복은 모든 타락한 존재까지 포함하는 보편적인 것이고 다시 타락할 가능성이 남아있게 된다.
유형C의 이레니우스는 인간의 곤궁을 사탄에 종속된 것으로 본다.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중심인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 종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새창조의 몸의 지체로 연합시키는 것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 만드는 접붙임이고 삶 전체를 통해 유효하며, 성찬은 그 몸의 지체인 신자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수단이다. 인간의 최종 목표는 창조주를 닮아가는 神化이고, 최종적 완성은 모두가 주권자의 공동상속자가 되며 자유와 정의 및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계속 성장하게 될 나라이다.
[제4장 성경의 사용]에서는 이단과의 논쟁 속에서 형성되었던 세 유형의 성경관을 살펴본다.
유형A의 터툴리안은 이단들과의 논쟁에서 법률가의 방식으로 성경에 접근하는데, 이를 통해 드러나는 유형A신학에서의 성서의 기능은 기독교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예언과 신앙인이 지켜야할 도덕적 법칙과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유형B의 오리겐은 성경 본문이 문자적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면서 특히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해 궁극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지닌 철학적 교리의 체계를 찾는 것을 중시했다. 유형C의 이레니우스는 유형론적 해석으로써 성경에서 신적 경세(oikonomia) 즉,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성서적 계시의 빛에서 세계와 역사에 대한 전적인 비젼을 읽어낸다.
[제5장 관점의 문제]에서는 세 신학 유형을 형성된 사회, 경제적 상황과의 관계를 통해서 각 유형이 수용되거나 사라지게 된 맥락을 살펴본다.
유형B는 기독교 신앙과 헬라철학의 조화를 보여주려는 동기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신자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와 기독교 신앙이 멸시당하는 문제에 대해 변증함으로써 전도의 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상류계급의 욕구에 기독교를 적응시키는 길을 열었다. 유형A의 터툴리안은 기독교 신앙이 로마의 도덕적 성취와 조화될 수 있음을 변증하려 했다. 이는 기독교가 비도덕적이라는 유언비어에 대한 변증이되었지만 동시에 기독교가 현존하는 도덕적, 법적 질서의 지지 체계로 변할 수 있게 되었다.
유형C 신학의 소아시아와 안디옥 교회는 주변 사회로부터 배척당했고 사회 질서의 선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레니우스는 교회 밖을 향해 변증하지 않았고, 가장 비천한 자들의 神化와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나라를 강조했다. 정치,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이런 관점들로 인해 수세기 이후에 유형C 신학은 잊혀지게 되었다. 유형A가 법과 질서를, 유형B가 철학을 통해 Graeco-Roman사회에 적응하고 결국 권세있는 지식인 계층의 이익에 봉사하게 되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제2부 서구 신학의 경과]
곤잘레스는 제2부에서 각 유형의 신학이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시기까지 어떻게 변화되고 수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제6장 후기 교부신학: 어거스틴의 역할] 콘스탄틴 개종후에 제국과 교회가 서로 얽히게 되면서 유형A와 B는 지지되고, 권력과 조화되기 힘든 유형C신학에는 큰 압력이 가해졌다. 그것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인데, 그는 오리겐의 추종자로서 제국과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제국에 대립하는 기독교의 경향 때문이었던 박해를 단순히 제국 측의 오류로 평가하고 유형C신학의 종말론적 기대를 낮게 평가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부지불식간에 기독교 신앙을 권세있는 자들의 관점에 맞게 해석해온 전통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서방신학은 복음에 대한 다수의 유형B의 요소들을 유형A의 본질적인 것에로 병합시켰다. 이런 과정에 탁월할 역할을 한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신론, 영혼론, 악의 이해를 형성한다. 그러나 복음의 본성 및 구원받는 것의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기본적 견해를 보여주는 은총론과 예정론에서는 터툴리안의 유형A신학을 반영했다. 즉 구속에 있어서 은총의 우위와 우선성을 강조하고 여 구원이 빚의 탕감이라는 유형A의 근본적인 이해를 반영했다는 것이다. 이런 어거스틴의 신학은 중세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고, 그의 위계질서에 대한 이해와 지배자의 관점을 옹호하는 “정의로운 전쟁”과 같은 관점들은 교회가 법과 질서를 보전해야하는 요구에 적당한 것이었다. 이런 측면은 또한 법과 질서에 대한 유형A신학의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제7장 중세 신학] 어거스틴 이후 로마의 평화는 무너지고 교회가 사회 질서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법과 도덕을 강조하는 유형A신학이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로마의 감독 대그레고리 시대에는 지배적 신학이 되었다. 중세의 유형A신학적 경향은 참회제도와 죄의 보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개념에 잘 나타난다. 유형A의 주된 범주가 법과 도덕질서이기 때문에 죄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빚인데, 중세에는 이를 사면해주는 참회제도가 발전하게 되고 결국 연옥과 ‘공로의 보고’라는 교리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사역도 인류의 죄에 대한 대속적 보상의 십자가에 배타적으로 집중되고 결국 그리스도에 의한 유일한 구속교리가 서방 신학에서 통상적인 것이 되었다.
유형A신학이 중심이 된 중세의 흐름에 반대하는 서방신학자들은 주로 유형B의 관점에 의지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플라톤 철학 전통에 영향을 받은 요한 스코투스 에리게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전통에 영향을 받은 피터 아벨라드가 있다.
[제8장 종교개혁과 그 이후]에서 저자는 종교개혁 시기부터 20C 기독교 사상사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 각 유형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추적한다.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에는 유형C신학의 부분적 재발견이 있었으나 결국은 유형A신학이 중심이었다. 합리주의 전통은 유형B신학의 경향을 보이고 경건주의는 유형C의 요소를 지니지만 중심은 유형A의 영역이었다.
19C에 이르러 역사 개념이 발전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유형B 신학의 성향을 지닌 자유주의 신학을 선택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근본주의과 카톨릭 교회의 반응은 유형A신학의 재긍정이었다. 20C에는 뛰어난 신학자들-폴 틸리히나 루돌프 불트만 등-에게서 유형B의 새로운 판이 나타났다. 이처럼 20C는 유형A와 유형B신학 양자의 연속과 부흥의 과정이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과정은 과거에 있었던 유사한 논쟁들과 재연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제3부 현대적 의미]
저자는 3부에서 20C에 유형C신학이 다양한 방식으로 회복되는 재발견의 과정을 살펴본다.
[제9장 20세기의 유형C신학] 20C의 기독교인들은 보편적인 교회의 성장, 제국과 문명의 지지를 받았던 콘스탄틴 시대가 지나간 변화, 북반구의 백인중심의 비젼의 실패라는 세 가지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현대신학의 조류가 유형 C의 재발견을 통해 형성된다. 바르트, 디트리히트 본회퍼, 판넨베르그, 몰트만 등의 신학자들을 통해서 역사가 다시 개혁신학의 중심에 위치하고 유형C신학의 재긍정을 보여주었다. 유형C의 재발견은 스웨덴 루터파 전통인 룬트신학에서도 나타났다.
카톨릭에서도 떼이야르 샤르뎅, 칼 라너 등이 그런 재발견을 보여주었고 바티칸 제2공의회는 다양한 방식을 허용함으로써 유형C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런 흐름이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 자극제가 되었다. 해방신학은 역사의 중심성, 해방자 그리스도, 성서에 대한 유형론적 해석 등 유형C신학의 다른 관점들을 재발견해냈다.
이런 재발견들은 전례(예배, 예전)의 갱신을 통해서 교회의 실천적 영역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세례에는 죄와 악에 대한 거부의 의미가 포함되었고, 성찬도 그리스도의 수난만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축하의 의미가 포함되었다. 이런 경향은 유형C신학의 관점으로 돌이켜진 것이다.
곤잘레스는 이런 유형C의 재발견이 불일치와 분열을 낳을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유형C신학이 기독교가 직면한 현대의 문제상황에 도움을 줄 것이기에 21C는 인류가 정의와 평화의 주된 논제들과 씨름하면서 유형C신학이 충분히 재발견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나가는 글; 되찾은 날개옷, 입을 때와 벗을 때
살펴본 바와 같이 저자는 기독교 사상사의 복잡한 흐름들을 세 패턴의 신학으로 유형화하고 그 중에 유형C 신학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기독교 역사는 복잡하고 무질서하게 뒤엉킨 듯 보이기 쉽다. 그러나 저자의 이런 유형화는 기독교 역사의 심연 깊이 감춰져있던 거대한 사상의 흐름들을 엮어내는 대가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그는 근본주의 혹은 정통주의의 원류인 유형A신학과 자유주의의 원류인 유형B신학이 현대의 새로운 문제 상황에 적절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고 본다. 그리고 오히려 잊혀졌던 유형C신학-목회적이고 역사적이며 해방을 통해 새 인간과 새 나라의 비젼을 지녔던 초대 교회의 또다른 신학유형-이 새로운 대안이라는 것이다. 마치 선녀가 잃어버린 날개옷 이야기처럼 전통의 옷을 벗고 그 날개옷-유형C신학-으로 갈아입을 때 현대의 문제라는 높은 벽을 날아올라 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끝없는 대화를 통해서 미래를 그려보는 해석이다. 이렇게 볼 때 저자의 해석은 무엇보다 현재 한국 교회의 위기 상황과 미래을 향해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한국 개신교는 그 성장이 정체되고, 다른 종교나 비종교인으로 개신교를 이탈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종교이고, 사회적 신뢰도 역시 가장 낮은 종교로서 젊은 층이 급격히 감소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이런 위기는 한국 개신교가 급속한 사회변화에 휩쓸려 사사화(私事化)되면서 사회적 참여에 무관심하고 더욱 배타적이며 보수적인 신앙만을 강화해온 경향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1) 바로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해온 그런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은 곤잘레스가 말하는 유형A신학에 속한다.
곤잘레스의 세 유형의 관점은 한국 개신교 전통에서 현대의 위기를 초래한 중요한 원인인 정통주의 신학이 기독교 사상사를 통해 흘러온 세 흐름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폭로한다. 절대적인 신앙의 척도로 군림해온 정통주의 신학의 한계를 보여주고, 근본주의 혹은 정통주의, 자유주의 등의 다양한 관점 중에 어느 한 전통만을 절대시하는 우상화의 오류를 드러내준다. 그리고 유형A신학에 속하는 그 전통이 초대교회 전통의 유형C신학이 지녔던 해방과 승리의 복음, 사회를 향한 구체적 실천을 가져오는 역사적 관점 등을 상실하게 했다는 점도 폭로하고 있다. 또한 그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초대교회의 유형C신학의 전통을 회복해야할 급박한 필요성을 알려준다. 이런 면에서 현대적인 문제들에 대처하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세 유형이 모든 하나의 신학 유형으로써 어느 하나가 규범이 될 수 없다는 스스로의 관점을 유지하지 못했다. 저자가 세 유형으로 기독교 사상사를 유형화하는 과정에서 A와 B유형의 신학 자체가 뭔가 문제를 내포한 관점이거나 적어도 유형C신학보다는 부족한 관점으로 보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들은 자유주의든 근본주의든 현대의 혼란에 대처하는 데 큰 도움이 못된다”(p. 24)는 저자의 언급에 단적으로 나타나있다. 유형C신학이 현대적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역시 어떤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하나의 신학 유형이다. 구체적 역사성을 초월하는 절대 보편의 관점은 아닌 것이다. 즉, 날개옷은 허공을 날아올라 벽을 넘을 때에만 유용하지 깊은 강물 속을 헤엄칠 때나 목욕할 때는 벗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자유주의/근본주의 또는 카톨릭/프로테스탄스 사이의 대립이 초래한 혼란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이런 두 유형의 대립에 오히려 세 번째 대립의 축을 안겨줌으로써 더 혼란스러운 형국이 되었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의 혼란은 어느 유형도 규범화하지 않고 각 유형의 통찰력과 한계를 균형있게 전달해주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등의 각 유형들은 자신의 시대에 기독교가 새롭게 대처해나간 방법으로서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각 유형이 문제가 된 것은 적합하지 않은 역사적 상황을 향해 절대화되고 규범화되었기 때문이지 그 유형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지녔던 각 방법들의 장단점은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규명해야 한다. 그럴 때 현대의 문제들에 접근하는 다양한 모범으로서 역사적 실례를 제공하는 의미를 지니고 양자택일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럴 때 상황과 용도에 맞는 옷을 자유롭게 골라 입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