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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앨벗 놀런 지음, 정한교 옮김 / 분도출판사 / 199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에스카톤을 향한 예수의 연민"
서평: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앨벗 놀런 저, 정한교 역(분도출판사, 1992)
들어가면서
보수적인 신앙 전통 속에서 “신앙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Faith)”의 내용이 곧 객관적이고 역사적 사실 그대로에 대한 기술인 것처럼 믿어져왔다. 그리고 그 역사적 사실성이 기독교 신앙의 진리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이 발달하면서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1)와 “신앙으로 고백된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가 드러났고 이 두 차원의 관계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는 중요한 난제로 대두되었다.
사실 그리스도론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신학적 서술로 볼 수 있다. 즉,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적인 고백이 의미하는 바를 해명하고 밝히는 과정이라는 것이다.2) 이런 과정에서 “역사적 예수”는 “신앙의 그리스도”를 가능케 하는 근거이자 “신앙의 그리스도”가 지닌 의미를 알려주는 기준이 되고, “신앙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가 탈은폐시키는 계시의 의미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모범을 제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해석해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직면한 난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동적 생명을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변증법적 대화라는 필연적 요구 앞에서 앨벗 놀런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는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그가 그려내는 역사적 예수가 전해주는 통찰력은 무엇이고 그 장점과 한계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몸 글
[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전제와 목적 ]
앨벗 놀런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에서 우선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저자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전제와 그 목적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자신의 관심사가 신앙의 대상이 되기 전의 ‘있는 그대로의 예수’ 곧 “역사적 예수임”을 밝히면서 그 어떤 신앙의 전제 없이 연구해나갈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교를 호교하려는 전제없이 연구해나갈 때 일반인들이 오히려 믿음에 얻게 될 것을 기대한다. 바로 예수의 역사적 발자취에서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저자의 확신 때문이다.
과연 역사적 예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으로도 진리가 충분히 드러나는지 그 성공여부를 떠나서 이미 저자의 접근 방식 자체가 중요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신앙의 그리스도 안에 갇힐 수 없는 예수의 신비와 ‘예수는 만인의 것’이라는 통찰력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전통 속에 예수가 오히려 적지않게 왜곡되었고, 그 전통을 통해서 예수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고 볼 수 없으며, 역사상의 어느 그리스도교도 예수를 전유물로 주장할 수 없다고 한다.(p. 11) 바로 역사적 예수 스스로가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리화된 예수상은 역사적 예수가 드러내는 계시의 신비를 모두 담을 수 없다. 또한 그 계시의 신비가 오늘날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서 성육화하여 새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열린 계시로서의 역사적 예수와 늘 새롭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하고, 신앙의 예수가 역사적 예수를 고백한 모범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교회의 체계 안에 갇힐 수 없다는 저자의 관점은 신앙의 그리스도로 표상된 예수상이 현대의 상황 속에서 화석화되고 무의미화되는 문제를 극복하는 통찰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예수에 관한 역사적 진리를 찾으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한다. 목적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절박한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라는 것이다. 그 절박한 문제의 내용은 “새전망”이라는 첫 장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우리 시대의 특징이 온 인류의 사활이 걸린 심각한 문제라면서 원자탄, 심각한 환경 파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인간적, 도덕적 근원의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는 비인격적 메카니즘으로서의 정치, 경제 체제, 제도적 폭력 등을 언급한다. 바로 이런 말세적 상황에 직면한 우리에게 예수의 역사적 삶이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교회가 고백해온 교리화된 예수상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문제와 무관한 공허한 신앙이 되기 쉽고, 영혼의 영원한 삶과 구원은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부터의 도피처가 되기 쉽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구원의 의미로서 역사적 예수를 체험하고 표상해왔듯이 우리는 우리 시대의 문제 상황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추체험하고 표현해야만 한다. 이렇게 현대 인류가 직면한 문제로부터 역사적 예수를 바라보는 저자의 통찰력은 바로 신앙의 그리스도, 즉 역사적 예수에 대한 우리의 고백이 뿌리내려야할 삶의 자리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적 예수가 하려고 한 사역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 밝혀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가를 밝히는 것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란은 자칫 둘 중에 어느 것이 참된 진리인가의 문제로 비약되기 쉽다. 그러나 저자의 이런 통찰력은 “역사적 예수”나 “신앙의 그리스도”의 두 극단 중 하나를 절대화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함몰되지 않고, 둘 사이를 비껴가면서 우리 시대의 절박한 문제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드러내 준다. 두 차원의 변증법적 대화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향한 해결의 실마리를 지향할 때 표류하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굳게 뿌리내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 앨벗 놀런의 역사적 예수 ]
저자가 그려내는 역사적 예수는 로마제국와 유대 지도자층의 이중 착취 속에서 어떤 해방의 가능성도 차단당했던 가난하고 고통받는 하층민들의 고통에 깊은 연민을 느낀 한 청년의 삶과 죽음으로 그려진다. 그는 그들의 고통과 병을 치유해주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용서를 실천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한 종말적 파국을 피할 수 있도록 회개를 촉구하는 과정에 로마 당국과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고자 죽인다. 그러나 그의 죽음 뒤에도 그의 운동이 계속 되고 그의 뜻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의 능력이 현존하는 것을 체험하며 더러는 그가 살아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것으로 그려진다.
이런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여타의 역사적 예수의 모습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신앙의 그리스도에서 간과되기 쉬운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역사적 예수의 삶이 의미하는 바는 대부분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공히 강조되는 측면이다. 이런 공통적인 측면과는 달리 놀런이 그려준 역사적 예수의 독특한 특징을 들라면 무엇보다 “예수의 연민”과 “진리 자체의 권위에 의지하는 예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예수의 연민”는 그가 역사적 예수를 그려나가는 데 있어서 중추를 이루는 개념이다. 예수가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다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다름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 중에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가이없는 연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가 어떤 위대한 대의명분을 위해서 사역을 하거나 목숨을 걸지 않았고, 오직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연민 때문이었다고 강조한다. 또한 저자는 참 믿음이란 연민 없이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연민의 하나님으로 계시했으며 하나님의 힘은 연민의 힘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연민만이 인간의 연대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고 연민에 근거한 연대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에게서 연민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이 때 연민은 일반적인 자비나 동정심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이 연민이 그런 차원을 넘어서 강한 감정의 근원으로서의 인간의 내부를 의미(p. 51)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과 절망을 함께 체험하며 느끼는 간절한 공감이자 애타는 사랑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가 깊은 연민의 체험을 통해서 행동하고 말했으며 십자가를 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p. 222)
이 연민은 성령이라는 신앙의 언어를 비신화화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신앙과 교리의 언어에서는 예수의 능력이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표현되곤 했다. 그러나 저자의 표현 어디에도 성령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저자가 어떤 신앙적 전제도 없이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서술하기 위해서 적용된 일반적 개념인 것이다. 성령을 연민으로 표현한 것을 두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닌 초월적 차원을 상실하게 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성령이라는 종교적 개념은 비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이런 비신화화의 과정은 비신앙인들에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신앙인들에게는 성령의 역사를 구체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점을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A. 놀런의 역사적 예수가 보여주는 또 다른 독특성은 오직 진리 자체의 권위에만 의지하는 예수의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을 통해서 바라보고 이해하면서 절대화한다. 예수에 대한 교회의 고백과 그것을 기초로 형성된 신념체계를 절대화하는 신앙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신념체계를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가 신앙의 척도이자 구원의 척도가 되기 쉽고, 예수의 신앙과 실천을 그대로 따라 사느냐의 문제는 간과되기 쉽다.
그러나 놀런이 그리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는 그를 경험한 사람들이 그에게서 하나님의 권위를 느끼지만 스스로에게 어떤 권위적 칭호나 존칭를 붙이지 않는 모습이고, 오직 진리 그 자체가 스스로 진리임을 드러내도록 하는 모습이다. 예수는 어떤 권위에 의지하여 진리를 호소하지 않는다. 예수가 의존한 유일한 권위는 진리 자체의 권위였고,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복종하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진리에 복종하여 그것을 체험하고 드러내며 스스로 예수 자신처럼 살아가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이런 예수의 모습은 ‘예수에 대한 신앙’에 의존해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려는 어리석은 집착이 또 다른 우상임을 드러내 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가 삶과 죽음으로 드러내준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바로 예수의 신앙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 것임을 드러내준다.
신앙에는 ‘앎의 차원’과 ‘믿음의 차원’과 ‘깨달음의 차원’이 있다. 예수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부활했는지를 ‘아는 것’과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아직 참된 진리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보여준 강력한 권위에 눌려 그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신앙인의 삶은 결코 거듭날 수 없다. 외적 권위는 내면에서 샘솟는 자발적 생명력을 거세하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의 신앙이 보여준 진리가 신앙인의 내면에서 자유롭게 솟아오르는 체험에 근거하여 일상 속에서 그 진리를 체험할 때만 깨달을 수 있고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오직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 속에서 그 진리를 체득하여 예수의 본을 따라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화, 신격화의 신비한 이미지로 옷입혀진 그리스도의 상(像)은 오히려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미지와 상징들을 사용함으로써 그 진리 자체와의 접촉을 가로막고 있다. 오히려 역사적 예수의 삶과 인격에서 그대로 풍겨나오는 그 초월적 깊이, 그 진리 자체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놀런이 그려준 역사적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외적이고 억압적이며 절대적인 권위도 부정하는 모습을 통해서 바로 이런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주고, 신앙의 전제 없이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그 진리와 직면하게 한다.
이런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놀런의 역사적 예수는 그럼에도 몇 가지 측면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그는 어떤 신앙적 전제도 없이 예수의 역사적인 모습 그대로가 보여주는 진리 자체만으로도 신앙에 도달하게 하려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그는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논하면서 예수를 자의적으로 옹호하려하거 미화하려는 의도를 자제하지 못한 듯하다. 예를 들어 그는 예수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목표로 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로마제국에 대한 편파성은 아니었다고 부정한다. 역사적 예수의 모습만으로는 그것이 편파성이 아니었는지를 확언하기 어렵게 한다. 그리고 예수가 억눌린 사람들의 편을 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저자는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서의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는 무의식적 집착 때문인지 편파성보다 보편적 사랑이었다는 자의적 해석을 고집한다. 이런 식으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미화하려는 듯한 자의적 해석의 흔적들은 역사적 예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내주는 진리에 직면하는 데 있어서 신뢰성과 연속성을 떨어뜨린다. 저자가 강력하게 주장했듯이 보다 객관적인 거리를 철저하게 유지했다면 더 강한 설득력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른 아쉬움은 파국적 사건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저자는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 다가오는 파국적인 사건이 바로 로마제국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괴임을 알고 믿고 있었고, 그 파국을 막기 위해 회개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고 봤다. 저자는 예수가 “회개하면, 진정으로 믿으면 파국 대신에 그 나라가 오리라”(p. 153)고 믿었다고 봤다. 그러나 예수의 믿음으로 표현된 파국과 회개의 관계에는 예수가 고통받는 자들에게 선포한 용서와 치유의 사역과는 모순되는 측면이 있는게 아닐까?
저자는 예수가 구조적 모순 때문에 기존의 종교 체제로는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에게 용서와 치유의 사역을 행했다고 봤다. 이런 예수의 사역에는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깊이 베어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가 믿었던 파국은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값으로 주어지는 결과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가 믿었던 하나님은 깊은 연민으로 회개할 수도 없는 이들에게 값없이 용서를 베푸는 은총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죄값으로 멸망을 주는 하나님이라는 모순을 낳는다. 또한 예수는 병든 고통이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에는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은총이 드러나 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에서는 죄의 대가로 멸망을 주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나가는 글; 우리의 에스카톤을 향한 예수의 연민
지금까지 앨빗 놀런이 그린 역사적 예수가 보여주는 탁월한 통찰력과 장단점을 살펴봤다. 그런데 가장 탁월한 통찰력이라고 생각된 부분을 남겨뒀다. 그것이 이 책을 통해서 만난 가장 중요한 관점이고 내 실존을 향한 강렬한 음성이기에 나가는 글을 통해서 살펴보면서 이 서평을 매듭짓고자 남겨둔 것이다. 가장 탁월한 통찰력이라고 생각된 부분은 바로 “예수를 믿음”이라는 마지막 장에 나타나 있다. 저자는 어떤 신앙적 전제도 배제하고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속에 드러나는 진리 자체를 현대의 문제 상황 앞에 제시하려 했다. 바로 역사적 예수와의 변증법적 대화를 통해서 오늘의 긴박한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려는 저자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그 결론은 바로 그런 역사적 예수를 오늘날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저자는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대해서 교회의 전통이 평가한 내용에 동의함을 뜻하고 동시에 예수와 예수가 뜻한 바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이 때 교회의 전통이 평가한 내용이라함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예수가 뜻한 운동의 영향력이 계속되었고 예수의 지도와 감화가 예수의 영을 받는 일로서 계속됨을 체험한 교회의 고백을 의미한다. 즉 예수는 인간 역사의 모든 곳에서 존재로서 파악되는 궁극의, 최후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뜻한 바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바로 역사적 예수의 삶이 보여준 실천에 대한 동의와 실행을 의미한다. 예수의 사역과 운동이 지금도 계속되고 예수의 삶이 보여준 하나님의 연민과 연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당연히 구체적인 실천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우리 시대의 절박한 문제들 앞에서 힘없이 고통받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체감하고 그들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 연대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에스카톤 속에서 지금도 깊은 연민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있는 예수를 앨벗 놀런의 역사적 예수는 그려준다.
결국 그런 역사적 예수는 우리에게 지금 묻고 있다. 예수가 이해하고 실천했던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의 양자택일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우리 시대의 에스카톤적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모든 고통받는 존재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연민에 체험적 공명으로 참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연대임을 앨빗 놀런의 역사적 예수는 드러내주고 있다. 이런 실존적인 결단의 요구 앞에서 부자 청년처럼 주춤하고 방황하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오랜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그 연대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은 예수의 믿음이 어떻게 가능했을지에 대한 절박한 질문과 대답에서 가능할 것이다. 예수처럼 모든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을 느끼고 자애로운 아버지와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체험이 내 안 깊은 곳에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앎의 차원과 믿음의 차원에 맺혀있지 않고, 오늘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고 죽기까지 사랑함으로써 주검의 문화를 극복하고 있는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는 "깨달음의 차원"이 간절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참고도서]
앨벗 놀런 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정한교 역 (분도출판사, 1992)
서창원 저, “역사적 예수의 그리스도론적 의미”, ‘신학과 세계’ vol. 42 (감리교신학대학교, 2001), pp. 66-88.
오강남 저,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
앎과 믿음과 깨달음의 차원, 그리고 현재의 삶 속에서 부활을 체험해야한다는 통찰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김진 박사님과의 대화와 가르침에서 통해서 얻은 깨달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