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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신학
서창원 지음 / 한들출판사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살림의 터와 전경"
들어가면서
신앙은 논리적 이성의 설명이 아니라 절대자 혹은 궁극적 존재에 대한 체험과 직관에 근거한다. 그렇기 때문에 증명되거나 반증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성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신앙은 지식을 찾는다(fide quaerens intellectum).”1) 그 신앙이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어떤 내용과 의미를 갖게 되는지에 대한 자기 이해와 비판적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찰과 이해를 통해서 그 신앙을 자기화할 때 주관주의와 맹목성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현실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에 대한 이해 곧 신학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추구돼야만 한다.
그러나 이해를 추구하는 신학은 추상화와 비현실화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신학 역시 합리적이고 논리적 이성을 통해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이론을 구성하는 학문의 영역 내에 위치한다. 그 결과 이성에 의한 설명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삶의 복잡성은 사상(捨象)되기 쉽고, 학문적 보편성 역시 구체성의 다양한 변수를 모두 포섭하기 어렵다. 학문 세계의 이런 경향으로 인해 신앙 고백이 지녔던 경이로움과 환희의 생동감은 거세되고 복잡한 이론과 논리의 화석으로 가득한 유적지가 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늘 구체적 일상으로 돌아가 실천의 저울대 위에 올려져야 한다. 바로 삶을 거친 신학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삶을 거친 신학이 신앙으로 뿌리내릴 때 그 신앙은 자기 성찰과 이해의 신학적 과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신학과 삶의 상보적이고 역동적 순환에 대한 이런 절대적 필요성 앞에서 “살림의 신학”은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 책의 각 장을 통해 얻게 되는 통찰력과 문제의식 그리고 새로운 비젼을 살펴보고 전체적인 접근방법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살림의 방법론”을 분석해보려 한다.
몸 글
이 책의 첫 장인 “종교적 언어의 방법론”에서는 종교 언어의 특성에 대해 정리하고 있다. 이런 접근에는 한국 신학계와 교계에 종교 언어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신앙은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고, 신학은 그 말씀에 대한 이해와 설명의 과정이다. 이 모든 과정은 늘 언어적 전체성의 체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 언어의 특성과 체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인 토대가 된다. 그럼에도 한국 신학계는 언어의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이 부족하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종교 언어의 상징성, 유비성, 윤리성, 구성적 성격에 대해 분석하여 종교 언어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저자의 문제의식은 한국 교계가 지닌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한국의 개신교 신학은 근본주의에서 급진적인 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학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각각 성향에 따라 종교 언어에 대한 전제의 차이를 지니는 것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장에서는 이런 신학적 차이와 무관하게 공히 문자주의적 성서 이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자주의적 성서 이해는 성서가 기록되고 고백되던 역사적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 지녔던 성서 본문의 의미를 상실하게 한다. 동시에 그 본문이 우리 시대의 삶의 정황 속에서 새롭게 재의미화되는 핵심적인 과정을 상실케 한다. 그 결과 일상의 구체적인 문제들과는 괴리된 채 교회 안에서만 울리고 마는 공허한 신앙을, 교회와 세상의 분리를 초래하고 있다. 당연히 예수님 당시와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삶의 구체적인 상처와 문제를 치유하고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해방시켜주던 복음의 놀라운 힘은 교회 안에 갇히고 신앙인의 삶과 유리된 채 영혼의 구원으로 축소되고 현재의 구원이 내세의 영역으로 미뤄지고 있다.
이런 문제 상황을 향해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종교언어의 기본적 특성은 문자주의적 성서 이해의 한계를 돌파하여 신앙의 구체적 삶 속에 뿌리내릴 수 있는 신학의 토대를 일구고 있다. 특히 상징성과 구성적 특성은 중요한 통찰력이 된다. 상징성은 성서와 신학의 표현들이 어느 특정한 의미에 갇히지 않고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로 부활할 수 있는 기본적 터전이 될 수 있다. 또한 저자가 “신학적 진술과 신학적 언어가 지향해야할 방향”(p.27)으로 규정하는 ‘종교 언어의 구성적 성격’은 신학이 단순히 성서의 언어를 재해석하는 수동적 영역에서 벗어나게 하는 토대가 된다. 우리 시대의 구체적 삶에 충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새롭게 재구성해내는 적극적 접근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종교 언어의 특성에 대한 저자의 방법론적 제시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언어가 지닌 다른 특성들을 제시함으로써 보다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언어는 무엇보다 억눌린 자, 가난한자, 고통받는 자에 대한 해방과 치유의 언어이자 죽임의 이데올로기적 체제에 대한 전복과 해체의 언어이다. 또한 인간의 영혼 깊은 곳을 울리고 매혹하는 미학적 해방의 언어2)이다. 기독교의 언어가 구원의 살림을 우리 삶의 터전 속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미학적 해방의 언어라는 측면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와 강조가 필요하다.
다음 장 “삼위일체론 Leonard Boff를 중심으로”에서는 바로 삼위일체론이라는 신학적 언어가 구체적인 문제 상황을 향해 재해석되고 재의미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기독교 사상사 속에 삼위일체 신관이 형성되어온 과정을 정리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신앙 정신을 살려내면서도 그 의미를 오늘날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현재화하고 있는 Leonard Boff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일체의 교리는 사회학적이며 정치적 관점에서 아버지는 해방의 근원과 목표로 아들은 온전한 해방의 중개자로 성령은 온전한 해방의 추진자로 새로운 의미를 획득”(p.52)하도록 재해석되고 있다. 이런 재해석은 사회적으로 전개시키면서도 경세적 삼위일체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모범적 변형으로서 우리 시대의 죽임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좋은 모범이 된다.
그러나 저자 역시도 한국 교회의 토양에 뿌리내린 상생적 삼위일체론이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듯이 Leonard Boff의 삼위일체론 역시 우리의 상황을 향해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여전히 인격적 신관의 범주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생태적 죽임의 문제를 고려할 때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3) 동아시아의 일원론적 사상 전통 속에 뿌리 내려야할 한국의 신학은 비인격적, 비이원론적 신관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볼 때 Leonard Boff의 예는 자신이 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해낸 하나의 모범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정통과 이단”이라는 장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영지주의의 도전에 대해 정통적 교회가 어떻게 대응했고, 어떻게 신앙의 정수를 지켜냈는지, 그 과정과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성적 신학이 지닌 위험성의 한 측면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적극적 재구성은 늘 혼합주의의 위험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희석시키지 않아야 하는 긴장 속에 놓여있다. 바로 이런 왜곡의 위험을 안고 끊임없이 새롭게 재구성해야 하는 우리의 필요성을 향해 어떻게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지켜나갔었는지에 대한 한 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와 대립했던 정통주의 교회의 대응은 신약성서의 정경화, 신경의 형성, 그리고 무엇보다 진리를 향한 교회의 사도적 권위를 정립함으로써 승리를 이뤄간다. 이런 과정은 우리 시대의 신앙이 적극적 재구성의 필요성에 응답하면서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어떻게 지켜가야하고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중요한 문제의식을 안겨준다. 저자 역시 “오늘 우리도 이 세상에서는 교회의 선교를 위해서 우리는 계속 물어야 한다. 어떤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진리를 거부하는 것인가? 어디에 그 경계를 그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본 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런데 정통주의의 대응은 승리를 얻은 것과 동시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정통주의는 영지주의가 기독교 진리의 핵심적 내용을 왜곡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제도화하고 형식화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영지주의가 지닌 장점까지 함께 제거하고 말았다. 영지주의는 신앙인 사이의 평등을 중요하시는 비계층적 성향을 지녔었지만 정통주의는 사도적 권위를 강조한 결과 교회 내에 계급구조의 틀을 심게 되었다. 또 영지주의는 신앙의 체험적 깊이를 중요시하였지만 정통주의는 신앙의 간단한 핵심만 고백하고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이면 모두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영지주의의 엘리트주의적 문제를 막았지만 동시에 신앙의 깊이, 복음의 가치를 희석시키게 되었다.
정통주의의 대응방식은 예수의 믿음이 지닌 깊이를 신앙인 각자도 품고 그 삶을 따르는 실천성보다는 예수에 대한 일원화된 권위적 신앙에 치우치게 하는 위험성을 지녔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유대교의 종교적 틀 안에 갇혀버린 하나님을 해방시켰던 것과는 달리 다시 교회의 권위 안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두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결국 이런 한계와 문제점을 통해서 새로운 질문에 직면하게 한다. 제도화, 형식화의 필요성 속에서도 체험적 깨달음의 신앙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교회 안에 하느님과 예수님을 가둬놓은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면서도 기독교 진리의 정수를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질문과 마주치게 한다. 살리는 신학은 뼈대만이 아니라 뜨거운 피가 흐르는 생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기도론”에서 저자는 외형적으로 기도를 많이 하는 한국 교회가 오히려 기도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신학적 연구가 부족하다는 문제 상황을 직시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하나의 시도로서 기도의 신학을 시도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위해 기도의 정의, 대상, 자세를 먼저 고찰하고 주기도문에 반영된 기도의 내용을 분석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기도가 신학의 원천이며 진정한 신앙 생활의 기초이며 살아있는 신학의 근거임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기도의 신학은 주검의 문화를 극복하는 “살림의 신학”을 위한 토대이자 원천이기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기도의 신학은 한국 교회의 기도가 지닌 또다른 문제점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기도가 너무나 기복적인 집착과 외침에 치우친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부르짖는 기도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비우는 ‘비움의 기도’와 하나님의 뜻에 귀기울이는 ‘들음의 기도’로, 침묵과 관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내면 깊이 품고자 하는 ‘일치의 기도’, 치유와 해방 기원하는 실천적 기도(企圖)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성화론”과 “구원론”에는 한국 개신교가 처한 문제 상황들을 극복할 수 있는 웨슬리 신학의 중요한 통찰력과 가능성들이 나타나 있다. 웨슬리의 성화론과 구원론이 전적으로 은총에 의지하는 구원을 전제하면서도 선행적 은총에 근거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책임성이 강조되는 신인협동설의 특성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자의 완전이 가능하다고 보면서 거듭남의 실제적 변화 과정인 성화의 점진적 과정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웨슬리의 신학이 죄악의 비관주의가 신앙의 실천성을 약화시키는 문제점을 극복케하고 은총의 낙관주의에 근거한 적극적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성화의 과정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동양 사상 특히 유교에서 강조되는 수신(修身)과 접촉점을 지니기 때문에 동양 사상으로 육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웨슬리의 성화론이 사회적 복음과 사회적 구원을 강조하고 우주적 차원에서는 온우주의 구원과 성화를 지향한다는 점을 분석한다. 바로 이런 측면이 사회적 실천과 생태적 구원을 향한 신학적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웨슬리의 성화론과 구원론이 한국 개신교가 사사화(私事化)된 신앙의 문제 상황을 극복하면서 사회적 실천의 근거가 되고, 생태적 문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토착화의 가능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분석과 평가는 신학의 전통 속에서 현대의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고 그것이 어떻게 근거가 될 수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를 잘 보여주는 모범이 된다. 결론부에서 다시 정리하겠지만 이런 접근 방법이 바로 살림의 신학을 위한 기본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중요한 통찰력이다. 즉, 신앙의 전통을 바로 우리가 처한 문제 상황이 제기하는 질문 앞에 위치시키고 해결의 실마리를 전통과 현실 문제의 대화 속에서 찾아가게 할 때 참된 살림의 신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만찬론”에서는 한국 개신교회에서 신학적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실행에서도 축소되어온 성만찬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저자는 성만찬과 관련된 신학적 논쟁을 정리하면서 그 과정에 나타난 두 극단을 유형화한다. 그리고 그 유형들이 현대신학적 관점에서 재해석되는 양상과 에큐메니칼한 합의를 반영하고 있는 라마문서의 성만찬론을 분석하고 있다.
이런 성만찬의 신학은 성만찬을 물질적 현존의 실체성으로만 치우는 실재론적 극단과 이와는 반대의 극단으로 성만찬을 단순한 기억이나 기념으로 보는 상징주의적 극단,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어느 것이 진리인가라는 질문보다 오히려 성만찬이 오늘날의 삶과 문제 상황 속에서 어떤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양쪽을 다 포괄하고 있다. “포괄적 입장은 성만찬에서 하나님, 인간, 세계의 만남이 이어지며, 빵과 포도주를 매개로 하여 그리스도께서 현존한다는 것이다.”(p.149) 이것은 종말론적이고 우주적인 구원의 비젼을, 현실의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를 극복하고 성도의 연대를 이루는 사귐의 비젼을 바라보는 재해석된 성만찬론이다.
“교회론”에서는 우리 시대가 직면한 총체적인 문제 상황인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려는 살림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론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구원이 개인적이고 영적인 구원으로 협소화된 문제점을 극복하고 사회 구조적 문제, 정치 경제적 문제, 생태적 문제 등의 총체적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는 총체적 살림의 운동을 구원으로 보는 우주적 구원론에 근거한다. 또한 살림자로서의 그리스도, 살림꾼으로서의 그리스도, 살림의 대리자로서의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하는 관점에 기초한다.
이런 “살림 교회론”은 교회와 세상, 내세와 현세를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구원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상처들을 방치시킴으로써 방관적 공범이 되고 말았던 기존 교회론의 문제를 극복하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리고 교리적 복음을 증거하기에 급급했던 교회를 사회와 우주를 섬기는 교회로 변화시키는 비젼을 제공한다. 이런 살림 교회론은 저자의 강조점처럼 책임성과 운동성과 연대성에 기초한 해방과 치유의 적극적 섬김이 강조된 교회론이다.
“토착화론”에서 저자는 개신교와 가톨릭 전통 내에서 진행된 토착화의 흐름을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토착화 신학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토착화가 적응과 육화의 문화 토착화 담론을 극복하여 간문화적, 간종교적, 간해석학적 토착화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이런 토착화는 서구 신학의 한계로 지적된 이원론적, 가부장적, 인간중심적 사유를 극복하는 유기적 일원론, 역동적, 생태적, 우주론적 차원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석학과 혼합주의의 문제를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는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토착화 신학이 한국적 신학과 아시아 신학 형성을 향한 항구적이고 역사적인 과제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토착화론에 대한 이론적 접근은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 사상과의 대화를 통한 토착화가 다양한 각도와 깊이로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문제는 그 동안 진행된 토착화 신학이 현실 교회에는 거의 전달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문제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한 가능성이 마지막 장인 “신학적 해석학: 남은 김인서 목사의 범례”를 통해서 드러나 있다. 남은의 토착화 신학은 학문적이고 개념적인 작업의 결과가 아니라 그가 살아간 역사적 정황 속에서 심화되고 형성되며 정형화된 결과였다. 이처럼 삶의 신학, 현장의 신학으로 토착화 신학이 자리매김할 때 서고에서 누렇게 변해가는 활자로만 맺히지 않고 한국 기독교인의 심층 속으로 스며들어 신명나게 하는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나가는 글: “살림의 터와 전경”
지금까지 살펴본 살림의 신학은 10가지 주제를 독립적으로 다뤄나가는 형식을 지니고 있고, 대부분의 조직신학 연구가 그렇듯이 각 장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 지를 밝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제목에 제시된 “살림의 메타포”가 각 장에서 구체화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각 장의 주제를 접근해가는 방법론 자체가 “살림의 방법론”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살림의 신학을 구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렇게 토대로 자리잡고 “살림의 메타포”는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찰력이다. 살림의 신학은 “살아가는 살림살이의 터가 어디인지”, “누구를 살리는지”를 명확하게 지향하는 메타포이다. 살림은 구체적인 대상을 전제한다. 신학하는 주체가 살아가는 터에서 죽어가는 모든 구체적 존재가 바로 그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 속에 죽어가는 모든 이웃들-노숙자들, 외국인 노동자들에서 땅과 하늘과 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죽어가는 존재자들을 향한 살림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신학이 바로 살림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살림은 개인적이고 영적인 구원에 갖힐 수 없는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구원의 개념이면서도 동시에 구체적인 존재자들을 향하는 메타포이다.
이처럼 살림이 그 터 위를 굳게 밟고 노니는 “치유 운동의 메타포”이기 때문에 그 방법론 역시 그 살림의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의 각 장은 예외없이 한국 기독교가 처한 문제 상황에서 출발한다. 한국 기독교가 생명력을 잃어가는 즉, 죽어가는 구체적 문제를 치유하고 살려내기 위한 살림꾼의 시선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림의 손길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 흐름이 우리의 살림터에서 어떻게 되살려질지를 묻고 있다. 이는 기독교의 진리와 한 생명으로 이어지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살림터에 깊이 뿌리내리기 위한 토착적 성향이 살림의 메타포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생명은 그 땅에 뿌리내지 못하면 결코 살 수 없기에 살림은 토착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살림은 살리는 구체적 행동을 지향하는 메타포이다. 살림은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처럼 진리를 추구하기 보다는 "어떻게 살릴 수 있는가?"라는 방법을 묻게 하는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림의 신학에서 분석해가는 10가지 주제들은 신학적 토대를 구성하면서도 행동과 방법을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을 통해 일궈가게 된 풍성한 열매들을 제시하고 있다. 현세적 종말론의 비젼들, 현세적 성취들, 사회적 구원이 살림살이의 터에 익어가는 전경을 그려 보여주고 소망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살림터에 다양한 생명이 풍성하게 익어가는 전경을 그려보게 하는 “살림의 신학”이 앞으로 보다 깊어지고 넓어지는 과정이 기대된다.
【미주】
1) 도르테 죌레 저,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서광선 역(한국신학연구소, 1993)p. 13에서 인용
2) 리차드 빌라데스 저, 신학적 미학-상상력, 아름다움, 그리고 예술 속의 하나님, 손호현 역(한국신학연구소, 2001), pp3-5를 참고.
3) 이정배 저, 토착화와 생명문화 (종로서적, 1991), pp. 183-192의 ‘서구적 인격 범주에 대한 보충으로서의 일체 범부로서의 신’ 부분을 참고.
【참고도서】
도르테 죌레 저,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서광선 역(한국신학연구소, 1993)
리차드 빌라데스 저, 신학적 미학-상상력, 아름다움, 그리고 예술 속의 하나님, 손호현 역(한국신학연구소, 2001)
이정배 저, 토착화와 생명문화 (종로서적, 1991)
서창원 저, 살림의 신학 (한들출판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