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하느님 아들의 삶
길희성 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분도출판사, 2003), pp. 271-294.

들어가면서

앞선 장들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엑카르트의 영성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단계는 인간 영혼이 초탈과 돌파를 통해 자신 근저에 '하느님 아들의 탄생'을 이루는 것이다. 본 장에서 길희성은 바로 그 탄생을 통해 이뤄진 '하느님 아들의 삶'을 엑카르트의 설교나 가르침들을 통해서 살펴본다. 전체적인 논의의 흐름은 하느님 아들의 삶이 지닌 전반적 특성과 함께 '윤리적 함의'와 '활동적 삶을 향한 지향성' 등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우선 책의 순서보다는 논리적 흐름을 따라 내용을 정리하여 보다 분명하게 내용을 파악하고 그 의미를 이해해보고자 한다.

[하느님 아들의 삶이란?]
영혼의 근저로 돌파해 들어가 하느님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난 삶은 무엇보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272)만 살아가는 하느님의 삶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자신의 안에 이미 하느님과 동일한 본성과 본질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과 하나된 하느님 아들의 삶이기 때문에 하느님처럼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이 자신의 외부에 그 어떤 것도 의지할 필요가 없고 자신 안에 모든 것을 지니고 있듯이 하느님의 아들도 하느님의 모든 것을,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엑카르트는 하느님 아들은 자기 밖의 어떤 것을 위해서 살아갈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고 본다. 자신의 명예나 이익은 물론이고 봉사처럼 선한 뜻을 담은 행동들조차도 외적인 목적이라면 안 된다. 자신 밖에서 기인한 외적 원인들에 의해 행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 죽은 것이고 심지어 하느님께 무엇이라도 받는 것조차 아들이 아니라 종이 되는 것이며 영생의 삶에서 이탈되는 것으로 본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271)는 것이다. 아들의 탄생을 통해서 하느님과 나의 하나됨이 탈은폐 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하느님과 자신을 분리된 것으로 전제하는 모든 것들은 어리석은 망상에 고착된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느님 아들의 삶의 특성]
철저한 자기 부정 곧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철저하게 죽고 하느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난 삶의 첫 번째 특성은 모든 존재들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되는 시각의 변화이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게 될 때 무가치해 보이던 존재들까지도 하느님 안에서 존재를 지니는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가 하느님으로부터 일탈된 타락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르는 길로 보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엑카르트는 "피조물마다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고, 하나의 책"(274)이라고 한다.
두 번째 특징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하느님과 동등한 삶으로서의 자유로운 자족성이다. 하느님은 스스로가 존재의 이유이자 근거이다. 바로 그런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하느님 아들도 역시 자신의 존재와 생명의 충일함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목적이나 이유없이 자족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충만한 자족성은 자신 안에 어떤 분리도, 자신으로부터의 어떤 소외도 남겨두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밖의 그 어떤 피조물도, 심지어 하느님에 의해서도 강요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타자에 의해 부과된 의무나 타자에 의해 유발된 동기나 목적 혹은 이유에 구애받지 않고 다른 누구를 위해 살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살지도 않는다. 카푸토의 표현대로, 그는 하느님을 위해for God 살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으로부터out of God 산다."(276, 277) 오직 스스로의 근저로부터 샘솟는 하느님의 자발적 이유와 목적을 스스로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느님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이런 자족성은 전통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무신론으로 오해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엑카르트의 관점은 무신론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무신론"이라고 해명한다. 즉,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와 분리된 하느님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해진 차원이라는 것이다. 바로 신비주의적 휴머니즘의 차원이자 "비종교의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엑카하르트가 이런 관점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거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등의 종교적 행위가 지닌 표피성과 그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자기 기만적 이기심과 자기애를 간파했다고 한다.
세 번째 특성은 자발성에 근거한 의지와 내적 동기에 대한 강조이다. 엑카르트는 어떤 행동이 옳은가하는 윤리학적 관심보다는 어떻게 본질적 삶을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을 뒀다고 한다. 그가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 "하느님 아들의 자기 충일성에 근거한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당연히 "결과보다는 의지와 동기"를 "행위보다는 존재"를 중요시하게 된다. 즉, 어떤 행위를 했느냐보다는 어떤 존재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행위가 우리를 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행위를 성화하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존재의 뿌리에 근거하지 않는 한,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 행위라 해도 거부한다."(282) 그는 성례전이나 그밖의 경건한 행위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내면적 동기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가 살아가던 시대의 종교적 형식주의나 의례를 통해 교권을 유지하던 교회의 권위에 반하는 정신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에게 적용된 28개조의 최종 이단 혐의 가운데 4개조가 외적 행위의 무가치성을 강조한 발언의 문제였던 점은 이런 측면을 잘 보여준다.
네 번째 특성은 활동적 삶의 영성, 곧 비종교적 종교성이다. 엑카르트의 초탈과 초연은 결코 정적주의나 관조적 삶으로 도피하지 않고 참된 활동적 삶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 힘이 된다. 이런 지향성에 대해서 저자는 불교에 빗대어 "진심眞心의 체體에 근거한 용用으로서 활기찬 삶이 전개되는 것"(287)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특성은 『루가 복음』의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대한 엑카르트의 독특한 해석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의 해석에서 마리아는 세상일을 등지고 하느님에만 집착하는 관조적 삶을 나타내고, 마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놓아버림으로써 세상일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활동적 삶의 경지를 나타낸다. 그는 이 둘 가운데 활동적 삶을 더 고귀하고 우월하다고 봤고 신비한 종교적 경험보다 사랑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다섯 번째 특성은 실천적 삶과 관조적 삶이 하나를 이루는 관조적 실천성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엑카르트는 하느님에 집착하지 않고 떠나서 영혼의 근저에 자리잡은 충일한 존재에 굳게 서서 흔들림 없이 세상사를 수행해 나가는 실천적 삶을 더 성숙하고 고차적 삶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마르타의 삶은 실천적 삶의 자리에 있을 뿐 그 실천 자체에 매몰되지 않는다. 이것은 실천을 통해 관조하는 더 높은 경지로서 "존재에 확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어서, 어떤 일을 하든지 장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영원한 빛에 감싸여 활기차게 수행"(288)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마저 떠나는 "돌파"를 통해 자기 존재의 근저에 뿌리박고 사는 하느님 아들이 살아내는 본질적 삶의 모습이다.
"여기서 성과 속, 유신론과 무신론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는 새로운 정신세계가 열린다. 도피적 세계 부정과 맹목적 세계 긍정을 넘어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이원적 대립이 극복되고 세상 안에서 완전히 편안하게 느끼는 종교적 내면성이 열리는 것이다."(289) 이처럼 어느 한 쪽만이 아니라 두 차원이 같이 가며 하나인 마르타의 경지는 관조와 활동, 초탈과 헌신이 하나인 영성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는 당연히 신비 체험이나 영적 경험 자체에 집착하거나 도취되지 않는다. 그 결과 세상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전파되는 개방적 영성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느님 아들의 삶은 내향성과 외향성을 안과 밖, 존재와 행위를 이분적 단절이나 역설적 모순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충만에 근거한 순수한 내적 자발성은 실천적 삶을 지향함으로써 존재의 심연에 뿌리를 둔 행위를 의도하고 있다. 그래서 "엑카르트의 사상은 "중세적 질서인 성과 속의 외적 구별, 종교적 일과 세속적 일의 형식적 구분을 넘어서서 인간의 삶과 행동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는 강력한 인격적 윤리를 형성한다."(284) 결국 "그의 윤리학은 존재와 행위, 존재와 당위, 인식과 실천 그리고 존재론과 윤리학이 하나인 '존재의 윤리학'이며 외적 행위보다는 내적 마음의 태도를 근본으로 삼는 '내면의 윤리학'"(281)인 것이다.
여섯 번째 특성은 무엇보다 사랑의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아들이 된 사람에게 여전히 어떤 참회의 행위나 어떤 수행이 필요한지에 관한 물음에 대해, 금식, 철야, 기도 등과 같은 참회의 행위보다는 "사랑의 고삐"를 매는 것이 수천 배 더 낫다고 대답했다. 그는 "사랑에 의해 잡힌 자는 가장 강한 사슬을 끌고 다니지만 하나의 즐거운 짐을 진 자이다. 이 달콤함 짐을 진 자는 사람들 모두가 할 수 있는 그 모든 참회 행위와 고행을 통해서보다도 더 많이 그리고 더 멀리 도달할 수 있다"(292)고 한다. 이런 엑크하르트의 활동적 영성이 중세적 한계 내에 있기 때문에 사회적이고 정치적 차원까지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길희성은 그럼에도 내적 삶의 근원적 순수성으로 사회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활동적 영성의 가능성이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나가는 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엑카르트의 영성이 그 절정에서 드러내는 하느님 아들의 삶은 영혼의 근저에 태어난 하느님에 근거하여 '하느님 없이' 자기 충일성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이다. 그것은 안과 밖, 내면과 실천, 종교적 삶과 일상의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그 사이로 비껴가면서 하나로 아우르는 삶이다. 길희성은 하느님 아들의 삶에 대해 살펴본 후에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엑카르트를 평한다.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종교적 경험이나 행위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상적 삶에 매몰되지도 않으며, 성과 속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영혼의 근저에 뿌리박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참다운 자유의 길을 가르쳐 준다."(293)
이런 하느님 아들의 삶은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절대적 긍정으로 도약하는 삶의 궁극적 차원을 보여준다. '하느님 없이', '이유 없이', '목적도 없이' 등의 표현은 하느님과 나, 안과 밖 사이의 남아있는 모든 간격이 해체되는 철저한 하나됨의 경지를 보여준다. 하느님이 없다는 것은 나의 밖으로부터 나를 압도해오는 절대적 권위의 하느님을 부정함으로써 내 영혼의 뿌리로부터 샘솟아 하느님 아닌 영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긍정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이 될 때 어디에도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이유와 목적이 없다는 것은 완전히 나와 하나되지 않고 나의 밖으로부터 강제되는 어떤 이유도 부정하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이유와 완전히 하나되는 절대긍정인 것이다.
완전한 하나됨의 삶인 하느님 아들의 삶은 종교적 형식이나 교리, 신앙의 내용 등을 강조하는 제도적 신앙에 대한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해체와 전복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 하느님 아들의 삶은 하느님과 나 사이의 어떤 매개도 남겨두지 않는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놓인 어떤 것-내 밖에 있다면 하느님마져도-도 우상이며 참된 구원의 걸림돌일 뿐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면 구원될 수 없고 교회의 전통 밖이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예수의 믿음이 나의 뿌리로부터 샘솟아 하느님 아들이 되었는가, 그 삶을 누리고 있는가 만이 중요할 뿐이다. 여기서 믿음이냐 행위냐의 이분법적 도식이 자연스레 해체된다. 
이렇게 엑카르트를 통해 어렴풋이 그려보는 하느님 아들의 삶은 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어떤 빈틈을 발견하기 어려울 만큼 견고하고 또 신앙의 실존적 차원에서 직면했던 문제들-신앙이 삶의 풍성한 열매로 이어지지 못하는-을 돌이켜 볼 때도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 밖으로부터 나에게 다가오고 나를 건져주는 초월적 하나님을 부르고 의지하며 경배하는 데 너무나 익숙한 신앙의 자리에서 볼 때 너무나 낯설고 너무나 큰 괴리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초탈하여 돌파하는 경험을 통해 몸으로 깨닫는 수행인 것이다. 내 안에 하느님 아들의 삶에 대한 소망이 자리잡고, 갈급한 갈증의 요구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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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0 2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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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5-21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공부는 않하고요, 숙제는 늘 벼락치기로...^^::
오늘 이정배 교수님께서 고3 아들 만큼만 자고 공부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성실한 열정에 감동받았습니다....
어제 문자가 넘 늦게 도착해서 답장을 못했습니다.
권위주의적 종교 양태에 붙들린 집단신경증으로서의 신앙....심각하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통찰력이죠. 오늘 아침에 제 책꽂이에서 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에리히 프롬의 "정신분석과 종교"라는 책을 오랜만에 뽑아봤습니다. 여기 저기 설익은 비판과 비평을 적어놓은 흔적이 남아 있어서 아련한 그리움과 부끄러움이 느껴졌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빌려드릴께요.
향린교회는 제 친구와 깊이 관련된 교회입니다. 기장(기독교장로교)측 교회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교회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가 기장측에서 공부마치고 전임으로 나가 있습니다. 녀석이 사역 하던 교회 이름도 향린교회였어요. 그 향린교회와 관련된 교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를 일궈나가보고 싶은 욕심도 있죠. 저도 이제 살림의 신학을 읽어야겠네요.
콩나물 시루에 물뿌리듯....^^::

2004-05-27 2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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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5-29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안에서 하느님을 찾는다면 밖에 있는 하느님은 필요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나요: 아마도 그것과는 조금 다른 뜻인 것 같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아들 곧 하느님이 태어나게 되면 내가 곧 하느님이 되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내 안에서 샘솟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면 되니까요. 그러나 밖에 있는 하느님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안과 밖이 하나로 통한 것이니까요. 그 밖의 하느님과 만나게 되지만 그 하느님을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되죠.

 또한 밖에 있는 그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질이나 본성을 묘사하려는 인간 언어의 한계, 상징성 때문에 어떤 표현도 완벽할 수 없으며, 결국 왜곡된 상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런 밖에 있는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다..:  네 그런 인식론적 맥락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단순히 진짜 하느님이 누구이고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똑같이 품을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밖에 있는 하느님을 정말 정확하게 묘사하고 인식할 수 있다해도 그 역시 여전히 내 마음과의 거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죠.

에크하르트 자신도 하느님을 부르고 기도하는 것 자체를 금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변론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

에리히 프롬이 분류하듯이 권위주의적 종교와 인간 중심적 종교를 생각할 때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권위주의적 종교는 내 밖에 나와는 너무나 다른 나와 차이가 크면 클 수록 더 능력이 있는 권위적 신을 바라보는 종교를 말하죠. 인간중심적 종교는 오히려 인간 안에 신적인 것을 눈뜨게 하고 스스로 하느님이 되도록 하는 종교를 말합니다.  에크하르트를 신비적 인본주의라고 하는 길희성 박사님의 표현이 보다 적확한 것 같습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지만 그 인간 안에 하느님과 일치되는 신비의 영역이 있고 그것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는 관점이죠. 하느님의 능력이 뿌리가 되지만 그 뿌리가 내 안에 자리잡고 자라나는 것이죠.

성경 말씀에도 하느님의 마음을 품으라고...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라고...하느님처럼 온전하라는 말씀이 있죠....그렇게 생각한다면 조금은 다르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영성".....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는 영성, 너무나 소중한 뿌리인 것 같습니다.  


2004-05-28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