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겨울 눈꽃 열차에 자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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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6-19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무늬님, 사람이 눈꽃보다 더 아름답네요. ^^

물무늬 2004-06-20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또 찾아주시니 마음둘바를 모르겠네요.
정말 감동했습니다.
님의 서재에 많은 귀한 님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너무나 반갑고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님의 서재에 슬쩍 들리겠습니다. ^^
 


학부 시절

축제에서

자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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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와 함께한 산행
자기가 끓여온 따듯한 커피 한 잔...
이 사진에 있는 내 얼굴에 번지는 잔잔한 미소에는 바로 포근한 자기의 시선이 비춰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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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길희성 지음 / 분도출판사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출원과 환원의 파사칼리아(passacaglia)

; 길희성,『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을 돌아보며…….1)



떠남: 하나님을 놓아버린 삶?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 그것은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 교회에서 너무나 자주 강조되는 신앙의 무늬(pattern)이다. 물론 강조되는 강도가 높을수록 그렇게 살아가는 신앙인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짙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런 삶을 추구해야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그 거대한 흐름을 가르며 역류하는 목소리가 중세의 수도사 마이스터 엑카르트로부터 도도하게 흘러오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경계하고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을 놓아 버린다.”(p.9),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든 … 어떤 목적을 위해 봉사하거나 일해서도 안 된다.”(p.271)라고 강조한다. 한국 개신교의 보수적인 신앙에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도 용납될 수도 없는 망언이자 불경일 것이다. 원죄의 뿌리를 타고난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의 은총만을 의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개신교의 신앙인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그의 영성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엑카르트 영성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삶을 살아가는 神人合一이다. 그는 이를 ‘하나님 아들의 삶’으로 묘사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 안에 이미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과 본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외부에 의지할 필요가 없고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위해서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이 되게 하려는 뜻이라고 본다.

이런 그의 영성은 보수적 신앙의 터를 흔들어놓기에 충분할만큼 과격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게 한다. 도대체 그는 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선언한 것일까? 또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고 또 왜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선포한 것일까? 이런 의문을 따라 보수적 신앙의 터를 뒤로하고 엑카르트의 신비사상의 지평으로 발걸음을 떼어본다.


풍경: 출원과 환원의 파사칼리아

개신교 보수적 신앙의 관점에선 충격적일 그의 사상은 맥긴이 엑카르트 사상의 구조를 표현한대로 출원出源과 환원還源의 역동적 존재론(p.65), 혹은 '유동의 형이상학'(metaphysics of flow)2)을 통해서 그 전체적인 얼개를 가늠해볼 수 있다. 엑카르트의 모든 사상 구석 구석에는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와서 다시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출원과 환원의 역동적 무늬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모든 존재가 궁극적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流出)고 본다. 그런 만물의 유출에는 크게 두 차원이 있다. 하나는 삼위일체 위격들이 신성(gottheit)으로부터 출원하는 내적 비등(bullitio)이다. 출원의 급진성은 이처럼 신조차 신성으로부터 출원한다는 관점에 있다. 신성은 무차별적 하나이자 활동이 없는 "초존재적 무(Nichtheit)"(p.79)이고 다양한 만물이 산출되는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근원이다. 오직 일치만이 있고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이 신성3)으로부터 신이 나온다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과 언어로 포착되는 신, 인간이 대상화할 수 있는 신의 상대성과 한계를 직시하면서 보다 근원적인 차원이자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향하게 하는 그의 급진적 영성이 여기에서 터져 나온다.

다른 하나는 만물이 신성으로부터 출원한다는 외적 비등(bullitio)이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외부의 무無로부터 만들어진다는 전통적 창조론과 달리 신성으로부터 출원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출원된 만물은 창조의 목적인 신성을 향한 여정에 있고 결국 존재의 근원인 신성으로 돌아가 안식을 누리고 완성을 이룬다고 본다. 출원과 환원의 창조론에서는 전통적인 창조론에서 하나님과 만물 사이에 강조된 무한한 거리와 질적 차이보다는 근원적 일치가 강조된다.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왔고 그 근원에 의존하기 때문에 피조물 “자체만”으로는 순전히 무無이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는 신적 존재이다. 그리고 늘 하나님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아야만 한다는 차원에서 계속적 창조가 강조된다.

신성으로부터 출원한 모든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출원과 환원의 과정을 통해서 신적 완성을 이룰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환원의 가능근거’와 ‘환원의 길’이다. 신화神化의 과정인 환원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동일한 원천이 있다는 독특한 관점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인간에게 창조되지 않은 신성이 이미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신성이 흘러넘치면(출원出源) 신성으로 돌아가(환원還源)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신화의 가능근거는 바로 인간의 지성(intellectus)이다. 지성은 자신을 완전히 비움으로서 모든 대상을 인식하는 속성을 지니기에 존재라기보다는 무無이다. 엑카르트는 신의 본질을 바로 이 '지성'으로 본다.4)  무無의 속성을 지닌 지성이 ‘하나로서의 하나님’의 성품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 ‘존재 없는 존재’인 신성이 바로 "초존재적 무(Nichtheit)"이자 무차별적 하나이기 때문에 자신을 비우는 무無로서의 지성을 본성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신의 본질인 지성이 인간의 영혼에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이 지성을 토대로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신의 지성이 인간 영혼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인간 영혼의 근저가 곧 하나님의 근저이고 하나님이 깃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는 터라고 본다. 바로 그 영혼의 근저에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발화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낳음으로써 인간은 하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신의 근저가 곧 영혼의 근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상인 인간 영혼의 지성은 하나님과 인간이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근거가 된다는 것이다.5)

결국 신성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환원은 영혼의 근저에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엑카르트는 하나님 아들의 탄생이 초탈과 돌파를 통해서 이뤄진다고 본다. 초탈(Abgesciedenheit)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과정이자 그 완성으로서 인간 영혼의 근저에 있는 신성을 회복하고자 벌거벗고 순수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을 가로막은 모든 장애물-이기적 욕망만이 아니라 일체의 생각과 관념, 모든 상像들에서 선행이나 하나님에 대한 모든 관념들에 이르기까지-을 비우고 순수해지는 것이다. 초탈은 어떤 행위를 금하거나 세상사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사랑, 자기 의지에 의한 집착, 소유욕 등을 비우는 자기 부정, 철저한 자기 부정을 의미한다. 이런 초탈은 하나님마져 놓아버리고 신의 근저, 신성의 무無에까지 도달하는 돌파를 통해서 완성된다. 초탈의 극치는 대상화된 하나님을 놓아버림으로써 하나님과 순수하게 하나가 되고 그 스스로 본질로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돌파(Durchbruch)가 바로 초탈의 극치이자 완성으로서 신과 영혼의 근저로 돌파해 들어가서 하나님과 “이름할 수 없는 벌거벗은 하나”(p.213)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초탈과 돌파를 통해서 영혼의 근저에 순수성을 회복할 때 비로소 하나님 아들이 탄생하게 된다. 영혼의 근저에 이미 각인되어 있던 하나님의 모상이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서 드러나고 결국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통해서 신성이 회복되고 발현되는 것을 하나님 아들의 탄생이라는 은유로 표현했다. 영혼의 근저에 탄생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한 성자 하나님과 본성상 조금도 차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가 성부와 본성상 완전히 하나이듯, 인간 역시 하느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엑카르트 신비주의의 얼개를 살펴보면 마치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변주곡인 파사칼리아(passacaglia)를 듣는 듯하다. 파사칼리아는 짧은 주제(motive)를 곡 전체의 저음부에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그 위에 다양한 멜로디와 장식음들을 입히는 대표적인 변주곡 양식 중에 하나이다. 바로 이런 파사칼리아처럼 삼위일체 하나님, 모든 존재의 창조와 완성, 그리고 인간의 신인합일에 이르기까지 ‘출원과 환원’은 근음(根音)이자 바탕음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그의 영성 사상은 출원과 환원의 반복되는 주제로써 ‘하나님의 인간됨(聖肉身, 出源)’을 통한 ‘인간의 하나님됨(神化, 還源)’을 연주하는 신학적 파사칼리아인 것이다.


돌아옴: 기도로 움켜쥔 손과 못 박혀 펴진 손

엑카르트 신비주의의 풍경, 출원과 환원의 신학적 파사칼리아가 남긴 잔영을 품고 다시 떠났던 자리로 돌아온다. 도대체 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와 인간의 신화神火를 역설한 것일까? 출원과 환원의 파사칼리아로부터 그 가능성과 방법을 엿볼 수 있었다면, 신화神化의 절정인 하나님 아들의 삶으로부터는 그 이유를 보다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영혼의 근저로 돌파해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삶은 무엇보다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가지고 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부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족적이고 자유로운 삶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미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과 본질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의 외부로터 어떤 도움도, 심지어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근저로부터 샘솟는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위해서만 살아간다.

이런 하나님 아들의 삶은 철저한 자기 부정인 초탈과 돌파를 통해서 절대적 긍정으로 도약하는, 영성의 궁극적 차원을 보여준다. ‘하나님 없이’, ‘이유 없이’, ‘목적도 없이’ 등의 표현은 하나님과 나, 안과 밖 사이의 모든 간격이 해체되는 철저한 신인합일의 경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밖으로부터 나를 압도해오는 절대적 권위의 하나님을 부정함으로써 내 영혼의 뿌리로부터 샘솟아, 하나님이 아닌 영역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긍정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될 때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이유와 목적이 없다는 것은 나와 하나되지 않고 밖으로부터 강제되는 어떤 목적도 부정함으로써 모든 존재의 이유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절대긍정의 세계를 의미한다. 바로 신비주의적 무신론, 신비주의적 휴머니즘이다.

또한 하나님 아들의 삶은 내면과 실천, 믿음과 행위, 종교적 삶과 일상, 성과 속의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그 사이로 비껴가면서 하나로 아우르는 삶이다. 어느 한 쪽에 얽매이지 않고 영혼의 근저로부터 샘솟는 신적 생명을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이다. 하나님 아들의 삶이 일상사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영혼의 근저로부터 샘솟는 신성을 통해 보다 활동적으로 살아가는 영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엑카르트의 지배적 관심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경험보다는, 진정한 인간성을 발휘하는 본질적 삶 곧, 실천적 영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들의 삶은 종교적 형식이나 교리, 신앙의 내용 등을 강조하는 제도적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해체와 급진적인 전복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 하나님 아들의 삶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어떤 매개도 남겨두지 않는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놓인 어떤 것-나의 밖에 있다면 하나님마져도-도 우상이며 참된 구원의 걸림돌일 뿐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면 구원될 수 없고 교회의 전통 밖이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경계는 해체된다. ‘예수의 믿음’이 나의 뿌리로부터 샘솟아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는가, 그 삶을 스스로 누리고 있는가만이 중요할 뿐이다.

하나님마져 놓아버릴 만큼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철저히 강조하는 엑카르트의 영성은 하나님만을 굳게 움켜잡으려는 한국 개신교 신앙의 그늘을 비춰준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본다는 그 열정 이면에 하나님을 통해 영원히 살려는, 하나님을 이용해 고통과 어려움을 피해가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그의 영성은 십자가에 못 박혀 힘없이 펴진 손을 보여줌으로써 도구화된 하나님을 움켜잡은 집착어린 손, 고통을 피하려는 기도로 움켜쥔 두 손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에 집착함으로써 스스로도 하나님 아들의 자유를 상실하고 욕망과 두려움의 종이 되어버린 신앙인의 자화상을 폭로한다.

우리의 신앙은 밖으로부터 다가와 나를 건져주는 초월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경배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런 신앙의 자리에서 볼 때, 하나님 아들의 삶은 너무나 낯설고 아찔한 괴리감마져 안겨준다. 그러나 그의 영성은 왜곡되고 미숙한 신앙의 자화상을 폭로해준다. 그리고 그 괴리감과 두려움을 핑계로 물러서서는 안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도구화된 하나님을 놓아 버리고,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하며, 일상의 도처에서 하나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게 하는 하나님 아들의 지평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신성으로부터 유출된 소외의 상태임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으로 환원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 그것이 엑카르트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와 인간의 신화神化를 강조하는 이유이다.

이젠 신화神化의 리듬, 곧 유출과 환원의 파사칼리아가 내 영혼의 근저로부터 울려오도록 신의 근저로 돌파해들어가 가만히 귀기울여야 하리라. 내 안에 태어난 하나님 아들의 첫 울음소리가 영혼의 근저로부터 울려 퍼지기를 기다리는 설레임으로 굳게 움켜쥔 두 손을 십자가 위에 펴놓아야 하리라.


 


[미주]

1) 이 글은 2004년 3월-5월까지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에서 함께 읽어나간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의 마지막장을 덮은 후에 마음에 남은 잔영을 되새겨본 것이다. 본문 가운데 주 텍스트에서 인용하거나 참고한 부분은 페이지 수만 표기한다.

2) 심종혁,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와 영성』, ‘신학과 사상’ 제46호(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3/겨울), p.13.

3) 레이몬드 B. 블레크니 엮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 이민재 역(다산글방, 1994), p.362,363.

4) 엑카르트는 신의 무성無性을 말할 때는 지성으로서의 신을, 피조물의 무성을 말할 때는 존재로서의 신을 강조한다. 하나의 진리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보는 차이이다. (p.122-124)

5) 물론 하나님의 지성은 인간의 지성처럼 외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모든 것을 지니고 아무런 매개 없이 자기 안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순수한 지성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의 모상으로서 순수지성인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다. (p.120) 그리고 인간의 지성은 순수지성이 아니라 지성적이지만 하나님의 모상과 형상으로서 신의 지성성에 참여한다고 본다.(p.147)


[참고도서]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분도출판사, 2003)

심종혁,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와 영성』, ‘신학과 사상’ 제46호(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3/겨울), pp. 7-39.

레이몬드 B. 블레크니 엮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 이민재 역(다산글방,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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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다 2011-05-18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무늬님, 뿐나입니다. 엑카르트의 사상에 대해 문외한인 제가 읽기에도 감동이 될 만큼 정말 잘 정리되고 의미있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글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추천 꾹~ 누르고 갑니다! ^^

물무늬 2011-05-1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의 마음으로 읽어주시니 제가 더 감사드려요. 엑카르트와 불교의 접촉점에 대한 연구는 참으로 흥미롭고 설레는 주제입니다. 설레는 연구 되셔요. *^^*
 

동방교회 전통에서의 신화(theosis) / John Meyendorff

이 글은 오늘날 서방 기독교를 기독교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으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방교회 전통에 대해 관심을 둔다. 저자의 말처럼 동방교회 전통이 오히려 교회사의 첫 천 년간 영적으로나 지적으로도 주도적 역할을 해왔고, 오늘날 서구의 세계관들이 심각한 도전을 받는 맥락 속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저자는 그 동방교회 전통 중에서 神化라는 독특한 신학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론, 구원론, 죄론, 성령론, 그리고 삼위일체 신론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규명하고 또한 神化에 대한 오해를 제거한다.


저자는 아타나시우스의 유명한 표현을 통해 첫 부분을 시작한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 바로 이 표현이 받았던 오해처럼 神化라는 개념이 신플라톤 철학의 언어이기 때문에 범신론, 혹은 철학적 사변의 산물인 것처럼 오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神化는 오히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종말론적인 개념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중심적이라 함은 神化라는 개념이 "그리스도가 말씀(Logos)이면서 모든 피조된 인간의 본보기"(p.324)라는, 동방교회 전통의 독특한 그리스도론에 근거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기에 완전한 인간"(p. 324)이라고 한다. 바로 神化의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론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연합이 본보기로 제시된 것처럼 인간은 神化를 통해서 자신의 궁극적 운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神化의 모범인 그리스도론은 서방교회와는 다른 동방교회 전통의 죄론과 구원론에 근거한다. 동방전통에서 죄는 아담의 죄에서 시작된 원죄와는 달리 아담의 죄에 의해 피조세계가 사탄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는 개념이다. 이것은 인간이 된 하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해결된다. 이때 "구원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래의 운명-"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을 회복하는 것"(323)이다. 동방전통이 인간성에 대한 절대적 부정인 원죄 개념을 거부하고 동시에 구원을 출발점(from)만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to) 지향성으로 꼴짓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神化의 가능성이자 토대로 제시되는 나머지 한 축은 보혜사 성령이다. 저자는 성령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는 부분에서 성령을 개인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앙이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성령의 개인성은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제한될 수 없다. 특히 성령은 교회론의 절대적 근거로서 분별과 판단의 기준이 된다. 교회의 성직구조나 체제를 거부하지 않지만 판단과 분별의 최종적 권위는 성령에게만 속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성령의 신적 임재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세상을 구원하는"(p. 327) 神化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론에서 출발하여 성령론으로 이어지는 神化에 대한 설명은 "하나와 셋"이라는 부분에서 결국 삼위일체론으로 확장된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보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을 인격으로 관계맺는 위격들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위격적 삼위일체론에서 神化는 "신적 생명 안에 인간들이 받아들여지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이미 자기들의 상호관계 안에 인간을 영접하시는 세 개의 영원하신 위격들 사이의 사랑의 교제"(p. 328)라고 본다. 결국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神化된다는 것은 신적 생명 안에서 나누는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를 의미한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모범이기에 神化는 인간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유지하고 상호 보완성과 사랑 안에서 이뤄진다.

저자는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神化)이 범신론도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융화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본질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초월적이기에 부정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고-부정의 신학, apophatic),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본질의 융합이 아니라 하나의 은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되는 神化는 그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인격적 융화를 거부하면서 본질과 에너지를 구분하고, 신적 교제의 실체성을 위해 위격적 삼위일체론으로 개념화하였다.

결국 神化는 그리스도의 모범를 따라 성령의 힘으로 완전한 인간을 이뤄 삼위일체의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서방 개신교 전통이 칭의로서의 믿음을 강조하면서 성화의 과정이 약화되었던 한계성에 대해 보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기독교 진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하나님의 초월성과 삼위일체의 인격적 관계에 근거하면서도 서방기독교 전통에서 볼 때 새로운 차원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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