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사렛 사나이가 지금 저 안에서 매맞고 있는 것 모르지. 꼼짝달싹 못하게 해놓고 때리니 안 맞고 배겨. 그 사내 어떻게 생각해,
자네들은?"
"알 바 아니지요."
알패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침까지도 땅에 뱉었다. 나는 이런 사내올시다라고 그는 예수를 향해 마음 속에서 그렇게 외쳤다. 내가 가지고 있는게 이게 답니다. 당신을 도와줄 용기도 곁에 다가갈 힘도없소. 글쎄 나라는 인간은 이게 다라니까요.
"봐, 저기 끌려나온다. 저 사내 빌라도에게 재판받으러 가는 거라구."
...
하인은 자기와 같이 웃어주면 해서 알패오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알패오는 입을 쩍 벌리고 울며 웃었다. 그 사람은 남을 위해 우는 것은 복된 일이라고 말했었다.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길 줄 알라고도 했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웃고 있다. 나는 이런 사내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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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읽혀지고 회자되어 혐오의 대상인 ‘북‘에게서 괴물의 상이 벗겨지기를 희망한다.
- P6

재영 학자 권헌익도 올해 한국전쟁 발발 70주기를 맞이해서 번역 소개된 자신의 책서문에서 "그런데 한반도의 전쟁은 70년이란 세월이 홀렀음에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아직 역사가 되길 거부하는 놀랍도록 예외적인 사건 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그 휴전 상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기원이라든가 역사적 파급효과, 그 끝나지 않은 전쟁이내포하는 인류 미래사적 함축 등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는의미라고 생각한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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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가 정확히 언제 〈절규〉를 그리게 된 영감을 얻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뭉크는 파리 유학 시절인 1892년, 습작 노트에 에케베르그 언덕에서 받은 느낌을 고스란히 기록해두었다.

친구 두 명과 함께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해는 지고 있었다. 하늘이 갑자기 핏빛의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나는 우울감에 숨을내쉬었다. 가슴을 조이는 통증을 느꼈다. 나는 멈춰 섰고, 죽을 것같이 피곤해서 나무 울타리에 기대고 말았다. 검푸른 피오르와 도시 위로 핏빛 화염이 놓여 있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가고 있었고, 나는 흥분에 떨면서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을 관통해서 들려오는 거니 하고 끝없는 비명을 느꼈다.
- 뭉크의 노트 (MIM T 2367, 1892)

이 노트를 읽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뭉크의 노트에 ‘절규‘라는 말은 없다는 점이다. 절구, 누가 처음 한국어로 번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어 스크리크Skrik는 있는 힘을다하여 부르짖는 ‘절규‘ 보다는 너무 놀라 지르는 외마디 소리인 ‘비명‘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이 그림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데도 ‘비명‘이라는 단어가 도움이 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 ‘절규‘라고 번역한 사람 역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 소리를 내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뭉크의 노트에 따르면, 소리를 내는 쪽은 인물이 아니라 자연이다. 인물은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 없는 비명을 듣고 있는 것이며, 그 거대한 비명에 괴로워하며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 P56

그렇기에 <아픈 아이>에서 뭉크는 사실주의적 화법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드러내다 보니 기술적으로 이를 보완할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그저 자연을 관찰하듯이 볼 수는없는 법이다. 그것은 분명 강렬한 비극적 경험으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찢어지는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었으리라.
훗날 뭉크는 이 실험적인 그림을 혁신적인 예술이라 불렀다. 그는, 아픈 아이는 자신의 예술 세계에서 중심적인 작품을 끌어낸씨앗이 되었을 뿐 아니라, 20세기 여러 미술 사조를 탄생시킨 문제작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뭉크에게 아픈 아이는 절규>나 마돈나 보다도 더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 P105

회화만 따져봐도 뭉크는 1885년부터 화가로서 말년인 1927년까지 4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아픈 아이>를 반복해서 그렸고, 여러버전의 판화로도 제작했다. 누이 소피에의 죽음을 목격한 강렬했던경험은 평생 잊히지 않았고, 그 잔상을 완벽히 그림으로 표현해내는것이 바로 뭉크가 도달하고 싶었던 예술의 경지가 아니었을까.
또 한편으로 뭉크는 그렇게 반복해서 <아픈 아이>를 그리면서 슬프고 아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치유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 두려움에 맞서는 것이라 했다. 누이의 죽음을 반복해서 그리고 판화로 제작하면서 어린 시절의 비극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신도 언젠가 겪게 될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P108

어느 날, 뭉크는 그곳에서 검은 피부의 이국적인 여성이 남성을유혹하는 장면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살아 있는 인간의 본능과감정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것인지 각성하게 된다. 뭉크는 이때받은 강렬한 느낌을 글로 남겼고, 이후에도 여러 번 곱씹어 생각하면서 자신의 예술이 지향해야 할 바를 고민했다.

더 이상 실내에 있는 사람, 책 읽는 사람이나 뜨개질 하는 여자들을그려서는 안 된다. 살아 숨 쉬고, 느끼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인간을 그려야 한다. 나는 그런 종류의 그림들을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의 신성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할 것이다.
뭉크의 노트(MM N 63, 1929)

뭉크는 자신이 세상에 보여줘야 할 그림은 살아 숨 쉬고, 느끼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강렬한 삶의 순간들이야말로 진정한 감동과 경의를 끌어낼 수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파리 유학을 거치며 뭉크는 눈으로 대상을 관찰해서 그려내는 화가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마음으로 느끼고 이를 시각적으로 담아내는 화가로 변모하게 된다. 이는 뭉크의 예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닺 왜냐하면 당대 혹은 이전 세대들과 완전히 다른 예술을 추고하겠다고 결심한 것이기 때문이다. 뭉크는 가장 창조적이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도시, 파리에서 새롭고 혁신적인 예술의 개념을 생각해냈고, 또 그것을 이끌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심은 오래가지 않아 행동으로 옮겨졌다. - P198

이후 뭉크는 자신의 예술이 정체됐다고 느낄 때마다 생 클루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니스, 오스고쉬트란드, 에켈리에서 그 흔적을 찾을수 있다. 고독은 뭉크의 예술 세계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 P202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뭉크가 노르웨이에 있는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 그림에 대한 영감을 찾을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저녁을 나는 혼자 창가에 앉아서 자네가 여기 있지 않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지 모른다네. 자네가 여기 있다면 우리는같이 달빛 속의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텐데, 강 건너편에 불빛들이 보이고, 길 아래의 가스 등이, 그리고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등을 단 증기선들이 보인다네. 방 안은 어스름한데 달빛이 바닥에던지는 푸른색이 도는 사각형 때문에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되지.
뭉크의 편지 초안 (MM N 1922, 1890)

생 클루에서의 외롭고 단조로운 생활은 뭉크가 깊이 생각할 수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고, 더불어 그의 예술이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이때 뭉크는 동일한 주제로 여러 그림을 묶는연작의 개념을 처음으로 구상하기도 했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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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광야에라도 가보나. 예루살렘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의 황량한 사막이거든. 예수가 요한교단에 몸 바쳐서 수도한 장소임에는 틀림없어. 거기서 출발하는 게 에수의 진짜 모습을 조금은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 - P61

안드레아도 그들과 섞여 돌을 주워서는 예수의 무리에게 던졌다.
그가 던진 돌이 예수의 살 꺼진 볼에 맞아 한줄기의 피가 그의 얼굴에 흘러내렸다.
"쓸모도 없는."
사람들과 같이 안드레아도 소리를 질렀다.
"무능한 사내."
예수는 그저 쑥 들어간 눈으로 슬프게 모두를 바라볼 뿐 참다못한제자 한 사람이 양팔을 벌리며 대꾸했다.
"대관절 이 사람이 당신들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요?"
"아무 것도 안 했어.‘
누군가 말했다.
"아무 것도 못했단 말야."
"그렇지만 이 사람은 당신들을 사랑하려고 했잖았소, 당신들의 고통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느냔 말이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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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예술은 그의 인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뭉크는 평생 외롭고 고독했다. 어린 시절엔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고, 청년이 되어서는 사랑을 갈구하고 그에 집착했다. 비극적 이별과 좌절을 겪고, 병마에 시달리면서 정신병을 앓기까지 했다. 공황 장애, 우울증, 불면증, 정신 분열, 불안 장애, 환각, 피해망상 등의 정신병적 증상들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민하고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과 불행에대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고, 자기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그림의 대상을 찾았다. 대표작 <절규>를 비롯하여 〈마돈나> <불안〉 〈아픈 아이〉 〈이별〉 〈키스> 등의 모티프를 그는 몸소 겪은 경험에 가져왔다. 그래서 그의그림은 마치 그림으로 된 일기장을 보는 듯하다.
뭉크의 작품이 담고 있는 사랑, 불안과 공포, 외로움과 고독의 감정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삶의 근원적인 감정들이다. 따라서사람들은 그의 그림에서 뭉크라는 한 개인이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게 된다. 나와 나의 가족, 나의 친구의 이야기를 뭉크의 그림에서 보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많은 이들이 동감과 교감의 지점을 찾는 것은 이 때문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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