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요?"그러면 나는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혼란스럽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나는 모른다.‘는 혼란이 아니다. 혼란은 ‘나는 모르지만 알아야 한다.‘ 혹은 ‘나는 모르지만 알 필요가 있다.‘인 상태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알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는 일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스스로에게 자아의식을 주기 위해 개념적으로 자신에 대해 규정짓는 일을 중단할 수있는가? ‘생각‘에서 정체성을 찾는 일을 멈출 수 있는가? 자신이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알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으면 혼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갑자기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면 실제로 당신은 평화롭고 투명한 상태로 들어가, 생각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었던,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더 가까워진다. 생각을 통해 자신을규정하는 것은 자신을 한계에 가두는 일이다.
- P130

당신은 상대방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마음속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당신이 현재 상호작용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특히 그렇다. 그러니까 ‘당신 자신‘
이 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이 전혀 아니라, 당신이 생각하는 ‘나는누구인가‘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당신 자신에 대해 만든 개념적 이미지가 당신이 창조해 낸, 그 상대방에 대한 개념적 이미지와 관계를맺는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도 아마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에고에 바탕을 둔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는 실제로는 마음이 만들어 낸 네 개의 개념적 정체성들의 관계인 셈이다.
그 정체성들도 결국은 허구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 많은 갈등이 있다는 것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진실한 관계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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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아야 하고 자신 안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은이것이다. 누군가에게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낄 때마다, 그것은 당신 안의 에고이다.
- P126

자신의 역할과 동일화될수록
관계의 진정성은 사라진다.
사랑은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당신의 순수한 있음을 알아볼 때
그 알아봄이 이 세상 속으로
두 사람을 통해
더 많은 ‘순수한 있음‘의 차원을 가져다준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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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에고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에고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인간의 집단적 에고를 소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행동이 에고에서 나온 것이며인간의 집단적 기능장애의 표현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만 그것에 대해 대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그것이 개인의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때, 마치 그것이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대응하려는 충동이 사라진다.
에고에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의 온전한 정신을 끌어내는경우가 종종 있다. 온전한 정신이란 조건 지어진 상태와는 반대인조건 지어지지 않은 의식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뿌리 깊은 무의식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질적인단계를 취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 경우에도 상대를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최고의 보호 장치는 깨어 있는 의식을 갖는 일이다. 당신이 에고라는 무의식을 그 개인의 문제로 분류하면 누군가는 적이 된다. 대응하지 않는 것은 허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다. 대응하지 않는 것의 다른 말이 용서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눈감아 주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에고를 꿰뚫어 모든 인간 존재의 본질인 온전한 정신을 보는 것이다.
- P96

다시 말해, 그 원한을 계속 살아있게 하는 생각들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들에 대한 신체적 반응인 감정을 느껴야 한다. 원한을 내려놓으려고 시도하면 안 된다.
원한은 내려놓거나 용서하려고 시도해도 성공하지 못한다. 원한이거짓 자아의식을 강화시켜 에고를 제자리에 유지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음을 당신이 보게 될 때, 용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보는 것이 곧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원수를 용서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에고가 지배하는주된 구조 중 하나를 해체하라는 의미이다.
과거에게는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머무는 것을 막을 힘이 없다.
오직 과거에 대한 당신의 원한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원한이란 무엇인가? 오래된 생각과 감정의 응어리이다.
- P100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만큼 에고를 더 강화시켜 주는 것은 없다. 옳다는 것은 하나의 관점, 의견, 판단, 이야기 등과 같은 정신적 입장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옳기 위해서는 당연히 틀린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에고는 옳기 위해 누군가를 틀리게 만들기를 매우 좋아한다. 바꿔 말해, 자신의 더 강한 자아의식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틀리게 만들 필요가 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상황도 불만과 반응을 통해 틀린 것으로만들 수 있다.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는 주장은,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과상황에 대해 자신을 상상 속에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에고가 갈망하는 것이 그 우월감이며, 그것을 통해 에고는 자신을 강화시킨다. - P102

에고의 정체를 알아차려야 한다. 에고는 집단적 기능장애, 즉 인간 마음의 정신이상 증세이다. 에고의 정체를 알아차리면 더 이상그것을 누군가의 정체성으로 오인하지 않는다. 일단 에고의 정체를 알면,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 것도 한결 쉬워진다. 그것을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불만을 품거나 책임을묻거나 비난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누구도 잘못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있는 에고일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증상이 심할 수 있지만 모두가 똑같은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음을 알면 자비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에고가 지배하는 인간관계의 드라마에 더 이상기름을 붓지 않는다. 기름은 무엇인가? 대응이다. 에고는 그것을 먹고 번창한다. - P112

유명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진정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이유가여기에 있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이미지를 만들거나 자기를 추구하는 에고에 지배되지 않는 관계이다. 진정한 관계에는 상대방을향해 열린 깨어 있는 관심이 있으며, 그 안에는 어떤 바람도 없다.
그 깨어 있는 관심이 ‘현존‘이다. 그것은 모든 진정한 관계에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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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상상과 감정이 도움이 되기를 많이 바라지만, 그것들의 도움없이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 있을 때 그것은사라집니다. … 그것이 사라지면 우리는 기도한다는 생각을 버립니다. … 기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채 많은 것이 일어나게 놓아두는 것입니다. 그것을 건드리지 않은 채, 방해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 P191

머튼은 그가 ‘정신 기도mental prayer
‘라고 부르는 것(문자적 의미로, 기도할 때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에 집중하고 발달시키는 것)을 우리가 극복하기를 바란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에게기도란 하나님에 대한(혹은 그 점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어떤 ‘흥미로운 생각‘을얻는 것이 아니다(<새 명상의 씨> 235쪽). 묵상(그는 이 단계에서 기도를 이렇게 부른다)의 진정한 목적은 ‘피조물과 현세의 걱정 근심으로부터 해방되는‘ 법을(<새 명상의 씨> 236쪽)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그가 <마음의 기도>에서 ‘모름의 앎‘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묵상에서 좌절당 하고 나면 통찰이 시작된다.

묵상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까? 그 반대입니다. 이런 당황스러움, 어둠,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대한 고뇌, 이 모든 것이 묵상의 진정한 성취입니다. … 묵상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섰을 때 실제로 우리를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데려가는 것입니다. 묵상은 우리를 더 이상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없는 어둠으로 이끌어 결과적으로 맹목적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서게 억지로 떠밀기 때문입니다. ( <새 명상의 씨>, 237-238쪽, 강조는 머튼)

그러므로 마음의 평화와 거둠을 발견하려면 마음의 평화와 거둠에 대한 욕망에서 초연해져야만 한다.

기도하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초연하지 않으면 완전한 기도는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새 명상의 씨> 227쪽)
- P172

그것은 우리의 영적 삶에서 ‘건기‘라고 불리는 오랜 기간을 설명해 줍니다. 그때는 기도하고 싶고 책을 읽고 싶지만 무엇을 해도 많은 것을 얻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그것을 계속합니다. 건기에는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고, 때로는 도대체 그런 수고를 할 가치가 있는지 의아스럽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서 조언을 구하지만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합니다. …설령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해도 그럴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그것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 P192

우리가 기도할 때, 기억이 작용한 결과로 우리의 영혼이 기도하기 건에 생각한 것들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이런 까닭에 기도하기 전에 신앙심 깊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P190

"궁극의 근원에서 실재를 직접 순수하게 경험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 이므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남으려면 관상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Merron 1981, p.95). 나는 지금 마음챙김운동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에 이런 머튼의 직관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지구적 과학기술 전문가, 대기업, 군사체제(한두 번쯤 머튼의 신랄한 비난의 표적이 되었던 것들)의 지배를 받아 비인간화되고 상품화된 세계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려고 탐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머튼에게 관상과 마음챙김은 모든 실재하는 것 안에서 실재를깨우치게 되는 돌연한 알아차림의 은총‘이다 (<새 명상의 씨> 17쪽), 그리고 그에게 그런 깨우침은 틀림없이 사회적 양심을 일깨운다.
- P185

말년의 머튼에게 있어서「새 명상의 씨」의 첫머리에서 강조한 존재에 대한 알아차림을 이루기 위해서는 좌선하는 것만큼이나 마음챙김으로 예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961년에 출간된 다른 책 <논란이 된 질문들ssured Quection>에서 머튼은 예술의 목표는 관상을 고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세상을 보는 방식‘이며예술가의 내면의 아비투스를 개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된 세계 안에서안정성, 질서, 통합을 보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생활만이 진실이며,
지상의 생활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이상주의 철학은 이제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
일상생활 속의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일들과 인간적인 문제들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 궁극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선과 맹금>45쪽).
현재 순간을 알아차림하는 것 즉 ‘지금의 힘‘에 의해 보다 넓은 우주적 알아차림이 일어나고 창조 안에 있는 우리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 P181

관상은 ‘지적이며 영적인 삶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관상은 온전히 깨어 있고, 온전히 활동하고, 살아 있음을 온전히 알아차리는 생명 자체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경이입니다. 생명의 신성함과 존재의 신성함에 대해 저절로 우러나오는 경외입니다. (<새 명상의 씨>15쪽)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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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결국, 그것도 아마 가까운 시일 안에, 그 반지를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될 때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한가요? 그것을 내려놓으면 자신이 더 작아지나요? 그 손실로 인해서 당신의 존재가줄어드나요?"
마지막 질문 후에 몇 분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그녀는 평화를 되찾은 듯 보였다.
"마지막 질문이 나로 하여금 중요한 무엇인가를 깨닫게 했어요.
먼저 내 마음에게 그 답을 물었어요. 마음이 말하더군요. ‘맞아,
당연히 나는 작아졌지.‘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질문을 했어요. 나는 정말로 줄어들었나?‘ 이번에는 생각으로 대답을 찾지 않고 느꺼 보려고 했어요. 그러자 갑자기 나 자신의 순수한 있음 Being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렇게 느낀 적은 처음이었어요. 만약 이토록 강렬하게 나의 ‘순수한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분명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죠.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느낄 수 있어요. 평화로우면서도 매우 살아 있는 무엇인가를."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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