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이후 150년이 지났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진화론을 만난 지 15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다윈이 교회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이방인인 까닭은, 우리가 아직도 진화론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P38

공포 영화에서 제일 두려울 때는 괴물은 보이지 않고 음향과 조명만이 가득할 때입니다. 그런데 일단 괴물이 등장하고 나면 공포감은더 이상 커지지 않습니다. 다윈도 그렇고 진화론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윈이나 진화론을 마주하지 않고, 그냥 주변에서 만들어낸 허상에 혼란스러워하고 소음에 놀라고 있습니다.
- P39

그리스도교는 지난 2,000년의 여정에서 여러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만남이 처음부터 즐거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장애물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헬레니즘도 장애물이었고, 중세에 이슬람을통해 만난 아리스토텔레스도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만남을 장애물로 여기지 않고 도약의 디딤돌로 삼았습니다. 어쩌면그들을 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는지도 모릅니다. 과학도 그런 만남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윈도 진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 P39

소통과 대화 속에서 미몽의 신앙과 독백의 신학을 넘어서는 그리스도교를 보게 될 겁니다. 소통과 대화를 통해서 무심한 물질과 냉정한 이론을 넘어서는 과학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때에는 다윈의진화론이 신앙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다윈과 진화론이 그리스도교를향한 선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너털거리면서 웃든지 계면쩍게 웃든지 다윈이 웃으면서 머무를 수 있는 열린 그리스도교를 기대합니다. 소통의 길에 들어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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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4-27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근본적으로 종교의 모든 관심은 우주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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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상실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창조의 동기가 부족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해나 시걸hanna Segal은 이렇게 썼다. "우리 안의 세계가파괴될 때, 그것이 죽고 사랑이 없을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파편화되고 우리 자신이 무력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우리 세계를 새롭게 개조하고, 조각들을 재조립하고, 죽은 파편들에 생명을 불어넣고, 생명을 재창조해야 한다." 원예는 생명을 작동시키는일이고, 죽은 파편과 같은 씨앗은 우리가 세계를 새로이 개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P34

상실에 대처하려면 우리는 안식처를 발견하거나 재발견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위로와 공감을 느껴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은워즈워스에게, 자연 세계의 온화한 면모는 위로와 공감을 주었다.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은 애도에 대한 한 논문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시인은 우리가 애도할 때 자연도 함께 애도해준다고 말한다." 그런 뒤 클라인은 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좋은 느낌‘을 회복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우리 일부가 죽는 것과 같다. 우리는그런 정신적 고통을 외면하고 싶지만 어느 시점에 의문이 생겨난다.
우리가 스스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정원을 돌보고 식물을 가꿀 때면 항상 이별과 재회를 맞닥뜨린다. 성장과 부패라는 자연 주기는 애도가 생명 주기의 일부라는 사실, 그리고 애도하지 못하면 영원한 겨울에 사로잡히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도와준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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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뿐 아니라 지금도, 원예에서 누리는 가장 큰 기쁨은 씨앗을 싹 틔우는 일이다. 씨앗은 자신이 어떻게 될지 말해주지 않는다.
크기도 그 안에 잠든 생명과 관계가 없다. 콩은 폭발적으로 자란다.
특별히 아름답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거의 난폭할 만큼 강력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담배풀 씨앗은 먼지만큼 작아서, 어디 뿌렸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씨앗만 보면 구름처럼 피어나는 향기로운 꽃은 고사하고 어떤 시시한 일도 해낼 기라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그렇게 한다.
나는 새로운 생명과 애착을 형성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느낀다. 거의강박적으로 씨앗과 모종을 자꾸자꾸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온실에 들어갈 때면 이제 막 피어오르는 생명의 고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숨까지 참는다.
- P19

정원에 나가 한참 동안 일을하다 보면 녹초가 될 수 있지만, 내면은 기이하게 새로워진다. 식물이아니라 마치 나 자신을 돌본 듯 정화한 느낌과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이것이 원예 카타르시스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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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도전적인 일들이 일어날 때 사람들과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당신이 자신을 어느 정도 깊이 알고 있는가를 가장잘 보여 준다.
자신에 대한 시각이 좁고 제한되어 있으며 자기중심적일수록,
당신은 타인에 대해서도 자기중심적이고 무의식적인 부분에만 눈이 가고 거기에 더 반응한다. 상대방의 ‘잘못‘,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잘못이라고 당신이 해석하는 부분을 상대방 그 자체로 본다.
즉, 상대방의 에고만을 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에고를 강화한다. 그 사람 안의 에고를 뚫고,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에고
‘그 자체를 본다. 그러면 그 에고를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당신 안의 에고이다.
- P244

자기자신을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이 된다는것은 마음의 내용물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동일화를 멈추는것이다.
- P250

일어나는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내면이 일어나는 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일어나는 일‘이란 물론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이미 그러하게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일어나는 일‘
은 내용물, 즉 이 순간이 취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간은 이 순간뿐이다.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면적으로 무저항의 상태라는 뜻이다. 마음속에서 좋다거나 나쁘다는 분류표를 붙이지 않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 있게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삶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지금이라는 순간과의 내적인 조화를 기초로 행동할 때 그 행동에는 삶 그 자체의 지성의 힘이 작용한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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