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은폐된 음성을 찾아서]
" 왜 성서가 교회 안에서 침묵을 지키는가?", 제임스 D. 스미스 저, 김득중 역 (컨콜디아사, 1995)
[ 비 평 : 성서의 은폐된 음성을 찾아서 ]
최근 몇 년간 인터넷 사이트에는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무수하게 늘어가고 있다. 그들은 성서 비평학의 지식과 현대과학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성서와 기독교의 모순을 지적하고 비난하고 있다. 서점에서는 기독교의 문제를 비판하고 객관적 학문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책들이 주목받고 있다. 젊은이들이나 고등교육을 받은 청장년층 기독교인들은 이미 맹목적 진리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이런 정보를 접하고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여전히 문자주의적 관점을 암묵적으로 고수하면서 어떤 대책도 없이 방치하거나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다.
이미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이 정체되고 오히려 감소하면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한 상황에서 안티-기독교의 영향은 그 흐름을 가속화시킬 것이 자명하다. 성서와 교회의 단절, 성서에 대한 정직한 지식이 은폐되고, 성서가 침묵당하고 있는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이 책은 최근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런 문제상황을 돌아보고 해결해야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한다.
저자의 분석과 지적을 통해서 한 사람의 신학도이자 신앙인으로서의 실존적인 고민에 대한 어떤 통찰력을 발견하게 된다. 성서학과 조직신학, 종교학과 철학 등의 학문을 통해서 신앙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문제는 '교회의 신앙 속에서 이것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많은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진보된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배우지만 교회에서는 문자주의적 성향의 보수성에 근거한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주된 풍토이다. '그 속에서 어떻게 해야할까?' 에 대한 대답은 두렵고 조심스러우며 망막한 것이었다. 신학대학에서는 바로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대부분 각자가 스스로 해결할 문제로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교인들에게 학문적 지식이 필요할까?'라고 반문하는 것은 중대한 오산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신앙, 정직한 신앙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무지의 허용'이라는 것이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다가가 성서가 스스로 말하게 한다면 성서는 충분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신학적 접근 방식을 통해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맛본 경험을 교회의 장에 적용해야할 당위성과 그것의 충분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성서학과 설교학과 조직신학 등의 상호공조가 중요하고 특히 모든 신학이 신앙의 자리에서 신자들에게 전달할 현대적 의미의 차원을 염두 해둬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한다. 물론 한 주에 네 다섯 번의 설교를 해야하고 교회에서는 아직도 보수적 신앙이 주류인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홀로 실천해나간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극복해야할 문제 상황일 뿐이고 그 당위성에는 충분히 수긍하게 된다. 이제 성서와 교회의 그 아찔한 간격, 그 공간에 울려퍼질 성서의 은폐된 음성을 찾아야할 뿐이다.
그러나 역사와 계시와의 관계를 논하면서 성서의 권위를 다시 확립시킬 방법이 성서에 대해서 충실하게 설교하고 그 설교와 교육에 응답하여 그들의 공동체 생활이 산 증거가 되게 하는 것 외에 없다(p.191)는 저자의 주장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물론 이런 방법이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의 권위는 삶의 경험 속에서 그 말씀을 재체험하고, 성서에 암시된 기독교 영성을 다양한 전통의 영성훈련을 통해서 체화해나갈 때도 역시 회복될 수 있다. 성서의 권위는 설교나 교육과 같은 언어 전달을 통한 지적 인식의 차원과 함께 삶과 몸으로 인식하는 깨닫음의 차원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 이외에는 역사 속에 나타난 계시의 실재로 나아갈 방법이 없다(p.183)는 주장 역시 수긍하기 어렵다. 이런 주장은 성서의 전승과 전통 밖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을 은폐하고 성서의 전통 안으로 가둬버리는 교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방인 중에 선택된 첫 번째 예이고, 성서에는 이미 멜기세덱이나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성서 없이도 하나님과 함께 한 경우들이 나타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성서 전통 밖의 세계를 방치시키는 하나님은 모순된 모습일 수밖에 없다. 최소한 그 밖의 영역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신비로 남겨두는 것이 인간의 신앙과 신학을 절대화하지 않는 겸허한 자세일 것이다.
[내용 요약]
1. 성서의 점차적 침묵
오늘날 성서를 중심에 둔다는 기독교에서 교회의 설교, 교육, 기독교인들의 의식에서 성서가 점차 침묵을 당하고, 그 결과 비성서적, 비기독교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교회에서 성서를 교육할 시간과 통로의 부족, 성서학적 결과를 반영한 설교를 준비하는 어려움, 주제 설교 방식, 신자들이 개인적 신앙의 용도로만 읽는 것, 19세기 독일의 신학자들에 의한 구약 성서에 대한 경시 등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그러나 주요원인은 성서학자들과 설교 및 교육 책임자들, 설교자들과 교인들, 그리고 신학교의 독립된 학과들 간의 의사소통이 단절된 데 있다.
2. 해석학과 설교학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성서 본문의 본래 의미로부터 현재에 적용될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의 부족으로 인해 곤경에 처해있다. 이는 본문의 본래 의미를 찾아 현대의 언어로 옮기는 해석학과 복음을 가장 적절하게 전달하도록 하는 설교학 사이에 계속 되어온 의사소통의 단절이 극복되고 밀접한 상호 공조가 이뤄질 때 극복될 수 있다.
3. 해석학적 질문의 재개
성서학에서 등한시되었던 해석학적 원리를 다시금 논의하게 한 대표적인 도전은 바르트와 불트만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해석학적 질문의 세 가지 기본적인 통찰은 첫째 학문적 객관성이라는 관망적 태도를 버리고 해석자의 신앙적 주체성으로 나아간 점, 둘째 해석의 임무가 성서 내용을 본래의 언어와 사상으로부터 현대인이 이해 가능한 언어로 번역하는 것까지라고 본 점, 셋째 성서의 궁극적, 결정적 내용은 하나님의 계시이고, 인간의 문제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발견케 하지 못하는 한 성서의 본질적인 말씀은 감춰진 것으로 본 점이다.
4. 해석의 컨텍스트
인간의 인식과 들음은 늘 해석의 컨텍스트 안에서 일어난다. 성서 역시 독자의 역사적 실존이라는 복잡한 컨텍스트 안에서 해석되고, 그 의미는 그 컨텍스트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해석과 본문 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존재하고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해석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성서무오설이나 어느 신학자의 해석 혹은 학문적 객관성만을 절대시하는 성서학의 경향 등은 어떤 특정한 해석을 성서 자체와 동일시하여 성서의 다양한 메시지와 의미를 침묵하게 만든다.
5. 無知의 허용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이 발전하였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그에 대한 무지가 허용되고 있다.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통로는 강단, 교회 학교, 교회 도서관이 있다. 이런 무지의 허용은 목사직 박탈에 대한 두려움, 평신도에게는 오히려 혼동을 일으킬 뿐 불필요하다는 중대한 오산, 목회자들이 본문의 본래 의미로부터 현재 의미를 밝히는 데 필요한 준비교육의 불충분함 때문이다.
미국 교회에서는 많은 성서학자들이 순수한 학문과 비신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런 단절이 공고히 되었다. 비평과 복음이 대립적으로 이해된 미국 교회의 상황 속에서 그런 입장을 취해야 안전하였고, 또 그럴 때 신학이 교회에 종속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는 경향 등이 원인이었다.
6. 역사 비평의 신학적 의의
관망자적 해석학이 책임있는 신학적 해석학보다 더 학문적인 것은 아니다. 학문적 방법론은 그 주제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성서는 역사적인 문서인 동시에 신학적인 문서이기 때문에 신학적 해석의 방법론 역시 요구된다. 성서의 본래 의미에 관심을 둠으로써 본문의 자유와 바른 해석의 기준을 마련한 역사 비평이 신학적인 면에 끼친 공헌; 첫째, 본문과 그에 대한 해석 사이의 거리를 인식케 함. 둘째, 성서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세계와의 연속성을 수립함. 셋째,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모든 것을 상대화시킴으로써 교묘한 우상숭배를 제거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회복시킴. 넷째, 성서를 다룰 때의 정직성과 지적인 온전성의 요구. 다섯째, 성서 기자들의 다양한 음성을 회복시킴.
7. 권위의 재해석
성서가 기독교인들로부터 멀어지게 된 한 요인은 금세기에 성서가 권위를 잃어간 것이다. 권위 상실의 요인은 첫째 현대인이 맹목적인 복종을 거부하게 된 것, 둘째 타문화, 타종교, 과학 등의 현대적 지식의 발전, 셋째 역사 비평으로 인해 성서 자체에서 권위를 찾기 어려워진 것이다. 성서 본문의 내용이 현대에 알맞은 의미를 갖게 되면 나름의 권위를 갖게 된다. 그러나 예수, 사도들, 예언자들에게 하나님의 권위가 그랬던 것처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확립될 수는 없다.
8. 역사와 계시와의 관계
계시는 역사 속에서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실성이기에 계시와 역사는 분리될 수 없다. 계시는 역사 속에 현실로 나타나고,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계속적인 관계, 곧 계시를 떠나 이해될 수 없다. 역사비평의 비판적 방법론을 경시해서는 안되지만 역사의 재구성은 과거의 외관적 실재로 제한되는 한계가 있다. 성서는 외관적 실재에 의해 입증 될 수 없는 계시의 차원을 가지고 있기에 그 권위를 가시적, 외면적, 역사적인 것에 근거시킬 수 없다. 그래서 성서의 본문은 본래의 역사적 상황뿐만 아니라 본래의 온전한 신학적 컨텍스트 가운데서 들어야 한다.
9. 간격의 확대
성서와 계몽기 이후의 현대인 사이의 커다란 간격이 생겼다. 이 문제에 대해서 보수주의는 독자로 하여금 성서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유지케 하려했고, 자유주의는 성서에서 현대인이 수용할 수 있는 것만을 남겨두려 했다. 이 두 방식과 또 교회에서 역사, 교회사, 성서의 전체를 결합시켜 주는 하나님의 목적을 가르치지 않은 것, 역사학의 발전도 그 간격을 더욱 확대시켰다. 하지만 역사적 방법론의 적용이 오히려 성서의 독특성을 드러내주었다. 역사적 방법론의 적용에 대한 두려움은 성서 자체가 증언하는 진리의 능력에 대한 신뢰감의 결핍이다.
10. 비신화화의 문제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실존주의적 관점에 의해서 내면화, 개인화되고, 하나님을 창조주와 역사의 주로 외면화하는 진술을 신화로 배척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성서와 현대인의 간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성서 해석에 비신화화의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비신화화에서 해석자가 지닌 실재관이나 신학 등의 전제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해석의 결과가 결정되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11. 성서 없이 계시 없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계시가 성서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계시는 교회가 그 전승을 통해서 교회의 기원을 계속 기억할 때에만 유지된다. 성서 없이 계시 역시 없기 때문에 성서와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변증법은 유지되어야만 한다. 또한 성서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필요한 말씀을 상실하지 않도록 어느 하나라도 무시해서는 않된다.
12. 성서를 동시대적으로 만드는 방법
성서와 교회의 역사는 성서를 어떻게 동시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성서의 해석자는 성서의 세계와 자기 시대의 세계 속에 살면서 이 두 세계의 연속성을 찾아내고 성서의 세계를 '통해서' 자신의 시대를 바라봐야 하고, 자신의 시대에 알맞도록 성서의 세계를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 後記: 실제적인 문제들
성서와 교회의 단절을 극복하려는 실제적인 적용을 위해서 우선 신학교는 성서 분야, 신학 분야, 실천 분야에서 배운 것들을 상호 연관시켜 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성서학에서는 본문비평과 주석방법의 목적이 설교에 놓여져야 한다. 목회 현장에서는 신학적 연구를 계속해나가면서 교회에서 성서 연구를 그룹에게 가르쳐야 한다. 특히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학생들에게 전해질 효과를 생각할 때 중요하다. 이런 모든 일에서 목사와 설교자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기에 충분한 준비가 어렵지만 예언자들과 사도들처럼 우선 다가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주시는 말씀을 찾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