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에 대한 두 가지 연구

예수는 누구였는가?
헨드리커스 보어스 저, 박익수 역(대한기독교서회, 1996)

예수는 누구인가?
존 도미닉 크로산 저, 한인철 역(한국기독교연구소, 1998)


1. 들어가는 글

예수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은 그의 가르침과 삶에 대한 초대교회 신앙인들의 체험과 해석에 근거한다. 이런 '예수에 대한 믿음'은 '예수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지만 교회사 속에서 예수의 믿음은 중심을 차지하지 못했다. 근원인 예수의 가르침과 삶보다 '예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오강남 저, 예수는 없다 (현암사, 2001), pp. 192-195 참고) 

물론 교회의 신앙 전통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예수에 대한 믿음은 예수 당시와 초대교회의 콘텍스트에 종속되어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콘텍스트와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예수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콘텍스트 속에서 살아 숨쉬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삶과 믿음에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그것에 대해 직접 응답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이 예수의 신앙을 어떻게 해석하고 재구성했던 것인지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역사적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 각기 독특한 방법으로 연구해 나간 크로산과 보어스의 책은 바로 이런 필요성을 충족시켜 준다. 그 두 가지 연구 방법과 결과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 연구가 가져다 주는 통찰력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H. 보어스의 역사적 예수: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
려 한 정치 혁명적 메시야.

보어스는 "예수는 누구였는가?"에서 공관복음서에 사용된 전승들의 역사를 추적하고 이를 근거로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고 있다. 즉, 공관복음서의 본문을 분석하여 전승들을 편집하고 수정한 방식들을 추적하고, 원전승을 창조적으로 변형한 방식들이 암시하고 있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그려본 것이다.

이런 접근방식에 의해서 재구성된 역사적 예수는 대략 다음과 같다. 비교적 안정된 가정 출신의 청년 예수가 금욕주의자이자 종말론적 묵시운동가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의 추종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세례 요한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새로운 전환을 선포한 '결정적, 종말론적 인물'로 보고 갈릴리로 돌아가 억눌리고 소외된 자들 속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해 나갔다.

그런데 예수 추종자들 중 일부는 예수를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을 가져다줄 메시야로 보게 되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의 추종자들이 무장했던 것, 예수가 제자들의 무장을 독려했다는 전승, 예루살렘 입성, 성전정화 등으로 볼 때 예수 역시 이를 위한 무력항쟁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게 한다. 어쨌든 예수는 로마인들에 의해서 메시야를 자처한 사람으로 사형을 당했다. 유대 당국은 예수를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나 로마인들의 유혈보복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예수의 사형에 관여한다. 그런데 그 죽음 이후에 그의 추종자들에게 예수는 단순한 메시야 이상의 의미로 계속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보어스는 이런 역사적 예수의 죽음 이후에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죽음이라는 상황을 극복하려 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교 신앙이 발생했다고 본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 현현을 경험하고, 예수를 정치적 해방의 메시야가 아니라 죽음을 통해 영광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오실 메시야로 재해석했으며, 그들의 신앙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종교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화의 과정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함으로 인해 예수의 실천은 그 의미를 상실해 갔지만, 기독교는 예수의 실천에 대한 전승을 보존했다고 본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마태의 진술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예수의 행동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존했다는 것이다.

2. 존 도미닉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 대안공동체를 통해 사회변혁을 추구한 현자

크로산은 "예수는 누구인가?"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의 연구 결과와 그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질문들에 대해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간략하고 쉽게 설명한다. 그는 예수의 사회와 유사한 모든 사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예수가 살았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교차문화적 연구', 예수 당시의 그리스도-로마 및 유대인들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 연구', 신약성서 밖의 복음서까지 포함하는 '본문에 대한 연구', 이 세 가지 방법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한다.

그 방법론을 통해 재구성되는 역사적 예수는 다음과 같다. 예수는 문맹인 하층계급으로서 묵시종말적 설교가인 요한의 세례를 받고 그의 운동에 동참하지만, 후에 방향을 전환을 했다. 요한처럼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세계로 지금 여기에서 들어가야 한다고 봤고,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들이 실현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여 이로써 현재 삶의 구조에 도전했던 것이다. 예수는 공개된 저항과 은폐된 저항의 경계에서 '무상의 치유'와 '개방된 식사'에 근거한 농민공동체를 의도했다. 이로써 극빈층(집없이 유랑하는)과 집이 있는 가난한 자 사이의 의존적 관계성을 형성하고 체제적인 악에 대해 비판하고 도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중개자나 중보자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계속 유랑했다. 그런데 예수는 유월절이라는 긴장감이 최고조인 시기에 성전파괴 곧 정치, 종교적 억압구조에 대한 상징적 파괴를 행함으로 인해 국가사범을 다스리는 잔인한 처벌 방법인 십자가형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크로산은 부활절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예수님의 뜻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이고, 부활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한 경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한 가지 표현양식이고 오랜 세월을 통해서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사실 이외의 것들은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신앙과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구약을 근거로 거꾸로 조회해서 장착한 재구성이라고 본다.

3. 두 가지 역사적 예수 연구의 통찰력과 한계

서로 다른 두 가지 역사적 예수 연구는 19C와 20C 중반까지의 연구를 통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들과 발전의 측면을 보여준다. 비록 그것이 완전한 모습이나 객관적인 확실성을 완벽하게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역사적 예수의 삶과 행동의 특성과 윤곽을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그동안 성서학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가 직면했던 한계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를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보어스와 크로산의 차이에서는 일종의 발전도 엿보인다. 예를 들면, 보어스는 예수를 중산층인 목수로 보지만, 크로산은 하층계급의 목수로 본다. 이런 차이는 크로산이 방법론으로 적용한 교차문화적 연구를 통해서 고대사회에 중산층이 없었고 농민계급은 주로 문맹이었음을 발견하고 적용한 결과가 가져온 차이였다. 크로산의 연구결과가 압도적인 우월성을 지닌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다양한 방법론을 적용하여 오류를 최소화하는 방식의 중요성을 보여주었고, 이것이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 응용해야할 주목할 만한 진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현대인들에게 전해주는 것은 이성을 포기하지 않고도 신앙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로산의 책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독자의 편지에 이런 점이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현대인들에게 상징적, 은유적, 종교적 표현들을 사실(fact)과 동일한 것으로 믿도록 강요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은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걸림돌이다. 이로 인해 교회를 떠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앙의 언어로 교리화된 예수 담론이 현대의 컨텍스트에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를 갖는 새로운 담론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희생양이라는 제의적 상징으로 형상화된 기독론과 이에 근거한 구원론은 현대의 컨텍스트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어렵다. 그러나 보어스의 관점에서처럼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실천으로서 약자를 돕는 예수의 실천이나 크로산의 예수처럼 개방된 식탁과 무상의 치유를 통한 대안 공동체로써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실천은 오늘 우리의 삶에 구체적인 의미와 재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예수 담론이 형이상학적, 교리적 거대 담론의 공허함에서 일상적 실천의 담론의 생명력으로 성육화하는 역동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일상적 담론의 실천적 적용이 날카로운 체제 비판의 기능을 지닌다는 측면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역사적 예수 연구는 교회의 기존 신앙에 불안감과 반감을 가져온다. 절대적 기준으로서의 정경에 모든 신앙적 근거와 판단을 뒀던 신앙체계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절대 유일의 기준은 해체되고 서로 다른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만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중심의 해체가 크로산이 본 예수의 사역과 일맥상통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브로커도 인정하지 않고 직접 관계하도록 한 예수의 유랑. 정경과 그것에 대한 권위적 해석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또 다른 브로커가 아닐까?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신앙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근원적으로 재고하게 함으로써 그런 자유의 공간과 그 속에서 배워가는 길을 엿보게 한다. '예수에 대한 신앙'은 교회의 전통을 근거로 삼아왔다. 하지만 '예수의 신앙'은 고통받는 민족의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직접적 만남을 통해서 구약을 새롭게 깨달은 신앙이었다. 그 신앙을 따르는 기독인은 역시 오늘 우리 이웃의 아픔의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성서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서 이미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에 다양한 시공간에서 각기 어울리는 해석을 추구하게 할 수 있다. 바벨탑을 허물면서 하나였던 인간의 언어가 해체되지만 오히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써 복음이 다양한 언어 세계로 침투해가듯이 고통받는 이웃을 바라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성서에 창조적 삼투압(渗透壓)을 가하게 한다.

이런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큰 맥락에서 볼 때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방법론의 역사학적 측면의 한계가 있다. 역사학은 보편적 학문으로써 인간 이성에 의해서 설명한 가능한 것만을 객관적 진리로 허용한다. 성서와 같은 문서를 분석할 때는 사실과 의미의 긴장 관계에 직면하게 된다. 이 때 역사학적 비평은 인간 이성에 의해서 가장 높은 개연성을 지닌 것으로 판단되는 사실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의미의 차원으로 모두 환원시키는 경향을 지닌다. 결국 모든 의미는 가장 높은 개연성을 지닌 사실의 지배를 받게 되고, 초월적 사실은 거세된다. 또 분명 객관적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크로산이나 보어스의 어투는 상당히 많은 부분 단정적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개연성에 기댄 역사적 재구성이다. 그러므로 "∼이다"가 아니라 "∼일 수 있다"가 가장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균형을 잃게 될 때 의미의 다양한 차원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동정녀 잉태는 단지 개연성이 낮다는 이유로 역사적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개연성은 낮지만 마리야가 미혼모였는데 이것을 당시 문화에서 위인의 잉태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연성이 낮아도 일어나면 100%의 확률을 지닐 수 있다. 결국 개연성이 낮은 사실을 통한 의미의 차원에 개방적이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크로산이 기적에 대해서 논하면서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항상 해온 것이라는 전제를 사용한다."(p.134)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너무 내재적인 차원, 의미의 차원으로 가둬두려는 경향이다. 기적 이야기에는 의미의 차원이 있다. 하지만 기적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전제된 신념일 뿐이다. 초월적인 차원이 닫혀 있어야할 어떤 근거도 없다. 그것을 수용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모른다고 해야 객관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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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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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적 변주 ]

희랍의 3대 비극작가 중 한 사람인 소포클레스의 대표적 비극 오이디푸스는 인간이 삶 속에 직면하게 되는 비극적 운명에 대해 묻고 있다. 인간의 의도하지 않은 잘못, 아니 의도적으로 피하려 안간힘을 써도 자신의 손에 의해서 벌어지고 마는 불행한 사건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묻고 있다.

오이디푸스와 그의 친부모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그 엄청난 불행을 피하고자 갖은 애를 쓴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려 하고, 아들은 친부모인 줄 알았던 양부모의 곁을 떠난다. 하지만 결국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신탁이 이뤄진 현실이 드러나고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 여왕은 목을 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 왕은 여왕의 옷에서 황금장식 바늘을 빼 자신의 눈을 찌른다.

비극의 결말부에 암시된 질문은 “오이디푸스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집약된다. 친부를 죽이고 친모와 살을 섞은 죄, 하지만 자의적 선택이 개입되지 않았기에 정죄할 수 없는 상황. 그 대답은 다시 포이보스 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극적 구성을 통해서 독자들의 숙제로 던져주는 것 같다.

그러나 운명의 절대적인 힘 앞에 처한 인간의 현실과 책임 소재는 암시해 준다. 자식들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오이디푸스에게 들려진, “이제는 아무것도 더 지배하실 생각을 마십시오”라는 말은 적어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지배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운명의 절대적인 힘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겸허히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죄악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의 눈을 찔러버림으로써 가시적 차원에 근거해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을 정죄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를 어떻게 처분할 지에 대한 신탁은 무엇이어야 할까? 적어도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을 전제하고 스스로 저지른 죄만 그 사람의 책임이라고 보는, 서구의 전통적 윤리관으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아니 그것에 의하면 모르고 저지른 것이기에 ‘부친살해’, ‘근친상간’의 죄는 물을 수 없다. 책임은 운명의 신에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버지 아닌 자를 죽인 것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 되고, 어머니 아닌 자를 범한 것이 근친상간이 되버리는 현실은, 의도하지 않아도 내 손에 묻어있는 아버지의 피는, 자살해 버린 어머니는, 형제인 자식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봐도 볼 수 없었던 진실이 이젠 눈을 찔러 보지 못하게 되도 보이게 된 것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종반부에 암시된 것처럼 그냥 자신의 교만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친딸과의 근친상간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올드보이의 결말처럼 그 은폐된 진실을 더 깊이 묻어버리면 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런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들은 인간의 행복과 지배는 무력하기 그지 없다는 비극 오이디푸스의 결론에서 너무 멀리 가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우주 만물이 연기적 상관관계 속에 있다고 보는 불교의 관점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딜레마가 오히려 여실한 진리를 드러내주는 것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아버지 아닌 자가 아버지이고 어머니 아닌 자가 어머니인 현실은 “가주에 있는 소가 풀을 뜯자 익주에 있는 말이 배불렀다”는 화엄종 초조(初祖) 두순(杜順)의 싯구(이찬수, 생각나야 생각하지 (다산글방, 2001), p. 54.)에 담긴 연기적 현실과 상통한다. 한 톨 밥알에 온 우주가 담겨 있고, 너가 곧 나인 무아의 연기적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무아와 공의 관점은 바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행동과 상통한다. 불교는 가시적 세계에 근거하여 존재자들이 서로 분리된 것으로 판단하고, 더 좋아하는 것에만 집착하는 분별지와 차별이 고통의 뿌리라고 본다. "너와 나의 단절", "독립된 존재자로서의 실체"는 허상일 뿐이라는 무아와 공의 관점은 분별지의 근원을 상징하는 눈을 찌름으로써 탈은폐되는 진여의 세계를 드러나게 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절망적인 운명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개(半開)한 참선의 시선에 비친, 하나로 이어진 세계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지배하지 말라”는 말은 남의 부모를 내 부모처럼 남을 나처럼, 내 자식에게만 집착하지 않고 차별적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로 변주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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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25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3-2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꾸뻑..... 님께서 예일여고 출신이시라니 전 대성고 나왔습니다. 제 여동생도 예일여고 출신인데..."세상 넓고도 좁구나" 싶어 놀랍고 더욱 반갑군요. 아마 그 때 저를 보셨다 해도 지금은 못알아보셨을 것입니다. 연신내에서 20대 중반까지 보낼 때는 지금 보다 20kg이상 가벼웠으니까요^^:: 대전에는 아내와 함께 살고 지금도 서울에 올라오면 연신내에 있는 가족의 집에서 지냅니다.

불교적 변주는 짧게 써야만 하는 한계가 있어서 자세히 설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버리고 말았죠^^:: 그래서 앞을 줄이고 중심 주제인 뒤를 늘릴까 생각도 했었는데 게을러서 그냥 두고 있습니다.

어제는 드뎌 님을 찾았습니다. 두번째 발제 질의응답 시간에 뒤쪽에서 어떤 여자분의 목소리가 들렸죠. 제 생각에 내용 상으로 볼 때 사회과학에 대한 조회가 깊은 전공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제 옆에 있던 동한이(경상도 사나이)가 "형 저분이 그분이야."라고 알려주더군요. 얼굴도 확인을 했는데 저 역시 내성적인 편(INTP)이라....

사실 초대교회사에 대한 글은 다 읽고 쓴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에 대해서 떠오른 생각과 문제의식을 붙들고 싶어서 적은 것이죠. 그 때 그 때 과제물 따라 가면서 관심있는 책들 찝쩍거리는 정도입니다. 사실 과제물도 아슬 아슬하게.....

목요일은 제게도 참 긴 하루이곤 합니다. 청강도 하고 학회모임도 하고...욕심이 앞서서 몸이...종교사회학 발제 시간은 제게도 어색하기 그지없습니다. 질문할 때마다 이름을 말해야하고 또 발제방식도 철저하게 학문적으로 접근해 가는 것에 근거하기 보다는 교회학교 수련회 비슷한 느낌이라...어색하고 아쉽고....연극과 뮤지컬...대학원 과정에서 그런 방식으로 발제를 한다는 것이 제게는 좀....하지만 교수님께서 그런 것을 좋아하시는 안타까운 현실과 님의 말씀처럼 배점이 높아서...저도 걱정입니다.

공신력이 떨어지다니요....뭐 그런 말씀을. 사실 들어와서 보는 님들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게다가 이렇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님께서도 부담 갖지 마시고 들려가시고 흔적 남기실 것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편하게 놀다 가세요....그럼 다음에 또.... 


2004-03-30 0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3-30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밤을 새우고 새벽기차를 타고 왔습니다. 사실 그 책 내용과 관련되는 문제에 붙들려서 다른 책들 읽느라 시간을 넘 많이 보냈었죠. 그 내용들이 서평을 쓰는데 반영될 줄 알았는데 결국 소용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그냥 썼으면 빨리 끝났을 것을 다른 공부만 한참했군요.
이제 서울집에 돌아오니 나른한 피곤이 밀려듭니다. 한 숨 자고 일어나서 또 책읽어야 겠죠. 내일 있을 교회사, 읽고가야 그나마 수업을 즐길 수 있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잘했었는데 글을 쓰는데는 도움이 되는 것같습니다^^::
님께서도 밤새운 다음날이라 피곤함이 밀려오시겠군요. 푹쉬시고 행복한 저녁 만끽하세요.
 

이 영화는 적어도 내게는 흥미나 재미를 주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기타노 특유의 유머"라고 하는 것이나 "그만의 스타일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는 등으로 긍정적인 평을 하는 것이 나와는 거리가 있었다. 지루하고 밋밋한 줄거리, 유머같지도 않은 썰렁함, 검술장면에 사용된 어색한 컴퓨터 그래픽....

하지만 이 영화에는 마음에 남는 요소들이 있었다. 우선 이제까지 접했던 무술영화와는 전혀 다른 검술장면. 다른 영화들은 화려하고 멋지게 짜여진 검술 대결을 보여주었지만,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전광석화처럼 단칼에 베어버리고 사람의 살이 베어지고 피가 솟구치는 모습을 정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실제와 다른, 또 다른 과장의 요소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검으로 싸우면 저럴 것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투사와 황소의 대결에서 그 화려한 복장으로 최후의 일격 직전까지 이어지는, 황소와 투우사의 춤은 사라져 있었다. 짧은 침묵의 순간으로 압축된 대결 구도와 단칼에 솟구치는 핏줄기 속에 화려하게 과장된 긴장감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 늘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는 주인공 자토이치. 이런 새로운 형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잔혹함과 그것이 일어나는 풍경의 냉혹한 무심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다른 요소는 이런 냉혹함과는 대조적으로 사소하고 비천한, 약한 존재들이 중심으로 옮겨지는 전복의 표현들이었다. 사무라이들의 행렬과 스쳐가는 자토이치의 장면은 줌아웃되면서 배경 구석에 있던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중심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들의 괭이질 소리는 배경 음악의 리듬을 형성한다. 또 길가에 세워진 허수아비(사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가 뽑혀 굴러다니자 자토이치는 적을 죽이러 가다가도 길을 멈추고 원래 자리에 꼽아둔 후에 다시 길을 간다 .

마지막 장면에서 탭댄스로 표현된 마을 축제에는 이런 전복의 상징이 집약되어 있다. 주인공 자토이치와 악당들을 제외한 조연들이 함께 추는 탭댄스에서는 조연들이 중심으로 등극한다. 동시에 영화 전체의 배경 속에 감춰졌던 발걸음 소리, 그 나막신 소리가 축제의 리듬을 엮어간다. 배경에 억눌려있던 미세한 소리가 축제의 흥을 돋우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소품과 배경이 중심으로 등극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맹인 검객의 보지못함은 이런 전복의 강한 상징성을 압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지 못하기에 오히려 더 많이 볼 수 있는 역설. 볼 수 있다는 교만이 놓쳐버리고 억압해 버리는 세미한 소리와 감각들이 오히려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게다가 이 새로운 자토이치는 못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지 않는다. 영화의 끝장면에서는 오히려 눈을 뜨고 걷다가 길가의 작은 돌맹에 걸려 넘어지면서 자토이치 스스로 "이러니까 장님이라는 소릴 듣지"라는 자조 섞인 독백으로 영화를 끝낸다. 본다는, 아니 "다 보고 있고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자기 기만이 오히려 장님이라는 자조.

그리고 이 영화에서 악당 두목은 배후의 인물에 조정을 받은 것이었고, 그 배후의 악당 조차도 더 깊이 감춰진 뜻밖의 인물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자토이치는 이중으로 감춰진 배후의 두목을 찾아내지만 단지 그의 눈만을 베어버린다. 모든 악행의 배후이자 근원은 바로 눈으로 상징되는, 시각적 세계에 붙들린 욕망과 집착이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너와 나를 나누고 보이는 것에만 그리고 그 중에서 더 좋은 것에만 집착하며 연약하고 무가치하게 "보이는" 너를 억누르는 차별지(差別知)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보지 않음으로 인해 보이는 "새로운 세계"는 쾌검의 현실성과 함께 '해체와 재구성의 한 흐름'을 형성한다. 검술의 화려한 치장을 해체하여 현실의 잔혹함을 드러내주고, 교만한 시선(모든 걸 볼 수 있다는)이 놓친 주변을 중심으로 등극시키는 흐름은 중심을 주변으로, 주변을 중심으로 전복시키는 새로운 재구성의 미학이다.

또한 그 잔혹함과 배경의 침묵에 속에 방치되있던 일상의 소품들이 중심으로 등극하면서 그 냉혹한 침묵을 잔혹함으로 보는 것이 편견임을 드러내준다. 우리의 삶이 살아가는 현실이 잔혹함으로 가득하지만 그 잔혹함을 무정하게 방관하는 듯한 주변의 풍경이 오히려 자기 살을 내어주며 그 모두를 살려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변의 침묵은 냉혹한 방관이 아니라 고통과 눈물을 삼키며 모두를 살려내고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는 인고의 신음소리인 것이다. 봄이 피어나는 소리, 숲이 숨쉬는 소리, 지구가 우주의 공간을 춤추는 소리.... 그 거대한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본다는 어리석은 욕망이 귀를 닫고 그 소리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영화는 배경으로 깔려있는 소품의 소리를 역동적인 리듬으로 전면에 내세운다. 발바닥에 깔려있던 나막신 소리가 함께 어울어져 축제를 이루듯 냉혹한 침묵 속에는 엄청난 생명의 박동소리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참된 생명과 변방의 다양한 중심들은 자토이치처럼 두 눈을 질끈 감고 억눌렸던 세미한 소리와 감각을 되찾고, 중심의 권력을 독점한 모든 허상과 자신도 그 중심에 편입되어야만 살 수 있다는 무명(無明)의 두려움을 단칼에 베어버릴 때만 복권될 수 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듯 욕망과 차별의 눈을 단칼에 베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눈일지라도...

이 영화는 감독과 관객의 관계성에서도 전복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타노 타케시의 "자토이치"는 전통적인 자토이치 영화와는 단절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 금발머리, 장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설정, 잘 짜여진 검술 장면의 전통성보다는 단칼에 끝나버리는 잔인함, 탭댄스로 표현된 마을 축제 장면...등.

기타노 다케시의 독특한 시대극 자토이치는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가?"에,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만의 독특함 새로움으로 이야기하려는 집착이 드러나 있다. 감독 스스로도 "영화를 만들되, 검술에 달인이고 주사위 노름의 천재인 맹인 안마사 자토이치라는 주요 캐릭터만 남기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겠다"는 의도를 인터뷰를 통해서 밝혔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관객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지를 읽어내려면 그 줄거리가 아니라 그 스타일을 느껴야 할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집착"

내용보다는 형식이, 줄거리보다는 표현방식을 중심에 놓는 변화는 그 무게 중심을 전통적인 관점에서 감독의 창조성으로 옮겨온다. 이런 창조적 해체와 재구성은 관객에게도 감상의 새로운 틈을 열어준다. 영화가 보여주려던 것보다는 관객이 느끼고 읽어내고 싶은 것이 중심에 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 자토이치에 대한 해체가 오해가 아니라 창조이듯이 관객이 자유롭게 오해하는 것 역시 창조적 감상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이 영화의 스타일에는 보여주는 대로 봐야했던 관객이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있는 자유를 내포하고 있는게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이미 그렇게 보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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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은폐된 음성을 찾아서]

" 왜 성서가 교회 안에서 침묵을 지키는가?", 제임스 D. 스미스 저, 김득중 역 (컨콜디아사, 1995)

[ 비 평 : 성서의 은폐된 음성을 찾아서 ]

최근 몇 년간 인터넷 사이트에는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무수하게 늘어가고 있다. 그들은 성서 비평학의 지식과 현대과학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성서와 기독교의 모순을 지적하고 비난하고 있다. 서점에서는 기독교의 문제를 비판하고 객관적 학문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책들이 주목받고 있다. 젊은이들이나 고등교육을 받은 청장년층 기독교인들은 이미 맹목적 진리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이런 정보를 접하고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여전히 문자주의적 관점을 암묵적으로 고수하면서 어떤 대책도 없이 방치하거나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다.

이미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이 정체되고 오히려 감소하면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한 상황에서 안티-기독교의 영향은 그 흐름을 가속화시킬 것이 자명하다. 성서와 교회의 단절, 성서에 대한 정직한 지식이 은폐되고, 성서가 침묵당하고 있는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이 책은 최근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런 문제상황을 돌아보고 해결해야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한다.

저자의 분석과 지적을 통해서 한 사람의 신학도이자 신앙인으로서의 실존적인 고민에 대한 어떤 통찰력을 발견하게 된다. 성서학과 조직신학, 종교학과 철학 등의 학문을 통해서 신앙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문제는 '교회의 신앙 속에서 이것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많은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진보된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배우지만 교회에서는 문자주의적 성향의 보수성에 근거한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주된 풍토이다. '그 속에서 어떻게 해야할까?' 에 대한 대답은 두렵고 조심스러우며 망막한 것이었다. 신학대학에서는 바로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대부분 각자가 스스로 해결할 문제로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교인들에게 학문적 지식이 필요할까?'라고 반문하는 것은 중대한 오산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신앙, 정직한 신앙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무지의 허용'이라는 것이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다가가 성서가 스스로 말하게 한다면 성서는 충분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신학적 접근 방식을 통해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맛본 경험을 교회의 장에 적용해야할 당위성과 그것의 충분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성서학과 설교학과 조직신학 등의 상호공조가 중요하고 특히 모든 신학이 신앙의 자리에서 신자들에게 전달할 현대적 의미의 차원을 염두 해둬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한다. 물론 한 주에 네 다섯 번의 설교를 해야하고 교회에서는 아직도 보수적 신앙이 주류인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홀로 실천해나간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극복해야할 문제 상황일 뿐이고 그 당위성에는 충분히 수긍하게 된다. 이제 성서와 교회의 그 아찔한 간격, 그 공간에 울려퍼질 성서의 은폐된 음성을 찾아야할 뿐이다.

그러나 역사와 계시와의 관계를 논하면서 성서의 권위를 다시 확립시킬 방법이 성서에 대해서 충실하게 설교하고 그 설교와 교육에 응답하여 그들의 공동체 생활이 산 증거가 되게 하는 것 외에 없다(p.191)는 저자의 주장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물론 이런 방법이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의 권위는 삶의 경험 속에서 그 말씀을 재체험하고, 성서에 암시된 기독교 영성을 다양한 전통의 영성훈련을 통해서 체화해나갈 때도 역시 회복될 수 있다. 성서의 권위는 설교나 교육과 같은 언어 전달을 통한 지적 인식의 차원과 함께 삶과 몸으로 인식하는 깨닫음의 차원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 이외에는 역사 속에 나타난 계시의 실재로 나아갈 방법이 없다(p.183)는 주장 역시 수긍하기 어렵다. 이런 주장은 성서의 전승과 전통 밖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을 은폐하고 성서의 전통 안으로 가둬버리는 교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방인 중에 선택된 첫 번째 예이고, 성서에는 이미 멜기세덱이나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성서 없이도 하나님과 함께 한 경우들이 나타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성서 전통 밖의 세계를 방치시키는 하나님은 모순된 모습일 수밖에 없다. 최소한 그 밖의 영역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신비로 남겨두는 것이 인간의 신앙과 신학을 절대화하지 않는 겸허한 자세일 것이다.

[내용 요약]


1. 성서의 점차적 침묵
오늘날 성서를 중심에 둔다는 기독교에서 교회의 설교, 교육, 기독교인들의 의식에서 성서가 점차 침묵을 당하고, 그 결과 비성서적, 비기독교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교회에서 성서를 교육할 시간과 통로의 부족, 성서학적 결과를 반영한 설교를 준비하는 어려움, 주제 설교 방식, 신자들이 개인적 신앙의 용도로만 읽는 것, 19세기 독일의 신학자들에 의한 구약 성서에 대한 경시 등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그러나 주요원인은 성서학자들과 설교 및 교육 책임자들, 설교자들과 교인들, 그리고 신학교의 독립된 학과들 간의 의사소통이 단절된 데 있다.

2. 해석학과 설교학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성서 본문의 본래 의미로부터 현재에 적용될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의 부족으로 인해 곤경에 처해있다. 이는 본문의 본래 의미를 찾아 현대의 언어로 옮기는 해석학과 복음을 가장 적절하게 전달하도록 하는 설교학 사이에 계속 되어온 의사소통의 단절이 극복되고 밀접한 상호 공조가 이뤄질 때 극복될 수 있다.

3. 해석학적 질문의 재개
성서학에서 등한시되었던 해석학적 원리를 다시금 논의하게 한 대표적인 도전은 바르트와 불트만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해석학적 질문의 세 가지 기본적인 통찰은 첫째 학문적 객관성이라는 관망적 태도를 버리고 해석자의 신앙적 주체성으로 나아간 점, 둘째 해석의 임무가 성서 내용을 본래의 언어와 사상으로부터 현대인이 이해 가능한 언어로 번역하는 것까지라고 본 점, 셋째 성서의 궁극적, 결정적 내용은 하나님의 계시이고, 인간의 문제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발견케 하지 못하는 한 성서의 본질적인 말씀은 감춰진 것으로 본 점이다.

4. 해석의 컨텍스트
인간의 인식과 들음은 늘 해석의 컨텍스트 안에서 일어난다. 성서 역시 독자의 역사적 실존이라는 복잡한 컨텍스트 안에서 해석되고, 그 의미는 그 컨텍스트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해석과 본문 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존재하고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해석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성서무오설이나 어느 신학자의 해석 혹은 학문적 객관성만을 절대시하는 성서학의 경향 등은 어떤 특정한 해석을 성서 자체와 동일시하여 성서의 다양한 메시지와 의미를 침묵하게 만든다.

5. 無知의 허용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이 발전하였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그에 대한 무지가 허용되고 있다.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통로는 강단, 교회 학교, 교회 도서관이 있다. 이런 무지의 허용은 목사직 박탈에 대한 두려움, 평신도에게는 오히려 혼동을 일으킬 뿐 불필요하다는 중대한 오산, 목회자들이 본문의 본래 의미로부터 현재 의미를 밝히는 데 필요한 준비교육의 불충분함 때문이다.
미국 교회에서는 많은 성서학자들이 순수한 학문과 비신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런 단절이 공고히 되었다. 비평과 복음이 대립적으로 이해된 미국 교회의 상황 속에서 그런 입장을 취해야 안전하였고, 또 그럴 때 신학이 교회에 종속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는 경향 등이 원인이었다.

6. 역사 비평의 신학적 의의
관망자적 해석학이 책임있는 신학적 해석학보다 더 학문적인 것은 아니다. 학문적 방법론은 그 주제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성서는 역사적인 문서인 동시에 신학적인 문서이기 때문에 신학적 해석의 방법론 역시 요구된다. 성서의 본래 의미에 관심을 둠으로써 본문의 자유와 바른 해석의 기준을 마련한 역사 비평이 신학적인 면에 끼친 공헌; 첫째, 본문과 그에 대한 해석 사이의 거리를 인식케 함. 둘째, 성서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세계와의 연속성을 수립함. 셋째,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모든 것을 상대화시킴으로써 교묘한 우상숭배를 제거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회복시킴. 넷째, 성서를 다룰 때의 정직성과 지적인 온전성의 요구. 다섯째, 성서 기자들의 다양한 음성을 회복시킴.

7. 권위의 재해석
성서가 기독교인들로부터 멀어지게 된 한 요인은 금세기에 성서가 권위를 잃어간 것이다. 권위 상실의 요인은 첫째 현대인이 맹목적인 복종을 거부하게 된 것, 둘째 타문화, 타종교, 과학 등의 현대적 지식의 발전, 셋째 역사 비평으로 인해 성서 자체에서 권위를 찾기 어려워진 것이다. 성서 본문의 내용이 현대에 알맞은 의미를 갖게 되면 나름의 권위를 갖게 된다. 그러나 예수, 사도들, 예언자들에게 하나님의 권위가 그랬던 것처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확립될 수는 없다.

8. 역사와 계시와의 관계
계시는 역사 속에서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실성이기에 계시와 역사는 분리될 수 없다. 계시는 역사 속에 현실로 나타나고,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계속적인 관계, 곧 계시를 떠나 이해될 수 없다. 역사비평의 비판적 방법론을 경시해서는 안되지만 역사의 재구성은 과거의 외관적 실재로 제한되는 한계가 있다. 성서는 외관적 실재에 의해 입증 될 수 없는 계시의 차원을 가지고 있기에 그 권위를 가시적, 외면적, 역사적인 것에 근거시킬 수 없다. 그래서 성서의 본문은 본래의 역사적 상황뿐만 아니라 본래의 온전한 신학적 컨텍스트 가운데서 들어야 한다.

9. 간격의 확대
성서와 계몽기 이후의 현대인 사이의 커다란 간격이 생겼다. 이 문제에 대해서 보수주의는 독자로 하여금 성서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유지케 하려했고, 자유주의는 성서에서 현대인이 수용할 수 있는 것만을 남겨두려 했다. 이 두 방식과 또 교회에서 역사, 교회사, 성서의 전체를 결합시켜 주는 하나님의 목적을 가르치지 않은 것, 역사학의 발전도 그 간격을 더욱 확대시켰다. 하지만 역사적 방법론의 적용이 오히려 성서의 독특성을 드러내주었다. 역사적 방법론의 적용에 대한 두려움은 성서 자체가 증언하는 진리의 능력에 대한 신뢰감의 결핍이다.

10. 비신화화의 문제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실존주의적 관점에 의해서 내면화, 개인화되고, 하나님을 창조주와 역사의 주로 외면화하는 진술을 신화로 배척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성서와 현대인의 간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성서 해석에 비신화화의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비신화화에서 해석자가 지닌 실재관이나 신학 등의 전제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해석의 결과가 결정되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11. 성서 없이 계시 없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계시가 성서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계시는 교회가 그 전승을 통해서 교회의 기원을 계속 기억할 때에만 유지된다. 성서 없이 계시 역시 없기 때문에 성서와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변증법은 유지되어야만 한다. 또한 성서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필요한 말씀을 상실하지 않도록 어느 하나라도 무시해서는 않된다.

12. 성서를 동시대적으로 만드는 방법
성서와 교회의 역사는 성서를 어떻게 동시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성서의 해석자는 성서의 세계와 자기 시대의 세계 속에 살면서 이 두 세계의 연속성을 찾아내고 성서의 세계를 '통해서' 자신의 시대를 바라봐야 하고, 자신의 시대에 알맞도록 성서의 세계를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 後記: 실제적인 문제들
성서와 교회의 단절을 극복하려는 실제적인 적용을 위해서 우선 신학교는 성서 분야, 신학 분야, 실천 분야에서 배운 것들을 상호 연관시켜 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성서학에서는 본문비평과 주석방법의 목적이 설교에 놓여져야 한다. 목회 현장에서는 신학적 연구를 계속해나가면서 교회에서 성서 연구를 그룹에게 가르쳐야 한다. 특히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학생들에게 전해질 효과를 생각할 때 중요하다. 이런 모든 일에서 목사와 설교자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기에 충분한 준비가 어렵지만 예언자들과 사도들처럼 우선 다가가 자신의 상황에 대해 주시는 말씀을 찾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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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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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서 현대까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박물관들이 있고, 수많은 교회들과 도시 자체가 미술관인 유럽. 그곳에서의 배낭여행은 낭만적인 기대와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답답함이 더해 갔었다. 미술교과서에서나 보던 작품들을 진품으로 마주했지만 처음의 신기함과 새로움은 퇴색되어갔다. 배낭여행의 정규코스이니 밀린 숙제 해치우듯 순식간에 지나치며 눈도장만 찍어댈 뿐이고 내겐 여행 사진들의 그럴듯한 배경이나 유명한 어디에서 무엇을 봤다는 자랑거리 이상의 어떤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도대체 그 작품들이 왜 유명하고 대단한 건지 알 수 없고 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작품들을 계속 봐야하는 건가라는 반문이 짙어져 간 것이다. (심지어 파리의 대표적인 현대미술관인 뽕삐두 예술 센터는 건물 외벽이 없이 건물 구조와 내부가 들여다 보이는 그 포스트모던 건축양식을 이해하지 못해 공사중인 줄로 착각하고 그냥 돌아왔다가 원래 그렇게 건축된 건물인 걸 알고 다시 보러갔던 사건도 있었다^^::)

그 때부터 미술작품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림을 읽어내는 대표적인 방식들을 특정한 작품들에 직접 적용하면서 쉽게 풀어 설명해주고 있는, 이 책은 오래 방치되었던 그 궁금증을 가볍고도 시원하게 풀어주고 미술작품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갖도록 인도해주었다.

이제 어떤 작품에 대한 해설을 읽게 되면 대략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초보자인 내가 이 책에 소개된 방식들을 혼자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그런 방식들을 사전적으로 나열하기만 하지 않고, 누구나 편안히 그림을 보고 읽고 느끼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길의 입구로 안내해준다. 어떤 양식을 사용했고, 도상학적 내용이 어떻고, 그 작품에 화가의 심리적 영향이나 사회적 영향이 어떻게 반영되었고, 혹은 기호학적 관점으로 배열된 기호의 구성을 풀어내는 등과 같은 전문적인 방법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한 작품은 그 작가와 시대의 자궁에 의해 잉태되어 태어나기 때문에 이런 연계구조를 이해할 때 보다 깊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복잡한 정보에 의한 해석만이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과 그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 아는 것이 다른 차원을 지닌 것처럼, 지금 여기서 그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나만의 새로운 느낌과 감동이 움틀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작품의 있는 그대로에 의해서 새롭게 열리는 느낌과 감동은 나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또 하나의 의미이고, 현대미술의 관점에서는 이 역시 하나의 예술적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해석만이 최고의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 늘 새롭게 잉태되고 태어나는 각자들의 다양한 그림읽기에 의해 그 작품의 의미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젊음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술작품을 천천히 읽어가는 각자들의 새로운 읽기와 그것을 통해 이어지는 영원성은 우리 일상의 영원한 의미들이 지닌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우리 삶 속에 살아 숨쉬는 의미는 내세나 유토피아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이데아의 고정된 영원성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매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나 깃드는 영원성, 바로 지금-여기에 새롭게 깃든 영원이 아닐까? 오히려 고정된 정답, 그 초월성에 집착할 때 살아 숨쉬는 새로운 의미가 살해되어 화석으로 굳어버리 것은 아닐까?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해석하는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일상의 굳어진 편견과 선입견을 전복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해석, 뭔가 대단하고 웅장한 무엇이어야 한다는 권위주의를 비웃어주는 순수한 유희적 해석을 지향해야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 만큼 볼 수 있지만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비춰주고 동시에 그 지평의 한계를 드러내줌으로써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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