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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평점 :
고대에서 현대까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박물관들이 있고, 수많은 교회들과 도시 자체가 미술관인 유럽. 그곳에서의 배낭여행은 낭만적인 기대와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답답함이 더해 갔었다. 미술교과서에서나 보던 작품들을 진품으로 마주했지만 처음의 신기함과 새로움은 퇴색되어갔다. 배낭여행의 정규코스이니 밀린 숙제 해치우듯 순식간에 지나치며 눈도장만 찍어댈 뿐이고 내겐 여행 사진들의 그럴듯한 배경이나 유명한 어디에서 무엇을 봤다는 자랑거리 이상의 어떤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도대체 그 작품들이 왜 유명하고 대단한 건지 알 수 없고 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작품들을 계속 봐야하는 건가라는 반문이 짙어져 간 것이다. (심지어 파리의 대표적인 현대미술관인 뽕삐두 예술 센터는 건물 외벽이 없이 건물 구조와 내부가 들여다 보이는 그 포스트모던 건축양식을 이해하지 못해 공사중인 줄로 착각하고 그냥 돌아왔다가 원래 그렇게 건축된 건물인 걸 알고 다시 보러갔던 사건도 있었다^^::)
그 때부터 미술작품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림을 읽어내는 대표적인 방식들을 특정한 작품들에 직접 적용하면서 쉽게 풀어 설명해주고 있는, 이 책은 오래 방치되었던 그 궁금증을 가볍고도 시원하게 풀어주고 미술작품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갖도록 인도해주었다.
이제 어떤 작품에 대한 해설을 읽게 되면 대략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초보자인 내가 이 책에 소개된 방식들을 혼자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그런 방식들을 사전적으로 나열하기만 하지 않고, 누구나 편안히 그림을 보고 읽고 느끼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길의 입구로 안내해준다. 어떤 양식을 사용했고, 도상학적 내용이 어떻고, 그 작품에 화가의 심리적 영향이나 사회적 영향이 어떻게 반영되었고, 혹은 기호학적 관점으로 배열된 기호의 구성을 풀어내는 등과 같은 전문적인 방법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한 작품은 그 작가와 시대의 자궁에 의해 잉태되어 태어나기 때문에 이런 연계구조를 이해할 때 보다 깊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복잡한 정보에 의한 해석만이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과 그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 아는 것이 다른 차원을 지닌 것처럼, 지금 여기서 그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나만의 새로운 느낌과 감동이 움틀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작품의 있는 그대로에 의해서 새롭게 열리는 느낌과 감동은 나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또 하나의 의미이고, 현대미술의 관점에서는 이 역시 하나의 예술적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해석만이 최고의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 늘 새롭게 잉태되고 태어나는 각자들의 다양한 그림읽기에 의해 그 작품의 의미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젊음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술작품을 천천히 읽어가는 각자들의 새로운 읽기와 그것을 통해 이어지는 영원성은 우리 일상의 영원한 의미들이 지닌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우리 삶 속에 살아 숨쉬는 의미는 내세나 유토피아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이데아의 고정된 영원성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매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나 깃드는 영원성, 바로 지금-여기에 새롭게 깃든 영원이 아닐까? 오히려 고정된 정답, 그 초월성에 집착할 때 살아 숨쉬는 새로운 의미가 살해되어 화석으로 굳어버리 것은 아닐까?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해석하는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일상의 굳어진 편견과 선입견을 전복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해석, 뭔가 대단하고 웅장한 무엇이어야 한다는 권위주의를 비웃어주는 순수한 유희적 해석을 지향해야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 만큼 볼 수 있지만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비춰주고 동시에 그 지평의 한계를 드러내줌으로써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