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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평점 :
[ 불교적 변주 ]
희랍의 3대 비극작가 중 한 사람인 소포클레스의 대표적 비극 오이디푸스는 인간이 삶 속에 직면하게 되는 비극적 운명에 대해 묻고 있다. 인간의 의도하지 않은 잘못, 아니 의도적으로 피하려 안간힘을 써도 자신의 손에 의해서 벌어지고 마는 불행한 사건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묻고 있다.
오이디푸스와 그의 친부모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그 엄청난 불행을 피하고자 갖은 애를 쓴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려 하고, 아들은 친부모인 줄 알았던 양부모의 곁을 떠난다. 하지만 결국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신탁이 이뤄진 현실이 드러나고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 여왕은 목을 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 왕은 여왕의 옷에서 황금장식 바늘을 빼 자신의 눈을 찌른다.
비극의 결말부에 암시된 질문은 “오이디푸스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집약된다. 친부를 죽이고 친모와 살을 섞은 죄, 하지만 자의적 선택이 개입되지 않았기에 정죄할 수 없는 상황. 그 대답은 다시 포이보스 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극적 구성을 통해서 독자들의 숙제로 던져주는 것 같다.
그러나 운명의 절대적인 힘 앞에 처한 인간의 현실과 책임 소재는 암시해 준다. 자식들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오이디푸스에게 들려진, “이제는 아무것도 더 지배하실 생각을 마십시오”라는 말은 적어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지배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운명의 절대적인 힘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겸허히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죄악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의 눈을 찔러버림으로써 가시적 차원에 근거해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을 정죄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를 어떻게 처분할 지에 대한 신탁은 무엇이어야 할까? 적어도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을 전제하고 스스로 저지른 죄만 그 사람의 책임이라고 보는, 서구의 전통적 윤리관으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아니 그것에 의하면 모르고 저지른 것이기에 ‘부친살해’, ‘근친상간’의 죄는 물을 수 없다. 책임은 운명의 신에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버지 아닌 자를 죽인 것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 되고, 어머니 아닌 자를 범한 것이 근친상간이 되버리는 현실은, 의도하지 않아도 내 손에 묻어있는 아버지의 피는, 자살해 버린 어머니는, 형제인 자식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봐도 볼 수 없었던 진실이 이젠 눈을 찔러 보지 못하게 되도 보이게 된 것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종반부에 암시된 것처럼 그냥 자신의 교만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친딸과의 근친상간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올드보이의 결말처럼 그 은폐된 진실을 더 깊이 묻어버리면 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런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들은 인간의 행복과 지배는 무력하기 그지 없다는 비극 오이디푸스의 결론에서 너무 멀리 가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우주 만물이 연기적 상관관계 속에 있다고 보는 불교의 관점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딜레마가 오히려 여실한 진리를 드러내주는 것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아버지 아닌 자가 아버지이고 어머니 아닌 자가 어머니인 현실은 “가주에 있는 소가 풀을 뜯자 익주에 있는 말이 배불렀다”는 화엄종 초조(初祖) 두순(杜順)의 싯구(이찬수, 생각나야 생각하지 (다산글방, 2001), p. 54.)에 담긴 연기적 현실과 상통한다. 한 톨 밥알에 온 우주가 담겨 있고, 너가 곧 나인 무아의 연기적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무아와 공의 관점은 바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행동과 상통한다. 불교는 가시적 세계에 근거하여 존재자들이 서로 분리된 것으로 판단하고, 더 좋아하는 것에만 집착하는 분별지와 차별이 고통의 뿌리라고 본다. "너와 나의 단절", "독립된 존재자로서의 실체"는 허상일 뿐이라는 무아와 공의 관점은 분별지의 근원을 상징하는 눈을 찌름으로써 탈은폐되는 진여의 세계를 드러나게 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절망적인 운명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개(半開)한 참선의 시선에 비친, 하나로 이어진 세계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지배하지 말라”는 말은 남의 부모를 내 부모처럼 남을 나처럼, 내 자식에게만 집착하지 않고 차별적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로 변주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