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폴 F. 니터 지음 / 한국신학연구소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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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궁극성과 타종교와의 대화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문제제기

개혁주의 신앙에 기초한 복음주의 신학과 신앙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예수의 인격과 그 사역에 대한 고백이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죽고 또한 부활했다는 것이다. 이런 고백의 특징은 배타적 궁극성으로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여러 종교를 만날 수 있고 역사 상대주의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지게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임(딤전2, 4)에도 왜 예수가 존재한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람들에게만 구원을 주셨다고 봐야 하는가?", "카톨릭과 불교가 서로 왕성한 교류를 나누는 상황에서 기독교는 불상의 목을 자르는 일을 저질러 일반인으로부터 질시의 눈길을 받고 있는데, 이런 배타성은 옳은가?", "예수께서 가장 큰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이라고 하시고 그렇게 행하셨으며, 또한 그 열매를 통해 나무를 안다고 하셨는데(마12, 33), 타종교들 안에서 이런 선한 행위들이 나타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최후의 심판을 양과 염소의 비유로 말씀하실 때 천국에 들어가는 자를 가리는 기준은 단지 어려운 사람을 도왔는가에 달려 있었는데(마25, 31-46) 타종교인이 이렇게 행한 것은 어떻게 되는가?" 결국 이런 의문의 중심에는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길인가?'라는 것이 있다. 이런 예수의 궁극성의 문제에 대해 기독교 내에 존재하는 의견들을 정리해보고 이를 기초로 타종교와의 대화는 어떻게 가능하고 또한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적 다원주의를 향한 그리스도적 태도들  

1. 보수적인 복음주의 모델- 참된 종교는 하나이다 :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을 이어가는 보수적 복음주의 모델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된 진리에만 존재하고 다른 모든 종교는 불신앙이라는 배타적인 관점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그들은 성경의 증언과 예수를 통해 이뤄진 진리의 성취를 얘기하는데, 이런 관점을 학문적으로 잘 정리한 대표적인 신학자가 바르트이기에 그의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바르트는 역사 상대주의의 주장을 수용하지만 오히려 인간이 이런 유한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과 질적인 차이가 있고, 결국 이로 인해 오직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만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이 직접적인 계시가 바로 예수와 성경의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실이 이런 계시의 내용과 반대되어도 이것은 유한한 것이고 거짓이며 오직 예수를 통한 구원만이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복음이 아닌 다른 모든 종교는 불신앙이고 이것은 기독교에도 적용되는 것이 있다. 즉, 기독교가 참된 유일의 종교인 이유는 경험적으로 타종교보다 기독교가 우월한 어떤 역사적 내용이나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주어진 예수 안의 계시와 구원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모델이 지닌 장점은 인간이 처한 현실에 대한 정확한 통찰을 준다는 점이다. 즉,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이성과 선한 의지 그 자체는 자동적으로 진보를 보장할 수 없다는 진실과 '악과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성'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주의 모델은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런 관점은 타종교와의 대화와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신적 은혜의 충만함을 잃게 하고 기독교의 생동적인 두 출처인 전통(성서와 이에 대한 해석들)과 경험(실천을 통한 깨달음) 가운데 후자를 잃게 한다. 즉,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의 진리는 상황 속에서 실천을 통해 깨달아 가는 것임을 포함하는데 이를 잃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신약성서학이 발견하는 사실과 상충된다. 또 그리스도를 기독교의 해석에 한계 지음으로 인해 예수와 하나님의 사랑이 지닌 보편성을 오히려 축소시키고 다원화되어 가는 시대 속에서 도태시킨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을 우리가 예수의 신비와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여 소유한 것과 동일시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2. 개신교 주류의 모델: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개신교 주류 모델은 복음주의 모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과의 차이는 개신교주류 모델이 타종교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고 대화적인 접근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이는 타종교에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존재한다는 것 때문이다. 즉, 일반계시로 인해서 예수 안에 계시된 신이 타종교를 통해서도 참으로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그렇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는 신약성서와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의 정황 속에서 동시에 발견된다. 즉, 신약성서에 고백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고 동시에 자연계시를 포함한 일반계시를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종교 안에 나타나는 신적이고 궁극적인 경험들이 이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 주류 모델은 예수의 배타적 유일회성을 강조한다. 즉 타종교 안에 드러난 일반계시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케 하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궁극적인 구원을 계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의 장점은 보편계시를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기 때문에 타종교의 긍정성-타종교를 신의 사랑을 인식케 하는 신의 도구로 보는 것-을 인정하게 하고 이를 기초로 대화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점은 첫째로 "오직 그리스도로만"에 대한 확신이 맹목적으로 타종교에 대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여 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점이 있고 둘째는 타종교는 일반계시이고 기독교는 구원계시라고 구분하는 근거가 불충하다는 것이 있다. 게다가 이런 구분은 사랑의 신에 대한 신앙을 위협한다. 즉, 인간을 좌절시키고 죄성에 묶어두는 신지식을 제공하는 신은 변덕스럽고 고통을 주는 신으로 보게 한다. 그리고 셋째는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라는 주장이 신의 보편적 구원의지와 공존할 수 없고 예수에 대해 '하나이며 유일한'이라고 진술하는 것이 그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한 묘사로만 해석되어야 할 필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3. 카톨릭의 모델: 길은 많으나 규범은 하나- 카톨릭 모델은 그리스도교 모델 중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이다. 이는 카톨릭 모델에서 타종교를 구원의 또 다른 길로 인정해야 하며 이 때 기독교적 구원이 타종교의 진리에 대해 모범적인 규범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신이 전 인류를 구원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신념과 인간의 본성에 본질적으로 선험적 계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계시하고 있는 은혜와의 만남은 다양한 실제적 삶의 정황 가운데 경험된다는 점에 근거한다.
카톨릭 모델의 장점은 첫째 그리스도의 신이 보편적 사랑의 신임을 일관성 있게 표현한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종교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꼭 필연적으로 모두 구원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음이 지적되어야 한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모든 종교 안에 작용하는 신적 현존을 분명히 표현하고 성육화시키는 구원의 긍정적 원인으로는 보는 점이다. 이는 초대교회 전통 중에 로고스 그리스도론에 일관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가 모든 종교의 규범이어야 할 근거는 불충분하다. 셋째는 개종이 아니라 인류공동체에 대한 공헌과 타종교에 대한 배움을 통한 기독교인의 성장을 목표로 한 대화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실제적 적용에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다음으로 단점은 이 모델이 대화로 인도하지만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기에 이를 엄밀한 의미에서 대화라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규범성과 궁극성에 대한 신념이 기독교 메시지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할 충분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4. 신 중심적 모델 : 중심에 이르는 많은 길들-이 모델은 카톨릭 모델보다 더 나아가 타종교의 구원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기독교의 구원이 모범적 규범일 필요가 없으며 타종교에도 나름의 유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대표하는 죤 힉의 신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힉은 모든 종교의 배후에 하나의 신적, 궁극적 실재가 있는데, 인간의 유한한 경험에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차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각 종교의 차이가 생겨나고, 결국 모든 종교적 표현은 상대적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때 이런 표현들은 경쟁적이거나 동등하게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 때 이 상대성이 동등성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 간에 우열을 가릴 기준이 필요하게 된다. 이에 대해 힉은 한 종교의 가치나 진리는 그 종교가 "자기 중심성에서 실재 중심성에로의 전이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 실존의 무한한 질적 향상을 촉진하는지의 여부, 또는 그 정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궁극성을 제외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가 유일회적 구세주일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성육신에 대한 신화적 해석-그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에 대한 문자적이 아닌 신중한 해석-을 해결로 제시한다. 그리고 예수 안에 구현된 신성을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목적을 수행하는 행위로 보면 성육신은 신의 아가페가 역사 안에서 예수를 통해 온전히 구현되었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결국 이런 해석은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케 하여 하나님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라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규범적 유일회성이 아니고도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적이고 규범적인 것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신중심적인 모델에 대해 복음주의적 관점이 제시하는 비판으로는 구체적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을 궁극적 실재라는 개념으로 추상화한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상대화시킨다는 것, 그리고 신약성경을 신화화한다는 것과 우상숭배의 계명을 어긴다는 것이 있다. 이런 반론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대답할 것이기에 간략하게 얘기하면 우선 추상적이라는 것이 반론인 이유가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체성을 상실하게 한다는 것인데 오히려 신중심 모델은 이런 구체성을 포함하는 것이기에 추상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상대화한다는 지적은 상대화하면 구원이 존재할 수 없다는 반론인데 구원의 길이 더 있다고 해서 예수의 구원이 상실되야 한다는 필연성은 없다. 그리고 우산숭배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를 숭배하게 된다는 것인데 사실 예수를 통해 현현된 하나님의 신비를 해석한 어느 한 관점만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그 형상만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인 것이다. 

5. 예수가 어떻게 유일회적인가? : 신중심적 그리스도론을 향하여-예수가 유일회적이라는 것은 신약성서를 그 본문의 역사적 상황으로만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충분하고 경험과 의미의 지평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는 그러한 지평이 역사를 통해 확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이란 표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실 그리스도의 원초적 메시지의 초점과 중심 내용은 하나님 나라-올 것이며 이미 현재에 활돌하는-였으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경험을 당시에 존재하는 유대교적 모델이나 그리스 이교적 모델로-신의 아들, 주, 로고스, 신적인 기적을 행하는 자 등-조심스럽게 표현한 초기 신자의 예수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와 신약성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초기의 그리스도론이 다양했으며 대화를 통한 진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리스도론은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쳤는데 그것을 정확하게 추적할 수 없음에도 분명한 것은 초기에는 "신의 아들", "종말론적 아들됨"의 개념이 사용을 통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전해주는 부활하는 힘에 초점이 있었다-이는 막, 눈, 마, 바울에게서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2세대 신앙인들 때-요한복음의 저자의 영향 하에-에 선재적 아들됨, 성육신 신앙이 나타났다.
이런 변화를 살펴봄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론이 '단정'이 아니라 '해석'-사진이 아니라 인상화-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론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상징으로서 재해석되어야 하고 다양한 상징들이 제각기 정당성을 지닌 채 보존, 조화되어야 함을 알게 된다. 즉, 어느 하나가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기에 어느 하나가 나머지를 흡수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을 절대화시키지 말고 그것에 충실하되 새롭게 발전시키고 당시에 타종교나 문화의 상징을 이용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론을 새롭게 해줄 이미지들에 개방시켜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중심주의의 갱신과 복귀가 중요하다.
물론 신약성서의 증언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배타성과 규범성의 문제는 남는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이 진보적이기에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고 게다가 이것은 그 메시지의 핵심이 아니라 표현의 한 방식이다. 즉, 하나이며 유일하다는 제한은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역사적- 문화적 문맥의 영향과 그 표현이 신앙 고백적 언어이기에 본질적인 내용이 아니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리스도의 상대화는 유일성과 인격적 위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리스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통한 위기감은 고전주의 의식과 진리는 오직 하나라는 서구철학의 전제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 위임은 예수를 통한 전적 변혁의 경험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것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고 타종교에 개방적일 수 있다. 또한 신앙인이 특수한 중개자를 통해 진리를 수용하게 되면 그것을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중개자를 통해 알게 되는 보편적 진리에 깊이 다가갈수록 그것의 신비를 더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 상대적임을 깨닫게 되기에 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유일성이나 규범성을 주장하지 않고도 예수를 자신의 주로 고백함이 가능하게 된다.

결론 및 타종교와의 대화
우린 지금까지 예수 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기독교 내의 의견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모델 중에서 신중심적 모델이 가장 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 동일하고 동등하게 구원이 존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이 모델은 그리스도의 궁극성이 가장 규범적인 것일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단지 기독교의 구원이 가능하기 위해 굳이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규범성을 주장할 필요는 없고, 우리가 모두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개방적이고 타종교와 대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을 근거로 구체적인 타종교와의 대화를 살펴보자. 이미 얘기된 예수의 규범성에 대한 미해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백적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화는 상대의 경험과 이해 속에서 성장할 것을 목표로 경험과 이해를 교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자기 종교에 대한 경험과 확고한 진리주장에 기초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종교에 공동의 기반과 공동의 목표가 존재한다는 가설과 참된 변화, 전환의 가능성-어떤 개종이 아니라 신의 진리에로의 접근-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타종교에 대한 지적 자료와 이를 이해하도록 돕는 상상력-유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대화에는 새로운 진리형태가 필요하기에 이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진리를 배타적 유일성으로 보지 않고 관계적 유일성으로 보는 것이 있다. 이 관계적 유일회성이라는 것은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를 패배시킴으로써 자기증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타진리와의 관계능력 곧, 서로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 관계성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유일성이 존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참고도서◀
다니엘 L. 밀리오리,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장경철 역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폴 F. 니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변선환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4)
김경재, 해석학과 종교신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7)
목회와 신학 92년 10월호, pp.55-72, 크리스 라이트, 종교다원주의와 그리스도의 유일성.
죤 H. 힉, 종교철학개론, 황필호 역 (서울: 종로서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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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7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08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가의 너비와 깊이를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학부3학년 때쯤에 발제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놨었죠.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이후정 교수님께선 제게도 깊은 배움을 주시는 분입니다. 저와는 입장이 많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제가 놓치는 부분을 깨닫게 하고 다시 되짚어보게 하시는 도전을 주시더군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 사이의 긴장 관계는 제게도 숙제로 남아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더 질문을 많이 하게 되는거죠. 긴장관계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문제점들에 대해 대답을 찾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평생을 쫓아도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신비가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붙들린 문제를 쫓아가면 공허한 신학이 아니라 생동감있는 "구도의 길"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각자의 몫인 부분도 조금씩 나누면 더 풍성한 열매들이 맺혀질 거란 기대도 해봅니다.

삼위일체론, 이후정 교수님께 더 밀어붙이지는 못했지만 전 그것에 한계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헬라적 사유와의 경쟁 속에서 기독교 신앙이 변증적 설명으로 치우치게 되고, 그 결과 초기 신앙이 자유롭게 사용했던 신앙적 상징과 은유들의 지닌 풍요로움과 자유를 상실케하고 하나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설명만으로 획일화하게 된 것 같습니다. 삼위일체론이 물론 중요한 신앙의 균형을 위해 불가피하긴 했지만 그것만이 모두인 것처럼 절대화되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으니까요. 신앙의 언어는 시와 신화의 언어처럼 자유롭게 새롭게 늘 거듭날 수 있는 여백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처음 이 터에 오셨을 때도 제가 박익수 교수님께 여쭤본 질문에 대해 궁금해하셨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 있었던 질문에 대해서는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싶습니다. 다음주 쯤이나^^ 저도 그 질문으로 인해 고민중이거든요...

오늘도 님과의 나눔이 제게 행복함을 안겨줍니다. 감사드려요...^^::

 
종교론
FR.슐라이어마허 지음, 최신한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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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재해석;
-신비의 일상화, 스스로 서는 자유인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본질이자 그 근원을 상대적인 존재를 넘어서는 무한자에 대한 근원적 감각이자 맛으로 정의한다. 종교에 대한 이런 새로운 보편적 규정은 교회의 전통적 관점에서 신앙에 대해 표현한 교의개념에도 새롭게 적용된다. 특히, 슐라이어마허는 기적, 계시, 영감, 예언, 은총에 대해 이 개념들이 종교가 소유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첫 번째 개념이라고 판단하고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 그는 이들 개념이 "종교를 소유한 인간의 의식을 가장 특징적인 방식으로 표현"(p. 110)한다고 봤다.

[기적]
그는 기적이 "오로지 사건에 대한 종교적인 이름"이고, "사건에 대한 종교적 견해가 곧 지배적인 견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곧바로 부합하게 되는 모든 사건과 가장 자연적인 사건"(p. 108)일 뿐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기적을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형태의 사건으로만 보는 전통적 관점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에게서 기적은 종교적 시선에 의해, 초월자의 손길이 내재한 것으로 드러나는 일상의 모든 사건이다. 이는 빈무덤이 누구에게는 부활의 기적으로, 누구에게는 시체의 도난으로 보인 차이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관점에서는 기적을 어떤 특별한 사건으로 한정기키려는 태도가 옹색하고 고통스러운 일일 뿐이다. 그리고 자기 내부에 일어나는 자유로운 확신을 상실하고, 외적 권위에 굴복하려는 종속적 태도일 뿐이다.

[계시]
계시는 "우주에 대한 근원적이며 새로운 직관"(p. 109)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기적과 연관해 볼 때 일상의 모든 사건에서 드러난 초월자의 손길과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 역시 기이한 사건을 통해 자아를 질식시키고 압도하는 방식을 부정한다.

[영감]
영감은 "오로지 자유에 붙이는 종교적 이름"일 뿐이고, "실제로 전달됨으로써 우주에 대한 직관이 다른 사람에게도 이행되는 종교적 감정의 모든 표현"(p.109)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영감이 정경으로서의 성경에만 제한된 것과 차이를 보여준다. 그에서 영감은 종교적 감정에 대한 모든 자유로운 표현으로 다른 사람에게 절대자에 대한 인상이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

[예언]
예언은 "종교적 사건의 반이 주어져 있을 때 다른 반을 희망하는 모든 것"(p.109)이다. 이것은 예언이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것이라는 관점과 다르다. 이런 관점은 예언을 단순한 점술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예언은 현재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영원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것을 미래적인 것으로 연결시키는 가능성이다. 또한 이는 종교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은총]
은총은 모든 종교적 감정이 우주를 통해 직접적으로 작용되는 초자연적인 것임을 말한다. 즉, 능동적 성취의 산물이 아니라 수동적 반응인 고유한 체험에서 '은총'을 느끼는 경건한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슐라이어마허의 재해석은 종교의 본질을 근원자에 대한 근원적 직관과 감정으로 본 관점이 일관되게 적용된 것이다. 종교의 본질로 작용하는 근원적 체험에 대한 2차적 반성의 산물이 교의와 종교적 개념이고, 이는 수동적 체험에 대한 능동적 접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종교에 대한 표현을 그 자체를 절대시하거나 신성시하는 일체의 행위를 부정한다. 그리고 이런 행위가 기이한 경험과 사건에만 종교적 체험을 환원시킨 것을 부정하고, 오히려 근원적 체험을 평범한 일상의 자리로 되살려내고 있다. 또한 종교를 어떤 절대적 권위에 대해 자아를 상실한채 복종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이미 가득했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신성이 샘솟아 스스로 살아있는 것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이 행한 것과 생각하고 느꼈던 것을 다시 생각하고 이것을 따라 느껴보려고 하는 것은 고되고도 무가치한 헌신이다. 여러분은 전적으로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서려고 하며 여러분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고귀한 의지는 종교를 행하는 여러분을 방해하지 않는다. 종교는 노예의 봉사와 감금이 아니다. 또한 여러분은 여기서 여러분 스스로 에게 속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종교에 동참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다."(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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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생각의창 1
한국종교학회 엮음 / 창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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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이승의 투사물로서의 공간'이라는 글은 큰굿의 시왕맞이제에 나타난 저승의 모습을 통해서 무교의 죽음관을 살펴보고, 특히 그것의 고유성을 논증하려 한다. 그런데 이 글에는 무교의 죽음관보다는 저승관이 나타나있다고 판단된다. 물론 저승을 어떻게 묘사했나를 근거로 무교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 저자 이수자는 그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유성이라는 것도 상당히 느슨한 논리로 전개된다. 예를 든다면 불교에 시왕이 열명인데, 시왕맞이제에는 열 네명과 한 명의 판관이 있기 때문이라거나 시왕맞이제가 보다 체계적이고 복잡하기 때문에 고유의 것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오히려 단순한 것에서 보다 복잡한 체계로 자리잡혀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불교의 단순한 구조가 반영되면서 복잡한 체계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설화 등에 나타난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도 고유성보다는 오히려 불교적인 것과의 혼합과 습합의 과정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단순히 시왕맞이제의 모든 것이 고유한 것이니까 우리 고유문화의 죽음관이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불교적인 것과의 차이를 통해서 그 고유성을 탐구하는 것이 더 타당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무교의 사후세계는 저자의 주장을 그대로 따른다면 이승과는 분리되고 단절된 저승으로 이승의 삶에 윤리적 교훈과 그 당위성을 설득하는 도구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 때 분리와 단절이라는 표현은 그가 이원론적 세계관이라고 표현한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런 저승은 이승을 살아갈 때 왜 옳고 착하게 살아야하는지를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런 윤리적인 관점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무교가 개인적인 복에만 집착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글에서 보여준대로 벌을 받을 죄의 내용에 오히려 타인과 사회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내용의 체계성과 복잡성도 미신이라고 보면서 폄하하는 일반적인 관점과는 다른 부분으로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승의 삶의 단 한 번뿐이라는 강조점에서 저승의 안락보다는 한 번 뿐인 이승의 삶에 더 충실해야 함을 강조한다는 것도 주목할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무교에서 죽음은 이승의 삶에 대한 경종의 역할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교 역시 죽음을 하나의 완결된 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봤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수자가 무교의 세계관을 이원론적으로 본 것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원론은 두 가지의 단절된 세계를 전제하는 체계다. 그러나 무교에서 이승과 저승의 위치적 관계는 단절이라기 보다는 연속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무교에서 저승은 하늘 위 어디나 땅 속 어디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일상의 곁인 수평 연장상의 공간이다. 먼 길을 걸어 연못 건너에 위치해있는 곳이다. 게다가 무교에서 수직적 위치에 놓인, 신들의 세계인 천상계가 있다는 것과 대조해 볼 때, 더더욱 이승과 저승의 수평적 연속성은 분명해 진다.

무교의 넋굿은 죽은 자와 산자의 맺힌 한을 풀어주고 오히려 살아있는 가족과 그 마을 주민의 새로운 삶을 위한 맺힘의 풀이인데, 이 경우에도 다른 차원의 어떤 세상이 아니라 바로 살아남은 이들의 삶, 그 모퉁이에 함께 하는 죽은 자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핵심이된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존재인 혼이 다시 이승의 동물이나 곤충으로 환생한다는 관점도 일상의 자리가 죽음과 서로 깊은 연관 속에서 상호 침투적인 관계 속에 얽혀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무에 있어서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은 "이승의 모퉁이만 돌면 바로 저승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서구적인 이원론적 세계관과는 다른, 단일 선상에 놓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무교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고 함께 맺힘없이 죽음과 조화를 이루려 했다고 볼 수 있다(차옥숭, 한국인의 종교경험, 무교 (서광사, 1977), p. 201∼277 참고).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고 방식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무교를 통해 바라본 죽음은 이처럼 우리 일상의 모퉁이에 함께 존재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관문이고, 이승의 삶 속에서 이웃과 가족을 위한 희생과 도움의 손길을 강조하는 마음의 결을 일깨워주는 삶의 경종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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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스 2004-04-13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종교에 대한 설명에 비해 이 책의 무교 부분이 저도 좀 석연치 않았습니다.

물무늬 2004-04-13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보셨다니 종교학이나 신학에 관심이 많으신가봅니다. 주로 논문들만 모아놓은 책이라 그냥 교양수준에서 읽기에는 무거운 책인 걸로 기억하는데.....그래서 더 님의 시선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알라딘에 문학이나 인문학 등의 영역에는 풍성한 나눔이 있어서 많이 부러웠어요. 좀 외로운 듯...

아라비스 2004-04-13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말론" 수업 중에 발제하느라 읽었어요. 주제가 "여러 종교의 죽음관"이었는데, 그냥 이 책 하나만 보고 후딱~ 어차피 신학도 아니니, 그냥 대충하자 그런 속셈이었는데, 역시 학생들이 약간 엉성해뵈는 무교 부분에서 많이 질문을 하시더군요^^ 그리고, "동양종교들이 과연 그리스도교의 종말론, 죽음관에 비해 좀더 초연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내세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고(특히 유교) 할 수 있는가"도 논쟁거리였구요.

물무늬 2004-04-13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셨군요. 전 각 종교의 생명관과 죽음관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학기 동안 진행된 세미나에서 접했던 책이었습니다. 기독교 생명 윤리 관련 세미나였는데 특이하게도 각 종교의 죽음관에서 출발해서 생명의 이야기로 진행해 나가는 흥미로운 과정이던 기억이 스쳐갑니다. ^^
 
초대교회사
후스토 L.곤잘레스 / 은성 / 198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교회사 가운데 2C에 일어난 박해와 순교를 바라보면, 무엇보다 고통과 죽음에 초연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에 대한 동경과 흠모의 마음으로 순교해나간 신앙인들의 모습이 강한 인상을 준다. 특히 순교자행전(Acts of the martyers)에서 볼 수 있는 순교자들의 고백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의 글에서는 순교에 대한 두려움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순교를 특권과 영광으로 여기고 흠모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그를 구출하고자하는 로마교회의 신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그대들의 친절이 나를 오히려 해치리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들은 그 계획을 성공시킬지 모른다. 그러나 부디 나의 부탁을 들어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얻게 하라" 유스토 L. 곤잘레스 저,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은성출판사, 1987), p. 73.

그는 자기 인생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것이고 이런 궁극적 희생을 통해서 진정한 제자가 되기 시작한다고 믿었다고 한다(앞의 책, 같은 쪽).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통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그의 보혈을 마실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으며 그와 함께 부활할 것을 믿었다.

3C의 박해 속에 순교한 한 여인의 모습에서도 박해를 통한 순교를 영광으로 여기는 모습이 나타난다. [퍼페투아와 펠리시타스의 순교기](Martyardom of Saints Perpetua and Felicitas)에 나타나는 퍼페투아는 젖먹이 어린 아이를 임신한 상류층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오히려 임신한 것 때문에 순교에 참여하지 못할까 두려했다고 한다.(앞의 책, p. 141)

골잘레스는 그의 책 초대교회사에서 "순교는 인간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믿었던 초대 신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p.77)"고 한다.

이런 순교자들의 놀라운 고백을 대하면 우선 내 신앙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과연 내 안에도 그런 순수한 신앙의 열정이 있는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극한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었을까? 이런 실존적 질문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순교와 역사적 예수의 순교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측면으로 나아가게 한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는 특권과 부활에 대한 소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아름답고 놀랍지만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와 차이를 지니고 있다.

우선 예수의 순교에서는 그런 당당함과 동경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극한의 두려움으로 그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진 십자가의 모습이다. 물론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내놓은 한 모습은 그런 기도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그 장면은 예수를 추종하는 무리들과 로만군들 간의 혈전을 완곡한 상징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복음서 어디에도 초대교회 신자들이 보여준 당당함과 동경은 없다.

보다 중요한 차이점은 순교의 이유에 있다. 예수의 순교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신앙이 초래한 정치, 종교적 갈등 속에 위치한다. 천하고 가난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실천적 사랑이 정치, 종교적 권력구조와 충돌하면서 일어난 죽음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통치 아래 자유가 억압되는 상황이었음에도 초대교회 신앙인들의 순교에는 억눌린 자로 인한 정치, 종교적 갈등을 찾아볼 수 없다.

순교와 관련된 고백들에서는 [예수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이 중심에 있었다. 로마의 통치 아래서 태양신 숭배를 통해서 로마의 통치자를 숭배하게 한 법을 따를 수 없었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오해로 인해 배교를 요구당할 때 굴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순교에서는 약자와 억눌린 자에 대한 실천적 연대로 인한 정치 사회적 맥락을 찾기 어렵다. 예수에 대한 신앙을, 즉 그리스도론이라는 특정한 절대신념체계를 지키려는 열정이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순교가 놀랍고 경이로우며, 바로 그 순교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전해진 것이기에 감사드릴 일이고 겸허히 고개 숙이게 되는 것임은 틀림없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대단한 영광이자 은사와 선물로 생각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했고 그것을 흠모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안락하고 부요한 삶으로 오해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부르짖는다. 이런 극단적인 차이는 참된 믿음과 신앙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자문하게 한다. 오늘날 신앙이 값싼 은혜로 경박하고 가벼워진 현실 속에서 목숨을 건 신앙의 모습은 심각한 경종을 울려준다.

그러나 그 순교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아름다운 비젼이 담겨있음에도 그 고난이 지닌 정치 사회적 맥락을 상실해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물론 초기 신앙인들의 순교에 대해서 전해지는 기록들이 모든 것을 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의 활동시기와 달리 기독교 신앙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상황적 차이도 있다. 하지만 순교의 기록 가운데 압제당하는 민족의 아픔이나 억눌리고 고통받는 사람들로 인한 희생의 죽음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 문제이다.

게다가 만일 순교에 관한 기록들이 보여주는 형태의 순교만을 강조할 때, 즉, [예수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을 지키려는 순교만 강조될 때,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뿌리를 상실하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개인적인 영생에만 치우칠 수 있는 위험한 왜곡이 일어나지 않을까? 교회와 사회를 너무 이원론적으로 보고 내세중심적으로 치우치는 신앙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렇게 될 때 순교는 또다른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될 위험성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신앙으로 인한 고문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고백자"들이 교회내에서 자신들의 특별한 위치를 주장하고 변절자들이 교회의 교제 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할 수 있는 권리를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여 교회 안에 분열의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 카르타고의 시프리안은 그런 자들은 고백자 곧 순교자가 아니라고 맹렬히 비판했고, 어거스틴은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이유"라고 강조했다.(보니페이스 램지 저, 초대 교부들의 세계, 이후정, 홍삼열 역(대한기독교서회, 1999),pp. 171-173) 고난과 순교에 대한 이유가 오직 교회의 성장과 한 몸됨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성장과 일치라는 중요한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교회와 사회의 이원론적 단절을 강화하고 교회만을 위한 희생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도 틀림없다.

또한 그런 희생이 영생과 특권, 그리고 자기의에 대한 집착을 무의식 속에 감춘 자아도취적이고 메조키스트적인 자기기만이 될 수 있는 위험성도 지니고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이라는 자의식의 가면 아래로 자학적 파괴성에 근거한 자기 쾌락과 자기 의를 위한 욕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수 있다. 고백자가 자신의 특권을 주장한 경우에서도 그런 경향을 엿볼 수 있고, 당시에 이미 퀸투스라는 신자가 순교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법정에 섰다가 마지막 순간에 포기한 사례도 있었다.(유스토 L. 곤잘레스 저,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은성출판사, 1987), p.76)

이런 위험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의 십자가가 지닌 생명력, 그 부활의 근원을 명확히 해야할 것이다. 그 근원은 영생이나 영광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고통받는 존재자들에 대한 절대적 사랑과 희생이었다. 이렇게 볼 때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특권과 부활의 영광을 향한 열망에 기초하기 보다, 가난하고 억눌리며 고통받는 모든 존재자들을 해방시키려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해야 하지 않을까? 특권과 부활은 없고 주검으로 끝나는 치욕이라 해도, 당당한 용기 없이 마지못해지는 십자가일지라도 고통받는 존재자들과 하나된 사랑에 못이겨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는 마음에 기초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혹시 내 구원을 포기하는 배교일지라도.([순교자]나 [침묵]이라는 소설은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구원까지 포기하는 배교를 상징적으로 그려줌으로써 참된 신앙, 참된 순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역사적 예수가 보여주는 정치, 사회적 함의와 예수의 신앙이 적어도 내게는 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혹은 부활의 영생을 맛보기 위해, 두려움도 없이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는 모습은 내 가슴 깊이 다가오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할 자신도 없다. 그러나 존재자들의 억눌린 고통이 내 안에 깊이 스며들고 그로인해 두렵고 떨리지만 어쩔 수 없이 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은 내 일상에 보다 가까운 것으로 느껴진다. 당장 모든 것을 줄 수는 없지만 작은 것부터라도 나눌 수 있는 작은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그 연대의 텃밭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도 익어가고 열매맺을 수 있을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그런 사랑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내 안에 이미 허락하신 사랑이 그 놀라운 희생을 감싸 안을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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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스 2004-04-13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교리사인가... 곤잘레스 책을 읽었는데 너무 깔끔하고 명쾌하더군요. 처음 들어보는 신학자였는데 말이죠. 이 책도 한 번 읽어봐야 되겠네요.

물무늬 2004-04-14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보수적인 성향이 있는 듯하지만 님의 말씀처럼 명쾌하게 쓰시죠. 신학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이 분의 책을 교회사나 사상사의 교제로 많이들 채택하더군요. 잘은 모르지만 곤잘레스가 역사신학 쪽에서는 꽤 권위를 인정받는 학자인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책은 아니지만 기초적인 책이라 교회사를 위해서는 거쳐가야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사 관련한 책 가운데 최근에 나온 아주 흥미진진한 책이 하나있습니다. 님의 코멘트를 볼 때 아마 님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나온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라는 책입니다. 그리스도론 논쟁의 사상사와 정치사 부분들 자세히 다룬 책인데 읽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고 있죠. 시간이 없어서 다음으로 미루고 있지만....

아라비스 2004-04-13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교의사를 다른 내용이라면, 그 책 제목이 정말 딱이군요. 근데 전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고 있답니다. 그냥 얼치기루요... 올해는 논문을 써야 하는데 이렇게 알라딘을 들락거리고 있는 걸 보면 뻔하죠.(칼 라너의 하느님 체험, 으로 쓰려는데 혹 좋은 자료 있음 알려주세요^^;)

물무늬 2004-04-13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셨군요. 역시 가톨릭 신학을 하시는 분이여서 열린 신앙의 관점과 미학적 관점을 고루 지니실 수 있으셨구나 싶었습니다. 사실 개신교는 미학적 감각을 상실한 안타까운 전통이라서...전 개신교 신학을 공부하면서 동양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어찌보면 개신교보다는 불교적 성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칼라너의 하느님 체험"이라...죄송합니다. 아직 공부가 얕아서 자료를 알려드릴만큼은 못됩니다. 칼라너에 대한 논문을 한 편 갖고 있기는 한데 그 정도는 대학 도서관에서도 충분히 찾으실 수 있을것이라서...전에 이찬수 목사님의 논문과 책을 훌터본 일이 있었죠. 깊이 공부해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깊이 다가가야 할 분이라는 미련만 남겨뒀습니다. 아마 이찬수 목사님께 직접 연락해보시면 좋은 자료를 얻으실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필요하시면 메일주소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가까운 전통을 공부하시는 님을 만나게 되서 더욱 반갑습니다. 가톨릭 전통이나 미술에 대해서 배울 수 있을거라는 기대 충만입니다.
 

역사적 예수의 관점에서 본 2, 3C 박해와 순교

교회사 가운데 2C에 일어난 박해와 순교를 바라보면, 무엇보다 고통과 죽음에 초연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에 대한 동경과 흠모의 마음으로 순교해나간 신앙인들의 모습이 강한 인상을 준다. 특히 순교자행전(Acts of the martyers)에서 볼 수 있는 순교자들의 고백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의 글에서는 순교에 대한 두려움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순교를 특권과 영광으로 여기고 흠모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그를 구출하고자하는 로마교회의 신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그대들의 친절이 나를 오히려 해치리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들은 그 계획을 성공시킬지 모른다. 그러나 부디 나의 부탁을 들어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얻게 하라" 유스토 L. 곤잘레스 저,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은성출판사, 1987), p. 73.

그는 자기 인생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것이고 이런 궁극적 희생을 통해서 진정한 제자가 되기 시작한다고 믿었다고 한다(앞의 책, 같은 쪽).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통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그의 보혈을 마실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으며 그와 함께 부활할 것을 믿었다.

3C의 박해 속에 순교한 한 여인의 모습에서도 박해를 통한 순교를 영광으로 여기는 모습이 나타난다. [퍼페투아와 펠리시타스의 순교기](Martyardom of Saints Perpetua and Felicitas)에 나타나는 퍼페투아는 젖먹이 어린 아이를 임신한 상류층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오히려 임신한 것 때문에 순교에 참여하지 못할까 두려했다고 한다.(앞의 책, p. 141)

골잘레스는 그의 책 초대교회사에서 "순교는 인간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믿었던 초대 신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p.77)"고 한다.

이런 순교자들의 놀라운 고백을 대하면 우선 내 신앙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과연 내 안에도 그런 순수한 신앙의 열정이 있는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극한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었을까? 이런 실존적 질문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순교와 역사적 예수의 순교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측면으로 나아가게 한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는 특권과 부활에 대한 소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아름답고 놀랍지만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와 차이를 지니고 있다.

우선 예수의 순교에서는 그런 당당함과 동경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극한의 두려움으로 그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진 십자가의 모습이다. 물론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내놓은 한 모습은 그런 기도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그 장면은 예수를 추종하는 무리들과 로만군들 간의 혈전을 완곡한 상징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복음서 어디에도 초대교회 신자들이 보여준 당당함과 동경은 없다.

보다 중요한 차이점은 순교의 이유에 있다. 예수의 순교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신앙이 초래한 정치, 종교적 갈등 속에 위치한다. 천하고 가난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실천적 사랑이 정치, 종교적 권력구조와 충돌하면서 일어난 죽음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통치 아래 자유가 억압되는 상황이었음에도 초대교회 신앙인들의 순교에는 억눌린 자로 인한 정치, 종교적 갈등을 찾아볼 수 없다.

순교와 관련된 고백들에서는 [예수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이 중심에 있었다. 로마의 통치 아래서 태양신 숭배를 통해서 로마의 통치자를 숭배하게 한 법을 따를 수 없었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오해로 인해 배교를 요구당할 때 굴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순교에서는 약자와 억눌린 자에 대한 실천적 연대로 인한 정치 사회적 맥락을 찾기 어렵다. 예수에 대한 신앙을, 즉 그리스도론이라는 특정한 절대신념체계를 지키려는 열정이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순교가 놀랍고 경이로우며, 바로 그 순교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전해진 것이기에 감사드릴 일이고 겸허히 고개 숙이게 되는 것임은 틀림없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대단한 영광이자 은사와 선물로 생각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했고 그것을 흠모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안락하고 부요한 삶으로 오해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부르짖는다. 이런 극단적인 차이는 참된 믿음과 신앙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자문하게 한다. 오늘날 신앙이 값싼 은혜로 경박하고 가벼워진 현실 속에서 목숨을 건 신앙의 모습은 심각한 경종을 울려준다.

그러나 그 순교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아름다운 비젼이 담겨있음에도 그 고난이 지닌 정치 사회적 맥락이 희석되거나 상실되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물론 초기 신앙인들의 순교에 대해서 전해지는 기록들이 모든 것을 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의 활동시기와 달리 기독교 신앙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상황적 차이도 있다. 하지만 순교의 기록 가운데 압제당하는 민족의 아픔이나 억눌리고 고통받는 사람들로 인한 희생의 죽음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 문제이다.

게다가 만일 순교에 관한 기록들이 보여주는 형태의 순교만을 강조할 때, 즉, [예수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을 지키려는 순교만 강조될 때,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뿌리를 상실하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개인적인 영생에만 치우칠 수 있는 위험한 왜곡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교회와 사회를 너무 이원론적으로 보고 내세중심적으로 치우치는 신앙의 왜곡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될 때 순교는 또다른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될 위험성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신앙으로 인한 고문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고백자"들이 교회내에서 자신들의 특별한 위치를 주장하고, 변절자들이 교회의 교제 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할 수 있는 권리를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여 교회 안에 분열의 문제를 일으켰었다. 이에 대해 카르타고의 시프리안은 그런 자들은 고백자 곧 순교자가 아니라고 맹렬히 비판했고, 어거스틴은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고난과 순교에 대한 이유가 오직 교회의 성장과 한 몸됨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성장과 일치라는 중요한 필요성을 강조한 것임에도 교회와 사회의 이원론적 단절을 강화하고 교회만을 위한 희생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은 틀림없다.(보니페이스 램지 저, 초대 교부들의 세계, 이후정, 홍삼열 역(대한기독교서회, 1999),pp. 171-173)

또한 그런 희생이 영생과 특권, 그리고 자기의에 대한 집착을 무의식 속에 감춘 자아도취적이고 메조키스트적인 자기기만이 될 수 있는 위험성도 지니고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이라는 의식표면 아래로 자학적 파괴성에 근거한 자기 쾌락과 자기 의를 위한 욕망을 감출 수 있다는 것이다. 고백자가 자신의 특권을 주장한 경우에서도 그런 경향을 엿볼 수 있고, 당시에 이미 퀸투스라는 신자가 순교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법정에 섰다가 마지막 순간에 포기한 사례도 있었다.(유스토 L. 곤잘레스 저,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은성출판사, 1987), p.76)

이런 위험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의 십자가가 지닌 생명력, 그 부활의 근원을 명확히 해야할 것이다. 그 근원은 영생이나 영광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고통받는 존재자들에 대한 절대적 사랑과 희생이었다. 이렇게 볼 때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특권과 부활의 영광을 향한 열망에 기초하기 보다, 가난하고 억눌리며 고통받는 모든 존재자들을 해방시키려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해야 하지 않을까? 특권과 부활은 없고 주검으로 끝나는 치욕이라 해도, 당당한 용기 없이 마지못해지는 십자가일지라도 고통받는 존재자들과 하나된 사랑에 못이겨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는 마음에 기초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혹시 내 구원을 포기하는 배교일지라도.([순교자]나 [침묵]이라는 소설은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구원까지 포기하는 배교를 상징적으로 그려줌으로써 참된 신앙, 참된 순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역사적 예수가 보여주는 정치, 사회적 함의와 예수의 신앙이 적어도 내게는 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혹은 부활의 영생을 맛보기 위해, 두려움도 없이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는 모습은 내 가슴 깊이 다가오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할 자신도 없다. 그러나 존재자들의 억눌린 고통이 내 안에 깊이 스며들고 그로인해 두렵고 떨리지만 어쩔 수 없이 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은 내 일상에 보다 가까운 것으로 느껴진다. 당장 모든 것을 줄 수는 없지만 작은 것부터라도 나눌 수 있는 작은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그 연대의 텃밭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도 익어가고 열매맺을 수 있을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그런 사랑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내 안에 이미 허락하신 사랑이 그 놀라운 희생을 감싸 안을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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