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사
후스토 L.곤잘레스 / 은성 / 198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교회사 가운데 2C에 일어난 박해와 순교를 바라보면, 무엇보다 고통과 죽음에 초연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에 대한 동경과 흠모의 마음으로 순교해나간 신앙인들의 모습이 강한 인상을 준다. 특히 순교자행전(Acts of the martyers)에서 볼 수 있는 순교자들의 고백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의 글에서는 순교에 대한 두려움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순교를 특권과 영광으로 여기고 흠모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그를 구출하고자하는 로마교회의 신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그대들의 친절이 나를 오히려 해치리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들은 그 계획을 성공시킬지 모른다. 그러나 부디 나의 부탁을 들어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얻게 하라" 유스토 L. 곤잘레스 저,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은성출판사, 1987), p. 73.

그는 자기 인생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것이고 이런 궁극적 희생을 통해서 진정한 제자가 되기 시작한다고 믿었다고 한다(앞의 책, 같은 쪽).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통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그의 보혈을 마실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으며 그와 함께 부활할 것을 믿었다.

3C의 박해 속에 순교한 한 여인의 모습에서도 박해를 통한 순교를 영광으로 여기는 모습이 나타난다. [퍼페투아와 펠리시타스의 순교기](Martyardom of Saints Perpetua and Felicitas)에 나타나는 퍼페투아는 젖먹이 어린 아이를 임신한 상류층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오히려 임신한 것 때문에 순교에 참여하지 못할까 두려했다고 한다.(앞의 책, p. 141)

골잘레스는 그의 책 초대교회사에서 "순교는 인간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믿었던 초대 신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p.77)"고 한다.

이런 순교자들의 놀라운 고백을 대하면 우선 내 신앙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과연 내 안에도 그런 순수한 신앙의 열정이 있는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극한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었을까? 이런 실존적 질문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순교와 역사적 예수의 순교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측면으로 나아가게 한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는 특권과 부활에 대한 소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아름답고 놀랍지만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와 차이를 지니고 있다.

우선 예수의 순교에서는 그런 당당함과 동경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극한의 두려움으로 그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진 십자가의 모습이다. 물론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내놓은 한 모습은 그런 기도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그 장면은 예수를 추종하는 무리들과 로만군들 간의 혈전을 완곡한 상징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복음서 어디에도 초대교회 신자들이 보여준 당당함과 동경은 없다.

보다 중요한 차이점은 순교의 이유에 있다. 예수의 순교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신앙이 초래한 정치, 종교적 갈등 속에 위치한다. 천하고 가난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실천적 사랑이 정치, 종교적 권력구조와 충돌하면서 일어난 죽음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통치 아래 자유가 억압되는 상황이었음에도 초대교회 신앙인들의 순교에는 억눌린 자로 인한 정치, 종교적 갈등을 찾아볼 수 없다.

순교와 관련된 고백들에서는 [예수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이 중심에 있었다. 로마의 통치 아래서 태양신 숭배를 통해서 로마의 통치자를 숭배하게 한 법을 따를 수 없었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오해로 인해 배교를 요구당할 때 굴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순교에서는 약자와 억눌린 자에 대한 실천적 연대로 인한 정치 사회적 맥락을 찾기 어렵다. 예수에 대한 신앙을, 즉 그리스도론이라는 특정한 절대신념체계를 지키려는 열정이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순교가 놀랍고 경이로우며, 바로 그 순교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전해진 것이기에 감사드릴 일이고 겸허히 고개 숙이게 되는 것임은 틀림없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대단한 영광이자 은사와 선물로 생각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했고 그것을 흠모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안락하고 부요한 삶으로 오해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부르짖는다. 이런 극단적인 차이는 참된 믿음과 신앙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자문하게 한다. 오늘날 신앙이 값싼 은혜로 경박하고 가벼워진 현실 속에서 목숨을 건 신앙의 모습은 심각한 경종을 울려준다.

그러나 그 순교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아름다운 비젼이 담겨있음에도 그 고난이 지닌 정치 사회적 맥락을 상실해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물론 초기 신앙인들의 순교에 대해서 전해지는 기록들이 모든 것을 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의 활동시기와 달리 기독교 신앙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상황적 차이도 있다. 하지만 순교의 기록 가운데 압제당하는 민족의 아픔이나 억눌리고 고통받는 사람들로 인한 희생의 죽음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 문제이다.

게다가 만일 순교에 관한 기록들이 보여주는 형태의 순교만을 강조할 때, 즉, [예수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을 지키려는 순교만 강조될 때,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뿌리를 상실하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개인적인 영생에만 치우칠 수 있는 위험한 왜곡이 일어나지 않을까? 교회와 사회를 너무 이원론적으로 보고 내세중심적으로 치우치는 신앙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렇게 될 때 순교는 또다른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될 위험성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신앙으로 인한 고문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고백자"들이 교회내에서 자신들의 특별한 위치를 주장하고 변절자들이 교회의 교제 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할 수 있는 권리를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여 교회 안에 분열의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 카르타고의 시프리안은 그런 자들은 고백자 곧 순교자가 아니라고 맹렬히 비판했고, 어거스틴은 "순교자를 만드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이유"라고 강조했다.(보니페이스 램지 저, 초대 교부들의 세계, 이후정, 홍삼열 역(대한기독교서회, 1999),pp. 171-173) 고난과 순교에 대한 이유가 오직 교회의 성장과 한 몸됨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성장과 일치라는 중요한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교회와 사회의 이원론적 단절을 강화하고 교회만을 위한 희생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도 틀림없다.

또한 그런 희생이 영생과 특권, 그리고 자기의에 대한 집착을 무의식 속에 감춘 자아도취적이고 메조키스트적인 자기기만이 될 수 있는 위험성도 지니고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이라는 자의식의 가면 아래로 자학적 파괴성에 근거한 자기 쾌락과 자기 의를 위한 욕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수 있다. 고백자가 자신의 특권을 주장한 경우에서도 그런 경향을 엿볼 수 있고, 당시에 이미 퀸투스라는 신자가 순교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법정에 섰다가 마지막 순간에 포기한 사례도 있었다.(유스토 L. 곤잘레스 저,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은성출판사, 1987), p.76)

이런 위험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의 십자가가 지닌 생명력, 그 부활의 근원을 명확히 해야할 것이다. 그 근원은 영생이나 영광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고통받는 존재자들에 대한 절대적 사랑과 희생이었다. 이렇게 볼 때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특권과 부활의 영광을 향한 열망에 기초하기 보다, 가난하고 억눌리며 고통받는 모든 존재자들을 해방시키려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해야 하지 않을까? 특권과 부활은 없고 주검으로 끝나는 치욕이라 해도, 당당한 용기 없이 마지못해지는 십자가일지라도 고통받는 존재자들과 하나된 사랑에 못이겨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는 마음에 기초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혹시 내 구원을 포기하는 배교일지라도.([순교자]나 [침묵]이라는 소설은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구원까지 포기하는 배교를 상징적으로 그려줌으로써 참된 신앙, 참된 순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역사적 예수가 보여주는 정치, 사회적 함의와 예수의 신앙이 적어도 내게는 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혹은 부활의 영생을 맛보기 위해, 두려움도 없이 당당하게 십자가를 지는 모습은 내 가슴 깊이 다가오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할 자신도 없다. 그러나 존재자들의 억눌린 고통이 내 안에 깊이 스며들고 그로인해 두렵고 떨리지만 어쩔 수 없이 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은 내 일상에 보다 가까운 것으로 느껴진다. 당장 모든 것을 줄 수는 없지만 작은 것부터라도 나눌 수 있는 작은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또한 그 연대의 텃밭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도 익어가고 열매맺을 수 있을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그런 사랑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내 안에 이미 허락하신 사랑이 그 놀라운 희생을 감싸 안을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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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스 2004-04-13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교리사인가... 곤잘레스 책을 읽었는데 너무 깔끔하고 명쾌하더군요. 처음 들어보는 신학자였는데 말이죠. 이 책도 한 번 읽어봐야 되겠네요.

물무늬 2004-04-14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보수적인 성향이 있는 듯하지만 님의 말씀처럼 명쾌하게 쓰시죠. 신학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이 분의 책을 교회사나 사상사의 교제로 많이들 채택하더군요. 잘은 모르지만 곤잘레스가 역사신학 쪽에서는 꽤 권위를 인정받는 학자인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책은 아니지만 기초적인 책이라 교회사를 위해서는 거쳐가야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사 관련한 책 가운데 최근에 나온 아주 흥미진진한 책이 하나있습니다. 님의 코멘트를 볼 때 아마 님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나온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라는 책입니다. 그리스도론 논쟁의 사상사와 정치사 부분들 자세히 다룬 책인데 읽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고 있죠. 시간이 없어서 다음으로 미루고 있지만....

아라비스 2004-04-13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교의사를 다른 내용이라면, 그 책 제목이 정말 딱이군요. 근데 전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고 있답니다. 그냥 얼치기루요... 올해는 논문을 써야 하는데 이렇게 알라딘을 들락거리고 있는 걸 보면 뻔하죠.(칼 라너의 하느님 체험, 으로 쓰려는데 혹 좋은 자료 있음 알려주세요^^;)

물무늬 2004-04-13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셨군요. 역시 가톨릭 신학을 하시는 분이여서 열린 신앙의 관점과 미학적 관점을 고루 지니실 수 있으셨구나 싶었습니다. 사실 개신교는 미학적 감각을 상실한 안타까운 전통이라서...전 개신교 신학을 공부하면서 동양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어찌보면 개신교보다는 불교적 성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칼라너의 하느님 체험"이라...죄송합니다. 아직 공부가 얕아서 자료를 알려드릴만큼은 못됩니다. 칼라너에 대한 논문을 한 편 갖고 있기는 한데 그 정도는 대학 도서관에서도 충분히 찾으실 수 있을것이라서...전에 이찬수 목사님의 논문과 책을 훌터본 일이 있었죠. 깊이 공부해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깊이 다가가야 할 분이라는 미련만 남겨뒀습니다. 아마 이찬수 목사님께 직접 연락해보시면 좋은 자료를 얻으실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필요하시면 메일주소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가까운 전통을 공부하시는 님을 만나게 되서 더욱 반갑습니다. 가톨릭 전통이나 미술에 대해서 배울 수 있을거라는 기대 충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