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곧 삶이요 열반 (정승석 저)'을 읽고 |
"죽음은 곧 삶이요 열반 (정승석 저)"을 읽고 한국종교학회 편, '죽음이란 무엇인가'(도서출판 창, 2001), p.73∼99.
빗장을 풀며 '알면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깊이 알면 알수록 그 대상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더 사랑하게 된다1)는 의미인 듯하다. 이 잠언은 종교 간의 이해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개종교들은 자기 종교의 교리에 대한 절대적 신념과 타종교에 대한 무지로 인해 타종교에 대한 편견에 빠지기 쉽다. 이로 인해 서로의 모습을 열린 마음으로 만나고 서로 간의 차이를 통해 배우며, 이를 통해 더욱 자기다워질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편견을 근거로 상대를 정죄하고 무시하며 심지어 극단적인 반목에 이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런 문화간, 종교간 충돌의 문제를 지니고 살아가는 현대에서 서로를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의 맥락 속에서 '죽음은 곧 삶이요 열반'이라는 정승석의 글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글이 불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고치고, 이를 통해서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정승석이 다루려는 오해는 '불교가 속세의 고뇌로부터 초연한 삶을 강조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고, 불교가 '죽음이 곧 열반'이라고 보기 때문에 죽음을 추구하는 종교로서 허무주의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불교의 이해를 바르게 전함으로서 불교의 궁극적 인식인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하고자 한다. 불교가 바라보는 죽음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생사즉열반의 진리에 대해서도 오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서 불교가 이해하는 죽음, 죽음에 대한 접근방식과 극복방식을 '죽음에 대한 붓다의 태도', '죽음의 정의와 상태', '죽음의 종류', '죽음의 과정', '죽음의 극복'을 분석함으로써 살펴본다. 우선은 저자의 생각을 따라 정리한 후에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불교의 이해를 살펴보려 한다.
지형탐사 ; 내용정리
[죽음에 대한 붓다의 대응] 저자는 먼저 죽음에 대한 붓다의 태도를 그의 설법 중에서 죽음에 대한 부분들을 인용하여 살펴본다. 이를 통해서 불교가 죽음에 대해서 도피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불가피한 현실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그 설법들을 일일이 살펴보지 않아도 불교가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여 해결하려 한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의 고통 가운데 죽음에 대한 고통은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불교가 근본적으로 인간이 직면한 고통의 실상을 정직하게 인식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집중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 다시 언급되기에 부연은 생략한다.
[죽음의 정의와 상태] 이렇게 죽음의 현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직면하려는 불교가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이어서 설명한다. 불교가 정의하는 죽음을 간단히 정리하면 "수명과 체온과 의식[識:정신작용]이 사라져 신체의 기관이 모두 변하여 파괴된 모습을 말한다.(p.81)" 이 때, 수명이란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기관으로서 체온과 의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 두 가지가 육체로부터 사라질 때 수명이 파괴되고, 바로 이런 상태가 죽음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죽음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수명을 지닌 생명체가 전변(轉變)하는 과정 중에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유(四有)' 개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사유란 생명이 결성되는 찰나인 생유(生有), 이로부터 생명이 임종하기 직전까지인 본유(本有), 최후에 임종하는 찰나인 사유(死有), 이로부터 다시 생명이 결성되는 생유와의 사이인 중유(中有)를 말한다. 이는 인간이 "물질적 신체[色], 감각[受], 관념[想], 성향[行], 의식[識]"2)이라는 다섯가지 요소 즉, 오온(五蘊)의 집합체인데, 이런 인간존재가 이 네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가 보는 죽음은 생명의 단멸(斷滅)이 아니라 삶의 연장선에 있는 하나의 과정이고, 바로 여기서부터 죽음에 대한 극복의 열쇠인 사즉생(死卽生)이라는 관점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죽음의 종류] 다음에는 죽음의 종류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논의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어서 생략하지만, 기억할 점은 우선 불교가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될 만큼 죽음의 종류를 자세하게 분류하여 파악한다는 점이다. 그 만큼 죽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철저하게 마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죽음에 대한 한 가지 분류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극복의 방식이다. 그것은 승만경에서 죽음을 분단사(分段死)와 부사의변역사(不思議變易死)로 나누는 것이다. 이 때 분단사란 허위의 중생이 수명의 한계를 따라 육신의 형태로 죽는 것을 말하고, 부사의변역사란 아라한과 벽지불과 대력보살 등의 육신이 생멸변역을 받지않고 자신의 의지를 따라 성립된 것일 뿐임을 말한다. 이는 부사의변역사에서는 육신의 존속 곧 죽음이 임의로 결정되기 때문에 죽음의 문제가 극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의 과정] 이어서 죽음의 과정이 설명되는데, 이것도 죽음의 종류 이상으로 복잡하고 저자의 표현 대로 번쇄한데, 역시 논점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중에 한 가지만 예로서 살펴보면,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육체의 기관이 사라지는 과정이 그가 처한 세계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른데, 만일 성자같은 무형의 존재가 거하는 최고의 세계인 무색계에서면 명(命), 의(意), 사( )[무관심·평정]의 3근이, 유형의 존재가 거하는 천계인 색계(色界)에서면 앞의 3근에 다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의 5근을 포함한 8근이 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욕구의 지배를 받는 인간 세계인 욕계에서면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돌연히 죽을 때는 앞의 8근에 남근(男根)·여근(女根)을 포함한 10근이 멸하지만, 8근에 남근과 여근 중에 어느 한쪽만 포함하여 9근이 멸하거나 8근만 멸하고, 점차로 죽을 때는 앞에서 제시한 3계의 경우마다 각기 신(信), 근(勤), 염(念), 정(定), 혜(慧)의 5근을 더 멸한다는 것이다. 불교가 자세하게 논하는 이런 죽음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이 육체의 기능 중에서 전적으로 정신적 기능의 소멸로 묘사되는 마음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유 중에서 사유[죽음의 찰나]와 생유[생명결성의 찰나]는 산란한 마음에만 있다(p92)".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무심에서는 죽음과 출생이 없다. 결국 죽음의 문제가 정신의 문제고, 정신의 집중이나 적정(寂靜)의 경지에서 극복될 수 있다는 불교만의 독특한 인식을 만나게 된다.
[죽음의 극복] 앞서 살펴본 내용에서도 이미 암시되어있지만 불교는 죽음의 불안에서 해방되기 위한 수행으로 죽음의 의미와 현상에 대해서 철저히 이해하는 염사(念死)를 중시한다. 죽음의 의미를 그 현상을 둘러싼 외연과의 관련하에서 이해할 때 진실한 것이고, 이렇게 죽음에 관한 전체 현상의 진실[실상(實相)]을 철저히 이해하는 정각(正覺)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 때 죽음에 대한 관심은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실의 세계를 밝히는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철저히 파악된 전체 현상의 실상은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라고 표현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나 해탈은 그런 실상을 체득함으로써 죽음을 포함한 모든 문제가 극복되어 있는 상태이다.(p. 94)" 그리고 이런 실상을 삶과 죽음의 관계에서만 살펴보면, 生卽死 死卽生의 진실에 이르게 된다. 즉, 삶이 이미 죽음을 내포하고 있고, 죽음에서부터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런 삶과 죽음의 실상을 깨달을 때 죽음의 문제는 극복된다고 본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생과 사가 동일성의 논리에 있다는 점인데, 동일성은 절대적으로 비객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념적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실상은 각자의 내적 체험에 의해서만 깨닫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내적체험에 의해 동일시된 생과 사가 열반, 즉 죽음이 극복된 세계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불사는 열반과 동일한 의미로서 죽음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번뇌를 멸함으로써 도달하는 절대 안주의 경지인 열반 또는 해탈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사즉열반'에서 생사란 동일성의 논리를 따를 때, 불사이자 열반이고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현상세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는 케네스 첸의 설명에 의하면 이원론적 세계관의 소승불교와는 다른 대승불교적 관점이다. 소승불교는 갈망과 욕망으로 인해 생겨나는 고통과 불안의 세계인 현상적 세계와 업의 작용이 끊어진 열반의 세계인 두 차원으로 존재를 파악했다. 이런 관점에서 열반은 현상적 세계에서 반복되는 환생에서 벗어나는 것이자 현상 세계의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관점에서는 모든 존재의 요소들이 그 원인과 조건을 제거하고 나면 실재하지 않는 텅빈 공이고, 열반 역시 모든 차별과 특성과 정의를 붙일 수 없기 때문에 공이다. 결국 존재의 현상적 요소들과 열반이 모두 공이기 때문에 현상세계와 열반은 서로 같다는 "생사즉열반"이라는 진리에 이르게 된다. 이런 대승의 관점에서는 열반과 현상세계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사실은 미망이고 어느 한 쪽을 버리고 나머지를 선택한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3) 결국 불교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이런 실상을 체험하고 내적으로 구현한 무심(無心)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때 무심이란 '생즉사 사즉생'을 깨달은 평등심(平等心)이고, '고(苦)·무상(無常)·무아(無我)'의 진실을 체득하여 생사의 원인을 제거한 마음의 결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과 사를 분리하여 고통을 초래하는 무명(無明)을 제거한 것이다. 무명이란 "자아와 현상계의 본성에 대한 무지"로서 "무명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비참한 것을 행복한 것으로 알고 실재하지 않고 덧없는 것을 실재하고 영원한 것으로 간주한다."4) 이런 무명이 모든 고통이 시작되는 첫 고리로써 이를 깨뜨리면 모든 고통이 제거된다는 원리다.
[허무주의의 오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는 죽음의 문제를 물리적 현상에 대한 관찰에서부터 마음의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만일 물리적 현상의 측면에 대한 관찰에서 멈추고, 죽음을 곧 열반으로 봤다면 모든 것이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삶의 근저에 무의미와 허무가 자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죽음을 결국에 가서는 마음의 문제로 보고 무심을 체득함으로서 생사의 세계 속에서 열반을 살아내는 것을 중요시한다. 바로 이런 불교의 관점은 오히려 허무주의에 대한 극복이자 초극의 의지가 맺은 결실인 것이다.
빗장을 걸며 : 죽음에 대한 불교의 이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는 죽음 그 자체의 정체와 정면대결하여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비문제화시켜 버리려는 독특한 방식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즉, "불교는 죽음이라는 실체를 인정하고서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 것인가라는 방향을 걷지않고, 죽음이라는 실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해 버림으로서, 죽음이란 없는 것이라고 깨달음으로서 죽음을 극복하려는 종교"5)라는 것이다. 이런 불교에 있어서 죽음은 존재가 변해가는 변화의 한 부분으로써,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존재의 사라짐, 단멸(斷滅)도 아니다. 물론 단순하게 새로운 세계로 도약해 가는 가능성의 과정만도 아니다. 오히려 무상한 변화의 과정인 죽음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라보는 체득을 통해서 넘어서야 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불교의 이런 관점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첫 째, 불교가 죽음의 문제에 접근해 가는 방식은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현상에서부터 시작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나 두려움, 또는 죽음에 대한 신화적 이해나 신비한 이해의 방식이 아니라, 죽음이 어떤 과정으로 일어나고, 그 종류는 어떻게 분류되며, 그 각각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인 것을 대단히 복잡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해간다. 이런 측면은 죽음 문제의 해결에 대해서 불교가 얼마나 철저하고 현실적인지를 보여준다. 죽음의 문제를 단순히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이나 윤회로 떠넘김으로써 회피하는 방식처럼 형이상학적이기만 한 공허한 방식들과는 너무나 다른 방식이다. 둘 째, 죽음의 문제를 생명과 삶의 문제와 깊이 연관시키는 점이다. 生卽死 死卽生의 관점에서 드러나듯이 죽음을 생명과 단절되고 대립적인 것으로 바라보면서 터부시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이 죽음으로부터 기원한다고 볼만큼 죽음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해낸다. 이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파괴하려고만 하는 두려움과 욕심의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의 미숙함을 향해서 중요한 깨달음을 전해준다. 발전과 확대만을 중요시하는 현대의 문명은 죽음을 생명의 적으로만 보면서 파괴하려고만 하여 오히려 모든 생명에 있어서 자신을 내어주는 죽음의 성숙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하여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고, 이것은 생태문제나 소비문화 등의 여러 문제로 전지구적 생명의 그물에 치명적인 상처를 내고 있다. 이런 문제 앞에서 불교는 오히려 죽음이 궁극적 의미와 삶 속에서 죽음을 깊이 품고 이로 인해 오히려 삶이 풍성해지는 성숙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불교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죽음의 의미와 현상에 대해서 철저히 이해하려는 염사(念死)를 중시'한다는 세 번째 특징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 문화는 죽음의 문제를 가장 극단적인 타부로 여기면서 들춰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건물의 4층을 F로 하거나 무덤을 가능한 한 멀리 두려는 등의 모습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회피하려고만 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생각한다고 어떤 대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섣부른 판단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무시한다. 그러나 죽음을 바로 직면하고 마주하는 삶이 아니라면 문제가 있는 삶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불교는 우리 삶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깊이 마주하고 뚫고 나아가는 일이 오히려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일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네 번째는 이런 복잡하게 보이는 생각의 결이 모두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에 실천적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죽음의 현상, 종류, 과정 등의 내용이나 극복의 방법 등을 얕게 보면 대단히 사변적이고 공허한 듯이 보이고, 죽음과 그 이후 세계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정립하고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가르침은 인간이 처한 죽음의 절박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하는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로 집중되어있다. 그래서 지적인 논증이나 설득보다는 내적인 체험을 통한 체득을 강조한다. 물론 이런 면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에게 얼마나 체득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그 궁극적 의도의 방향성만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1) 최재천 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사, 2001), p. 7, '글을 시작하며'에서 참고. 2) 케네스 첸 저, "佛敎의 理解", 길희성·윤영해 역(분도출판사, 1994), p. 94에서 인용. 3) 앞의 책, p. 94∼96에서 참고. 4) 앞의 책, p. 69에서 인용. 5) 김경재, "죽음에 대한 이해와 성찰-죽음에 대한 이해와 그 극복을 향한 위대한 두 종교의 패러다임"- 중 '[2] 원시불교에서 죽음의 극복'에서 인용.
※ 참고도서 정승석, "죽음은 곧 삶이요 열반", 한국종교학회 편, '죽음이란 무엇인가'(도서출판 창, 2001), p.73∼99. 케네스 첸 저, "佛敎의 理解", 길희성·윤영해 역(분도출판사, 1994) 김경재, "죽음에 대한 이해와 성찰-죽음에 대한 이해와 그 극복을 향한 위대한 두 종교의 패러다임"-(1997)http://www.soombat.org/article/article.html 최재천 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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