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임의 心
김영임 노래 / MFK(뮤직팩토리코리아)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어머니 기억 속에 가곡과 앨비스의 노래를 너무나 멋드러지게 부르셨던 아버지,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듣는 모습을 찾기 어렵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기타를 배우고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부는 것은 내게 호흡과도 같았다. 내 안에 그 무엇을 노래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그 예민하고 여린 마음.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노래부르는 내 모습을 잃어갔다. 아버지 역시 그렇게 잃어가신 걸까?

중학교 때 서랍 깊은 곳에서 겉에 영어로만 적혀 있는 카세트 테이프를 발견한 일이 있다. 호기심에 틀어보고는 그 연주음악(폴모리아)이 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그 음악만 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 테이프가 아버지의 것이라는 점이 이상했었다. 아버지가 이런 음악을? 그렇게 아버지의 삶에서 희미해진 음악의 숨결...그렇게 서랍 깊은 곳에 갇혀버리게 한 현실의 무게...

음악을 잃어가신 아버지께서 가끔씩 들었던 음악이 하나 있었다. 바로 김영임의 "회심곡(回心曲)", 내 기억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노래이다. 어린 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뭔가 무척 힘겨운 일이 있으시면 아버지는 방에서 혼자 회심곡을 듣곤 하셨다. 뭔지 모를 구슬픔이 느껴지는 꽹과리 소리가 사이 사이에 울려오는 김영임의 회심곡. 가사를 알아들 수는 없었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향한 아버지의 깊은 회한과 자책감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을 직접 봤던 것인지 왜 그렇게 기억되는지 알 수 없지만 내 기억 속에 회심곡을 듣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뒷모습을 보이고 계신다. 당당하고 강한 모습의 앞모습과는 달랐던 그 뒷모습과 회심곡은 함께 있었다. "사람의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고 했던가? "뒷모습이 측은해 보이는 것은 그곳이 무장을 해제한 곳이기 때문이다. 완고한 자아로 무장하는 앞모습과는 달리 뒷모습은 철저히 무방비 상태로 열려있다."1) 표정도 말도 없는 뒷모습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면으로 가릴 수조차 없이 가장 진실한 모습이 비치는 마음의 얼굴이 되는 것일까? 회심곡을 홀로 듣으시던 그  뒷모습은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시며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버지의 속내를 느끼게 했다.

긴 병환 끝에 힘겹게 돌아가신 친구의 어머니, 친구의 뒷모습과 흐트러진 머리, 마를 대로 마른 멍한 눈망울 앞에 아무말 못하고 함께 울어야 했던 지난 밤. 먼길을 돌아오며 아버지의 회심곡을 떠올렸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회심곡은 그 노래를 홀로 들으시던 생전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른 거리게 한다. 회심곡과 아버지의 뒷모습은 하나가 되어 내게 한 편의 회심곡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구슬픈 꽹과리의 공허한 울림과 함께 돌이키는 마음(回心)이 들려온다. " ...아버지전 뼈을 빌고 어머니전 살을 빌어...나를 곱게 길렀건만 어려서는 철을 몰라 부모 은공을 갚을 소냐....세상천지 동포님네 회심곡을 허수말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할 일을 합시다..." 

1) 김승철 저, "전시회에 간 예수, 영화관에 간 부처"(시공사, 2001) pp. 161, 162에서 인용.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4-04-26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26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의 삶과 죽음이 세월이 흐르면서 제 일상에서는 오히려 무표정한 이야기가 되버린 듯합니다. 물론 어떤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제 몸이 아버지를 기억하고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당황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제 아버님의 이야기가 우리 존재의 무의식 깊은 곳에 흘러오는 아름다움과 맞닿아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살과 피를 모두 주시고 이제는 우리의 숨결이 되셨습니다."라고 우리 가족의 고백을 아버지의 묘비에 새겨넣었죠. 제 아버지의 죽어가시는 시간들은 제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시고 그리스도로 부활하시는 모습을 재체험케 해주었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인생의 무게를 더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홀로 남으신 어머님 앞에서 효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부모 가슴에 응어리로 남게 될까봐 두렵다는 님의 마음이 제게도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확신 속에서도 마음 깊은 곳에 불확신과 절망, 상처들이 뱀처럼 도사리고 소리없이 돌아다닌다는 님의 생각이 어쩌면 제 마음을 그리도 명확하게 비춰주시는지....일영에서도 새벽2시까지 서성이고, 옥상에서 혼자 별을 보게 되고, 잠시 눈을 붙이다 5시경에 다시 나와 홀로 산 꼭대기 까지 오르며 계속 제 마음 깊은 곳을 응시하게 되었습니다. 뱀처럼 소리없이 돌아다니는 혼돈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바울의 말씀처럼 이제까지 이뤄온 것에 대한 집착과 교만은 다 놓아버리고 늘 다시 시작하는 듯이 푯대를 향해 낳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망스럽기도 하지만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로드무비 2004-08-1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영임의 <회심곡> 사서 즐겨 들었어요.
김영동의 <먼 길>도 참 좋아한답니다.^^

물무늬 2004-08-1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셨군요.
전 아버님 덕분에 마음 붙이게된 곡이었네요.
참 마음 깊이 울려오는 곡이죠...*^^*
 
메를로 뽕띠와 애매성의 철학
김형효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6년 8월
평점 :
절판


메를로 뽕띠는 훗설의 현상학에 존재하는 중요한 두 흐름인 '선험적, 본질적 현상학'과 '생활세계의 현상학' 가운데 후자에 중심을 두고 강조한 실존주의적 경향의 현상학자이다. 즉, 구체적 실존과 사실의 모든 경험을 괄호 속에 묶어두고 관념의 본질을 의식 현상 속에서 찾으려는 것보다 의식이 실존의 체험적 세계에 근거하여 하나로 뒤엉켜 있다는 점에 강조점을 둔다는 것이다.

뽕띠가 이렇게 생활세계를 강조하는 것은 의식이 언제나 대상들에 대해 지향하고 있는 능동적인 면 뿐만 아니라 이런 의식의 집중이 없이 자동적이고 수동적으로 체험을 받아들이는 신체의 작용이 자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주어지는 세계는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세계라기 보다는 신체주관이 중심이 되어 체험되는 것이고, 인간의 의식이 언제나 신체를 전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신체주관이 의식작용의 근거로 작용한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런 관점은 훗설의 '환원'(reduktion)에 대해 다른 해석을 준다. 훗설은 명증한 진리를 확보하기 위해 의식의 순수한 모습을 규명하려는 의도로 선험적 환원을 말한다. 하지만 뽕띠는 오히려 이 환원은 그 완전한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인간의 의식이 신체적 주관에 근거지워져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의식과 신체의 관계를 무화시키는 훗설의 환원을 멈춰야 하고, 현상학은 인간의식의 근거가 되는 생활세계와 그것과 관계 맺는 의식의 "살아진", "체험된"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이 어떤 이념이나 과학의 교설 또는 종교적 교리 이전에 생활세계와 어떤 모습으로 관계 맺고 있는가하는 그런 원초적 인간생활의 적나라한 현상을 밝히려는 의도를 중심과제로 삼는다."1)

이런 뽕띠의 현상학이 설명하는 몸, 지각, 그리고 세계의 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세계 내적인 존재인 의식은 육화된(embodied) 상태로 인해 세계에 의해 구성되면서 동시에 세계를 향해 지향되어 있음으로 인해 세계를 선택해 구성한다. 그런데 이런 두 방향의 움직임이 신체를 통해서만 실존하기 때문에 결국 이런 구조는 '근원적으로 몸을 통해 세계는 인간을 구조화하고, 몸을 통해서 인간은 세계를 구조화한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런 신체의 인식작용을 신체주관의 '신체적 지각'(bodily percep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육화된 의식의 현상은 정확히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사이에 있는(in-between) 영역'이다."2)

이런 육화의 철학은 과학, 예술, 언어 그리고 역사 등의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전면적인 재해석을 요구한다. 그 가운데 철학에 대해서는 먼저 근대 철학사를 꿰뚫어 온 정신의 절대화를 비판한다. 즉, 정신이 절대화된으로써 정신 내적인 세계와 이성에 의해 이론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우리가 살아가는 바깥의 실제 세계보다 더 참운 세계로 보게 되는 문제를 낳는다는 것이다. 사실 뽕띠의 철학에 의하면 순수의식이나 순수한 세계와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기에 기존의 관념론, 경험론, 합리론 그리고 실재론 등의 철학은 무너지게 된다.

다음으로 기존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이원(二元)의 대립들 즉, 관념론과 실재론, 즉자와 대자,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기계론과 목적론 등의 대립을 낳는다는 문제를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이 문제를 신체주관 현상학 즉, 육화된 의식의 개념으로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를 극복하면서 과학적 경험론과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양뿔 사이을 빠져 나오려 한다. 의식과 세계의 극단적 양극화를 이 둘이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묶여있는, 주관과 객관이 이분되기 이전에 그 사이의 영역에 근거로 존재하는 '육화된 의식'을 제시함으로 가능케 하다.

그리고 과학에 대해서는 '과학이 사물들을 조작하고 그들에게서 생명성을 사상(捨象)시켜 버린다'3)고 비판한다. 과학이 이런 문제를 낳는 것은 스스로 보편적이라고 판단하는 과학의 모든 보편성이 사실 직접적으로 경험된 세계에 대한 단순한 추론 내지는 설명이기에 이차적 질서임에도 이것을 시간에 독립적인 절대불변의 진리로 잘못 보는 것에서 기원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현상학은 과학의 양심으로 작용하여 이른바 객관적 범주라고 보는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원래의 체험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의 의미를 새롭게 해준다. 즉, 과학이 과거와 미래이 시간적 한계의 제약 안에서 그리고 생활세계에서 우리의 지향적 활동의 산물일 뿐임을 알려주고 과학적 이성의 시간성은 그 안에 존재하는 상호주관성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이 때 상호주관성은 신체주관이 '지각됨과 지각함'으로 경험하는 것처럼 과학적 이성 역시 타자로부터 그 진리를 위임받는 동시에 타자를 위해서 진리를 재창조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이든 과학적이든 간에 이성은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생각 또는 자율적으로 사유하는 자아라는 형식으로 혼자 존재할 수 없다"4)는 것이다.

 [미주] 
1) 김영효, "메를로-뽕띠와 애매성의 철학" (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6), p. 17.
2) 리차드 커니,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 임현규, 곽영아, 임찬순 역(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2), p. 91.
3) 메를로 뽕띠, "눈과 마음", 앞의 책, p. 93에서 재인용.
4) 앞의 책, p. 95.

[참고도서]
박정호, 양운덕, 이봉재, 조광제, "현대 철학의 흐름" (서울: 도서출판 동녘, 1996)
김영효, "메를로-뽕띠의 애매성의 철학" (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6)
리차드 커니,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 임현규, 곽영아, 임찬순 역(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날 I
어떤날 노래 / 신나라뮤직 / 2000년 1월
평점 :
품절


여린 날개짓, 그 가녀린 떨림의 풍경

처음으로 음반을 사고 늦은 밤 라디오의 음악에서 귀기울기 시작하던 때, 내게는 음반을 고르고 듣는 나름의 무늬가 있었다. 그 가사가 내 가슴 깊이 울려와야 했고, 그 음반 전체에 한 곡도 버릴 곡이 없어야 했다. 그래서 내 가슴에 와닿은 음반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낯가림이 심한 편이어서 어려웠지만 일단 사귀게 되면 몇 시간이고 그 앨범을 듣고 또 들었었다. 어떤날Ⅰ은 그렇게 사귀어 내 어린 감성 깊이 뿌리내린 몇 않되는 앨범 중에 하나였다.

어떤날의 노래가 마음 깊이 울려온 것은 그 앨범 전체에 베어있는 너무도 여린 감수성과 일상의 사소한 소품들에까지 마음을 빼앗기는 순수한 시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창 밖의 빗소리에도 잠 못이루는 그 여린 가슴, 소리없이 떠나간 그 많은 사람들을 아직도 기다리는("하늘") 여린 감수성. 지친 마음으로 붙잡을 수 없었던 많은 꿈에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려 애쓰고, 곁에서 떠나갈 모든 것을 자신의 어두운 마음으로 사랑할 수 없기에 길모퉁이 조그만 화랑에 걸려있던 그림처럼, 여행길에 차창밖에 스치는 풍경처럼 그 모습들을 자신의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있게 하려 안간힘 쓰는("너무 아쉬워 하지마") 마음의 결, 그 상처받기 쉬운 영혼. 그리고 "햇빛, 따뜻한 한숨, 눈을 쓰는 싸리비 소리, 녹슨 기타줄, 지난 밤 거친 꿈 씻겨주는 빗소리..." 어떤날의 음악은 이렇게 일상의 구석에 숨겨진 사소한 소품들에까지 애정어린 시선을 빼앗기고 마는 마음의 무늬를 느끼게 해준다.

저기 끝없이 바라볼 수 있는 하늘, 저렇게 다가온다고, 어둡고 지루했던 어제라는 꿈 속에서 어서 올라오라고("하늘"),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날엔 우리 머리 위에 뜨거운 태양이 뜰거라고 위로해준다. 그리곤 수없이 다짐하고 또 허물어온 푸르른 꿈 위해 오늘도 조용히 일어나 혼자 걷는 너에게 저 파란 하늘 위에 나는 법을 배우는 작은 새라고 불러준다.("그날")

그렇게 어떤날의 노래는 스치가는 사람들과 풍경에 빼앗겨버린 마음의 상처와 함께 울어주고, 위로해주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많이도 무뎌진 시선으로 다시 들어본다. 내 어린 영혼에 깃들었던 작은 새의 여린 날개짓과 그 가녀린 떨림의 풍경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내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서 아직도 나는 법을 연습히고 있는 것만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명의료윤리를 공부하려는 수업, 그런데 그 절반은 죽음에 대한 탐구로 계획되어있다. 죽음에서 시작하는 생명에 대한 공부...

5부작 생노병사의 비밀 중
3부 검은 빛 죽음을 봤다. 일관된 흐름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생명과 죽음에 대한 화두들이 스쳐갔다.

1) 검은 꽃, 죽음의 향기
말기환자는 성격에 따라 개인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부정, 고립 2)분노, 노여움 3)타협(조금이라도 더...) 4)우울 5)수용이라는 다섯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그렇게 죽음에 다가가다가 벗어난 이들(삼풍참사)은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후에 죽음에 다가갈수록 오히려 삶이 더욱 선명해지고, 삶에 대한 아쉬움과 집착이 더 강해진다고 한다. 한 사람은 죽음이 생각보다 담담하게 느껴지고, 오히려 삶의 마지막 희망이라고도 고백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들에게 죽음을 물었을때 오히려 삶이 선명해진다는 점은 공통점이고 분명한 일이다.

죽음, 그 검은 꽃의 향기를 깊이 들이키면 삶의 환상과 신기루가 겉혀 그 깨인 시선이 삶을 더욱 맑고 분명하게 바라보게 한다.

2) 삶과 죽음, 그 춤추는 경계
공동묘지를 도시에서 가급적이면 멀리 두는 우리의 삶은 죽음을 터부시하고, 두려워 멀리하려는 것이 바로 문화와 문명이라는 거대한 힘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렇게 거리를 두고, 그 경계선을 멀리두거나 유보시키려는 의지는 너무나 무력하고 혼란스럽다. 죽음을 판단하는 인식의 차원에서나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멈춰있지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죽음을 정의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심폐기능의 정지를 죽음으로 정의했었다. 심장이나 폐가 정지하면 혈류가 차단되서 뇌가 멈추게 되고, 몸도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뇌사는 뇌는 정지되어서 스스로 폐나 기타 장기를 움직일 수는 없지만 인공적으로 몸을 살려둘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기존의 정의는 무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사실 죽음은 그렇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심장이나 폐가 정지해도 몸 안의 세포들은 죽지않은 상태로 얼마간 살아있다.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시체에서 손톱이 자라거나 죽은 남자의 정자를 몇 일 안에 체취하면 아직 살아있는 것을 반견하는 일 등은 죽음이 서서히 진행되는 것임을 알려준다. 세포사에 이르러 썩기 시작하는 단계에까지 죽음은 어떤 범위와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 영역 안에서 죽음은 살아움직이는 또다른 생명인 것이다.

이런 죽음을 극복하여 영생을 얻으려는 인간의 오랜 욕망은 분자생물학의 도움으로 새로운 사실에 직면했다. 세포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담고 있는 말단소립을 연구하면서 바로 말단소립이 세포의 복제와 재생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말단소립이 재생과 복제의 과정을 거듭할수록 달아서 짧아지는데, 결국 다없어지게 될 때가 바로 죽음에 이르는 시점인 것이다. 영생은 이 말단소립을 다시 만들어주기만 하면 가능하든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말단소립을 재생해주면 오히려 인간은 죽게 된다. 인간의 몸이 스스로 말단소립을 재생해주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암세포인 것이다.
죽지않는 세포인 암세포. 영생의 가능성은 오히려 더욱 고통스러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발견은 생명과 죽음의 관계를 새롭게 보게한다. 생명은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관점을 드러내 준다. 죽음의 가능성이 전체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뿌리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에이폽토시스"에 의해서 더욱 명확해 진다.
에이폽토시스는 세포의 자살을 말한다. 세포가 죽는 것은 보통 외부의 자극과 파괴에 의한 결과다. 그러나 세포가 외부의 파괴없이 자체적으로 죽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 에이폽토시스다. 이것은
세포가 활성산소에 의해서 어느 정도 파괴되서 더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때, 스스로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전체 생명을 위해서 자살하는 것이다.

이처럼 생명과 죽음은 서로 안에 침투되어 있고, 서로 맞물려 있다. 죽음을 멀리하려고 그 경계선을 지평선 너머로 던져버리려 하지만 오히려 그 영생이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고, 죽음이 생명의 끝에 놓인 선명한 경계선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 안에서 생명을 지탱해주고 있다.
그렇게 춤추는 경계선, 경계의 해체는 우리가 죽음을 다시 바라보고 오히려 깊이 끌어안아야 참된 생명을 살아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인간의 존엄성 vs 생명의 존엄성
자살, 안락사의 문제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존엄성의 대립지점에 서있다. 생명의 존엄성은 인간이 신의 영역에 놓인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생명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관점은 생명의 기반인 죽음의 존엄성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 관점의 논리대로이면 주어진 생명을 마음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과 동일하게 다가오는 죽음도 마음대로 하면 안된다. 그런데, 한 쪽에만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존엄성은 자살과 안락사를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의 방식으로 본다. 죽음을 거부하려는 현대의학의 힘은 죽음의 진행을 끊임없이 지연시켜왔다. 결국 죽음의 고결한 삶은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산산히 부서진 자아의 파괴에 이르고, 주검에 겁탈당해 만신창이가 된 추한 몰골이 되고 만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존엄성은 단순히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를 넘어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 짓고 싶은 최후의 만찬이자 삶의 완성에 대한 유언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에 쩔은 나머지 자아가 파괴되어 광기어린 몸부림으로 죽어가는 것과 자신의 삶을 키워온 죽음을, 사랑하는 가족의 포근한 눈길 속에서 담담하게 맞이하는 죽음. 이 가운데 성숙한 생명은 후자를 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게다. 이처럼 생명의 어머니인 죽음을 존중하는 마음이 바로 생명을 존중하는 손길인 것이다.

어쩌면 생명의 성장은 향기롭고 맛갈스러운 먹거리로 자신을 키워 다른 생명을 위해 내어줄 고귀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당당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배우고 만들어 가는 것이 삶의 이유가 아닐까...

 

낙엽의 부드러움에 깃든 죽음

작고 노란 낙엽을 매만집니다. 뜻밖에 너무나 부드러운 감촉이었습니다. 뜻밖이었던 새로움이 죽음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죽음이 그렇게 푸석하고 단단한 것만은 아님을, 그 부드러운 회귀를 바라봅니다.

온 우주의 한 몸으로 땅 속에 머물다가 나무의 줄기를 타고 올라 나뭇잎이 되고, 이제 자신이 땅 속에서 키워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키워줄 존재가 누구인지 가득 알고 난후에, 다시 어머니의 몸으로 돌아가는 회귀, 그 하나됨. 그것이 죽음임을 너무나 평화로운 부드러움으로 비춰줍니다.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도 자신을 살아숨쉬게 해준 온 우주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득하여, 자신을 내어주고, 또 다른 생명이 살아숨쉴 터로 돌아가는 되돌아감은 아닐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죽음은 곧 삶이요 열반 (정승석 저)'을 읽고

"죽음은 곧 삶이요 열반 (정승석 저)"을 읽고
한국종교학회 편, '죽음이란 무엇인가'(도서출판 창, 2001), p.73∼99.

빗장을 풀며
'알면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깊이 알면 알수록 그 대상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더 사랑하게 된다1)는 의미인 듯하다. 이 잠언은 종교 간의 이해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개종교들은 자기 종교의 교리에 대한 절대적 신념과 타종교에 대한 무지로 인해 타종교에 대한 편견에 빠지기 쉽다. 이로 인해 서로의 모습을 열린 마음으로 만나고 서로 간의 차이를 통해 배우며, 이를 통해 더욱 자기다워질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편견을 근거로 상대를 정죄하고 무시하며 심지어 극단적인 반목에 이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런 문화간, 종교간 충돌의 문제를 지니고 살아가는 현대에서 서로를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의 맥락 속에서 '죽음은 곧 삶이요 열반'이라는 정승석의 글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글이 불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고치고, 이를 통해서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정승석이 다루려는 오해는 '불교가 속세의 고뇌로부터 초연한 삶을 강조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고, 불교가 '죽음이 곧 열반'이라고 보기 때문에 죽음을 추구하는 종교로서 허무주의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불교의 이해를 바르게 전함으로서 불교의 궁극적 인식인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하고자 한다. 불교가 바라보는 죽음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생사즉열반의 진리에 대해서도 오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서 불교가 이해하는 죽음, 죽음에 대한 접근방식과 극복방식을 '죽음에 대한 붓다의 태도', '죽음의 정의와 상태', '죽음의 종류', '죽음의 과정', '죽음의 극복'을 분석함으로써 살펴본다. 우선은 저자의 생각을 따라 정리한 후에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불교의 이해를 살펴보려 한다.

지형탐사 ; 내용정리

[죽음에 대한 붓다의 대응]
저자는 먼저 죽음에 대한 붓다의 태도를 그의 설법 중에서 죽음에 대한 부분들을 인용하여 살펴본다. 이를 통해서 불교가 죽음에 대해서 도피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불가피한 현실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그 설법들을 일일이 살펴보지 않아도 불교가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여 해결하려 한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의 고통 가운데 죽음에 대한 고통은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불교가 근본적으로 인간이 직면한 고통의 실상을 정직하게 인식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집중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 다시 언급되기에 부연은 생략한다.

[죽음의 정의와 상태]
이렇게 죽음의 현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직면하려는 불교가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이어서 설명한다. 불교가 정의하는 죽음을 간단히 정리하면 "수명과 체온과 의식[識:정신작용]이 사라져 신체의 기관이 모두 변하여 파괴된 모습을 말한다.(p.81)" 이 때, 수명이란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기관으로서 체온과 의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 두 가지가 육체로부터 사라질 때 수명이 파괴되고, 바로 이런 상태가 죽음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죽음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수명을 지닌 생명체가 전변(轉變)하는 과정 중에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유(四有)' 개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사유란 생명이 결성되는 찰나인 생유(生有), 이로부터 생명이 임종하기 직전까지인 본유(本有), 최후에 임종하는 찰나인 사유(死有), 이로부터 다시 생명이 결성되는 생유와의 사이인 중유(中有)를 말한다. 이는 인간이 "물질적 신체[色], 감각[受], 관념[想], 성향[行], 의식[識]"2)이라는 다섯가지 요소 즉, 오온(五蘊)의 집합체인데, 이런 인간존재가 이 네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가 보는 죽음은 생명의 단멸(斷滅)이 아니라 삶의 연장선에 있는 하나의 과정이고, 바로 여기서부터 죽음에 대한 극복의 열쇠인 사즉생(死卽生)이라는 관점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죽음의 종류]
다음에는 죽음의 종류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논의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어서 생략하지만, 기억할 점은 우선 불교가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될 만큼 죽음의 종류를 자세하게 분류하여 파악한다는 점이다. 그 만큼 죽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철저하게 마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죽음에 대한 한 가지 분류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극복의 방식이다. 그것은 승만경에서 죽음을 분단사(分段死)와 부사의변역사(不思議變易死)로 나누는 것이다. 이 때 분단사란 허위의 중생이 수명의 한계를 따라 육신의 형태로 죽는 것을 말하고, 부사의변역사란 아라한과 벽지불과 대력보살 등의 육신이 생멸변역을 받지않고 자신의 의지를 따라 성립된 것일 뿐임을 말한다. 이는 부사의변역사에서는 육신의 존속 곧 죽음이 임의로 결정되기 때문에 죽음의 문제가 극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의 과정]
이어서 죽음의 과정이 설명되는데, 이것도 죽음의 종류 이상으로 복잡하고 저자의 표현 대로 번쇄한데, 역시 논점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중에 한 가지만 예로서 살펴보면,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육체의 기관이 사라지는 과정이 그가 처한 세계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른데, 만일 성자같은 무형의 존재가 거하는 최고의 세계인 무색계에서면 명(命), 의(意), 사( )[무관심·평정]의 3근이, 유형의 존재가 거하는 천계인 색계(色界)에서면 앞의 3근에 다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의 5근을 포함한 8근이 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욕구의 지배를 받는 인간 세계인 욕계에서면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돌연히 죽을 때는 앞의 8근에 남근(男根)·여근(女根)을 포함한 10근이 멸하지만, 8근에 남근과 여근 중에 어느 한쪽만 포함하여 9근이 멸하거나 8근만 멸하고, 점차로 죽을 때는 앞에서 제시한 3계의 경우마다 각기 신(信), 근(勤), 염(念), 정(定), 혜(慧)의 5근을 더 멸한다는 것이다.
불교가 자세하게 논하는 이런 죽음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이 육체의 기능 중에서 전적으로 정신적 기능의 소멸로 묘사되는 마음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유 중에서 사유[죽음의 찰나]와 생유[생명결성의 찰나]는 산란한 마음에만 있다(p92)".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무심에서는 죽음과 출생이 없다. 결국 죽음의 문제가 정신의 문제고, 정신의 집중이나 적정(寂靜)의 경지에서 극복될 수 있다는 불교만의 독특한 인식을 만나게 된다.

[죽음의 극복]
앞서 살펴본 내용에서도 이미 암시되어있지만 불교는 죽음의 불안에서 해방되기 위한 수행으로 죽음의 의미와 현상에 대해서 철저히 이해하는 염사(念死)를 중시한다. 죽음의 의미를 그 현상을 둘러싼 외연과의 관련하에서 이해할 때 진실한 것이고, 이렇게 죽음에 관한 전체 현상의 진실[실상(實相)]을 철저히 이해하는 정각(正覺)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 때 죽음에 대한 관심은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실의 세계를 밝히는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철저히 파악된 전체 현상의 실상은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라고 표현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나 해탈은 그런 실상을 체득함으로써 죽음을 포함한 모든 문제가 극복되어 있는 상태이다.(p. 94)"
그리고 이런 실상을 삶과 죽음의 관계에서만 살펴보면, 生卽死 死卽生의 진실에 이르게 된다. 즉, 삶이 이미 죽음을 내포하고 있고, 죽음에서부터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런 삶과 죽음의 실상을 깨달을 때 죽음의 문제는 극복된다고 본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생과 사가 동일성의 논리에 있다는 점인데, 동일성은 절대적으로 비객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념적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실상은 각자의 내적 체험에 의해서만 깨닫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내적체험에 의해 동일시된 생과 사가 열반, 즉 죽음이 극복된 세계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불사는 열반과 동일한 의미로서 죽음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번뇌를 멸함으로써 도달하는 절대 안주의 경지인 열반 또는 해탈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사즉열반'에서 생사란 동일성의 논리를 따를 때, 불사이자 열반이고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현상세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는 케네스 첸의 설명에 의하면 이원론적 세계관의 소승불교와는 다른 대승불교적 관점이다. 소승불교는 갈망과 욕망으로 인해 생겨나는 고통과 불안의 세계인 현상적 세계와 업의 작용이 끊어진 열반의 세계인 두 차원으로 존재를 파악했다. 이런 관점에서 열반은 현상적 세계에서 반복되는 환생에서 벗어나는 것이자 현상 세계의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관점에서는 모든 존재의 요소들이 그 원인과 조건을 제거하고 나면 실재하지 않는 텅빈 공이고, 열반 역시 모든 차별과 특성과 정의를 붙일 수 없기 때문에 공이다. 결국 존재의 현상적 요소들과 열반이 모두 공이기 때문에 현상세계와 열반은 서로 같다는 "생사즉열반"이라는 진리에 이르게 된다. 이런 대승의 관점에서는 열반과 현상세계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사실은 미망이고 어느 한 쪽을 버리고 나머지를 선택한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3)
결국 불교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이런 실상을 체험하고 내적으로 구현한 무심(無心)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때 무심이란 '생즉사 사즉생'을 깨달은 평등심(平等心)이고, '고(苦)·무상(無常)·무아(無我)'의 진실을 체득하여 생사의 원인을 제거한 마음의 결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과 사를 분리하여 고통을 초래하는 무명(無明)을 제거한 것이다. 무명이란 "자아와 현상계의 본성에 대한 무지"로서 "무명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비참한 것을 행복한 것으로 알고 실재하지 않고 덧없는 것을 실재하고 영원한 것으로 간주한다."4) 이런 무명이 모든 고통이 시작되는 첫 고리로써 이를 깨뜨리면 모든 고통이 제거된다는 원리다.

[허무주의의 오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는 죽음의 문제를 물리적 현상에 대한 관찰에서부터 마음의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만일 물리적 현상의 측면에 대한 관찰에서 멈추고, 죽음을 곧 열반으로 봤다면 모든 것이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삶의 근저에 무의미와 허무가 자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죽음을 결국에 가서는 마음의 문제로 보고 무심을 체득함으로서 생사의 세계 속에서 열반을 살아내는 것을 중요시한다. 바로 이런 불교의 관점은 오히려 허무주의에 대한 극복이자 초극의 의지가 맺은 결실인 것이다.

빗장을 걸며 : 죽음에 대한 불교의 이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는 죽음 그 자체의 정체와 정면대결하여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비문제화시켜 버리려는 독특한 방식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즉, "불교는 죽음이라는 실체를 인정하고서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 것인가라는 방향을 걷지않고, 죽음이라는 실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해 버림으로서, 죽음이란 없는 것이라고 깨달음으로서 죽음을 극복하려는 종교"5)라는 것이다. 이런 불교에 있어서 죽음은 존재가 변해가는 변화의 한 부분으로써,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존재의 사라짐, 단멸(斷滅)도 아니다. 물론 단순하게 새로운 세계로 도약해 가는 가능성의 과정만도 아니다. 오히려 무상한 변화의 과정인 죽음을 새로운 차원으로 바라보는 체득을 통해서 넘어서야 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불교의 이런 관점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첫 째, 불교가 죽음의 문제에 접근해 가는 방식은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현상에서부터 시작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나 두려움, 또는 죽음에 대한 신화적 이해나 신비한 이해의 방식이 아니라, 죽음이 어떤 과정으로 일어나고, 그 종류는 어떻게 분류되며, 그 각각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인 것을 대단히 복잡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해간다. 이런 측면은 죽음 문제의 해결에 대해서 불교가 얼마나 철저하고 현실적인지를 보여준다. 죽음의 문제를 단순히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이나 윤회로 떠넘김으로써 회피하는 방식처럼 형이상학적이기만 한 공허한 방식들과는 너무나 다른 방식이다.
둘 째, 죽음의 문제를 생명과 삶의 문제와 깊이 연관시키는 점이다. 生卽死 死卽生의 관점에서 드러나듯이 죽음을 생명과 단절되고 대립적인 것으로 바라보면서 터부시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이 죽음으로부터 기원한다고 볼만큼 죽음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해낸다. 이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파괴하려고만 하는 두려움과 욕심의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의 미숙함을 향해서 중요한 깨달음을 전해준다. 발전과 확대만을 중요시하는 현대의 문명은 죽음을 생명의 적으로만 보면서 파괴하려고만 하여 오히려 모든 생명에 있어서 자신을 내어주는 죽음의 성숙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하여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고, 이것은 생태문제나 소비문화 등의 여러 문제로 전지구적 생명의 그물에 치명적인 상처를 내고 있다. 이런 문제 앞에서 불교는 오히려 죽음이 궁극적 의미와 삶 속에서 죽음을 깊이 품고 이로 인해 오히려 삶이 풍성해지는 성숙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불교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죽음의 의미와 현상에 대해서 철저히 이해하려는 염사(念死)를 중시'한다는 세 번째 특징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 문화는 죽음의 문제를 가장 극단적인 타부로 여기면서 들춰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건물의 4층을 F로 하거나 무덤을 가능한 한 멀리 두려는 등의 모습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회피하려고만 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생각한다고 어떤 대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섣부른 판단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무시한다. 그러나 죽음을 바로 직면하고 마주하는 삶이 아니라면 문제가 있는 삶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불교는 우리 삶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깊이 마주하고 뚫고 나아가는 일이 오히려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일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네 번째는 이런 복잡하게 보이는 생각의 결이 모두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에 실천적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죽음의 현상, 종류, 과정 등의 내용이나 극복의 방법 등을 얕게 보면 대단히 사변적이고 공허한 듯이 보이고, 죽음과 그 이후 세계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정립하고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가르침은 인간이 처한 죽음의 절박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하는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로 집중되어있다. 그래서 지적인 논증이나 설득보다는 내적인 체험을 통한 체득을 강조한다. 물론 이런 면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에게 얼마나 체득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그 궁극적 의도의 방향성만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1) 최재천 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사, 2001), p. 7, '글을 시작하며'에서 참고.
2) 케네스 첸 저, "佛敎의 理解", 길희성·윤영해 역(분도출판사, 1994), p. 94에서 인용.
3) 앞의 책, p. 94∼96에서 참고.
4) 앞의 책, p. 69에서 인용.
5) 김경재, "죽음에 대한 이해와 성찰-죽음에 대한 이해와 그 극복을 향한 위대한 두 종교의 패러다임"- 중 '[2] 원시불교에서 죽음의 극복'에서 인용.

※ 참고도서
정승석, "죽음은 곧 삶이요 열반", 한국종교학회 편, '죽음이란 무엇인가'(도서출판 창, 2001), p.73∼99.
케네스 첸 저, "佛敎의 理解", 길희성·윤영해 역(분도출판사, 1994)
김경재, "죽음에 대한 이해와 성찰-죽음에 대한 이해와 그 극복을 향한 위대한 두 종교의 패러다임"-(1997)http://www.soombat.org/article/article.html
최재천 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사, 20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