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료윤리를 공부하려는 수업, 그런데 그 절반은 죽음에 대한 탐구로 계획되어있다. 죽음에서 시작하는 생명에 대한 공부...

5부작 생노병사의 비밀 중
3부 검은 빛 죽음을 봤다. 일관된 흐름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생명과 죽음에 대한 화두들이 스쳐갔다.

1) 검은 꽃, 죽음의 향기
말기환자는 성격에 따라 개인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부정, 고립 2)분노, 노여움 3)타협(조금이라도 더...) 4)우울 5)수용이라는 다섯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그렇게 죽음에 다가가다가 벗어난 이들(삼풍참사)은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후에 죽음에 다가갈수록 오히려 삶이 더욱 선명해지고, 삶에 대한 아쉬움과 집착이 더 강해진다고 한다. 한 사람은 죽음이 생각보다 담담하게 느껴지고, 오히려 삶의 마지막 희망이라고도 고백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들에게 죽음을 물었을때 오히려 삶이 선명해진다는 점은 공통점이고 분명한 일이다.

죽음, 그 검은 꽃의 향기를 깊이 들이키면 삶의 환상과 신기루가 겉혀 그 깨인 시선이 삶을 더욱 맑고 분명하게 바라보게 한다.

2) 삶과 죽음, 그 춤추는 경계
공동묘지를 도시에서 가급적이면 멀리 두는 우리의 삶은 죽음을 터부시하고, 두려워 멀리하려는 것이 바로 문화와 문명이라는 거대한 힘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렇게 거리를 두고, 그 경계선을 멀리두거나 유보시키려는 의지는 너무나 무력하고 혼란스럽다. 죽음을 판단하는 인식의 차원에서나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멈춰있지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죽음을 정의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심폐기능의 정지를 죽음으로 정의했었다. 심장이나 폐가 정지하면 혈류가 차단되서 뇌가 멈추게 되고, 몸도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뇌사는 뇌는 정지되어서 스스로 폐나 기타 장기를 움직일 수는 없지만 인공적으로 몸을 살려둘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기존의 정의는 무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사실 죽음은 그렇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심장이나 폐가 정지해도 몸 안의 세포들은 죽지않은 상태로 얼마간 살아있다.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시체에서 손톱이 자라거나 죽은 남자의 정자를 몇 일 안에 체취하면 아직 살아있는 것을 반견하는 일 등은 죽음이 서서히 진행되는 것임을 알려준다. 세포사에 이르러 썩기 시작하는 단계에까지 죽음은 어떤 범위와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 영역 안에서 죽음은 살아움직이는 또다른 생명인 것이다.

이런 죽음을 극복하여 영생을 얻으려는 인간의 오랜 욕망은 분자생물학의 도움으로 새로운 사실에 직면했다. 세포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담고 있는 말단소립을 연구하면서 바로 말단소립이 세포의 복제와 재생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말단소립이 재생과 복제의 과정을 거듭할수록 달아서 짧아지는데, 결국 다없어지게 될 때가 바로 죽음에 이르는 시점인 것이다. 영생은 이 말단소립을 다시 만들어주기만 하면 가능하든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말단소립을 재생해주면 오히려 인간은 죽게 된다. 인간의 몸이 스스로 말단소립을 재생해주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암세포인 것이다.
죽지않는 세포인 암세포. 영생의 가능성은 오히려 더욱 고통스러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발견은 생명과 죽음의 관계를 새롭게 보게한다. 생명은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관점을 드러내 준다. 죽음의 가능성이 전체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뿌리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에이폽토시스"에 의해서 더욱 명확해 진다.
에이폽토시스는 세포의 자살을 말한다. 세포가 죽는 것은 보통 외부의 자극과 파괴에 의한 결과다. 그러나 세포가 외부의 파괴없이 자체적으로 죽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 에이폽토시스다. 이것은
세포가 활성산소에 의해서 어느 정도 파괴되서 더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때, 스스로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전체 생명을 위해서 자살하는 것이다.

이처럼 생명과 죽음은 서로 안에 침투되어 있고, 서로 맞물려 있다. 죽음을 멀리하려고 그 경계선을 지평선 너머로 던져버리려 하지만 오히려 그 영생이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고, 죽음이 생명의 끝에 놓인 선명한 경계선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 안에서 생명을 지탱해주고 있다.
그렇게 춤추는 경계선, 경계의 해체는 우리가 죽음을 다시 바라보고 오히려 깊이 끌어안아야 참된 생명을 살아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인간의 존엄성 vs 생명의 존엄성
자살, 안락사의 문제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존엄성의 대립지점에 서있다. 생명의 존엄성은 인간이 신의 영역에 놓인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생명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관점은 생명의 기반인 죽음의 존엄성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 관점의 논리대로이면 주어진 생명을 마음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과 동일하게 다가오는 죽음도 마음대로 하면 안된다. 그런데, 한 쪽에만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존엄성은 자살과 안락사를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의 방식으로 본다. 죽음을 거부하려는 현대의학의 힘은 죽음의 진행을 끊임없이 지연시켜왔다. 결국 죽음의 고결한 삶은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산산히 부서진 자아의 파괴에 이르고, 주검에 겁탈당해 만신창이가 된 추한 몰골이 되고 만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존엄성은 단순히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를 넘어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 짓고 싶은 최후의 만찬이자 삶의 완성에 대한 유언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에 쩔은 나머지 자아가 파괴되어 광기어린 몸부림으로 죽어가는 것과 자신의 삶을 키워온 죽음을, 사랑하는 가족의 포근한 눈길 속에서 담담하게 맞이하는 죽음. 이 가운데 성숙한 생명은 후자를 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게다. 이처럼 생명의 어머니인 죽음을 존중하는 마음이 바로 생명을 존중하는 손길인 것이다.

어쩌면 생명의 성장은 향기롭고 맛갈스러운 먹거리로 자신을 키워 다른 생명을 위해 내어줄 고귀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당당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배우고 만들어 가는 것이 삶의 이유가 아닐까...

 

낙엽의 부드러움에 깃든 죽음

작고 노란 낙엽을 매만집니다. 뜻밖에 너무나 부드러운 감촉이었습니다. 뜻밖이었던 새로움이 죽음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죽음이 그렇게 푸석하고 단단한 것만은 아님을, 그 부드러운 회귀를 바라봅니다.

온 우주의 한 몸으로 땅 속에 머물다가 나무의 줄기를 타고 올라 나뭇잎이 되고, 이제 자신이 땅 속에서 키워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키워줄 존재가 누구인지 가득 알고 난후에, 다시 어머니의 몸으로 돌아가는 회귀, 그 하나됨. 그것이 죽음임을 너무나 평화로운 부드러움으로 비춰줍니다.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도 자신을 살아숨쉬게 해준 온 우주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득하여, 자신을 내어주고, 또 다른 생명이 살아숨쉴 터로 돌아가는 되돌아감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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