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칸토 1
앤 패챗 지음, 김근희 옮김 / 민음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의 제목인 벨칸토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벨칸토는 이탈리아말로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이며 이는 극적인 표현이나 낭만적인 서정보다도 아름다운 소리, 부드러운 가락, 훌륭한 연주효과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 결과 기교적 과장에 치우치는 폐단이 있어 글루크나 바그너는 벨칸토를 배척해 왔다. 그러나 벨칸토 자체는 고도로 예술적인 기법으로 현재 이탈리아오페라나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창법으로 간주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기교적 과장에 치우친다는 점이다. 이 작품이 보여주려는 점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노래로 사람들의 눈을 가려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996년 페루의 일본 대사관 점거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 사건이 남긴 것은 유명한 ‘리마 신드롬’이 있는데 그것은 이 작품에서도 보여주듯이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자신을 인질과 동일시함으로써 공격적인 태도가 완화되는 현상으로 그 사건에 대해, 신드롬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면 1997년 페루 리마에서 반정부조직 요원들이 127일 동안 인질들과 함께 지내면서 차츰 인질들에게 동화되어 가족과 안부 편지를 주고받고, 미사 의식을 여는 등의 현상을 보였다는 데서 '리마'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인질사건은 1996년 12월 17일 페루 반군들이 일본대사관을 점거하고 400여 명의 인질을 억류하면서 시작되어 이듬해 4월 22일 페루 정부의 강경진압으로 끝이 났다. 당시 14명의 인질범은 모두 사살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인질범들은 인질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인질들을 위한 의약품류의 반입을 허용하는 한편, 자신들의 신상을 털어 놓는 등 인질들에게 동화되는 여러 가지 이상 현상을 보였다. 리마신드롬은 이러한 현상을 빗대어 심리학자들이 붙인 범죄심리학 용어이다. 즉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자신을 인질과 동일시함으로써 공격적인 태도가 완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인물들이 동화되지만 완전한 리마신드롬이라고 하기보다는 같이 동화되고 자신이 갇혀 지내는 동안 밖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회상을 하며 잃었던 것들을 발견하고 조그만 공동체를 이루어 그래도 살아가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만들어가는 두 인물은 록산 코스라는 오페라 가수와 겐이라는 일본 회사 사장의 통역관이다. 한 사람은 낭만이라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소통이라는 실제적인 일상  생활의 역할을 담당한다.


첫 장면부터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아마도 이런 점은 바그너의 배척하는 심정과 같지 않을까, 이러면서 은근슬쩍 나를 바그너와 같은 선상에 놓아보았다. 이것도 이 작품만큼이나 너무 기교적인 과장스런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읽을수록 결말이 궁금해지게 되는 작품이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돈 많은 회사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사장의 생일 파티를 열고 그가 좋아한다는 오페라 가수를 비싼 돈을 지불하고 초대를 한다. 하지만 사장은 투자할 생각은 없고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오페라 가수를 보기 위해 왔다가 테러리스트들에게 인질이 된다. 인질들은 대통령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입수하고 대통령만을 납치해 밀림의 본거지로 갈 생각이었지만 대통령은 드라마를 보기 위해 불참을 하는 바람에 그들은 협상을 위해 남자들과 오페라 가수를 잡고 대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면 극명한 대비를 볼 수 있다. 이 상황에서도 노래를 연습하겠다고 악보를 요구하는 여가수와 창문이 있는 집, 텔레비전을 처음 보는 어린 테러리스트들의 이질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대비, 여가수도 삶을 위해 살고 어린 테러리스트들도 삶을 위해 산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지. 마치 누군가에게는 꿈꿀 자유조차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마지막으로 치닫는 과정과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도 망각을 위해 애쓰는 이들을 보면서 곡물 값 안정을 위해 바다에 곡물을 버린다는 말을 듣고 저 곡물들을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난민들에게 왜 주지 않는가를 알아봤더니 그보다 기름 값이 더 먹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허무함과 씁쓸함이 느껴졌다.


우린 여전히 아름답게 살아가야 한다. 남보다 더 아름답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 마치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달의 반대편 얼굴처럼 우리가 진짜 봐야 하는 것들은 보지 않고 있다. 누군들 아름답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것을 단지 잘못 태어났음만을 원망하라고 말해야 한다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하는 유명한 성악가를 떠올려보자. 들어주는 이 없이 노래하는 이가 무슨 소용이며 내 배 채우기 위해 다른 아이 배를 골리는 일이 무에 다른 일인지를.


지금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재능이 있는 지도 모른 채,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이 작품이 바쳐졌으면 좋겠다. 진정한 아름다운 노래를 위해서... 

 

여담이지만 책 띠가 있을때는 보이지 않고 아름다운 여인의 우아한 드레스 차림만이 보이는데 띠지를 벗겨보니 그 드레스 밑에 핏 자국이 선명히 보인다. 이 핏자국은 과연 누구의 핏자국일까? 우리의 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작품보다 표지가 더 마음에 들었다. 정말 작품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표지는 못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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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5-20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엄청 멋진 리뷰여요!

반딧불,, 2006-05-20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사이 만두님 리뷰 읽고 있으면 황홀해요.

반딧불,, 2006-05-20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0148205

참 여전한 인기!


물만두 2006-05-20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런스님 밥먹으러 가기전에 후다닥 올려서 고칠려고 왔느데 벌써 읽으셨네요^^;;;
반디님 무슨 황홀씩이나요^^;;; 인기가 아니고 구글로봇의 상주입니다 ㅠ.ㅠ
 
달을 쫓다 달이 된 사람
미하엘 엔데 지음, 박원영 옮김 / 노마드북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첫 단편 <‘따분이’와 ‘익살이’>만 봐도 알 수 있다. ‘따분이’는 보고 나면 누구나 잊어버리는 인물, 기억 못하게 되는 인물이고 ‘익살이’는 만났는지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는데 뒤에 가서 기억하게 되는 인물이다.


‘따분이’는 아무리 진실과 사실과 진짜를 알려 주도 소용이 없어 슬프고 ‘익살이’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도, 거짓과 도둑질과 온갖 나쁜 짓을 해도 그 당시에 알 수 없고 지난 뒤 기억 속에서만 떠올리게 되므로 재미있어 한다.


우리의 삶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좋은 건 뒤 돌아서서 잊어버리고, 나쁜 건 당한 뒤에 후회해도 이미 때가 늦고... 세상에 이 둘이 공존하는 한 우리의 삶은 언제나 망각과 후회의 연속이 될 것이다. 그것이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든 작은 개인사에 국한되든지 간에.


이런 면에서 <거울을 보지 않는 아이>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이 미하엘 엔데가 들려주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 것은 우리가 이런 일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울이 아무리 진실을 보라고 해도 백설 공주의 동화 속 왕비처럼 우리는 눈앞의 이익에 눈멀고, 자신만의 행복에 겨워 절대 거울을 보지 않는 것뿐 아니라 그 거울을 없애기도 한다. 보면 무엇이 보일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두운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글픈 아이러니지만 위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예’ 혹은 ‘아니오’>와 <원맨쇼의 달인>은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함을 남겼다. 그러고 보니 전체적으로 그리 밝은 작품들이 아니다. 그래서 아쉽냐면 그건 아니다. 어차피 사는게 그런 건데 꼭 밝은 것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미하엘 엔데의 단편집 속에는 언제나 그림이 들어 있다. 이번에는 칸딘스키다. 칸딘스키가 이렇게 환상적인 작품을 그렸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그림 보는 재미가 대단했다. 정말 환타스틱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림들을 보면서 이 작품이 주는 무거움을 그림이 얼마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림만 보더라도 그저 좋을 수밖에 없는, 가끔 꺼내서 읽고 싶은, 보고 싶은 책이 되리라 생각된다. 소장하고 있다가 우울할 때 꺼내서 그림을 찾아보고 글을 읽어보면 식탁에 놓여 진 봄꽃처럼, 밥상의 싱싱한 채소처럼 삶의 입맛을 돋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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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2006-05-1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감사합니다..Thanks to!!

물만두 2006-05-18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요^^

가넷 2006-05-19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보신거여요?.

물만두 2006-05-19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로님 작아서 금방 볼 수 있어요. 저는 그림 찾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네요^^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실비 제르맹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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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서 이 책을 과연 이렇게 빨리 읽어도 될까 생각했다. 이렇게 빨리 감상을 써도 될까도 생각했다. 그녀의 발자국에서는 잉크 맛이 났고 그녀가 사라진 뒤에 잉크는 투명해졌다. 하지만 그 맛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여자는 왜 책으로 스며들어와 페이지를 넘기고 다니는 길목마다 나타나 거구의 몸을 쩔뚝거리며 잔향을 남겼던 것일까. 아니 그 여자는 왜 프라하 거리를 돌아다닌 것이고 이제 사라져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지금 이 땅에도 그 여자가 다니고 있음을 느꼈다. 같은 여자일 것이다. 가장 낮고 가난하고 헐벗고 고통스럽고 비참했던 누군가의 눈물을 옷자락마다 담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땅이 또 어디 있으랴.


이 땅에도 그녀는 있다. 유태인 거리에서 빵 한 덩어리를 끼고 오던 길에 나치의 총에 맞아 죽은 작가의 숨결을 느끼게 하듯이 팔레스타인 거리에서 내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외치다 이스라엘군의 총알에 아들을 감싸고 죽은 이의 눈물과 한도 거둬야 하고 이라크에도, 미국에도 그 어디에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머물 곳은 하나의 책 속의 페이지가 아니듯 그녀는 그 누구만의 것도 아니고 그 어떤 한 곳에만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억이 살아있는 한, 우리의 기억이 망각이란 이름으로 사라지는 한 그녀는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나타날 것이며 거리를 돌아다닐 것이다. 못 보는 자들에게는 결코 자신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 연민의 프리즘은 모든 곳, 모든 삶, 모든 살 속을 들여다 보고 파내고 긁어 모은다. 그리고 다시 보여준다.

 

그리고 신이 쌓은 담이 견고할수록 아니 인간이 그 담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수록 그녀의 몸은 더욱 거대해질 것이다. 거두는 이 없는 눈물과 남루한 삶의 조각조각이 살이 타는 냄새를 옷자락에 품어야 하므로.


‘나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치기보다는 ‘잊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치고 싶다. 그녀를 만나면 그녀의 옷자락을 무겁게 하는 이들의 존재를 또 다른 이가 품을 수 있기를, 그래서 그녀의 몸이 더는 자라지 않고 그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싶지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고 나 또한 그 옷자락 속으로 언젠가는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내 아는 이들을 그 옷자락 속에서 보게 되리라는 상념에 이 서울 한복판에서 목 놓아 울고 싶어졌다.


그녀는 어쩌면 이 도시 어딘가에서 걸어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욱 쩔뚝거리며 더욱 남루해진 모습으로... 그녀가 이 도시를 품에 안고 잠시만이라도 얼러줄 수 있을까. 잠시만이라도 이 비루한 인생들을 위해서... 그래주기를...

 

언젠가 다시 한 번 꼭 한자 한자, 그녀의 잉크 냄새를 킁킁거리며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어보고 싶다. 아직 나는 작가가 말하는 의도도, 그 여자의 정체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지 못한다고 해서 울 수 없는 것은 아니고 모른다고 해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쓸 수 없는 건 아니다. 언젠가 내 글도 사라짐을 당할 테니 말이다.

 

78쪽에 이런 문장이 있다. 이 문장으로 졸필의 마지막을 대신하고자 한다. 나 역시 언제나 피라미드를 생각할때 파라오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피라미드를 만드느라 힘들어 죽어간 많은 무명씨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역사의 몸은 깊은 바다 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어서 그 터진 살 속에 수없이 많은 조가비, 해초, 산호, 그리고 온갖 바다 속 꽃들이 박힌 익사자의 몸과도 같다. 그래서 그 살이 더 많이 터지면 터질수록 더 많은 조가비들과 조개 껍데기 꽃들과 응고된 눈물과 피가 번식하는 것이다. 그 살이 더 많이 부대끼고 훼손당하면 당할수록 그 상처들에는 무수한 눈들과 입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주인들과 강자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역사를 만드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역사를 견디고 역사에 희생된 모든 약자들, 무명의 모든 하층민들, 익사자들이 죽어가듯이 지상의 거처를, 지상의 아름다움을, 하늘과 빛과 바람의 공간을 동시에 다 빼앗긴 채 그 역사로 인하여 죽은 자들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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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5-1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이 책을 담은지 여러날이 지났어요
이제 주문하기...를 누르라고 만두님이 재촉하시는군요 ^^

물만두 2006-05-17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저는 어려웠지만 님은 더 잘 읽으시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플레져 2006-05-17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만두님 리뷰, 너무 좋아요. 78쪽 문장들은... 아프네요.
욕심나는 책이지만 일단 갖고 있는 거라도 다 읽어야 하기에 보관함으로. 흑.

물만두 2006-05-17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서 좋았는데 제 수준에 너무 고차원적이었답니다 ㅠ.ㅠ;;;
 

 한 권으로 읽는 노벨문학상 100년의 작가 그리고 작품. 교양있는 지식인 및 학생들의 필독서!!
≪노벨문학상 100년을 읽는다≫는 그 제목처럼 1901년 제1회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시인 쉴리 프뤼돔부터 2001년 수상자인 네이폴에 이르기까지 노벨문학상 100년의 역사와 작품 그리고 작가를 아우르고 있다.
각 단락은 ‘작가 소개’, ‘작품 내용’, ‘작품 감상’, ‘감상 안내’, ‘선정 이유’, ‘수상 소감’ 등의 6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어려운 작품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읽는 이의 전체적인 이해와 감상을 위해 수상자의 약력, 당선작의 내용, 작품의 일부분 및 감상 팁과 함께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한 작가에 대한 평가 및 수상자의 소감 일부도 실려 있어 독자로 하여금 노벨문학상 100년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느끼게 해준다.
동시에 본문 곳곳에 표기되어 있는 자세한 역주는 문학에 깊은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도 쉽게 대작가들의 문장에 접근하게 해주고 있으며 이 책 전체에서 취급하는 방대한 양의 작가와 작품 수는 독자들의 지식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
또한 권말부록으로 포함되어 있는 1901년부터 2005년까지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일람표와 이 책에 나오는 인명을 총망라한 인명색인은 읽는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면서 쉽게 이해하도록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타고르,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헤밍웨이, 파스테르나크 등 문학사상 가장 빛나는 작가와의 생생한 만남!!
주지하다시피 노벨문학상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예로운 상이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설립된 노벨상 5개 시상 항목 중 하나인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에서 수상자를 결정하게 되는데 역대 수상자는 예술적인 창조성, 인류문명에 대한 공헌도, 인류 이상에 대한 기여도, 시대적인 대표성 등에서 당 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들이다.
비록 수상자 선정에 대한 잡음은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1901년 이래 노벨문학상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장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여러 작가들과 작품들을 한 권으로 묶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소개와 분석은 물론 실제 작품 일부가 발췌, 소개되어 있어 작품의 생생한 이해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작가의 얼굴 사진 및 작품의 배경이 되는 여러 사진들이 풍부히 실려 있어 작가와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따라서 ≪노벨문학상 100년을 읽는다≫을 읽은 독자라면 앙드레 지드, 솔제니친, 윌리엄 골딩 같은 작가들의 이름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지게 된다. - 1984년 수상 피카디리의 우산 [체코슬로바키아]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

 ‘유럽’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크고 작은 도시 여기저기에 자리잡고 있는 정겨운 카페들이다. 유럽의 카페를 들여다보면 그 도시의 표정과 그곳 시민들의 심상 풍경이, 그리고 유럽이 보인다. 16세기 중반 터키에 처음 등장한 이래 카페는 문인과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자 사교와 담론의 공간이었으며 대중에게도 일상으로부터 해방된 휴식의 공간이자 자유로운 교류의 장이 되어 왔다.
이 책은 카페의 기원이 된 이스탄불 카페를 시작으로 파리, 베네치아, 로마, 런던, 빈, 베를린, 프라하, 부다페스트까지 유럽 주요 도시에 있는 명문 카페 순례기이다. 그간 책(『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을 통해, 동서양의 차 문화(『동과 서의 차 이야기』)를 통해 유럽 문화를 탐색한 서양사학자 이광주 교수가 이번에는 카페를 테마로 하여 유럽 문화를 들여다본다.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카페맨들, 괴테, 반 고흐, 나폴레옹, 루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카프카……. 그들 카페맨은 하나같이 카페에서 많은 나날을 보냈고 위안을 받았으며 카페를 예찬하고 영감을 받고 위대한 작품을 완성했다. 카페를 사랑한 예술가와 문인, 사상가 등 지식인들의 면면과 함께 그들이 즐겨 찾던 카페 이야기, 카페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을 아울러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유럽의 역사와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에세이이자 여행기이며 역사서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이 사랑한 아름다운 카페들, 그곳에 가면 유럽이 보인다
카페는 일상으로부터 해방되어 ‘한가’와 ‘자유’, 그리고 ‘일탈’을 즐길 수 있는 가벼움의 공간이다. 또한 이렇다 할 목적 없이 그저 걷고 싶고 스스로 이방인이 되고 싶은 이들의 은밀한 퍼포먼스의 장이기도 하다. 이것이 카페와 카페 문화가 꽉 짜여진 근대 도시 한복판에서 뿌리를 내린 본질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카페는 명문 카페 플로리안이나 프로코프에서 알 수 있듯 신문이 만들어지고 혁명이 속삭여진, 자유의 깃발이 나부낀 공간이기도 하다.
광장 문화와 함께 독특한 카페 문화를 발전시켜 온 유럽의 카페에는 유럽 문화의 주요 특징인 담론과 사교의 풍토가 짙게 깔려 있다. 또한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역사의 증인이자 무대로서, 시인과 작가가 자신의 새 작품을 선보이는 공간이자 정보를 교환하고 정치적 담론을 나누는 터전이기도 했다. 그래서 카페는 늘 반체제적인 ‘결사(結社)’가 될 위험을 안고 있었으며 실제로 여러 번 반란자들의 회합 장소가 되기도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유럽의 카페맨들은 대개 집보다 카페를 더 사랑한 도시의 보헤미안들이었고, 그들 중에는 유럽의 문화사를 빛낸 시인, 작가, 미술가, 음악가, 그리고 사상가들이 적지 않다. 카페는 그들에게 마음 편한 사랑방이며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 수 있는 자유로운 놀이방, 그리고 창작의 공방(工房)이었다.
이스탄불, 파리, 베네치아, 로마, 런던, 빈, 베를린, 프라하, 부다페스트,
그리고 이름없는 작은 마을 카페까지

역사상 최초로 카페 문화를 일군 이스탄불에 16세기 처음 커피가 전해진 후 커피는 포도주에 비유되어 찬반양론을 일으켰지만 600여 개의 카페가 생겨나는 등 호황을 누렸다. 유럽에서 한때 일어났던 동방 취미(오리엔탈리즘)의 발신처가 또한 이스탄불이었으며 거기에는 커피가 큰 역할을 했다.
유럽 최초의 문학 카페는 파리의 카페 ‘프로코프’이다. 예술가와 사상가, 문학가들이 서로 허물없이 사교와 담론을 즐기던 프로코프는 프랑스혁명을 맞아 혁명의 드라마를 이끈 주역들의 은밀한 사랑방이 되기도 했으니 혁명가 에베르를 비롯하여 당통, 마라, 로베스피에르 등이 밤이면 프로코프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혁명 작전을 모의한 곳이었다.
파리에 모여든 가난한 예술가들의 무대였던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 그곳에 자리잡은 문학 카페 되 마고와 플로르 두 카페는 좋은 라이벌 관계를 이루며 파리 카페 문화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특히 카페 플로르는 계약결혼의 주인공인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단골 카페로 유명하다. “나에게 플로르로 가는 길은 4년 동안 자유로 가는 길이었다”고 말한 사르트르는 이곳에서 원고를 쓰고 친구들과 담론을 즐겼고 보부아르의 눈치를 살피며 틈틈이 몇몇 여성들에게 연애편지를 썼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페로 불리는 베네치아의 명문 카페 플로리안. 괴테에서 바이런, 바그너, 모네, 마네, 하이네, 니체, 릴케, 토마스 만까지 이어지는 플로리안의 순례자들은 생애를 통해 베네치아와 카페 플로리안을 사랑하고 예찬하였다.
그 밖에도 카페 플로리안과 함께 초기 유럽 카페 문화를 상징하는 로마의 명문 카페 그레코, 영국식 삶의 양식을 대표하는 런던의 커피하우스와 클럽을 거쳐, 빈의 문학카페 첸트랄, 화가와 시인들의 사랑방이자 창조적 정신의 대합실로 불리는 베를린의 로마니셰스 카페, 카프카의 산책길 끝의 기항처였던 프라하의 카페들, 이국적인 정념의 도시 부다페스트에서 카페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한 카페 제르보와 카페 뉴욕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의 주역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명문 카페들이다.
“당신의 단골 카페는 어디입니까?”
저자는 또한 마을 골목길에서 마주칠 수 있는 멋스러운 작은 카페 순례도 잊지 않는다. 좋은 카페란 결국 집 가까운 곳에 혹은 자주 거니는 산책길에 들를 수 있는 자기만의 카페가 있다면 그곳이 가장 좋은 카페이며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축복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월간미술』에 일 년여 간 연재되었던 ‘유럽 카페 기행’을 저자가 다듬고 추가하여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멋스러운 문장 속에 녹아들어 있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카페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이 150여 컷의 아름답고 귀한 사진자료들과 함께 어우러져 읽는 재미와 보는 재미를 모두 만끽할 수 있는 이 책은, 유럽의 문화와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문화기행서이자 유럽 여행길에 들고 갈 좋은 안내서이기도 하다.
언젠가 파리의 프로코프에 들르게 된다면 독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힌 메뉴판을 받아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년도 훨씬 전에 아마도 당신이 앉은 자리에서 볼테르, 보마르셰,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벤저민 프랭클린, 베를렌과 감베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도 식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프로코프에 오신 당신을 환영합니다.” -
우니온의 단골 중에는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는 시인 세이페르트(Jaroslav Seifert)도 있었다. 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카페 우니온에서는 담론이 벌어지고, 기획이 짜였으며,...

 2001년은 노벨상 수상 100주년의 해이다. 그 기념비적인 성과를 축하하기 위해 '노벨상 100년전'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다. 노벨상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에 하나인 만큼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 그 의미가 더욱 클 것이다. 책에 실린 글들은 주요 경향과 발달 과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알프레드 노벨의 생애와 역사, 노벨 재단의 역사, 수상자의 추천과 선정 과정에 대한 정보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제공한다. 나아가 노벨의 의도와는 달리 노벨상이 가져온 몇몇 오점도 드러냈다. 수상자들의 수상 거부를 비롯,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수상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많은 인물들, 특히 평화상 수상자 명단에서 간디가 누락된 사실뿐 아니라, 자격이 부적합함에도 불구하고 영예로운 수상자로 결정된 일부의 경우 등 노벨상의 자취에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긴 사례도 있다. 이와 같이 이 책은 노벨상의 그간 100년 동안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평가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설립된 노벨상은 최초의 진정한 국제적 상이었다. 규모와 사명감에서 노벨상만큼 세계적인 성격을 지닌 상은 없다. 상이 차지하는 중요성 면에서 노벨상과 어깨를 할 수 있는 국제적인 상으로는 올림픽 대회에서 수여되는 상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노벨의 유언에는 '후보자의 국적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며'라고 명시되어 있다.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고조되고 있던 시대에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인도주의적 가치를 보여주는 표상이었다. 실제로도 노벨이 베르나 폰 주트너(1905년 노벨 평화상 수상)와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계몽주의적 이상과 인류의 급속한 발전에 대한 강한 낙관론이 결합된 그의 철학적 견해가 잘 나타난다. 오늘날 노벨상이 지닌 권위는 무엇보다도 수상자들의 면면과 그들이 인류의 발달에 기여한 공로 때문이다.
2001년은 노벨 재단이 노벨상 수상을 시작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날을 기념하여 다채로운 행사들이 개최되었는데, 그중 하나에는 '노벨상 100년전'이 포함되어 있다.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시작된 순회전은 도쿄를 거쳐 현재 우리나라에 도착하여 로댕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그리고 노벨 웹사이트는 '노벨 e-박물관(NeM)'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NeM은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물리학상·화학상·생리학 및 의학상·문학상·평화상 수상자뿐만 아니라,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여 스웨덴 중앙은행에서 수여하는 경제학상 수상자의 업적을 평가하는 일련의 책들을 출판했다. 비록 노벨상이 인류 발전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업적들을 전부 포괄할 수는 없겠지만, 해당 분야에서 일어난 주요 경향을 보여주는 표지의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노벨상 수상기관들이 늘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노벨의 유언을 해석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새로운 세기를 맞아 노벨상 수상기관들은 노벨의 마지막 유언에 담긴 기준 및 공식적인 제약을 과학과 문학, 평화 등 늘 변화, 발전하는 현실과 조화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엘리아스 카네티,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런 판단기준은 시에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며, 그에 따라 1990년과 96년 사이에는 시부문 수상자들이...

 이 책은 세계문학의 흐름을 알고자 하는 학생, 교사, 일반인들을 위해 씌어졌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언어 예술'이기 때문에 해당 언어로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개인이 습득할 수 있는 언어능력이나 문학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세계문학 전체를 원어로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책은 그러한 독자들을 위해 세계문학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서술하되 감상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유사 이래 인류의 영혼을 살찌운 문학의 도도한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같은 체코의 작가로서 시집 <봄이여 다시금>(1961) 등 일련의 작품으로 1984년 노벨상 수상자가 된 세이페르트(Jaroslave Seif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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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테레진 아이들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이 책 '더 이상 나비들은 보지 못했다'는 감동적인 시와 그림이 어우러진 책이다. 이 작품들은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15세 미만의 아이들이 쓰고 그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감동적인 이유는 죽음과 고통의 비극적 현실 속에 처한 아이들의 희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극렬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를 지향하는 나치스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을 때.1939년 나치스는 프라하를 침공하여 체코를 독일 제국에 편입시키고, 1941년 테레지엔슈타트에 유대인 거주 지역인 게토를 설치했다. 프라하에서 6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은 200년 전에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의 명령으로 세워졌고,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을 따서 ‘테레진’이라고 불렸다. 전쟁 기간 동안 테레진은 굶주림과 두려움의 땅이었다. 나치스는 유럽의 모든 유대인을 몰살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죽음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다. 그 기착지 중의 하나가 테레진이었다. 나치스에 의해 계획된 모범 수용소 ‘테레진’은 외국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모델 게토’였다. 처음에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유대인들이 테레진으로 이송되었으며, 나중에는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왔다. 나치스는 이곳을 무대로 홍보 영화를 찍었고, 1944년에는 적십자에 공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나치스의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했다. 테레진에 살던 유대인들은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보내질 운명이었으며, 여기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테레진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본 모든 것을 보았다. 그들은 사형집행을 지켜보았고, 그것을 연필로 그린 유일한 어린이들이었다.
1942년에서 1944년에 걸쳐 10세 전후의 아이들이 유럽 전역에서 테레진으로 왔다. 그리고 1945년 5월 8일 소련군에 의해 테레진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한때 이곳에서 놀고 그림을 그리고 공부하던 15,000명의 아이들 중에서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100명에 불과했다. 테레진에 거주하던 아이들의 작품은 두 개의 가방에 담겨 프라하 유대인 모임에 보내졌다. 처음에 이 작품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선반에 놓여 먼지가 쌓인 채 십 년을 보냈다. 그 후에야 그림들은 다시 발견되어 세상에 나왔다. 이후 전 세계 수백만 사람들이 이 작품들을 보았다. 1945년 8월 17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유대인들도 모두 테레진을 떠났다. 이후 테레진은 그 평온한 풍경 속으로 되돌아갔다. 악몽과도 같았던 게토 시절을 보여주는 흔적들은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체코를 여행하여 이곳을 방문한다면 우리는 단지 완만한 언덕과 부드러운 강, 보헤미아의 산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비들도.
2. 삶과 죽음의 문제로 읽는 테레진의 비극
이 책은 테레진 아이들의 시와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시와 그림을 남긴 아이들의 운명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독자들은 이 작품들을 보면서 아이들의 꿈과 희망뿐만 아니라 눈물과 절망의 심정 또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유대 민족의 운명에 대한 민족적 입장이나 종교적 입장을 떠나 삶과 죽음에 직면한 내면 풍경의 기록이며, 아이들의 눈으로 본 비극의 현장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 새겨진 테레진의 풍경은 황량하기도 하고, 때로는 풍요롭기도 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본 모든 것을 보았다. 식료품 가게 앞에 끝없이 늘어선 줄을 보았고, 한때 빵을 나르던 수레였지만 이제는 시체로 가득 찬 수레를 보았으며, 그 수레를 나르기 위해 말처럼 묶인 사람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천국처럼 보였던 진료소와 단지 시체를 모아 두는 게 전부였던 장례식을 보았다. 아이들은 처형 현장도 보았다. 어쩌면 아이들은 이 모든 광경을 담은 자신들의 그림 속에서만 어린이였을지 모른다. 아이들은 점호를 하는 나치스 친위대의 고함소리와 어른들이 거주하는 막사에서 새어 나오는 작게 중얼거리는 기도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게토의 입구를 벗어나면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 녹색의 풀밭과 푸른 언덕, 저 멀리로 이어지는 큰길과 프라하로 이어질 것만 같은 길, 동물과 새들, 나비들. 이 모든 것들이 게토를 둘러싼 벽 너머에 있었다. 아이들은 멀리서나마 막사의 창문과 요새의 성벽들 틈으로 그것을 보았다. 또한 아이들은 왕관을 쓴 공주들과 사악한 마법사들, 어릿광대와 사람의 얼굴이 달린 벌레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살던 고향집도 보았다. 창에는 커튼이 쳐있고, 고양이가 한 마리 있고, 접시에 우유가 담겨 있는 집. 아이들은 고향집을 테레진으로 불러 왔다. 이 집에는 담장이 있어야 했고, 냄비와 주전자가 많이 있어야 했다. 냄비와 주전자에는 음식이 가득 담겨 있게 마련이니까.
이 모든 것들을, 또 다른 많은 것들을 아이들은 그렸다. 아이들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쓴 시는 다른 느낌들을 전해준다. 시에는 ‘고통스러운 테레진’이나 ‘헤어진 여자친구’에 관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친절한 사람들이 있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소망을 말하고 있다. 시 속에는 점심식사로 딱딱하게 굳은 빵과 썩은 감자를 갉아먹어야 하는 나이 든 할아버지가 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공포가 있다. 그렇다. 공포는 아이들에게도 다가왔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기에 시를 통해 두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이들이 어른들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기 있는 시와 그림들, 이것이 이 아이들이 남긴 모든 것이다. 이들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이후 오랫동안 남은 것은 그들의 재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서명이 여기에 있고, 몇몇 그림들에는 연도와 아이들이 속해 있던 그룹의 번호가 새겨져 있다. 이 서명들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알아 낼 수 있다. 아이들이 태어난 장소와 날짜, 테레진과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날짜, 그리고 그들이 죽은 연도 등. 대부분의 아이들이 죽은 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1년 앞둔 1944년이다.
테레진의 아이들에 대해서 알려져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수용소의 기록들은 대개 아이들의 생년월일과 테레진에 도착한 날짜, 테레진을 떠난 날짜와 목적지, 그리고 그들의 최후만을 알려준다. 이 책에서는 ‘그림 설명’과 ‘시 설명’에 알려져 있는 정보들을 실었다. 많은 작품들에는 서명이 없어서 그것을 창작한 어린 작가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이 책에 실린 테레진 아이들의 작품은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것들이다. 테레진 아이들이 남긴 예술 작품들을 통해 하나하나 독특하고 개성적인 이 아이들의 목소리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범죄의 심연을 건너 우리에게 들려온다. 우리가 그들에게 가 닿을 수 있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인간성을 다시금 회복시켜 준다. 이 시와 그림들은 살아남아 우리에게 진실과 희망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것은 이 책의 출간 의의이자 테레진 아이들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이다.

프란타 바스가 작가인 줄 알았다. 어린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안네 프랑크같은 아이... 이 아이가 살아 있다면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어린 아이, 자기 또래 아이들에게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 뭐라고 할지가 더욱 궁금해졌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더 이상 프란타 바스 같은 아이들을 만들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추모하고 잊지않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은 우리가 아니라 지금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에게 총을 쏘아대고 이라크 아이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이스라엘군과 미군, 영국군 등이 봐야만 하는 책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또한 은연중에 우리 주위에 프란타 바스같은 아이를 만들려 하고 있지 않나를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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