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실비 제르맹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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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서 이 책을 과연 이렇게 빨리 읽어도 될까 생각했다. 이렇게 빨리 감상을 써도 될까도 생각했다. 그녀의 발자국에서는 잉크 맛이 났고 그녀가 사라진 뒤에 잉크는 투명해졌다. 하지만 그 맛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여자는 왜 책으로 스며들어와 페이지를 넘기고 다니는 길목마다 나타나 거구의 몸을 쩔뚝거리며 잔향을 남겼던 것일까. 아니 그 여자는 왜 프라하 거리를 돌아다닌 것이고 이제 사라져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지금 이 땅에도 그 여자가 다니고 있음을 느꼈다. 같은 여자일 것이다. 가장 낮고 가난하고 헐벗고 고통스럽고 비참했던 누군가의 눈물을 옷자락마다 담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땅이 또 어디 있으랴.


이 땅에도 그녀는 있다. 유태인 거리에서 빵 한 덩어리를 끼고 오던 길에 나치의 총에 맞아 죽은 작가의 숨결을 느끼게 하듯이 팔레스타인 거리에서 내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외치다 이스라엘군의 총알에 아들을 감싸고 죽은 이의 눈물과 한도 거둬야 하고 이라크에도, 미국에도 그 어디에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머물 곳은 하나의 책 속의 페이지가 아니듯 그녀는 그 누구만의 것도 아니고 그 어떤 한 곳에만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억이 살아있는 한, 우리의 기억이 망각이란 이름으로 사라지는 한 그녀는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나타날 것이며 거리를 돌아다닐 것이다. 못 보는 자들에게는 결코 자신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 연민의 프리즘은 모든 곳, 모든 삶, 모든 살 속을 들여다 보고 파내고 긁어 모은다. 그리고 다시 보여준다.

 

그리고 신이 쌓은 담이 견고할수록 아니 인간이 그 담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수록 그녀의 몸은 더욱 거대해질 것이다. 거두는 이 없는 눈물과 남루한 삶의 조각조각이 살이 타는 냄새를 옷자락에 품어야 하므로.


‘나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치기보다는 ‘잊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치고 싶다. 그녀를 만나면 그녀의 옷자락을 무겁게 하는 이들의 존재를 또 다른 이가 품을 수 있기를, 그래서 그녀의 몸이 더는 자라지 않고 그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싶지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고 나 또한 그 옷자락 속으로 언젠가는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내 아는 이들을 그 옷자락 속에서 보게 되리라는 상념에 이 서울 한복판에서 목 놓아 울고 싶어졌다.


그녀는 어쩌면 이 도시 어딘가에서 걸어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욱 쩔뚝거리며 더욱 남루해진 모습으로... 그녀가 이 도시를 품에 안고 잠시만이라도 얼러줄 수 있을까. 잠시만이라도 이 비루한 인생들을 위해서... 그래주기를...

 

언젠가 다시 한 번 꼭 한자 한자, 그녀의 잉크 냄새를 킁킁거리며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어보고 싶다. 아직 나는 작가가 말하는 의도도, 그 여자의 정체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지 못한다고 해서 울 수 없는 것은 아니고 모른다고 해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쓸 수 없는 건 아니다. 언젠가 내 글도 사라짐을 당할 테니 말이다.

 

78쪽에 이런 문장이 있다. 이 문장으로 졸필의 마지막을 대신하고자 한다. 나 역시 언제나 피라미드를 생각할때 파라오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피라미드를 만드느라 힘들어 죽어간 많은 무명씨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역사의 몸은 깊은 바다 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어서 그 터진 살 속에 수없이 많은 조가비, 해초, 산호, 그리고 온갖 바다 속 꽃들이 박힌 익사자의 몸과도 같다. 그래서 그 살이 더 많이 터지면 터질수록 더 많은 조가비들과 조개 껍데기 꽃들과 응고된 눈물과 피가 번식하는 것이다. 그 살이 더 많이 부대끼고 훼손당하면 당할수록 그 상처들에는 무수한 눈들과 입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주인들과 강자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역사를 만드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역사를 견디고 역사에 희생된 모든 약자들, 무명의 모든 하층민들, 익사자들이 죽어가듯이 지상의 거처를, 지상의 아름다움을, 하늘과 빛과 바람의 공간을 동시에 다 빼앗긴 채 그 역사로 인하여 죽은 자들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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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5-1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이 책을 담은지 여러날이 지났어요
이제 주문하기...를 누르라고 만두님이 재촉하시는군요 ^^

물만두 2006-05-17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저는 어려웠지만 님은 더 잘 읽으시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플레져 2006-05-17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만두님 리뷰, 너무 좋아요. 78쪽 문장들은... 아프네요.
욕심나는 책이지만 일단 갖고 있는 거라도 다 읽어야 하기에 보관함으로. 흑.

물만두 2006-05-17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서 좋았는데 제 수준에 너무 고차원적이었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