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제60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부문은 리처드 프럼의 <아름다움의 진화>(동아시아)를 옮긴 양병찬 번역가에게 돌아갔다. 내가 적은 심사평을 옮겨놓는다.

올해 번역 부문 심사에서 다수 심사위원의 추천으로 경합한 것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과 조류학자 리처드 프럼의 ‘아름다움의 진화’였다. ‘방랑자들’을 우리말로 옮긴 최성은 교수는 국내에 희소한 폴란드 문학자이자 번역가로 토카르추크의 작품들은 물론이고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작품들도 그간에 번역 소개해왔다. 비단 ‘방랑자들’ 번역의 성취뿐 아니라 폴란드 문학을 한국에 알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아름다움의 진화’를 옮긴 양병찬 역자는 생명과학분야 전문번역가로 최근 몇 년간 괄목할 만한 번역물들을 내놓았다. ‘자연의 발명’이나 ‘핀치의 부리’ ‘의식의 강’ 등의 번역서들이 해마다 출판문화상 예심과 본심에서 거론되었고 아깝게 수상을 놓친 적도 있었다.

이번 심사에서는 이렇듯 올해의 번역서뿐 아니라 역자의 과거 업적과 노력에 대해서도 합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합의에 따라 자연스레 ‘아름다움의 진화’를 수상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노벨상 수상작으로서 ‘방랑자들’에는 많은 대중적 주목이 주어진 면도 고려했다. 

‘아름다움의 진화’는 진화생물학에서 그간에 변방에 밀려나 있던 다윈의 심미적 성 선택 이론을 조류의 성 선택 작동 방식에 대한 해명을 통해서 복권시키고 있는 흥미로운 저작이다. 진화생물학의 주류 이론은 성적 장식물과 그 과시의 목적이 실용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데 있다고 본다. 아름다움을 철저하게 효용과 관련 지어 해석하는 것인데, ‘아름다움의 진화’는 그와 반대로 성 선택이 생존능력과 생식능력을 감소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자연선택이라는 관점에서는 퇴폐적으로까지 보이는 성 선택의 특이성이 바로 아름다움과 미적 진화의 독자성을 입증한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미적 진화의 새로운 이론은 인간의 미의식과 미적 체험에 대한 이해에도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정확하고도 유려한 번역을 통해서 수준 높은 과학 교양서를 한국어로 쓰인 책처럼 읽도록 해준 역자의 역량과 노고에 감사를 표하며 축하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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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taiji 2019-12-27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움의 진화’는 그와 반대로 성 선택이 생존능력과 생식능력을 감소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happytaiji 2019-12-27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히려반대아닌가요? 책에서주장하는것은? 증가시킬수있다는점에주목했기때문에 주류학계와 다소 다른결로 이목을 끈걸로알고있어요

로쟈 2019-12-27 22:41   좋아요 0 | URL
증가시킨다면 자연선택이란 개념으로 충분하겠죠. 성선택이란 개념을 따로 설정할 필요가 없이요.
 
 전출처 : 로쟈 > 국민통합은 어떻게 가능한가

7년 전에 쓴 칼럼이다. 한국판 토머스 프랭크의 책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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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58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투르게네프의 소설들을 다시 강의하는 차에 첫 장편 <루진>에 대해서 적었다. 투르게네프의 소설들을 다시 강의하면서 그간에 견해를 일부 조정할 수 있었던 게 성과다. 리뷰에도 일부 반영하고 있다...
















주간경향(19. 12. 30) 자신의 운명 탄식하는 ‘잉여인간의 초상’


한국 근대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이반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본격적인 문을 연 작가로 평가된다. 애초에 낭만적 서사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지만 농노제 하의 러시아 현실을 다룬 단편집 <사냥꾼의 수기>(1852)로 명성을 얻는다. <사냥꾼의 수기>가 불러일으킨 반향은 1861년에 단행된 농노제 폐지에도 기여했다고 알려진다.


장편소설 작가로 투르게네프의 이력은 <루진>(1856)부터 시작되는데, 이후 마지막 장편소설 <처녀지>(1877)에 이르기까지 투르게네프는 여섯 편의 사회소설을 통해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실상을 기록했다. 다만 그가 그려낸 실상은 주로 러시아의 시골 영지로 제정시대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다룬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1866) 같은 작품과는 차이를 보인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이 발자크와 디킨스 같은 서구 작가들의 소설에서 많은 영감을 얻으면서 동시에 러시아적 변형을 보여준다면, 투르게네프의 소설은 러시아식 사회소설의 전형을 발명했다고 여겨진다.


러시아식 사회소설이라는 표현은 투르게네프가 ‘잉여인간’이라는 독특한 형상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가 <루진>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 역시 대표적인 잉여인간이라고 할 주인공 루진의 초상이다. 루진은 서른다섯 살가량의 인물인데 한 부유한 여지주의 시골 별장에 예기치 않은 손님으로 처음 등장했을 때 좌중을 압도하는 지성과 논리적인 언변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특히 여지주 다리야 미하일로브나의 딸 나탈리야는 루진의 웅변에 감동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다. 나탈리야는 루진이 가진 높은 이상을 존경하며 급기야는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루진과 나탈리야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쓴 나탈리야는 루진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정작 루진은 뒤로 물러서며 운명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풍부한 지적 교양과 고상한 이상을 품고 있음에도 루진은 그것을 현실로 옮겨놓을 수 있는 의지와 결단력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나탈리야를 떠나며 남긴 편지에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탄식한다. 

“그렇습니다, 자연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 힘에 걸맞은 일을 아무것도 못 하고, 어떠한 유익한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겁니다. 모든 풍부한 재능은 헛되이 사라지고, 나는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보지 못할 겁니다.” 

이렇듯 무력해 보이는 잉여인간의 형상은 1860년에 작가가 추가한 에필로그에 의해서 그 의미가 복잡해진다. 에필로그에서 루진은 1848년 6월 프랑스 파리의 바리케이드 봉기에서 정부군의 총에 맞고 죽는다. 이국의 실패한 혁명에 참여해 익명으로 죽는 루진은 그의 예언대로 오직 씨앗만 뿌렸을 뿐 열매는 보지 못한다. 종종 무의미한 죽음으로 폄하되기도 했지만 <루진>의 예기치 않은 결말은 혁명, 혹은 사회변혁의 역량이 충분하지 않은 시기에 가능한 선택지를 시사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천고의 뒤에 올 초인을 위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던 시인을 나는 루진과 겹쳐서 떠올린다. 


19.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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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실재의 사막과 곁다리 인문학

8년 전의 인터뷰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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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셸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새 완역본이 나왔다(구 번역본으로는 김창석, 민희식 번역본 두 종이 있다). 이형식 교수가 옮긴 <잃어린 시절을 찾아서>(펭귄클래식, 전12권). 새 번역본으로 민음사판과 경합하다가 뒤처지는 줄 알았는데 한꺼번에 네 권이 출간돼 장정을 마무리지었다. 민음사판은 해를 넘기는 듯싶다.

이번에 나온 건 원작(전7권)의 5-7권으로 5권이 분권돼 있어서 전체가 4권이다. 전체로 치면 원작의 4-5권까지는 번역본이 분권돼 있고 6권과 7권이 단권이다. 원저의 제목을 따르면 이렇다. 괄호는 번역본 권수.

1권 스완 댁 쪽으로 (1,2)



2권 피어나는 소녀들의 그늘에서 (3,4)


3권 게르망뜨 쪽 (5,6)


4권 소돔과 고모라 (7,8)


5권 갇힌 여인 (9,10)


6권 탈주하는 여인 (11)


7권 되찾은 시절 (12)


전체 제목이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라고 돼 있어서 마지막 권의 제목도 ‘되찾은 시간‘ 대신에 ‘되찾은 시절‘이 되었다. 하지만 이 번역본의 최대 약점이 바로 제목이다. 역자는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절‘이어야 함을 강변하는데, 불어 ‘temps‘에 대한 이해는 차고 넘치겠지만 한국어 ‘시간/시절‘에 대한 이해는 부족해 보인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대표적인 ‘시간소설‘로, 시간소설은 모더니즘 소설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에 견주어 리얼리즘 소설은 ‘시대소설‘이다. 비록 시간이나 시대를 (영어로 치면) 똑같이 ‘time‘이라고 옮기더라도 그렇다(이건 영어뿐 아니라 불어, 독어, 러시아어에서도 공통적이다). ‘시절‘은 ‘시간‘에 비하면 의미가 상당히 축소된다. 프루스트 소설의 의의를 그렇게 축소할 필요가 있는지(시절소설?) 의문이다. 게다가 이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통용되고 있는데 굳이 번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지도(다른 사례로는 카뮈의 <이방인>을 <이인>으로 옮긴 경우다. 식자우환의 사례들이다).

제목에 대한 불만을 적었지만 이미 1-8권을 구입하고 완간을 고대하던 터라 반갑다(정확히는 인도감과 함께 후련함을 느낀다). 내년 가을 프랑스문학기행을 앞두고 프루스트를 다시 읽을 기회를 가지려 한다. 민음사판도 순조롭게 완간되기를 기대한다...


19. 12. 25.



P.S. 펭귄판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와 관련해서 예전에 한번 적은 적이 있는데, 보급판(반양장본) 형태로 나오면서 처음 나왔던 두 권의 양장본은 자취를 감추었다(잃어버린 양장본을 찾아서?). 특별한정판으로 나왔으니 절판된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양장본 구매자들은 멋쩍게 되었다. 하긴 일곱 권이 다 나왔다면 가격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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