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 논쟁이 가장 활발한 곳은 영국 같은데(런던의 서점에서 한 서가 전체가 무신론 코너였다) 도킨스와 히친스 같은 무신론의 맹렬한 사제들에 맞서온 존 레녹스의 책을 구입해봤다. ‘종교를 제거하려는 시도의 역설‘을 지적한 대목은 깨달음을 준다. 무엇이 진리인가는 많은 얘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 자녀의 수를 비교해보자는 것. 종교의 진화적 우위성 논변에 해당하겠다...

신무신론자들이 신앙을 말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진화론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진화는 그들에게 협조적이지 않은 것 같다. 선데이 타임즈는 과학 편집인 존 리크가 쓴 "자연은 ‘신앙심이 있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은 죽어가고 있는 종족이다"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는 독일 예나 대학교의 마이클 블룸이 이끈 「종교성의 번식상 우위」(The Reproductive Advantage of Religiosity)라는 제목의 82개 국가에 대한 연구를 보도하는데, 이 연구는 최소 주 1회 예배하는 부부는 25명의 자녀를 둔 반면, 전혀 예배하지 않는 부부의 자녀는 1.7명으로 이는 자기들을 대체하기에도 불충분한 숫자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리크는 종교는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돈과 건강 리스크 측면에서 커다란 비용을 부과하는 정신적 바이러스와 같다는 도킨스의 주장과, 이와 반대로 진화는 신자들을 매우 선호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적인 경향이 우리의유전자에 내면화되게 되었다는 블룸의 연구를 대조한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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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422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썩은 잎>에 대해 적었다. 분량상 지면에 실리지 못한 부분도 일부 포함시켰다...


















주간경향(21. 04. 22)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예고하는 작품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간판 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표작은 <백년의 고독>(1967)이다. 마르케스 자신은 이 작품이 누린 엄청난 인기와 명성에 부담을 느끼며, 그 이후에 발표한 <족장의 가을>을 대표작으로 꼽았지만 <백년의 고독>이 갖는 문학사적 의의는 확고하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특징과 성취를 집약하는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어서다.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백년의 고독>의 탄생과정이다. 그보다 먼저 쓰인 작품들은 <백년의 고독>에 이르는 여정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첫 소설 <썩은 잎>(1955)도 마찬가지인데, 뒤이어 발표한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1958)와 함께 <백년의 고독>을 예고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썩은 잎>과 <백년의 고독>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무엇보다도 '마콘도'라는 공간적 배경이다. 마르케스의 실제 고향인 콜롬비아의 마을 아라카타카를 모델로 한 마콘도는 <백년의 고독>이 세계문학의 고전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가장 유명한 문학적 지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렇지만 실제 지명 대신에 마콘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면서 마콘도는 상징적, 신화적 의미도 획득하게 된다. 즉 마콘도는 콜롬비아의 축소판이면서, 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것은 1982년에 마르케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수상연설문의 제목을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라고 지은 데서도 시사를 얻을 수 있다. 마르케스에게서 '백년의 고독'은 곧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마콘도와 라틴아메리카를 등치시킨다면 자연스레 마콘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와 비교하게 된다. 그것이 <썩은 잎>을 읽는 일차적인 독법이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 퇴역 대령(외조부)과 그의 딸 이사벨(어머니), 그리고 역시 이름이 나오지 않는 그의 손자(아이)가 번갈아가면서 화자로 등장하는 이 소설의 줄거리를 연대순으로 정돈하면, 대령의 가족이 1898년, 마콘도에 정착한 이후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1903년에 의사와 본당 신부가 동시에 마을에 등장한 것이다. 마콘도라는 지명의 상징성을 고려하면 서양의 과학(의사)과 종교(신부)가 한꺼번에 마을에 유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위 서양식 근대와의 조우이면서 근대로의 전환이다.

문제는 그에 뒤이어 바나나 회사가 들어온다는 점이다. 마을의 연대기로는 1907년에 벌어진 일인데, 바나나 회사가 마을에 도착하고 철도 부설작업이 이루어지면서 근대화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당장 바나나 회사가 노동자들을 위한 진료소를 설치하면서, 그들보다 먼저 들어왔던 의사는 존재감을 상실하고 칩거한다. 그리고 점차 마을의 부패와 타락이 진행된다. '썩은 잎'은 이러한 부정적 변화의 상징이다. 바나나 회사와 함께 다른 마을의 쓰레기 인간들과 쓰레기 물건들이 마콘도로 유입되었고 마을을 오염시켰다. 그러다 1915년, 바나나 회사가 철수하게 되지만 마콘도는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한다. 썩은 잎이 모든 것을 가져왔고 또 모든 것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1918년, 마을에서 선거가 치러지는 동안 군인들의 공격을 받지만, 의사는 부상당한 마을 사람들의 치료를 거부하여 분노를 산다.

그렇게 의사와 마을 사람들간의 적대관계가 형성되는데, 한편으로 의사는 위중한 병에 걸린 대령의 목숨을 구하여 그의 은인이 된다. 의사는 대령에게 자신이 죽으면 매장해줄 것을 부탁하고 1928년, 목을 매어 자살하자 대령은 마을 사람들의 반발, 그리고 새로 부임한 신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사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 의사와 대령,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착종된 관계는 곧바로 라틴아메리리카의 착종적인 근대화 과정의 상징이다. 마콘도는 근대와의 조우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지만 서양과 같은 자연스런 근대적 발전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비극을 절묘하게 다룬 작품이 <백년의 고독>이라는 사실을 <썩은 잎>은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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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1784) 5막에 나오는 피가로의 독백이다. 보마르셰의 이런 작품에 와서 소위 ‘시민비극‘(부르주아 비극)은 ‘비극‘이란 딱지를 떼고 시민극으로 재탄생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바야흐로 프랑스대혁명 전야의 분위기를 <피가로의 결혼>은 전달한다...


귀족, 재산, 혈통, 지위, 뭐 이런 것들로 기고만장해진 거지! 그런 막대한 재산을 쌓는 데 당신이 무슨 노력을 했단 말입니까? 세상에 태어나는 수고야 했겠지만, 그 이상은 하나도 한 게 없죠. 되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위인 아닙니까. 반면, 나로 말하면, 젠장! 낯모를 사람들 속에 버려져서 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갖은수완과 술수를 부려야 했단 말입니다. 백 년 전 스페인 전역을 다스리는 데도 이만한 재주가 필요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런 나랑 한판 붙어보시겠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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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1960년대 한국의 문학과 정치

3년 전 페이퍼다. 강의와도 관계가 있어서 1960-70년대 한국문학과 사회에 대해서 상시적으로 관심을 두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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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 참고하려 비꽃에서 나온 <어려운 시절>도 구입했다(아직 2016년에 나온 초판 1쇄). 속지의 디킨스 프로필이 잘못돼 있어 확인해보니 부록(작품해설)에도 사망연도가 오기돼 있다. 디킨스는 1870년 6월 9일 사망. 1868년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수수께끼다. 디킨스 선집을 번역하고 출간하면서 작가의 생몰연대도 엉뚱하게 적다니. 사망의 정황까지 적으면서!..

1868년 6월 8일, 오십구 세 나이로 저택에서 소설 원고 ‘에드윈 드루드의 수수께끼‘를 온종일 쓰고 저녁 식사를 하다가 쓰러져 다음 날 세상을 떠난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의 묘역‘에 묻혀 묘비에 다음 같은글을 새긴다.
"가난하고 고통받고 박해받는 사람을 동정했다. 이 사람이 죽으면서 세상은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를 잃었다."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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