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작가들은 기회를 보아 따로 다루기로 하고 동서양 인문학자 3인을 골랐다. 먼저 <프로이트>(교양인, 2011), <부르주아전>(서해문집, 2005) 등의 저자 피터 게이의 또 다른 대표작 <모더니즘>(민음사, 2015)이 번역돼 나왔다. 문학사나 문화사 강의 때 자주 들먹이게 되는 용어가 '모더니즘'인데, 이 개념에 대한 상세한 검토와 문화사적 기술로 읽을 수 있는 책.

 

모더니즘은 대략 184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초까지, 보들레르와 플로베르에서 베케트와 그 이후 팝아트를 비롯해 위험한 작품들까지를 아우르는 시대이다. 물질주의에 대한 반항과 속물 부르주아들의 가식에 대한 혐오에서 시작되어 성의 해방, 솔직함, 자신만의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과 연결된다. 따라서 모더니즘의 첫 번째 특징은 전통과 권위에 도전하고 뒤집기, 두 번째 특징은 나 자신만의 주관성으로 독창성을 이루는 것이다. 모더니즘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독창성과 시대성이다. 피터 게이는 모더니즘을 '주관성의 극대화'로 정의한다.

안 그래도 에곤 프리델의 <근대문화사>(한국문화사, 2015)가 (무모한) 독서욕을 자극하는 판에 불에 기름을 붓는 듯한 책이 나온 것. 고통 속의 쾌락을 뜻하는 '주이상스' 같은 말은 이런 경우에도 해당한다.

 

 

한동안 뜸하던 중국사상사가 리쩌허우의 책들도 연거푸 출간되고 있다. 이번에 나온 건 <중국철학은 어떻게 등장할 것인가?>(글항아리, 2015). <중국철학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가?>(글항아리, 2013)와 짝이 될 만한데, 둘다 작가이자 평론가 루쉬위안과 나눈 대담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류짜이푸와의 대화록 <고별혁명>(북로드, 2003)으로 처음 관심을 가졌던 저자인데, 노년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그리고 좀 놀라운 소식으로 일본 비평계의 거목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비평선이 출간됐다. <영화의 맨살>(이모션북스, 2015). 아무래도 소개가 필요할 거 같아서 좀 길지만, 소개글을 그대로 옮긴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영화비평가로 데뷔한 1969년부터 최근까지의 글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선별하여 번역한 것으로 일종의 ‘비평선집’이다. 영화 비평가로서 활동한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발표한 글들에서 정선한 것을 모은 것인 만큼 그의 비평의 특징과 지향점을 한 눈에 볼 수가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세계영화계 전체를 뒤져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비평가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를 포함해 오늘의 일본 영화계를 이끄는 쟁쟁한 중견들을 감독의 길로 이끌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 영화관객들에겐 둘도 없는 지침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하스미 시게히코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가 프랑스에서 플로베르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들뢰즈와 푸코를 일찌감치 일본에 소개한 선구적 학자이며, 동경대 총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던 거물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평론이 그의 화려한 지적 배경과는 달리 철저히 영화광적이며, 기존의 평론이 이르지 못한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는 점일 것이다.

일본 영화의 높이에 상응하는 비평의 깊이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지레 짐작에 올해 나온/나올 가장 중요한 영화비평서가 아닐까 싶다...

 

15. 0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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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공지다. 9월 10일부터 10월 29일까지 8주에 걸쳐 한우리독서토론논술 광명지부에서 '로쟈와 노벨문학상 수상작 같이 읽기'를 진행한다(매주 목요일 오전 10시-12시). 정확하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대표작 읽기'다. 일단은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에서부터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까지 여덟 작가의 대표작 여덟 편을 골랐다(추후에 비슷한 주제의 강의가 더 이어질 수도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포스터를 참고하시길.

 

 

15. 0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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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 12일만에 퇴원하여 집에 돌아왔다. 아직 치료기간이 3주가량 남았지만 여러 가지 일정상 남은 기간은 통원치료를 하기로 해서다. 밀린 책짐들을 다 풀고 책상맡에 앉으니 없던 만감도 생겨난다. 마치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그렇잖아도 병원비가 저렴한 해외여행비 정도는 된다). 바깥구경 대신에 누워서 TV만 본 게 좀 다르지만. 아직 정상 컨디션이 아니지만 밀린 일들이 적잖아서 조금씩 시간을 내기로 한다. 아마도 입원하지 않았더라면 12일 전에 올렸을 포스팅부터. 이달 출판문화(596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으로 하퍼 리의 신작 <파수꾼>(열린책들, 2015)을 다룬 글이다.

 

 

출판문화(15년 8월)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하퍼 리의 신작 <파수꾼>

 

올해 미국 출판계의 최대 화제작은 하퍼 리의 <파수꾼>이다. <앵무새 죽이기>(1960)라는 기념비적 소설의 저자가 무려 55년만에 발표한 ‘신작’이어서다. 1926년생으로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가 이전까지 발표한 작품은 <앵무새 죽이기> 단 한편이었다. 1964년의 한 인터뷰에서 글쓰기를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이며 언제 어디서건 글을 쓸 거라고 고백한 작가의 소출로서는 기이한 수준이었다. 젊은 하퍼 리는 자신의 소망이 “남부 앨라배마의 제인 오스틴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절반의 생애도 살지 못하고 마흔둘에 세상을 떠난 오스틴조차도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쓰지 않았던가. 심지어 은둔 작가의 대명사 제롬 샐린저도 <호밀밭의 파수꾼> 외에 세 권의 작품집을 남겼다. 하퍼 리가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면 거의 전무후무한 기록감이었다. 그런 작가가 신작을 발표하다니!


정확하게 말하면 신작은 아니다. 오히려 구작이다.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쓰인 작품으로 순서상 먼저 발표될 뻔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이 호호프라는 베테랑 편집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운명의 여신은 작품의 운명을, 혹은 순서를 뒤바꿔놓았다. <파수꾼>이 1950년대 말 당시 시대적 상황에 너무 밀착된 뜨거운 이슈(인종차별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판단한 편집자는 작품의 회상 장면에 주목하여 차라리 주인공 진 루이즈(스카웃)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확장해볼 것을 권한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하퍼 리는 2년에 걸쳐 어린아이 시점의 일인칭 소설을 다시 쓰는데, 그것이 바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라이브러리 저널)로 꼽히기도 한 <앵무새 죽이기>다.


그렇게 출간 순서가 뒤바뀌었다 하더라도 이미 완성된 작품이기에 <파수꾼>을 <앵무새 죽이기>에 뒤이어 발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하퍼 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덤속에까지 가지고 가려고 했는지 아니면 작가 스스로 출간을 포기했는지는 수수께끼다. 그렇게 50여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뀐 것은 하퍼 리의 보호자였던 언니 앨리스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다. 그 뒤를 이어 보호자 역할을 맡은 변호사 토냐 카터가 하퍼 리의 금고에서 <파수꾼>의 원고를 발견하고 저자의 동의를 얻어 마침내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 무엇이 하퍼 리의 마음을 바꾸게 한 것인지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제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이면서 동시에 <파수꾼>의 작가가 되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파수꾼>이 갖는 문제성은 아무래도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 스카웃의 뒷이야기라는 점에 놓인다. 뉴욕에서 생활하며 이제는 스물여섯 살이 된 진 루이즈 핀치는 잠시 고향인 앨라배마의 메이콤으로 돌아온다. <앵무새 죽이기>의 배경이기도 한 메이콤은 하퍼 리가 그녀의 고향 먼로빌을 모델로 삼은 곳이다. 절친했던 오빠 젬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인 변호사 애티커스는 일흔두 살의 노인이 되었다. 남편과 별거중인 고모 알렉산드라가 애티커스와 함께 살면서 안주인 역할을 하고 있고, 진 루이즈보다 네 살 많은 청년 헨리 클린턴(행크)이 애티커스의 일을 돕고 있다. 아들 젬을 잃은 뒤에 애티커스는 헨리를 아들처럼 여긴다. 진 루이즈는 고향에 들를 때마다 헨리와 데이트를 즐기며 그와의 결혼도 고려하지만 알렉산드라는 ‘백인 하층민 쓰레기’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탐탁찮아 한다. 그러던 차에 진 루이즈는 아버지 애티커스와 헨리가 인종차별주의 성격이 강한 주민협의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는다. 어째서 충격인가.

 


<앵무새 죽이기>에 등장하는 변호사 애티커스는 ‘깜둥이 애인’이라고 조롱당하면서도 강간혐의로 기소된 흑인 팀 로빈슨을 구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비록 백인 남성으로만 구성된 배심원단은 유죄를 선고하지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믿으며 정의에 헌신하는 애티커스의 모습은 스카웃과 젬, 두 남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곧 애티커스는 진 루이즈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이자 신이었다. 작품 바깥에서도 1962년에 영화 <앵무새 죽이기>가 개봉되고 나서 그레고리 펙이 배역을 맡을 애티커스는 정의의 대명사이자 백인의 양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이런 전력이 <파수꾼>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그가 강간 혐의로 기소된 흑인 청년에게 무죄 선고를 얻어내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언급된다. 사실 당시 시대적 배경상 백인 변호사가 흑인을 변호하여 법정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파수꾼>에서는 그렇게 기술된다(나중에 쓰인 <앵무새 죽이기>와의 사소한 차이점이다).


바로 그런 존재였던 아버지 애티커스의 ‘변신’은 진 루이즈에게 큰 실망과 배신감을 안겨준다. <앵무새 죽이기>의 독자로서 <파수꾼>을 계기로 애티커스와 ‘재회’하게 되는 많은 이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연이어 쓴 두 편의 소설, 연작소설로도 읽을 수 있는 <파수꾼>과 <앵무새 죽이기>에서 하퍼 리는 두 명의 애티커스를 그려놓은 것일까. 아니면 ‘영웅’의 이면을 그의 딸도, 그리고 독자들도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일까. 


당연하게도 <파수꾼>의 하이라이트는 두 부녀의 충돌 장면이다. 이제 성인이 된 진 루이즈는 지금까지 자기 존재의 지주이자 파수꾼이었던 아버지를 매섭게 비판한다. 애티커스는 어째서 주민협의회에 참석하여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터무니없는 연설을 듣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연방정부와 NAACP(흑인지위향상협회)가 원인이라고 말한다. 도화선이 된 건 1954년 연방 대법원의 판결이다. 브라운대 교육위원회 소송 사건에서 연방 대법원은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가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분리교육을 채택하고 있던 남부에서 이 판결은 주정부의 자치권을 연방정부가 짓밟은 것으로 받아들여져 남부 백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애티커스 또한 이러한 백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 루이즈에게 “만인에게 평등권을, 특권은 없습니다”라는 생각을 주입한 장본인인 애티커스는 정작 그러한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위선자란 말인가.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진 루이즈는 “만인에게 평등권을, 특권은 없습니다”라는 제퍼슨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제퍼슨 민주주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애티커스는 달리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제퍼슨은 시민권이란 각자가 획득해야 하는 특권으로 결코 가볍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로 투표권이 허락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민의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시민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애티커스가 보기에 흑인은 시민의 신분에 따르는 책임을 충분히 나눌 만한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그의 경험은 백인은 백인이고 흑인은 흑인이라고 말해준다.


그런 면에서 애티커스는 분명 백인우월주의자이지만 한편으로 시민에게는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공화주의자이기도 하다. 그가 흑인 청년을 법정에서 변호한 것은 평등하게 재판받을 수 있는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믿어서였지만, 그에게 사법상의 평등권이 곧바로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뒤늦게 깨달은 진 루이즈는 애티커스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시는 아빠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아빠와 아빠가 지지하는 모든 것을 경멸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렇게 분명한 차이를 확인하게 된 이상 상황은 애티커스와 진 루이즈 부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퍼 리는 애티커스의 동생 핀치 박사를 중재자로 내세움으로써 진 루이즈에게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을 갖게끔 한다. 핀치 박사에 따르면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의지하며 아버지의 답이 곧 자신의 답이라고 생각해온 진 루이즈는 정서적 불구자였다. 그래서 아버지 애티커스를 하나님으로 혼동하면서 그가 가진 인간적 결점들을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충고한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


<파수꾼>의 원제는 성경의 이사야서에 나오는 ‘가서 파수꾼을 세우라’란 구절이다. 진 루이즈에게는 그동안 아버지 애티커스라는 듬직한 파수꾼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만의 양심을 갖게 된 이상 이전의 파수꾼과는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라는 우상을 무너뜨리고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가 어린 스카웃의 성장소설이었다면 <파수꾼>은 스물여섯 살 진 루이즈의 성장소설이다. 스카웃이 진 루이즈로 성장하기까지 십수년이 걸린 걸 고려하면, <앵무새 죽이기>의 출간으로부터 55년이 지난 뒤에야 <파수꾼>이 빛을 보게 된 것은 너무 과도한 ‘성장 지체’로 여겨진다.

 

15. 0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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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회에 걸쳐서 경향신문에 '이현우의 내 인생의 책'이 실렸다.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연재를 진행하느라 기존에 썼던 글들을 기자의 도움을 받아 정리하는 식으로 수습했다.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도 '내 인생의 책'이라고 다섯 권을 꼽은 바 있어서 중복되지 않도록 했는데, 사실 내게 '내 인생의 책'보다 더 중요한 관심사는 '이주의 책'이다. 다만 내게 삶의 결정적 이미지를 만들어준 몇 권의 책을 골랐다. 내가 처음 읽은 판본은 대개 절판됐기에 대체본들의 이미지를 올려놓는다.

 

 

1. 릴케, 두이노의 비가 - 진리도 복음도 때론 가혹한 것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비가1’의 첫 시구다. 이 같은 시구를 당신은 접해본 적이 있으신지? 인생에 대해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건 릴케의 이 시 구절을 읽은 덕분이다.

시의 기본축은 강한 천사와 연약한 인간의 대비다. 인간은 짐승도 아니지만, 천사도 못 된다. 유한한 존재이자, 필멸적 존재인 인간, 그래서 ‘울부짖는’ 존재로서 인간의 어중간함이 릴케 시의 숙고 대상이다. 그런 어중간한 인간은 무엇으로 구원받는가?

지상의 존재인 우리가 아무리 울부짖더라도 천사들은, 혹은 신은 눈도 끔쩍하지 않으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건 계와 질서가 다르며, 존재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사들의 무관심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은 유치하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으로 더 무서워할 만한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이라고 릴케는 말한다. 우리의 울부짖음을 불쌍히 여겨 설혹 한 천사가 우리를 껴안아준다 해도 문제는 우리가 그걸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질 거라는 것.

 

진리나 복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진리를 견딜 수 있을까? 살아남는 일은 왜 많은 거짓말을 필요로 할까? 그건 진리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어떤가? 만약 당신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견뎌낼 수 있는가? 그의 기적은 어떤가? 혹은 재림은? 종말은?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 허무와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가끔은 골방에서 이 시구를 되뇌어보시라. 다소간 위로가 되고, 구제가 될는지 모른다. 물론 구원은 턱도 없다. 우리는 연약하기만 한 게 아니라 천박하기도 하므로. 사정이 그러하니, 우리는 공연한 관심과 사랑, 진리와 복음을 구걸하지 말고, 그저 대충 울부짖는 데 만족할 일이다.

 

 

2.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 쓰라린 유년에 피운 희망의 꽃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위험한 가계 1969’ 중)

1969년 하면 내가 떠올리는 건 한 시인의 불행한 가족사다. 시인 기형도의 많은 시가 그의 유년 시절과 불행한 가족사에 바쳐져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위험한 가계 1969’는 그 사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시인데, 시작은 아버지의 병환이다. 인용한 대목은 시인이 어린 날에 깨달은 삶의 방법론을 집약하고 있으며 이처럼 구체적인 가족사는 ‘그토록 쓰라린 삶’이라는 보편성을 상기시킨다.

유년의 화자는 그래도 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환한 가계’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용수철처럼 튀어오를 ‘아주 큰 꽃’과 ‘환한 가계’! ‘작은 씨앗들’이 ‘큰 꽃’을 피워내는 게 생명의 미스터리이고, 삶의 미스터리다. 유년의 시인 또한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라고 대견스레 물을 때 그러한 미스터리를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과 의지를 동시에 피력한 것이리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미스터리는 그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生)의 벽지(僻地)”였다. 그는 다만,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박명(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잠시 유예하던 ‘마지막 한 잎’이었기에. 1969년의 겨울 이후 시인은 20년을 더 살았을 뿐이다. 그는 어머니께 ‘아주 큰 꽃’을 보여드렸을까?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3.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자유와 사랑이 ‘구원’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최후의 걸작이다. 강의를 하다 보면 부득불 이런 걸작들을 ‘상대’해야 하는 때가 닥친다. 스릴을 느끼기도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잔인한 천재’를 내려다보면서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정작 작가 자신은 이 소설을 두고 주인공 3형제 중 막내 알료샤의 전기를 구성하는 일부에 불과하다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정수이자 서구 소설사에서 기념비적인 위치에 놓인 작품이 주인공의 어린 시절 ‘한순간’, 혹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다룬 “소설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야기라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친부 살해라는 모티프가 중심인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 전개에 재미와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카라마조프가의 세 아들이 대표하는 인간형이다. 큰아들 드미트리는 정념의 인간, 미학적 인간이다. 그는 ‘마돈나의 이상’(성스러움)을 동경하면서도 끊임없이 ‘소돔의 이상’(추악함)에 이끌린다. 미는 마돈나에만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소돔 속에도 깃들어 있는 것이다. 둘째 이반은 이성적인 인간으로 서구의 합리주의와 무신론을 대변한다. 사실 이반이 부정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세상,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다. 막내 알료샤는 신앙의 인간으로 작가가 제시하는 미래 러시아를 상징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자유와 양면적인 본성을 억압하는 대가로 경제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당대의 어떤 이념에도 반대했다. 그는 인간 영혼의 자유와 사랑, 그리고 부활에 대한 희망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진정한 힘이라고 믿었다.

 

 

4.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 삶을 아름답게 할 시간의 재창조

“일주일 동안 나는 당신의 영화를 네 번이나 보았습니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진정한 삶을 산다는 것, 진정한 예술가 그리고 인간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의 한 여성 노동자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고 보낸 편지의 일부다. 영화라는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읽힌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내게도 그런 것이다.

<봉인된 시간>은 부분적으로 타르코프스키의 연출노트이면서 영화와 예술 전반에 대한 그의 독자적인 사고와 통찰을 보여주는 유례없는 책이다. 사실 대개의 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미학을 글로써 말하기보다는 영화의 이미지로 보여주는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의 작업환경은 순조롭지 못했다. 그는 내내 당국과 마찰을 빚어야 했고, 실제로 작품과 작품 사이에 ‘고통스럽고 긴 휴식’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 ‘강요된 휴식’ 속에서 그는 영화 창작과정에서 추구하는 목적을 숙고했고, <봉인된 시간>은 그 산물이다.

 

그가 말하는 영화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을 빚어내는 것”이다. 영화적 순간들을 창조·구성하는 데 있어서 그가 유난히 강조하는 것은 윤리적 이상이다. 그 윤리학의 미적 실천을 위해서 그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시적, 혹은 정서적 연결이다. 그는 이런 순간을 포착하고자 한다. “(…)사형수들에게 외투와 구두를 벗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무리 중의 한 명이 무리에서 벗어나 구멍투성이의 양말을 신은 채 한참을 물구덩이 속을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는 일분이 지나면 전혀 필요가 없게 될 자기 외투와 장화를 내려놓을 마른 땅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삶에서 이보다 더 격렬한 순간은 많지 않다.

 

 

5. 에밀 시오랑, 절망의 맨 끝에서 -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

 

“나는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눈물들은 생각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들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쓰라리지 않을까?” 루마니아 출신의 작가 에밀 시오랑의 말이다. 철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둔 그는 1937년 파리로 건너가서 이후 죽을 때까지 인근의 창녀들이 야밤에도 소란을 피우는 싸구려 호텔 다락방에 은둔해 살았다. 그가 철학을 그만둔 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칸트와 피히테, 쇼펜하우어, 베르그송을 읽으면서 철학을 제외하곤 시에도 무관심했던 그는 남들처럼 논문을 쓰기로 결정하고 어떤 주제를 고를까 고심했다. 진부하면서도 뭔가 독특한 주제를 찾았다고 생각해서 지도교수에게 달려갔다. “‘눈물의 일반이론’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가능이야 하겠지. 하지만 참고문헌을 찾는 게 어렵지 않겠나.” 이에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논문의 근거가 되니까요.” 시오랑은 자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는 경멸에 찬 시선을 보냈고, 그는 그 순간 철학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한다. 그는 철학자 대신에 절망의 에세이스트로 남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근대철학의 개시를 선언하는 것이었다면, 시오랑은 바로 그 코기토의 불철저성이 미덥잖다. 그에 따르면 “철학의 잘못은 너무 참을 만하다는 것이다”. 사유를 철저하게 극단에까지 밀어붙인다면, 그것은 ‘존재’를 통과하여 의당 그 ‘폭발’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참을 수 없는 철학의 참을 만함’을 더 이상 참지 못할 때, 우리는 ‘폭발’한다.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가 시오랑의 새로운 명제다. 그의 아포리즘들은 어떤 사유의 응집이 아니라 그러한 폭발의 잔재로 읽혀야 한다. 그의 아포리즘들이 지시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라 사유의 종말로서의 폭발이다.

 

15. 0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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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의 대담집 <철학과 사건>(오월의봄, 2015)이 출간됐다. 얼마전에 러시아어본을 구한 책이라고 포스팅을 올린 적이 있는 그 책이다. 영어본도 갖고 있는데, 한국어본이 때맞춰 출간돼 '3종 세트'가 되었다. 바디우의 주저와 함께 소개서도 몇 권 나온 적이 있지만 이 대담집이야말로 가장 요긴한 입문서가 되지 않을까 한다. 부제는 '알랭 바디우, 자신의 철학을 말하다'. 겸사겸사 올해 나온 바디우의 책들로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철학과 사건>이 다섯 번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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