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책읽는 습관까지 바뀌는 건 아니어서 여전히 몇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다. 어느 한권을 집중해서 읽는 것보다 좋은 습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사정상(혹은 필요상) 여러 권의 책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한비자, 권력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최근의 발견이라 할 만한 책이지만('한비자의 발견'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책만 읽을 수는 없어서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에서도 몇 페이지, 그리고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서도 몇 페이지를 읽는다(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룰 예정이다).

무페의 책은 어제 이번주 '시사IN'에 실린 기사 '최장집 교수의 대선 후 진단'("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를 읽은 탓에 다시 생각이 났는지도 모른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7). 어제 귀가길에 최장집 교수 등의 <어떤 민주주의인가>(후마니타스, 2007) 를 찾았지만 이젠 어지간한 서점들에서는 구하는 책을 찾을 수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오늘에야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 등과 함께 주문했다.

 

 

 


나는 시간착오적인 기대이지만, <어떤 민주주의인가> 같은 최장집 교수의 일련의 책들과 <한비자, 권력의 기술> 같은 책을 5년전쯤에 노대통령이 미리 숙독할 수 있었더라면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란 생각마저 든다(나중에 역사적 평가가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참여정부의 개혁이란 건 결국 실패한 것 아닌가).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다른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현 정부의 '정실주의 인사'니 '코드 인사'니 하는 걸 한비자라면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뛰어난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는, 다른 사람이 나를 애정으로 대하지 아니할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지, 다른 사람이 애정을 베풀어 나를 위해 일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애정으로써 나를 위해 일하기를 기대하는 자는 위태로우며, 내가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방법에 기대는 자는 안전하다."(<한비자, 권력의 기술>, 160쪽에서 재인용)

저자가 이 대목에 대해서 이런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리더는 다른 사람의 충성을 기대하는 이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충성을 다 바친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지겟작대기나 똥장군도 왕 노릇할 수 있다. 모든 일이 충성스러운 신화와 관료조직에 의해 완벽하게 돌아가는데 리더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리더는 전혀 충성스럽지 않은 이들을 데리고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크게 부족한 것은 한비자의 이런 냉철한 시각이다. 지도자가 자신에 대한 '충성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들어 쓸 때는 최선의 인재를 발탁할 수 없다. 신하 또는 부하의 충성을 기대하지 않을 때, 리더는 되레 사람을 능력 본위로 바라보고, 능력 본위의 인사를 할 수 있다. 자신과 친한 사람,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 같은 사람을 등용하는 인사는 저잣거리의 필부도 할 수 있는 인사다."(160-1쪽)

 

 

 

 

저자가 한비자와 묵자의 말을 풀이하면서 또 이렇게 덧붙인다: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들만으로 조직을 구성하는 건, 그가 이끄는 조직을 돌돌돌 흐르는 시냇물이나 타닥타닥 타는 작은 모닥불 수준으로 만드는 일이다. 광야는 바위와 흙과 모래와 먼지와 바람과 티끌과 나무와 풀과 숲을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에 광야인 것이며, 바다는 모든 개울과 내와 강의 흙탕물과 폭우가 씻어 온 물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다인 것이다."(164-5쪽) 정치인 노무현은 결국 노사모의 탁월한 리더였을 뿐이라는 걸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이번 대선결과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평가 인터뷰에 이어서 실린 시사IN의 정치면 기사는 흥미롭게도 이명박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인선을 주된 화제로 삼은 것인데, 이에 대한 기자의 분석은 이렇다.

"이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은 전임 대통령들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한국 정치사에서 최대 라이벌로 통하는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인사 스타일 면에서도 정반대였다. YS는 마음에 둔 인사라도 언론에 사전 노출되면 취소해버리는 '깜짝쇼'를 즐겼다.(...) 반면 DJ는 언론의 하마평을 중시했다. 측근이나 하마평에 오른 이들은 가급적 언론에 거명되게 하려고 애썼고, 이 때문에 '언론 검증'이라는 유행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직 두 사람에 비하면 시스템주의자였다.(...) '국민 참여'라는 이름으로 여론의 천거를 받은 점도 노무현식 인사의 특징이었다."

"이명박 당선자는 스타일상 양김보다 노무현 대통령과 비슷한 면이 좀더 많다. 자기 판단을 믿으며, 한번 맡기면 주의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당선자는 도덕성이나 정치적 신념, 역사적 평가 같은 가치 기준보다는 실무 능력을 최우선으로 친다.(...) 일로 평가하고 일을 잘하면 다음 일을 주는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 당선자 주변에는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평생을 바친 가신도, 정치적 동지도 없다. 서로 쓰고 쓰이는, 그야말로 '용인(用人)' 관계다." 그리고 이런 점이 "새로운 정치 실험일 수는 있지만, 자칫 위태로울 수 있다"고 한 한나라당 의원은 지적했다 한다.

 

 

 

 

또 한가지 특징적인 것이라면 "10년 이상 인연을 맺은 참모가 거의 없"는 상황에다가 김유찬, 김경준 두 측근에게 배신을 당한 전력이 있어서 이 당선자에게 '배신 콤플렉스'까지 있다는 점. 경험적으로 이 'CEO형 정치인'은 "애사심과 충성심을 논하지 말라"는 한비자식의 인사관을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에 내가 유일하게 기대하는 건 이러한 용인술 혹은 인사 스타일의 효과이다(고려대 인맥이 대거 움직일 거라는 소문은 나돌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측근정치와 가신정치로부터 탈피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

다시 <한비자, 권력의 기술>의 저자의 말을 옮기면, "이렇게 믿을 놈이 하나도 없는 상황, 어떤 놈이 진짜 충신인지 간신인지 모르겠는 상황, 누가 이중 첩자인지 어떤 연놈이 산업스파이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기업체의 리더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한비자의 답은 간명하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칠 것을 기대하지 마라. 대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그것은 신하들이 또는 부하들이 당신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라는 것이다."(159-60쪽)

   

이명박 리더십이 과연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이 될 것인지는 다시 5년후에 판단할 수 있을 테지만 적어도 '자폐적 정실주의'(강준만)의 그늘에서는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당선자 자신이나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희망사항을 피력하면서 냉정하게 지난 대선에 대한 평가 두 가지를 인용한다.

먼저 최장집 교수와 함께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공저한 박상훈 박사: "우리 유권자들, 결코 보수적이지 않다. 이명박 정부를 불러들인 것은 노무현 정부다. 민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와 성장주의라는 나쁜 조합을 만들고 정당화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대선 결과가 큰 정치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상당수가 추구한 것이 '신자유주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드러났다. 하층 배제적인, 중산층 위주의 민주주의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새로운 보수적 민주파의 형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민주파 내부의 기득권층이다. 보통 사람들은 노무현 정부에서 특별히 혜택받은 것이 없는데 왜 정권 교체에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가."(시사IN 인터뷰)

그리고 한겨레21에 실린 홍기빈 박사의 칼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니 희망찬 새해를 시작해봐야겠다...

한겨레21(07. 12. 27)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NEVER SAY DIE. 죽는 소리 마라. 당신 12월19일 저녁에 술 마셨는가? 국민들 원망했는가? 대한민국이 실망스러운가? 한국의 운명이 어찌될꼬 하면서 <중경삼림>의 진청우(금성무)처럼 애상에 젖었는가? 혹시, 이민갈까 하는 소리까지 했는가? 

온갖 감정적, 논리적 호르몬의 막가는 분출을 잠깐 누르고 돌아보자. 5년 전에는 ‘노란 바람’이 있었다. 10년 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있었고, 이회창씨가 김영삼 허수아비를 불사르는 진풍경이 있었다. 그리고 15년 전에는 민자당 합당의 사생아로 나온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년 전에는 온 국민이 달려들어 물과 불에 목숨을 잃어가며 만들어준 절체절명의 ‘어시스트’를 김씨 성 가진 두 양반이 죽을 쑤어 개를 준 바 있다. 그래,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버텼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007이든 747이든 대통령이 된들 별일 있겠는가. 너무 걱정하시는 것은 좀 쓸데없이 간장만 혹사하는 게 아닐까.



나태와 안일을 털어버릴 때
아니다. 근거가 있다.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한다. 50% 더하기 13% 정도가 한목소리가 되어 “꺼져라, 진보 개혁!” 하고 외친 셈이 아닌가. 이런 정도의 압도적인 숫자가 대선에 나온 적이 있었는가. 그래서 두렵다. ‘우리’는 이제 왕따가 되었고,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참에 한 큐에 다 쓸어버리자고 막갈 기세다. 이 정도라면 지난 20년간의 파란만장한 한국 정치에서도 보지 못한 초유의 사태다. 이제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까. 나는 또 어디로 갈까. 그러니 어찌 취하지 아니하리오….

근데 잠깐 물어보자. 노무현 정권이 이라크 파병에 대연정 운운할 때 당신은 무얼 했는가? 김대중 정권이 IMF 핑계로 사방을 마구 ‘잘라’댈 때 얼마나 몸으로 버텼는가? 김영삼 정권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한다고 나댈 때는 뭐라고 할 생각이나마 했던가? 우리는 그저 코스닥에 열광했다가 부동산에 열중했다가 중국 펀드로 몰려갔다가 우리 애들 특목고 못 들어갈까봐 핏대를 올리며 살지 않았나? 그러면서 비정규직을 무시하고 시민운동을 정권의 앞잡이로 매도하며 혼자 고고한 듯 떠들지 않았는가? 그런 ‘호세월’이 얼마나 가기를 기대했던가? 이런 날이 올 줄 정말 몰랐나?

그래서 말인데, 정말 잘됐다. 이제 우리는 지난 십 몇 년간의 온갖 나태와 관성과 안일을 털어버릴 준비를 할 기회를 만났다. 흙 묻은 운동화를 털고, 잊어버릴 뻔한 소주병 쑤시는 법을 기억해내고, 보도블록을 어떻게 쓰다듬어줘야 해체되는지도 다시 떠올릴 때가 되었다. 진짜 상대를 만났다. 박근혜나 이회창이 되었다면 ‘독재자의 딸’ 어쩌고 ‘차떼기’가 어쩌고를 안주 삼아서 또 5년을 헛되이 보냈을 것이다. 정동영이 되었으면 ‘좌파 신자유주의’를 논하며 또 시대의 아이러니를 핑계 삼아 담배와 술만 작살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의 새 대통령은 돈을 알고 비즈니스를 알고 5년·10년짜리 계획을 세울 줄 알며, 만인을 ‘성공시대’로 몰아칠 줄 아는 분이다. ‘최선진 금융기법’도 알고 한반도를 쭉 째서 물을 흘릴 계획도 세우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본 축적과 경제성장률로 연결되는지를 또 아는 분이다. 한마디로, 이 땅에 꼭 맞는 ‘한국형 신자유주의’ 파라다이스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할 실행력을 가진 분으로 보인다.

5년 동안 우리는 무척 바쁠 것
나태와 안일에 젖은 우리 시민들을 위해 이보다 더 훌륭한 파트너가 어디 있을까. 당신, 지난 몇 년 혹은 몇십 년간의 우리의 늘어져 있던 삶이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인 줄 인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되짚어 나를 너를 우리 전체를 함께 새로 젊게 만들 에너지를 아직 느끼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서울 게 무언가. 오히려 이렇게 말하자. 이건 최고의 기회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만세. ‘삶의 허무와 권태’ 따위는 우리에게 없을 것이다. 최소한 5년간 우리는 살아남으랴 개개랴 어쩌면 또 한편으로 싸우랴 무척 바쁠 테니까.(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08.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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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x3 2008-01-01 23:3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 곳을 즐겨찾습니다.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이 글 덕에 한동안 회의적이고 혼란스럽던 생각들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8-01-02 09:54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구요.^^

로이73 2009-06-18 10:0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난 가을 '셰익스피어 저작 논쟁'에 관한 페이퍼 "썼느냐 안 썼느냐, 그것이 문제로다"(http://blog.aladin.co.kr/mramor/1578491)를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딱 이 주제와 관련된 책이 출간됐다. 버지니아 펠로스의 <셰익스피어는 없다>(눈과마음, 2008)가 그것인데, 이 책이 올해 구입한 마지막 책의 한권이면서 동시에 첫 2008년의 책이다(출간일이 2008년 1월 30일로 돼 있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이 책과 더불어 자연스레 2008년으로 건너뛰게 되었다.

아직 아무런 소개기사도 떠 있지 않아서 출판사의 소개글을 참고하면,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문호이자 천재적인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존재 여부와 그가 남긴 작품들의 진위 여부를 다룬 책이다." 저자인 버지니아 펠로스는 프란시스 베이컨을 둘러싼 비밀들에 매료되어 연구하다가 그가 '셰익스피어'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하는데, 책은 그 탐색의 여정을 보여주는 듯. 원제는 '셰익스피어 코드'이다. 소개의 글을 마저 옮겨놓는다.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쓰지 않았다!

영국의 유명 연극배우ㆍ연출가 287명이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것으로 알려진 작품들의 진짜 원작자가 셰익스피어 본인이 아니라는 내용의 ‘합리적 의심 선언’을 발표했다고 영국 BBC 방송이 보도했다. 이 선언문에는 연극배우 데렉 자코비 경, 마크 릴랜스(런던 ‘셰익스피어 글로브 시어터’ 전 예술 감독) 등 영국의 대표적인 배우들과 연출가들이 서명했다. 또한 이들은 과거에 같은 의문을 제기했던 마크 트웨인과 찰리 채플린 등 유명 인사 20명의 이름도 선언문에 포함했다.  

 

이들은 16세기 영국의 지방 도시에서, 게다가 문맹 부모 밑에서 태어난 셰익스피어가 궁중 생활과 이탈리아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한 점 등을 의심의 근거로 제시한다. 또한 셰익스피어가 원고료를 받은 기록이 전혀 없고, 유서에 작품 언급이 없다는 점 또한 꼽고 있다. 셰익스피어 존재 여부에 대한 회의론자들은 희곡 작가였던 에드워드 드 비어와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등,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 진짜 원작자라고 주장한다.  

 

이 책, <셰익스피어는 없다>에서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진짜 셰익스피어라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셰익스피어 역할을 했을 법한 인물인 가난한 연극배우 ‘윌 샥스퍼’의 삶에 대한 흔적과 베이컨과의 관계, 베이컨이 왜 셰익스피어라는 필명에 숨어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의 출생 비밀과 연계시켜 설명하며, 실제 원작자인 베이컨의 재산이 줄어들수록 윌 샥스퍼의 재산이 타당한 이유 없이 급속도로 늘어갔던 점 등, 기존의 어느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숨겨진 이야기들을 포함하여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다.


그들은 셰익스피어가 거짓이라고 말한다!

근대 철학의 선각자이자 영국 경험론의 창시자인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세계 문학사에 가장 위대한 유산을 남긴 셰익스피어. 각각 사상과 문학에서 천재로 군림해온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출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들 개인사의 질곡들이 상당 부분 부정확하거나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들의 전기 작가들을 곤혹스럽게 한 부분인 동시에 이 책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베이컨의 출생과 죽음에 얽힌 비밀은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반면,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관여된 일이니 당연하다) 셰익스피어의 그것은 아예 처음부터 황당할 정도로 정보 자체가 부재하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스트랫포드는 인구가 적은 소촌임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작가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없다. 다시 말해 셰익스피어의 고향 마을에서조차 그의 생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출생과 그의 고향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의 작가인 버지니아 펠로우 이전에 셰익스피어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심을 갖고 연구했던 오웬과 그가 이용한 ‘사이퍼 휠(Cyper Wheel)’을 통해 밝혀진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의 진위 여부를 연구하는 이 매혹적인 미스터리에 헌신해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중 촉망받는 젊은 외과 의사였던 오빌 오웬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숨겨진 코드를 해독하기 위한 암호 해독기, ‘사이퍼 휠’을 발명하여 셰익스피어의 진정한 원작자가 말하고자 했던 비밀을 밝히고자 하였다. 우리는 이 독특한 장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웬 이후, 역시 장시간 이 문제를 연구해온 이 책의 저자는 오웬의 사이퍼 힐을 직접 입수하여 연구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녀 이전의 수많은 사람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치열한 고민과 연구 끝에 <셰익스피어는 없다>를 집필하였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사생아다!

베이컨은 표면적으로 1561년에 니콜라스 베이컨과 앤 베이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것은 조작된 사실이며, 셰익스피어의 암호에 대한 비밀이 시작되는 출발선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 암호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베이컨은 1561년 처녀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서 태어난 뒤 당시 대법관을 맡고 있던 니콜라스 베이컨의 집으로 옮겨졌다. 즉, 프랜시스 베이컨은 당시 영국을 통치하던 처녀 여왕의 숨겨진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것이다. 이제 음모론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오며 영국 절대주의의 전성기와 문예부흥의 황금기를 구가하면서 영국민의 숭배를 받았던 엘리자베스 여왕,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베이컨은 궁정에서 유독 자신을 관심 있게 대하는 여왕의 눈길을 느낀다. 그런데 여왕과 그녀의 총신 레스터 백작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베이컨뿐이 아니었다. 여왕과 레스터 백작의 차남이자 베이컨의 동생인 에섹스 경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는 친형제인 베이컨과 에섹스, 그리고 베이컨 부부의 실제 아들인 앤서니 베이컨, 이 세 사람은 정통 사가(史家)에서 배제된 슬프고도 은밀한 역사의 한 장을 이 책 속에서 엮어간다.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함께 읽는다!

국내에서도 셰익스피어는 잘 알려져 있고, ‘귀납법’ 하면 절로 따라오는 베이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유명세와는 달리 좀처럼 쉽게 읽히지 않는 작품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것이다. 의외로 제대로 된 번역서가 부족하다는 이유에다 장르가 희곡이라는 영향도 있다. 셰익스피어와 베이컨을 모른다고 해서 불편할 것은 없지만, 안다면 일상에서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이들의 이름이나 작품으로 지적이고 흥미로운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읽기 힘들고 건지는 것은 별로 없을 것 같은 희곡이나 철학서를 읽자니 부담스럽다면 이 책이 안성맞춤이다.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 방식과 정보를 위주로 전달하는 이 책은 쉽고도 흥미롭게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그리고 엘리자베스 시대를 함께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정반대로 접근하는 셰익스피어를 통해 베이컨이라는 위대한 사상가의 숨겨진 삶과 엘리자베스 치하 영국사의 일면까지 보여주는 정보와 지식이 책 속에 맛깔스럽게 담겨 있다. 


07. 12. 31.

 

P.S. '셰익스피어 코드'란 제목의 영화도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nbA9tkWE2wM). TV 시리즈물의 하나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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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셰익스피어에 관한 책 두 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6 22:15 
    셰익스피어 관련서 두 권이 눈길을 끈다. 이젠 '셰익스피어 산업'도 성장 동력이 떨어질 만한데, 계속 나오는 걸 보면 거의 '화수분' 수준이 아닌가 싶다. 여유가 된다면 몇 권을 모아서 읽어봐도 좋겠다. 연합뉴스(09. 05. 04) 40대 하숙생이었던 셰익스피어의 모습  1612년 5월11일 월요일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영국 웨스터민스터 소재 소액청구재판소에 계류 중인 한 소송기록에 서명을 남겼다.
 
 
깐따삐야 2007-12-31 22:55   좋아요 0 | URL
저희 지도교수님이 셰익스피어 전공하셨는데 새해선물로 이 책을 드리면 정말 깜딱선물이 되겠는걸요. ㅋㅋㅋㅋ
로쟈님! 새해에도 좋은 글들 많이 올려주시고 가끔씩 열정적인 자작시도 보여주세요.
저도 성실한 알라디너가 되겠사와요.^^;

로쟈 2007-12-31 23:35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 전공자라면 싫어하실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열정적인 자작시'라고 하시니까 열쩍은데요.^^; 내년엔 깐따삐야님의 활약을 기대해봐야겠습니다.^^

다락방 2007-12-31 23:34   좋아요 0 | URL
앗, 로쟈님.
정말 잘 읽었어요.
별찜도 하고 보관함에도 넣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셔요!
:)

로쟈 2007-12-31 23:35   좋아요 0 | URL
저야 옮겨놓았을 뿐입니다.^^

qualia 2007-12-31 23:43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가 베이컨이라는 사실을 현대의 최첨단 유전자 검사법 혹은 고고학적 DNA 검사법으로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수십만년 전에서 4만~1만년 전까지 생존했던 맘모스(mammoth, 매머드)까지 다시 복제해서 되살려 낼 수 있다고 하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베이컨이 진짜 셰익스피어였는지 증명하는 일은 영국 정부와 영국 과학계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로쟈 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2007-12-31 23:35)

로쟈 2008-01-01 00:11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나 베이컨이나 모두 영국인이니 영국으로선 손해볼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리고 베이컨이 셰익스피어라는 건 셰익스피어가 쓴 걸로 알려진 작품들의 실제 저자가 베이컨이란 뜻입니다.^^

qualia 2008-01-01 00:09   좋아요 0 | URL
아하, 그렇군요^^ 제가 과학적으로 오독했군요. 셰익스피어는 그럼 실존 인물이었던 모양이죠?

로쟈 2008-01-01 00:12   좋아요 0 | URL
물론이죠!..

qualia 2008-01-01 00:40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프랜시스 베이컨이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레스터 백작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인가요? 저는 그 설이 역사적/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면, 그것을 유전자 검사법으로 증명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가 봅니다.^^ 이 생각에 셰익스피어에 대한 무지가 겹쳐 위와 같은 엉뚱한 질문을 드렸던 것이군요. 잘못을 지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8-01-01 00:43   좋아요 0 | URL
네, 그건 '과학적' 검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yoonakim 2008-01-01 10:24   좋아요 0 | URL
친애하는 로쟈님의 독서량은 익히 알지만 늘 족탈불급임을 확인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고 부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올 한해 평안하시고 원하시는 많은 일들이 원만하게 그리고 원하는 시간안에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

로쟈 2008-01-01 10:56   좋아요 0 | URL
아이고, 이게 다 '빈곤한' 독서량을 카바하기 위한 방책인 걸요.^^;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언제 한번 '면담'이라도 가져보도록 하지요.^^

순오기 2008-01-01 17:27   좋아요 0 | URL
대단히 흥미로운 기사군요, 더불어 책도 봐야겠단 끌림이 강력합니다! ^^ 찜!
님의 서재에 들러보지만, 어쩐지 댓글 남기기가 어렵더라는... ^^
새해에도 님의 활동 기대하며 새해 인사 드립니다!

로쟈 2008-01-01 17:57   좋아요 0 | URL
제가 '접대'에 좀 서툴러서 그런 모양입니다.^^; 하지만 댓글은 자주 남기셔도 좋습니다.^^

라로 2008-01-01 18:09   좋아요 0 | URL
저건 Dr. Who라는 영국의 TV 시리즈물 맞아요. '셰익스피어 코드'도 찾아서 봐야겠어요.
로쟈님이 모르시는 것도 있다니! 갑자기 로쟈님이 다정하게 느껴져요~.^^;;;
새해에도 변함없는 서재 활동을 해주시길 바라며 새해 인사드립니다.

로쟈 2008-01-01 18:26   좋아요 0 | URL
네, Dr. Who시리즈라고 뜨긴 하는데, 인기시리즈인지는 몰랐습니다. 제가 드라마는 안 봐서요.^^;
 

지난 주말 흥미롭게 읽은 북리뷰는 <사화와 반정의 시대>(역사비평사, 2007)에 관한 저자 인터뷰였다. 오늘 오다가 동네서점들에 들러봤지만 책이 눈에 띄지 않아서 헛걸음했는데 사화와 반정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 때문으로라도 읽어볼 작정이다. 사실 한국사 관련서들을 손에 드는 일은 아주 드문데, 책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사이의 다툼이라는 조선정치사에 대한 나의 오랜 고정관념을 재고하게 만든다(그 고정관념은 사실 고등학교때 국사선생님이 심어준 것으로 당시에는 '개안'이고 '발견'이었다). 저자는 거기에 '삼사'가 제3항으로 개입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 최근 읽고 있는 <한비자, 권력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2007)과도 무관하지 않아서 독서 목록에 올려둔 김에 인터뷰기사도 챙겨두도록 한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9979.html).   

한겨레(07. 12. 29) "사화는 선비 대립 아닌 삼사 둘러싼 권력투쟁”

사극의 단골 메뉴로 곧잘 등장하는 조선시대 사화(士禍)는 흔히 폭군 연산의 출생비밀과 패륜이 오버랩되는 궁중 치정·암투극, 또는 고루한 훈구파와 개혁적 사림파간 싸움 쯤으로 상투화돼 있다. 김범(37)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자신의 첫 책 <사화와 반정의 시대>(역사비평사)에서 그리는 사화는 그런 모습과는 좀 다르다. 예컨대 첫 사화인 무오사화를 폭군의 패륜으론 설명할 수 없다. “연산군은 그때까지만 해도 광포한 폭군적 면모를 보이지 않았고 방법상으로도 나름의 정합성을 갖고 있었다. 무오사화의 진정한 의도는 김종직 일파를 처벌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삼사(3司)의 언론활동을 경고하려는 데 있었다고 판단된다.”

고작 ‘삼사의 언론활동’을 규제하려고 그런 피바람을 일으켰단 말인가? ‘고작’이 아니다. 이 삼사의 언론활동 규제를 둘러싼 권력투쟁이야말로 조선시대 500년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키워드의 하나라는 게 김씨의 주장이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의 핵심적 주제가 바로 “삼사라는 중요한 관서가 그 기능을 현실정치에 구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과 결과를 살피고 그 의미를 짚어보는 것”이다. 그럴려면 선대인 9대 성종(재위기간 1469~1494) 치세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하고, 10대 연산군(1494~1506)과 그가 폭정 끝에 쫓겨난 반정 이후의 11대 중종조(1506~1544) 연간까지 살펴야 한다. 그 기간에 3번의 사화가 일어났고 첫 반정이 감행됐다.

“조선시대를 임진난을 중심으로 전·후기로 나눌 경우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진통 끝에 국왕-대신-삼사의 정립구도가 자리잡은 건국 1백여년 뒤의 이 3대 75년간의 치세가 조선후기까지 관통하는 제도의 토대를 놓은 시기다.” 김씨는 바로 이 제도에 천착하는 제도사적 접근자세를 취한다. “제도의 골격을 일단 파악하고 나면 현실의 수많은 복잡한 모습들은 한결 체계있게 정리될 수 있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19살 때 요절한 의경세자의 둘째 자산군. 세조비 정희왕후가 형 월산군을 제치고 13살 나이의 그를 보위에 앉힌 뒤 수렴청정을 했다. 장인 한명회로 상징되듯 그 시절은 세조대에 양산된 수많은 훈구공신들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승정원(국왕 비서실)의 재상’들을 가리키는 ‘원상’ 지배체제이기도 했다. 성종이 수렴청정과 원상제를 물리치고 친정을 시작한 것은 재위 7년(1476)부터였고, 그 이후 그는 훈구대신들의 전횡을 꺾기 위한 장치로 대간, 곧 신하들을 감찰하는 사헌부와 국왕에 대한 간언과 잘잘못을 논박하는 사간원을 키웠다.

대간은 훈구세력을 밀어내고 성종시대를 여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곧 비대해진 대간이 왕권을 제약하자 성종은 원래 학문을 담당한 홍문관의 언론기능을 강화해 대간들을 견제토록 했다. 삼사란 바로 대간에 홍문관이 가세한 언론·감찰기관이다. “조선은 절대왕정체제이긴 하나 왕이 마음대로 전횡할 수 있는 전제체제는 아니었다. 신권이 강했다. 삼사는 왕권과 신권에 대한 중요한 견제장치였는데, 중국엔 삼사가 약했다. 조선에서 환관의 발호가 거의 없었던 것은 삼사 덕이다. 삼사가 약했던 중국에선 환관의 힘이 셌다.”

삼사가 겨냥하는 주표적은 대신들. 대신은 최고관서로 영의정 등이 포진한 의정부와 이·호·예·병·형·공의 판서와 참판들이 포진한 육조(6曹), 즉 집행기관 고관들을 가리킨다. 성종은 대신과 삼사를 상호견제케 했고 삼사가 비대해지자 홍문관을 강화해 내부견제토록 했다. 이는 국왕-대신-삼사라는 조선조 특유의 정치정립구도의 토대가 됐으나 항상 제대로 작동한 건 아니었다. 말년에 성종은 “대신과 대간이라는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19살 나이에 왕이 된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삼사의 약진에 눌려 있던 대신들과 공모해 삼사를 친 게 무오사화였다. 훨씬 더 처참했던 갑자사화는 무오사화 이후 강화된 왕권을 자의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한 연산군에게 대신과 삼사가 합세해 견제에 나서자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 못한 채 자제력을 잃은 연산군이 훈구, 사림 구분없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른 결과다. 결국 조야 모두로부터 원한을 산 연산군은 재위 12년만에 쫓겨나는데 그게 중종반정이다. 중종 14년(1519)에 조광조 등을 숙청한 기묘사화 역시 반정공신들이 주축이 된 대신의 전횡을 삼사 강화로 견제했다가 그 삼사가 왕권마저 위태롭게 한다고 느낀 중종이 이번엔 대신들과 짜고 삼사를 친 사건이라는 게 김범씨가 내린 결론이다.

“사화를 출신배경이 다른 훈구파-사람파 단순 선악대립구도의 이분법으로 봐서는 안 된다. 조선사회는 혈통과 가문 등이 공고하게 짜여진, 상상을 초월하는 인맥사회였다. 사림파 거두로 알려진 조광조나 김종직도 명문거족 출신이었고 훈구파 거두 양성지와 후손들은 사림파로 분류될 수도 있다. 훈구와 사림은 서로 얽혀 있었다.”

김씨는 국사편찬위에서 <승정원 일기>(실록보다 몇배나 더 방대한 기록이나 임진란 때 불타 인조 이후 기록만 남았다) 디지털화 작업을 하면서 지난해 타계한 미국의 한국학 연구분야 거두 제임스 팔레의 반계 유형원론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있다. 해외 한국연구는 내부시각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수준높은 일급의 연구들에 대해서는 시각이 다르더라도 “감정적 대응보다는 공부에는 공부로 대응하는 실체적 접근을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때가 됐다”고 그는 말했다.

◎ 사화란= 사화(士禍)는 말 그대로 선비(사대부)들이 입은 참화다. 조선시대 4대 사화라면 연산군 4년(1498년) 때의 무오사화, 10년 때의 갑자사화, 중종조의 기묘사화, 13대 명종(재위 1545~1567)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를 가리킨다. 무오사화는 사림(‘사대부의 숲’이라는 뜻)파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춘추관 사관으로 있을 때 훈구대신 이극돈 등의 비행을 사초에 넣고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삽입한 게 발단이 됐다. 김종직 일파와 대립했던 이극돈, 유자광 등이 <성종실록> 편찬 때 조의제문이 단종한테서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비방한 것이라며 연산군에 고하고 처벌을 부추겼다.

갑자사화는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한 연산군의 무차별 보복극, 기묘사화는 유교적 도덕정치를 지향한 조광조 등이 남발된 훈구대신들의 공훈 삭제를 감행한 데 대한 대신과 국왕의 반격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을사사화는 대윤, 소윤으로 갈라진 문정왕후 외척간의 권력투쟁이었다. 수십, 수백명에 이르는 피화자들은 다수가 사사, 주살 등의 형태로 사형당하거나 고문당하고 유배됐으며, 무덤에서 주검을 꺼내 목을 베는 부관참시도 드물지 않았고 가족, 친척, 친구, 제자들도 연루돼 맞아죽거나 노비가 되고, 유배당하는 참혹한 화를 당했다.

반정(反正)은 정통이나 정도를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다. 조선시대에 두 번의 반정이 있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과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을 쫓아낸 16대 인조(1623~1649)반정이다.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비사건을 구실로 삼은 인조반정은 나름대로 치적을 쌓은 광해군의 치세와도 관련해 명분없는 궁정쿠데타였다는 지적이 많다.(한승동 선임기자)

07.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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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화의 역사적 성격
    from 看書痴齋 2007-12-31 22:50 
       조선왕조 정치사에서 사화(士禍)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개국 후 약 한 세기가 가까와지는 시점이었다. 사화는 한 차례로 끝나지 않고 약 70년간에 걸쳐서 큰 것만 해도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 기묘사화(중종14년, 1519), 을사사화(명종 즉위년, 1545) 등 네 차례나 되었다. 동일한 형태의 정치현상이 이렇게 연속적으로 거듭된 것은 그 자체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모처럼 재미를 만끽하며 읽고 있는 책은 이상수의 <한비자, 권력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2007)이다. 예전에 저자의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길, 2001)을 재미있게 읽고 논술교재로 쓰기도 했는데,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부듯하기도 하다. 새해에도 저자의 책들이 연이어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권력의 기술'과 관련하여 염두에 두고 있는 책 몇 권을 꼽아본다. 주로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에 관한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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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권력의 기술- 제왕학의 고전에서 배우는 리더의 조건
이상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7년 12월 31일에 저장
품절
이야기의 숲에서 한비자를 만나다- 원전으로 읽는 한비자
한비자 지음, 이상수 엮어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7년 12월 31일에 저장
품절

한비자
한비 지음, 김원중 옮김 / 현암사 / 2003년 8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07년 12월 31일에 저장
구판절판
한비자- 덕치에서 법치로
윤찬원 지음 / 살림 / 2005년 9월
9,900원 → 8,91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3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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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우울한 열정>(이후, 2005)에서 벤야민에 관한 장을 다시 읽어보려고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는다(참고로, 나는 이 책에 관해서 몇 차례 페이퍼를 쓴 바 있다). 원저인 <토성의 영향 아래>를 내가 안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도서관에서 주로 빌려 읽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책을 찾아보려는 열정 역시 이럴 땐 '우울한 열정'이다(손택은 벤야민이 우울증적 기질의 비평가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곁다리로 고유명사 표기에 대해 지적하자면, 처음에 '수잔 손탁'으로 소개돼던 'Susan Sontag'을 '수전 손택'으로 읽는 건 현지음을 고려한 탓인 듯하나 그런 식으로라면 우리가 표기만으로 읽을 수 있는 이름은 거의 없다(가령 영국식과 미국식 영어의 차이는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마샬 맥루한(Marshal Mcluhan)'의 경우는 점입가경인데, '마셜 맥루언'으로 바뀌더니 최근엔 아예 '마셜 매클루언'이란 표기까지 등장했다. 이유는 역시나 '현지음'인가? 하지만 관행 파괴적인 '동인이명'이 이런 식으로 점차 늘어난다면 소통가능성은 그와 반비례하여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하긴 유식의 과시는 애당초 소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울하게도 말이다.

그런 우울 모드는 오전부터 간간이 붙들고 있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도 빚지고 있다. 야심차게 출간되기 시작한 이 선집이 적어도 한국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내가 읽기에 독어본이나 영어본 등 다른 판본의 도움 없이 국역본만으로 벤야민을 읽고 이해하기는 여전히 지난해 보인다. 비록 가독성을 경계해 마지 않았던 아도르노만큼은 아니더라도 벤야민 읽기 역시 팍팍한 여정이다.   

 

 

 

 

걸음을 지체시키는 원인은 번역자들이 원칙으로 삼은 듯이 보이는 '직역주의'에 있다. 원저에 대한 '충실성'이 이유인 듯한데, 덕분에 한국어 독자는 들러리에 머문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건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한 한국어까지 정당화하느냐는 것이다(벤야민 자신이 그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독일어 문장을 구사한다면 물론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를 자임했던 벤야민이 과연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한 것인지?).

아직 이번에 나온 국역본들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안을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벤야민의 가장 대표적인 '논문'의 경우는 사실 지난 1983년에 나온 반성완 교수의 번역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다(내가 읽을 수 있었던 대여섯 종의 우리말 번역본들을 고려할 때 그렇다). 물론 반성완본의 여러 오역들에 대해서는 여러 후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말 문장력에서만큼은 반성완본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그래서 차라리 반성완 교수가 개역판을 내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한다). 예컨대, 벤야민의 에피그라프격으로 인용하고 발레리의 첫문장은 이렇다.

"제반 예술이 정초되고 그것들의 여러 유형이 생겨난 것은 우리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에서 시작되었고, 사물과 상황에 대한 그 권력이 우리 시대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던 사람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최성만, 99쪽)

"예술이라는 개념과 예술의 여러 상이한 형식은 오늘날의 시대와는 크게 다른 시대, 즉 사물과 상황을 제어하는 힘이 우리들의 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미한 시대에 생겨났다."(반성완, 197쪽)

여기서 무엇이 맞는 번역이냐는 부수적이다. 다만 나의 관심은 문장이고 문체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 대목의 원문은 불어이기에 두 판본 모두 '중역'이다(벤야민이 불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발레리에 대한 충실성이며 불문학쪽에서도 뛰어난 문장가로 꼽히는 발레리라면 보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인용문의 끝문장을 읽어본다.

"우리는 엄청난 혁신들이 예술의 테크닉 전체를 변모시키고, 그로써 발명 자체에 영향을 끼치며, 결국에는 예술의 개념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를지 모른다는 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최성만)

"따라서 우리는, 위대한 신발명들이 예술형식의 기술 전체를 변화시키고 또 이를 통해 예술적 발상에도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서는 예술개념 자체에까지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반성완)

발레리가 말하는 '엄청난 혁신들' 혹은 '위대한 신발명들'(영역으로는 'great innovations')이 벤야민의 문맥에서는 '기술복제'나 '영화'를 가리키게 된다. 이러한 혁신/발명이 초래하게 된 '놀라운 변화'가 사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한데, 인용문의 '발명 자체'는 무엇인가? 반성완본에서 '예술적 발상'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지만 '발명 자체'만으로는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기 어렵다. 이걸 영역본에서는 'artistic invention'으로 옮겼고,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는 '창작 과정 자체'라고 옮겼다. 모두 '발명 자체'보다는 뜻이 통한다. 이어서 마르크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머리말.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기도하려고 했을 때 자본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연구를 착수할 때 그 결과가 진단적 가치를 지닐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의 근본 상황으로 되돌아가서 그 상황을 그로부터 추후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점점 더 심화되는 무산계급의 착취를 예상할 수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케 할 조건들이 만들어지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최성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분석하는 일에 착수했을 때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아직도 그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분석이 예언적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기본관계에까지 소급하면서, 이 기본관계로부터 자본주의의 미래적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서술하였다. 마르크스의 결론은, 자본주의하에서는 앞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가 점점 더 날카롭게 심화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하게 할 제(諸)조건이 마련될 것이라는 것이었다."(반성완)

일단 "기도하려고 했을 때"보다는 "기도했을 때"가 우리말로 자연스럽다(벤야민이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하는가?) 물론 반성완본의 '생산방식'보다는 '생산양식'(영역으로는 'mode of production')이 더 적합한 역어인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진단적 가치'라는 건 문맥에 맞지 않다(다음 쪽에 나오는 '진단적 요구'도 마찬가지다). 독어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말에서 '진단'은 보통 'diagnosis'에 상응하는데, 여기서 쓰인 단어는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prognosis'이고 이건 의학용어로 '예후'라고 번역되는 용어다('pro'라는 접두사가 이미 암시해주듯이 '예측' '조짐' 등을 가리킨다). 마르크스가 한 일은 자본주의 초기단계를 분석하면서 향후 자본주의의 종말까지를 예측한 것이니 '진단'이라고만 하는 건 부족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라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미래가 이미 초기의 맹아에 새겨져 있다는 것과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동일한 것인지? 영역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수동태 구문이다: "Going back to the basic conditions of capitalist production, he presented them in a way which showed what could be expected of capitalism in the future." 다른 번역들을 둘러봐도 '생겨나도록'의 출처는 찾기 어렵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이라고 이어지는 걸 보면 역자는 '생겨난 것'에 상당히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머리말에 이어지는 1절의 첫문장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정확하게 말하면 '오역'이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다."(100쪽) 왜 '가능했다'가 아니라 '가능했었다'인가? 우리말에서 '가능했었다'라고 하면 '현재는 가능하지 않지만'이란 뜻을 함축한다. 물론 벤야민이 뜻하는 바는 아니다. 2절에서도 첫문장은 좀 어색하다.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최성만, 103쪽)

"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그 요소는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이다."(반성완, 200쪽)      

완벽한 복제에서도 빠져 있는 한가지는 '현존재'가 아니라 '현존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현존재'라는 말을 고집하더라도 '현존재성'이라고 해야 타당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라기보다는 존재가 갖는 어떤 '속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완벽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제와 마찬가지로 원저가 갖고 있는 현존성, 곧 아우라를 갖지는 못한다. 다만 근접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번역에 대한 불만은 그런 근접에의 욕망이 불가피하게 빚어내는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난하게 읽힐 수도 있는 대목들에 대해 괜한 투정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처럼 끝간 데를 알지 못하는 법. 해서 "사람들이 번역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번역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이를 때까지 이런 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07. 12. 30.

P.S. 내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처음 읽은 건 20년쯤 전이다. 도서관에서 노트에 정리해가며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텍스트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당시에 가장 어려워한 텍스트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었고, 우연찮게도 내가 읽은 루카치와 벤야민의 번역자는 똑같이 반성완 교수였다. 하지만 20년이 지나서 세 가지 언어의 번역본들을 펼쳐놓고 읽는 벤야민은 어찌된 영문인지 예전보다 더디 읽힌다. 반성완본이나 최성만본이나 채플린의 영화 <황금광시대(The Gold Rush)>(1925)를 <골드러시>로 표기한 것도 이젠 불만스러워 하는 것이니 달라진 건 나의 지성이 아니라 감성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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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ine 2007-12-3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자하니 초현실주의는...정말 글이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하던데...그걸 읽으신 후의 감상이 기대되네요...^^;

로쟈 2007-12-31 01:11   좋아요 0 | URL
어느 책을 말씀하시는지요?..

caline 2007-12-31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벤야민이 쓴 '초현실주의' 글 말이죠....5권인가 수록 예정이니 아직 발간되지는 않았지만...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번역이 장난 아니라는 소리가 있어서...^^;

로쟈 2007-12-31 01:25   좋아요 0 | URL
네, 설마 아직 안 나온 책을 말씀하시나 했습니다.^^;

2007-12-31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31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31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다음카페 비평고원에도 올려놓았는데, 어느 분이 역자의 답글을 댓글로 달아놓으셨다. 여기에도 옮겨놓는다.

* 다음은 로쟈 님의 글에 대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의 역자 최성만 선생님의 답글입니다.파란색 글자가 역자의 답변입니다(*여기서는 색깔처리가 되지 않았지만 식별은 가능하다). 역자를 대신하여 글을 올립니다.

그런 우울 모드는 오전부터 간간이 붙들고 있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도 빚지고 있다. 야심차게 출간되기 시작한 이 선집이 적어도 한국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내가 읽기에 독어본이나 영어본 등 다른 판본의 도움 없이 국역본만으로 벤야민을 읽고 이해하기는 여전히 지난해 보인다. 비록 가독성을 경계해 마지 않았던 아도르노만큼은 아니더라도 벤야민 읽기 역시 팍팍한 여정이다.

-> 당연히 번역은 원본을 대체하지 않는다. 더구나 고도의 사유작업을 요하는 이론에서는 원본이 훨씬 더 잘 읽히는 게 상식이다. 그렇지만 번역은 원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충분히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엉뚱한 길잡이(오역)는 잘못된 것이고 애매한 길잡이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은 끊임없는 개선 작업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명백한 오역 내지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비문과 매끄럽지 못하고 애매한 부분이 섞여 있는 번역은 구별해야 할 것이다. 모든 걸 한 통속으로 만들면 결국 오역이나 중역이나 다 정당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팍팍한 여정’은 원어민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난해한 이론의 번역본은 원문을 옆에 두고 참고로 읽는 데 그 본래의 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걸음을 지체시키는 원인은 번역자들이 원칙으로 삼은 듯이 보이는 '직역주의'에 있다. 원저에 대한 '충실성'이 이유인 듯한데, 덕분에 한국어 독자는 들러리에 머문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건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한 한국어까지 정당화하느냐는 것이다(벤야민 자신이 그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독일어 문장을 구사한다면 물론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를 자임했던 벤야민이 과연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한 것인지?).

아직 이번에 나온 국역본들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안을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벤야민의 가장 대표적인 '논문'의 경우는 사실 지난 1983년에 나온 반성완 교수의 번역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다(내가 읽을 수 있었던 대여섯 종의 우리말 번역본들을 고려할 때 그렇다). 물론 반성완본의 여러 오역들에 대해서는 여러 후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말 문장력에서만큼은 반성완본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그래서 차라리 반성완 교수가 개역판을 내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한다). 예컨대, 벤야민의 에피그라프격으로 인용하고 발레리의 첫문장은 이렇다.

->직역이냐 의역이냐는 번역의 이론과 실제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두 대립적 원칙이다. 둘 다 수렴하는 게 최선일 것이지만 그것은 이상(理想)으로 남는다. 역자로서 해명을 하자면 이 번역에서 직역(주의?) 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최선은 아니지만 역자들이 선택한 원칙에 따른 것이다. 새 번역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반성완 교수의 번역본을 계속 고수하기를 권한다.

"제반 예술이 정초되고 그것들의 여러 유형이 생겨난 것은 우리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에서 시작되었고, 사물과 상황에 대한 그 권력이 우리 시대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던 사람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최성만, 99쪽)

"예술이라는 개념과 예술의 여러 상이한 형식은 오늘날의 시대와는 크게 다른 시대, 즉 사물과 상황을 제어하는 힘이 우리들의 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미한 시대에 생겨났다."(반성완, 197쪽)

여기서 무엇이 맞는 번역이냐는 부수적이다. 다만 나의 관심은 문장이고 문체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 대목의 원문은 불어이기에 두 판본 모두 '중역'이다(벤야민이 불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발레리에 대한 충실성이며 불문학쪽에서도 뛰어난 문장가로 꼽히는 발레리라면 보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인용문의 끝문장을 읽어본다.

->‘유려한’ 번역이 그리우면 원본을 읽으시거나 직접 번역해 보시기 권한다. 위에 인용한 문장의 프랑스어 원본을 가지고서. 문체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건 좀 유치한 투정 같이 보인다. 그것도 원 작자와 비교하다니. 참고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원문에 나오기에 새 번역에서는 그 부분을 분명하게 번역했다. 위 인용문이 왜 이해가 안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엄청난 혁신들이 예술의 테크닉 전체를 변모시키고, 그로써 발명 자체에 영향을 끼치며, 결국에는 예술의 개념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를지 모른다는 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최성만)

"따라서 우리는, 위대한 신발명들이 예술형식의 기술 전체를 변화시키고 또 이를 통해 예술적 발상에도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서는 예술개념 자체에까지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반성완)

발레리가 말하는 '엄청난 혁신들' 혹은 '위대한 신발명들'(영역으로는 'great innovations')이 벤야민의 문맥에서는 '기술복제'나 '영화'를 가리키게 된다. 이러한 혁신/발명이 초래하게 된 '놀라운 변화'가 사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한데, 인용문의 '발명 자체'는 무엇인가? 반성완본에서 '예술적 발상'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지만 '발명 자체'만으로는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기 어렵다. 이걸 영역본에서는 'artistic invention'으로 옮겼고,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는 '창작 과정 자체'라고 옮겼다. 모두 '발명 자체'보다는 뜻이 통한다. 이어서 마르크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머리말.

->이 부분의 지적은 직역이 어색한 번역을 낳은 예로서 수용한다. 다음 기회에 좀 더 바로 잡을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 즉 영역이나 러시아역에서처럼 (예술의) 창작(과정) 자체라고 의역했으면 의미가 더 분명하게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굳이 해명을 하자면, 벤야민의 원본에 Invention selbst(발명, 구상 자체)라고 되어 있다. 예술이나 창작이라는 말은 없다. 문맥상 그렇게 읽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창작’이라는 표현도 우리말식이다. 만일 굳이 창작이라고 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또 다른 원어가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기도하려고 했을 때 자본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연구를 착수할 때 그 결과가 진단적 가치를 지닐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의 근본 상황으로 되돌아가서 그 상황을 그로부터 추후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점점 더 심화되는 무산계급의 착취를 예상할 수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케 할 조건들이 만들어지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최성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분석하는 일에 착수했을 때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아직도 그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분석이 예언적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기본관계에까지 소급하면서, 이 기본관계로부터 자본주의의 미래적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서술하였다. 마르크스의 결론은, 자본주의하에서는 앞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가 점점 더 날카롭게 심화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하게 할 제(諸)조건이 마련될 것이라는 것이었다."(반성완)

일단 "기도하려고 했을 때"보다는 "기도했을 때"가 우리말로 자연스럽다(벤야민이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하는가?) 물론 반성완본의 '생산방식'보다는 '생산양식'(영역으로는 'mode of production')이 더 적합한 역어인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진단적 가치'라는 건 문맥에 맞지 않는다(다음 쪽에 나오는 '진단적 요구'도 마찬가지다). 독어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말에서 '진단'은 보통 'diagnosis'에 상응하는데, 여기서 쓰인 단어는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prognosis'이고 이건 의학용어로 '예후'라고 번역되는 용어다('pro'라는 접두사가 이미 암시해주듯이 '예측' '조짐' 등을 가리킨다). 마르크스가 한 일은 자본주의 초기단계를 분석하면서 향후 자본주의의 종말까지를 예측한 것이니 '진단'이라고만 하는 건 부족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라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미래가 이미 초기의 맹아에 새겨져 있다는 것과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동일한 것인지? 영역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수동태 구문이다: "Going back to the basic conditions of capitalist production, he presented them in a way which showed what could be expected of capitalism in the future." 다른 번역들을 둘러봐도 '생겨나도록'의 출처는 찾기 어렵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이라고 이어지는 걸 보면 역자는 '생겨난 것'에 상당히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기도..’ 부분의 지적은 너무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뜻은 통하니까. 그 다음의 지적: diagnose와 prognose는 원어에서는 현재의 진단과 미래의 진단으로 차이가 있지만, prognose를 예측적, 예후적 가치라고 번역해도 어색해 보이고, 진단이라는 말에 미래의 진단이라는 의미, 즉 예측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 같아 그렇게 번역했다. 원어를 병기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의 지적: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장차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나오도록(생겨나도록) 서술했다는 뜻인데,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면 유감이다.

머리말에 이어지는 1절의 첫문장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정확하게 말하면 '오역'이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었다."(100쪽) 왜 '가능했다'가 아니라 '가능했었다'인가? 우리말에서 '가능했었다'라고 하면 '현재는 가능하지 않지만'이란 뜻을 함축한다. 물론 벤야민이 뜻하는 바는 아니다. 2절에서도 첫문장은 좀 어색하다.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최성만, 103쪽)

"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그 요소는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이다."(반성완, 200쪽)

완벽한 복제에서도 빠져 있는 한가지는 '현존재'가 아니라 '현존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현존재'라는 말을 고집하더라도 '현존재성'이라고 해야 타당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라기보다는 존재가 갖는 어떤 '속성'이기 때문이다.

->‘가능했(었)다..’는 지적은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가능했었다고 하면 지금은 가능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오버한 것 같다.

'현존재’냐 ‘현존성’이냐는 물음은 역자도 고민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원문에 Dasein이라고 되어 있고 그것에 충실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원작의 (지금 여기서의) 존재(=현존재) 자체는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현존성’이라는 말은 Daseinshaftigkeit 정도가 될 텐데, 내가 알기로 철학 개념이 아니고 만든 말 같다. 역자가 보기에는 ‘현존성’이라는 말이 이미 번역으로 통용되어 우리 귀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나 추측해 본다.

물론 가장 완벽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제와 마찬가지로 원저가 갖고 있는 현존성, 곧 아우라를 갖지는 못한다. 다만 근접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번역에 대한 불만은 그런 근접에의 욕망이 불가피하게 빚어내는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난하게 읽힐 수도 있는 대목들에 대해 괜한 투정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처럼 끝간 데를 알지 못하는 법. 해서 "사람들이 번역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번역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이를 때까지 이런 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번역비평에서 투정을 하는 건 언제나 좋다. 역자들은 반성하고, 독자들은 차이에 대해 날카로운 감각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번역비평이 번역에서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사태가 되면 이 또한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한두 가지 디테일 상의 지적 때문에 독자들은 번역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고 사상이나 이론 전반에 진력이 나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행여 이 말을 불충분한 번역에 대한 변명으로 읽지 않기를 바란다.) 좀 더 묵직하고 결정적인 오역이나 비문을 지적해 주면 좋겠다. (한 가지 역자로서 이 번역비평에 대한 메타비평을 하자면, 벤야민이라면, 발레리라면 그렇게 썼겠는가 라는 표현은 좀 오버한 것 같다.)

허리우스 2007-12-3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복 마니 받으십시요. 복을 받을 자격이 마니 있으십니다. 그리고 요번 한겨레에 쓰신 글 마지막에 아직도 우리에게는 타는 목마름과 치떠리는 노여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읽고 안구에 습기가 찼습니다. 안습입죠. 벤야민에 관심이 많지만 시간이 없어 읽지 못하고 있는데 찜해 둡니다. 감사....

로쟈 2007-12-31 17:07   좋아요 0 | URL
네, 허리우스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공부는 무엇보다도 시간과의 싸움 같습니다.^^;

주니다 2007-12-3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7년 한해가 벌써 후딱 지나갔네요. 여긴 눈이 엄청 많이 왔어요. 내년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내년에 뵈요~~

로쟈 2007-12-31 20:10   좋아요 0 | URL
서울은 눈구경 좀 했으면 싶습니다.^^; 한해한해 후딱 지나가는 건 이젠 일도 아닌 듯싶어요. 그러니 어여(아시죠?!).^^ 네, 내년에 한번 뵙지요...

lefebvre 2007-12-3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최성만 교수님의 답변은 상당히 징후적(!?)이군요...... 예의 인터뷰에서 느꼈던 그런 포스가...... ㅋㅋㅋ 그나저나 발레리 인용에 관하여 "굳이 해명을 하자면, 벤야민의 원본에 Invention selbst(발명, 구상 자체)라고 되어 있다"라는 말은 좀...... 본문에서는 그렇게 번역하시더라도 각주 같은 걸 달아 확인된 원문과의 차이를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지적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 이거이거 이번에는 발레리 원문을 찾아봐야 하는 건가요? 아놔~ ㅋㅋㅋ

로쟈 2007-12-31 22:01   좋아요 0 | URL
발레리는 그래도 국내에서 찾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Octopus 2007-12-31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갑합니다. 에휴... 번역자를 붙들고 한국어 생 기초부터 하나하나 가르칠 수도 없고. 그야말로 '번역이론'만 있고 번역실행력'이 없는 경우네요. 게다가 왜 그렇게 잔뜩 몰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시를 세워서 글을 쓰시는지.

로쟈 2007-12-31 22:02   좋아요 0 | URL
'번역비평'이란 게 어디 가서도 좋은 소리 못 듣는 분야죠...

퍼그 2007-12-3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직하고 결정적인" 오역이 아니더라도,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쌓이게 되면 책을 계속 읽어나가기가 힘들다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에휴.

새해가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남았네요.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로쟈 2007-12-31 23:14   좋아요 0 | URL
네, 새해 복많이 받아요.^^

tubbath 2022-10-3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의 번역은 자꾸 원문이 궁금해지더군요. 번역물로만 봐도 그렇기, 영문이라도 찾아보니 반의 역이 훨씬 좋아서 저도 그걸로 택했습니다. 역자가 표현한 사소하다는 것은 실은 엄청난 거죠. 나무가 모여 숲이 되지 서로 다른 게 아닌데... 역자의 해명? 변명!이 아쉽습니다. 실력보다는 변명으로 오점을 가리려해서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