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에 관해 글도 쓰고 강의도 해야 하는 터라 손에 든 책은 <김진애가 쓰는 인간의 조건>(웅진지식하우스, 2011)이다. <인생은 의외로 멋지다>(웅진지식하우스, 2005)에 이어서 이 책을 만든 편집자에게 선물받은 책인데, 에디터의 말에 이렇게 적혀 있다. "에디터의 장점 중 하나는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한나 아렌트라는 사상가와 많이 친해졌다. 왜 멋진 사람들 중에 '아렌티안'이 많은지 알 것 같다." 아렌트가 특별히 언급된 건 제목의 '인간의 조건'이 아렌트의 책 <인간의 조건>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신문(11. 11. 12) 인간의 조건 지키며 사는 게 왜 이리도 힘든 것인가

국회의원이 쓴 책이라고 하면 대체로 자기자랑이겠거니 하고 치부하기 쉽다. ‘김진애가 쓰는 인간의 조건’(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은 건축 분야의 전문가이자 지식인이며 민주당 국회의원인 저자의 사유와 자기 성찰이 담긴 책이다.

책에는 두 명의 본보기가 등장한다. 한 명은 책의 제목까지 빌려 쓴 해나 아렌트(1906~1975)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이정희(42) 민주노동당 대표다. 독일의 유대계 정치철학자인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등의 저서를 통해 평생 전체주의의 기원과 악의 평범성을 고발했다.

김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죽기 전에, 이정희 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해 큰 화제가 됐다. 김 의원의 이 말은 이 대표가 대통령감이라는 것뿐 아니라 그가 대통령이 되기란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려던 것이었다고 한다. 변호사를 지내다 정치에 뛰어든 이 대표의 내공은 자신이 할 말을 직접 자신이 쓰는 ‘법조 훈련’을 통해 키워졌다고 김 의원은 분석한다. 그리고 ‘가슴에 불을 안은, 된 사람’이 제대로 된 법조 훈련을 받았을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고 덧붙였다.

국회에는 299개의 대통령 당선 시나리오가 있다는 농담이 있다. 국회의원 숫자가 299명이기 때문이다. 김 의원은 혐오집단인 국회의원이 된 심정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건축가로서 주목받았던 그가 정치를 시작한 동기는 ‘더 좋은 생각을 더 많은 사람이 공유하도록 하자.’는 좋은 정치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17대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18대에 비례대표로 당선된 것도 우연이었다. 당선되었던 한 비례대표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김 의원 앞의 승계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것.

그는 국회에서 전공 분야를 살려 4대강 사업과 뉴타운을 비판하는 전사로 활약하고 있다. 책은 그러나 4대강 사업 비판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진 않는다. 대신 1994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21세기 리더 100인’에 꼽으면서 갑자기 주목받게 된 사연을 얘기한다. 한 번은 전화로, 또 한 번은 찾아온 기자와 인터뷰한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는 김 의원은 그야말로 ‘사건’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기대받는 사람이 되었고,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했고 좋은 채찍이었다고 말한다.(윤창수기자)  

11. 11. 12.    

P.S. 책에는 저자의 롤 모델로 아렌트뿐만 아니라 이정희 의원도 거명되고 있다. 딸아이가 정치가가 될 생각도 있다고 해서 여성 정치인의 책 몇권을 사다준 적이 있는데 <김진애가 쓰는 인간의 조건>도 나보다는 아이에게 더 영감을 줄 만한 책 같다. 내겐 저자가 속해 있는 국회 국토해양위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이고 무슨 문제를 안고 있는지 알게 해준 책이다. 김진애 의원은 국토위에 대해서 겉모습은 '공룡위원회', 속모습은 '이권위원회', 그리고 본색은 '거수기 위원회'라고 적었다. 18대 국회에서 '4대강 사업' 관련으로 국회 차원의 공청회 한번 없었다고 하니 저자의 말대로 믿기지 않는 일이다... 

한편, 올해는 아렌트 입문서가 한꺼번에 여럿 출간된 해이기도 한데, 홍원표 교수의 <아렌트>(한길사, 2011), 사이먼 스위프트의 <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앨피, 2011), 그리고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 등이 거기에 속한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빵가게재습격 2011-11-12 10:01   좋아요 0 | URL
음...괜찮은 기사인데, '해나 아렌트'가 걸리네요. 서울신문 서평 기자는 의외로 책 읽기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실수를 몇 번인가 본 것 같아요. 아렌트 입문서로는 두번째 사이먼 스위프트의 책이 가장 나은게 아닌가 합니다. 아렌트에 관한 글을 쓰신다기에 로쟈님의 새로운 신간소식인가 싶어 살짝 두드려보고 갑니다.^^

로쟈 2011-11-12 10:15   좋아요 0 | URL
'해나'는 외국어표기안에 따른 거에요. '발터 베냐민'처럼. 한겨레에서도 '해나 아렌트'라고 씁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는 방식이에요. 고유명사는 보통명사와는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듯해요...

빵가게재습격 2011-11-12 10:20   좋아요 0 | URL
오? 정말이네요. 전 단순한 실수인가 했는데, 정말로 이중으로 표기가 되어 있네요. 한겨레21에서도 그렇게 쓰여 있고.^^; 할 말을 잃는데요...^^;

PhEAV 2011-11-12 12:44   좋아요 0 | URL
보통 인명은 출생지를 고려하지 않나요? 해나라고 표기하면 출생지가 미국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데… 뭐 반드시 출생지를 고려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게다가 독일로 간주해도 베냐민처럼 '하나 아렌트'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함정일까요 -,.-;;

로쟈 2011-11-13 13:35   좋아요 0 | URL
보통 출생지가 아니라 국적을 고려하는데, 그것도 충분한 이유는 안되구요. '한나 아렌트'라고 고정된 이름을 '해나 아렌트'라고 표기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저로선 백치적 발상으로 보입니다...

yamoo 2011-11-12 17:00   좋아요 0 | URL
김진애씨의 책이 급 땡기는데요~
이 참에 아렌트에 도전해 볼까욤~ 아렌트는 부러 멀리해 왔는뎅~^^;;

로쟈 2011-11-13 13:36   좋아요 0 | URL
네 편하게 읽히는 책이에요.^^
 

어젯밤에 당일배송으로 주문한 책의 하나는 히로세 다카시의 <제1권력 2>(프로메테우스, 2011)이다. 자본권력을 다룬 전작 <제1권력>(프로메테우스, 2010)을 읽을 터라 어떤 내용인지 살펴보지도 않고 바로 주문을 넣었다. 아침에 리뷰가 뜬 걸 보니 러시아의 지배계급과 권력지도에 관해 다룬 책이다. '러시아 이야기'로 분류해도 될 만하다. 마이리스트로 만들어놓으려고 하다가 자세한 리뷰기사가 있길래 기사를 옮겨놓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현재 러시아 지배층 가운데 로마노프 왕가의 후손들은 아직도 최대 이권 집단이라고 지적"이 요지 가운데 하나일 텐데(일종의 족보결정론?), 푸틴도 거기에 해당하는지 읽어봐야겠다... 

    

세계일보(11. 11. 12) 러시아 지배계급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항해 온 것은 빈곤을 낳은 하나하나의 문제들이지,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데올로기가 결코 아니었다. 소련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했다지만, 사실상 그들 지도자는 대부분 귀족계급 내지는 자본주의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이래서야 무슨 실험을 했다고….” 이 책은 이른바 ‘좌파’의 원조격인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이면을 고발하면서, 민중운동을 명분으로 내건 사회주의 진보 지식인들의 본모습을 들춰낸다. 저자가 겨냥한 인물들은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친 칼 마르크스, 민중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자며 국가혁명론을 들고 나선 블라디미르 레닌,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완성하자고 외친 트로츠키, 스탈린 등이다.

우선 16세기 중반부터 러시아를 통치한 로마노프 왕가의 혈연을 따라간다. 이에 열거한 인물들은 죄다 로마노프 왕가와 직계 혹은 모계로 연결돼 있다. 저자는 이들이 권력서클을 이룬 과정, 인민 대중을 수탈하는 과정, 기득권 보호 행태 등을 고증자료를 토대로 비판한다. 특히 민중 봉기를 부추기는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맹점을 통렬히 고발하고 있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으로 유명한 저자는 지난해 ‘제1권력 1’을 펴내 JP모건과 록펠러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거대자본가들이 미국을 좌지우지했던 갖가지 행태들을 열거했다. 지난해 이 책은 출간 직후 일본 공산당 이론가들이 공식 항의하고 반박하는 소동을 빚으면서 30만부 이상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책은 이제껏 전해진 소비에트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종래 인식을 뒤집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종래 ‘좌·우’이념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깨고 ‘러시아혁명(공산주의혁명)은 대체 무엇이었나’라고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이를테면 소비에트 독재를 연 인물 가운데 한 명인 흐루시초프는 로마노프 가문의 대귀족이었다. 이어 이오시프 스탈린, 몰로토프, 미코얀 등의 크렘린 수뇌부는 거의 로마노프 가문과 유대관계 또는 혈연으로 연결된 사실도 밝혀진다.

흐루시초프는 100% 프롤레타리아 출신임을 간판으로 내걸고 소비에트운동에 앞장선 인물. 러시아 정부 공식 문헌에도 도네츠크 탄광에서 일한 노동자로 분명히 명기되어 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러시아 왕가의 일원이었으나,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완수하는 주역으로 면모를 탈색한다. 이렇듯 노동자와 농민이 지배한다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구소련의 최고 권력 집단 ‘볼셰비키 정부’를 구성한 인물들은 대부분 귀족 집안의 후손이거나 그 후광을 업고 있었다. 이런 게 사실이라면 사회주의 이념을 추종하고 있는 국내 진보 사상가들의 이념적 혼돈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금도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혁명의 아버지를 떠받들고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선조는 로마노프 왕가를 추종한 귀족이었다. 레닌의 외조부는 1847년 카잔의 영주였으며 가장 유복한 계급이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자유 기운이 한창 무르익을 때 반체제 인사로 이름을 알린 사하로프. 그는 수소폭탄이라는 인류 최대의 흉기를 스탈린에게 만들어 바친 인물로 묘사된다. 서방에서는 그를 반체제 양심인사의 상징으로 치켜세우곤 했다. 하지만 지금 러시아에서 사하로프를 떠받들거나 존경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보리스 옐친의 금고지기 출신으로, 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구단 첼시의 구단주이자 석유재벌인 아브라모비치 역시 귀족집단 ‘울리가르히’ 중 한 명이다.

저자는 이런 인물들이 움직이는 러시아가 향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도 분명히 적시한다. 양심적 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면서 민중운동 내지 사회주의를 명분으로 한 특권층의 행태를 고발한다. 그는 현재 러시아 지배층 가운데 로마노프 왕가의 후손들은 아직도 최대 이권 집단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로마노프 왕가가 지배한 제정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로 바뀌고, 현대에 와서 다시 제정 러시아로 돌아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지배계급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면서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낭만적 성향의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맹종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국내 사회 운동가들 가운데서도 이런 표리부동의 인물들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공산주의 이념을 내걸고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실험했던 장본인들은 실상 당대의 자본가 내지 귀족 계급 출신이었다. 저자는 로마노프 왕가로 대표되는 러시아 지배계층의 본모습을 고발하면서 현대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정승욱 선임기자)  

11. 11. 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달 책&(400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소셜미디어'가 주제이고 세 권의 책에 대해 간략히 적었다. 주로 언급한 책은 클레이 셔키의 <많아지면 달라진다>(갤리온, 2011)이다.  

책&(11년 11월호) 실시간 소통의 혁명

세계인구 70억 시대가 됐다. 2000년에 60억명을 돌파한 지 11년만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얘기하지만 70억 인구 시대는 ‘지구사’에서 유례가 없는 새로운 시대다. 지난 1750년 세계인구가 8억 명 수준이었고 1950년에 25억 명이었던 걸 고려하면 우리가 얼마나 ‘예외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인구가 많아지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물론 늘어나는 인구만이 사회변화의 동력은 아니다. 새로운 발명과 기술적 진보 또한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는다. 예컨대 최근 10년간 우리의 일상생활과 소통방식을 가장 파격적으로 변화시킨 소셜미디어가 그렇다. 과연 지금 우리 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의 저자인 IT전문가 클레이 셔키는 <많아지면 달라진다>(갤리온)에서 우리 시대 변화의 핵심을 ‘새로운 대중의 탄생’으로 보고 역사적 사례와 견준다. 산업화 초기였던 1720년대 영국의 런던은 도시 전체가 술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도시생활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시름을 달래기 위해 진을 마셔댔기 때문이다. 하나의 도시 현상으로서 ‘진 열풍’은 사람들이 급격한 사회적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이었고 사회 구조 개혁이 진행됨에 따라 잠잠해졌다. 이어서 산업화 시대에서 탈산업화 시대로의 전환기에 사람들이 진 대신에 빠져든 것은 시트콤이다. 우리도 비슷한 경로를 밟고 있지만 서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수명이 늘어나면서 여가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은 이 시간을 텔레비전 시청에 할애했다. 텔레비전 시청은 고독감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사회적 활동을 감소시키고 대인간 접촉을 줄게 만들었다. 미국의 경우 전체 미국인이 일 년 동안 텔레비전 시청에 쓰는 시간은 대략 2000억 시간이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동적 문화소비에 반기를 든 젊은 세대가 등장하면서 또 한 번 새로운 전환이 마련된다.  

클레이 셔키는 이 전환의 두 가지 배경으로 전 세계의 교육받은 인구 사이에서 연간 1조 시간이 여가시간이 생겨난 것과 자신이 관심을 가진 활동을 추구할 수 있게 해주는 공공 미디어가 발명‧확산된 것을 든다. 즉 소셜미디어의 발명과 그것을 적극 활용하는 세대의 등장이 우리 시대를 과거와는 다른 시대로 호명하게 해준다. 텔레비전을 덜 보는 대신에 지금의 젊은 세대는 빠른 대화형 미디어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발견하며 행동한다. 저자는 네 살짜리 딸과 DVD를 보던 친구의 얘기를 들려주는데, 화면을 보던 아이가 갑자기 화면 뒤쪽으로 가 뭔가를 찾더라고 한다. “왜 그러니?”라는 물음에 아이는 “마우스 찾아요.”라고 대답했다. ‘마우스가 없는 화면’은 뭔가 빠진 걸로 간주하는 세대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세대와는 분명 다르게 세상을 지각할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바로 그런 세대를 새로운 대중으로 합쳐놓는다. 그들이 가진 ‘1조 시간’과 ‘인지 잉여’, 곧 ‘남는 머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어쩌면 아직 상상할 수 없는 변화의 문턱에 우리는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소셜미디어 전략 컨설턴트인 제이 베어와 애버 나스룬드는 그러한 변화를 ‘실시간 혁명’이라고 부른다. <실시간혁명>(더숲)에서 저자들은 급변하는 소셜미디어 시대에 기업과 조직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충고한다.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현행 비즈니스 문화의 철저한 개조를 요구하는 이 혁명적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와 기지, 인간화, 소셜미디어의 포용 같은 것들이다. 예컨대 음악가 데이브 캐럴이 유나이티드 항공의 처사를 고발한 유튜브 비디오를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자 그가 가진 기타의 브랜드 회사인 ‘테일러 기타’는 나흘 만에 ‘<유나이티드가 기타를 부수었네>라는 노래에 대한 테일러 기타의 반응’이란 제목의 2분짜리 비디오를 올려서 망가진 기타가 어떻게 수리되는지를 보여주었고 열띤 호응을 얻었다. 적극적인 소셜미디어의 활용이 기업의 이미지를 단시간에 제고시킨 대표적 사례다.   

소셜미디어의 폭발적 확산은 소셜미디어의 ‘소리 없는 혁명’을 학문적 차원의 연구대상으로도 만든다. 설진아 교수의 <소셜미디어와 사회변동>(커뮤니케이션북스)은 소셜미디어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소셜미디어와 사회변동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조명한다. 이미 우리는 여러 차례의 국내외 선거를 통해서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고, 저자 또한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에 주목한다. 문제는 기존의 선거법이 새로운 매체 서비스에 적용하기에는 불합리한 내용이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는 “소셜미디어와 선거법 개정에 대한 사회적 숙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한다. 변화의 물꼬는 제도 개선의 수준을 넘어서 곧 사회구조 변혁에까지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실시간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11. 11. 11.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11-11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2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국사람 2011-11-12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위 내용과는 상관이 없지만 이명박 자서전이 나와서 올립니다.
The Uncharted Path: The Autobiography of Lee Myung-Bak.
http://www.amazon.com/Uncharted-Path-Autobiography-Lee-Myung-Bak/dp/1402262914,
아마존 서평 별5개 3개, 별1개 28개
청와대 자금으로 출판했을텐데 국민세금 엄한데 쓰는 짓 계속하는군요. 자서전을 자기 임기중에 출판하는 미국 대통령은 본 적이 없는데 이 양반은 임기 끝나면 감옥에 가 있을까봐 이러는지.....
욕먹을 짓은 이렇게 골라가며하는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로쟈 2011-11-12 10:18   좋아요 0 | URL
한 '캐릭터'하는 양반이죠. 제목대로 Uncharted Path를 가는 듯해요...
 

격주간 기획회의(30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마감이 지나 편집자의 애를 태우며 보낸 원고인데 당초 쓰려고 했던 책이 너무 두꺼워 다 읽지 못하는 바람에 급하게 따로 읽고 쓴 글이다.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동녘, 2011)과 <한국학의 즐거움>(휴머니스트, 2011)을 나란히 읽고서 백석 시 읽기에 관해서만 적었다.   

기획회의(11. 11. 05) 흰 당나귀와 나타샤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동녘)을 읽었다. 각각 14인의 시인과 철학자를 짝지어놓고 시를 통해 철학을, 철학을 통해 시를 읽는 책이다. 전작인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동녘)을 먼저 읽었기에 이어서 읽었다고 하면 독서의 이유로 자연스럽겠지만, 사실은 예기치 않은 독서였다. 각 분야의 전문가 22인의 글 모음집 <한국학의 즐거움>(휴머니스트)에 실린 강신주의 ‘한국의 사랑’을 읽은 것이 계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답하여 그는 “한국인의 내면을 이해하려면 한국인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란 생각에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꺼낸다. 여인의 이름은 조선권번의 기생이었던 김영한(1916-1999). 사랑에 짝이 없을 수 없으니 그이가 사랑한 남자는 백기행(1912-1995).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였다. ‘김영한과 백기행’이라고 하면 알아보기 힘들겠다. 백기행은 시인 백석(白石)의 본명이고, 그가 김영한에게 붙여준 이름이 ‘자야(子夜)’이다. 해서 강신주가 들려주려는 건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이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28)를 읽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시 말이다. 백석과 자야의 사례로 ‘한국의 사랑’을 읽어내는 저자를 좇아서 백석의 시 읽기를 사례로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에 대한 리뷰를 대신해 보기로 한다.   

 

일단 강신주는 김자야의 회고록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근거로 시의 ‘나타샤’가 자야를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관계를 좀 특이하게 푼다. 시의 마지막 연을 읽어본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특이하다’고 한 건 그가 이 시에서 화자 백석의 욕망 대상이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백석에게 자야는 분열된 존재로 보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타샤가 일본 유학을 다녀왔으며 글쓰기 재주까지 갖춘 지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면, 흰 당나귀는 성적 매력을 풍기는 관능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물론 정신분석적 해석이다. 백석의 의식 속에서 자야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있다면 정작 분열된 건 백석의 의식 자체다. “결국 백석은 있는 그대로의 자야가 아니라 상상 속의 자야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백석은 자야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사랑의 대상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있다. 나타샤가 ‘지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면 흰 당나귀는 ‘관능적인 여성’을 상징한다. 흔한 경우로 지적인 여성과 관능적인 여성이 각기 다른 두 여성이라면 백석의 사랑은 분열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면모가 자야라는 동일한 여성의 속성이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럼에도 강신주는 “이렇게 분열된 의식 속에서 온전한 사랑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고 적는다. 우리는 지적이거나 관능적인 여성, 어느 한쪽만을 사랑하는 건 온전한 사랑이지만 지적이면서 관능적인 여성을 사랑하는 건 온전하기 어려운 사랑인가. 하는 의문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게다가 ‘있는 그대로의 자야’와 ‘상상 속의 자야’는 무엇에 대응하는 것일까. 지적이면서 동시에 관능적인 여성이 ‘있는 그대로의 자야’이고, 그것이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있는 것이 ‘상상 속의 자야’인가. 이것은 특이하면서 좀 예외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다.  

통찰이 없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관능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백석에게 있어 자야는 나타샤의 측면보다 기생의 측면으로 더 강하게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강신주는 적는다. 어떤 관능성인가. 이에 대한 설명은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에 실린 백석 편에서 보충적으로 읽을 수 있다. 백석이 감각에 얼마나 민감했던 시인이었던가를 얘기하면서 저자는 특히 이 시의 의성어들에 주목한다. ‘푹푹’과 ‘응앙응앙’ 같은 의성어이다. “‘푹푹’은 눈이 내리는 소리인 동시에 성교를 연상시키는 의성어이고, ‘응앙응앙’도 하얀 눈을 만지듯이 나타샤를 애무하는 백석의 손길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의성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의 화자가 혹은 백석이 푹푹 나리는 밤눈 속에서 그런 연상을 떠올릴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시의 지배적 분위기는 관능적 에로티시즘보다는 ‘쓸쓸함’에 더 가깝다. 첫 연에서 ‘가난한 나’와 ‘아름다운 나타샤’의 사랑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라는 걸 암시한 다음에 백석은 둘째 연에서 이렇게 쓴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시의 나머지 대목은 그렇게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는 화자의 취기가 불러낸 환영이다. 만약 나타샤와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 공간은 ‘여기’가 아니라 ‘어데서’이다. 그러니 그 사랑의 시제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다. 저자가 이 시의 성격을 “스물일곱 젊은 시인이 겪고 있는 사랑의 열병이 차가운 눈발과 대조되어 낙인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는 애절한 시”라고 규정한 대로다. 하지만 거기서도 ‘푹푹’ 눈이 내리는 소리가 성교를 연상시키는 의성어이기도 하다면 ‘사랑의 열병’과 ‘차가운 눈발’의 대립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애절함과 쓸쓸함만이 묻어나는 시는 또 아니다. 그것은 ‘나는 나타샤를 사랑한다’는 핵심문형이 어떻게 변주돼 나타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1연에서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라고 ‘나’와 ‘나타샤’가 행으로 분리돼 있다. 2연에서는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나’라는 주어가 빠져 있다. 3연에서는 “나타샤와 나는”이 주어로 붙어 있지만 ‘사랑’이 빠져 있다. 4연에 와서야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로 온전한 문형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마지막 5연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라는 표현을 통해 환상을 통해서일망정 두 사람의 사랑은 ‘완성’된다. 

‘철학적 시읽기’는 보통 시를 통째로 파악하기에 이러한 ‘내러티브’에는 덜 주목한다. 대신에 저자는 백석의 시에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란 오감으로 세계를 느꼈던 시인의 ‘감각의 풍성함’을 읽어내며 이것을 일본의 철학자 나카무라 유지로의 <공통감각론>과 연관 짓는다. 시와 철학을 동시에 읽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지적인 여성(나타샤)과 관능적인 여성(흰 당나귀)을 동시에 사랑하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11. 11. 0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11-09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9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학은 인문학의 무덤인가

이번주부터 격주로 주간경향에 북리뷰를 싣는다. 첫번째 책으로 고른 것은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 이미 소개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서평에서는 나대로 중요하다 싶은 대목을 간추렸다.    

주간경향(11. 11. 15) 인문학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 

“인문학의 미래가 인류의 미래다!” 미국의 저명한 인문학자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미래>에서 던지는 메시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예언이나 확신이 아니라 희망이다. 이 희망이 인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인문학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진단과 진지한 자기반성을 통해서 제기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물음은 자연스레 인문학이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포함한다. 문제의 발단은 한 세대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인문학은 가장 명망 있는 학문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은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원자탄을 발명하고 달 착륙 우주선까지 쏘아올린 자연과학이 급부상하여 학문의 패권을 차지한다. 가장 높은 명성과 경제적 후원을 누리게 됐다는 뜻이다. 자연과학에 뒤이어 사회과학 또한 ‘과학’이라는 이름에 얹혀 갔고, 일부 인문학자들조차도 ‘인문과학자’이고 싶어 했다. 이렇듯 인문학을 둘러싼 학문 지형의 변화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질문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경우 학문의 판도 변화와 함께 인문학에 들이닥친 또 다른 문제는 1970년께부터 갑자기 인문학 박사 학위자들이 빠지게 된 구직난이다. 카우프만은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지목하는데, 첫째는 베이비붐 시대의 출산율이 주춤하면서 대학의 성장 또한 정체돼 버린 것이고, 둘째는 교수직이 1970년대를 기점으로 과거 25년간 젊은 사람들로 채워짐으로써 퇴임으로 인한 공석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 것이다. 요컨대 인구 문제와 인력 수급 문제가 ‘인문학의 위기’를 낳았다.  

대학의 팽창과 함께 미국에서는 1950년에서 1970년까지 약 20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인문학 대학원에 진학했고 이들은 학위를 채 끝내기도 전에 대학에서 자리를 제안받곤 했다. 교원에 대한 수요가 전례 없이 증가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인문학에 대한 가수요가 발생했다. 미국에서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 중반까지도 지속되었고 결국은 철학분야에서만 2000여 명의 박사학위자가 교직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예술과 인문학 분야의 박사학위자 80% 이상이 자기 전공분야에서 직업을 찾을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한 것이다.  

저자는 “이런 문제는 전 세계로 확산됐다”고 덧붙이는데 사실 더듬어보면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의 경우는 미국보다 딱 한 세대 뒤인 1980년에서 2000년까지 대학이 우후죽순으로 증가했고 대학 진학율이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라섰다. 인문학 교원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대학원 진학자도 증가했고 상당수는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에 교원으로 임용됐다. 하지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출산율 저하와 함께 대학의 성장이 한계에 도달하고 인문학 전공자는 수요에 비해 초과 배출됐다. 카우프만의 책이 처음 출간된 게 1977년이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에도 적실성을 갖는다면 이런 공통적인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 이렇다고 하면 해법은 무엇인가. 특이하게도 저자는 인문학자의 유형론에서 문제의 단초와 해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인문학자는 그 마음가짐(에토스)에 따라 통찰가형과 사변가형, 저널리스트형과 소크라테스형으로 나뉜다. 각각은 일장일단이 있으므로 문제는 어느 한 가지 유형으로 편중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학의 교수들은 점점 사변가가 되어갔고 한 시대의 신념과 도덕을 엄밀하게 따지면서 문제 삼는 소크라테스적 에토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소크라테스형의 실종은 매카시즘의 광풍과도 관련이 있는데, 당시에는 일반 여론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보다 각자의 좁은 전공분야만 파는 사변가 역할에 안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대학의 인문학 연구마저도 전문화를 지향하면서 ‘숲’이 아닌 ‘잎사귀’ 연구에 치중하고 있는 게 전공논문 편수로 교수의 업적을 평가하는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것이 “미국의 낙선한 부통령의 비서의 아버지에 관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카우프만은 꼬집는다. 사변가들만이 득실거린다면 인문학의 미래는 없다. 인문학이 인류의 미래가 되기 위해선 인문학자들의 마음가짐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는 게 카우프만의 주장이다.  

11. 11. 07. 

P.S. 짐작엔 분량상 지면에서는 세 문장이 빠졌는데, 그중 하나는 "대학원 진학자들 가운데 “인문학이 의학이나 다른 유용한 전문지식들과 달리 별 쓸모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이다. '인문학 위기'가 실상은 '인문학자의 위기'라고 할 때 음미해볼 대목이다. 참고로 카우프만은 대학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미처 대비하지 못한 것도 사변가형만 넘쳐나기 때문이라고 질타한다. 그러한 현실이 바뀔 수 있을까. 미국 대학은 과연 30년 전과는 사정이 달라졌는가. 선뜻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11-08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9 0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08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우프만은 아렌트가 학자가 아니고 저널리스트라며 평가절하하는데 로쟈 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로쟈 2011-11-09 07:48   좋아요 0 | URL
아렌트는 원래 저널리스트활동을 했으니까요. 한데, 카우프만의 분류대로라면 최소한 '통찰가'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좀 인색한 평가에요. 요즘에 아렌트 전공자는 있어도 카우프만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게 나름의 역사적 평가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09 16:12   좋아요 0 | URL
하이데거의 나치전력 때문에 그와 사귄 아렌트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 정서가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물론 이런 식의 평가가 올바르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요.

로쟈 2011-11-11 09:32   좋아요 0 | URL
비판의 논거가 생각보다 자세하지 않아서 '사감'이 얹힌 게 아닐까 싶은 거죠. 하이데거의 전집이 나오는 거에 대해서도 불만스러워하고...

노이에자이트 2011-11-11 16:11   좋아요 0 | URL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굉장한 찬반논쟁을 일으켰고...아마 이런 일 때문에 카우프만은 아렌트가 센세이셔날한 것을 노리는 사람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