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의 <평등이 답이다>(이후, 2012)이다. '왜 평등한 사회는 늘 바람직한가?'가 부제. 저자 리처드 윌킨슨은 건강의 사회결정에 고나한 연구로 유명한데, 국내엔 이미 <건강 불평등>(이음, 2011)과 <평등해야 건강하다>(후마니타스, 2008)이 소개돼 있다. 평등을 주제로 한 책들이 늘어난 듯싶어서 리스트로 모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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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이 답이다- 왜 평등한 사회는 늘 바람직한가?
리처드 윌킨슨 & 케이트 피킷 지음, 전재웅 옮김 / 이후 / 2012년 2월
21,000원 → 18,9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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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평등해야 건강하다-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3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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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한국 건강불평등- 사회의제화를 위한 국민보고서
이창곤 지음 / 밈 / 2007년 9월
12,500원 → 11,250원(10%할인) / 마일리지 6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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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불평등- 무엇이 인간을 병들게 하는가?
리처드 윌킨슨 지음, 손한경 옮김 / 이음 / 2011년 12월
8,800원 → 7,920원(10%할인) / 마일리지 44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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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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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낮에 몇가지 아이템을 두고 고심하다가 영화 <공룡시대> 이야기를 단서로 삼아서 자유주의적 문화주의에 대해 적었다. 아이가 내일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러간다는 말에 엊그제 한겨레문화센터의 지젝 강의에서 언급한 내용이 떠올라서다.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에 <공룡시대>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다.  

 

 

 

경향신문(12. 02. 17) [문화와 세상]수상한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종업식을 하고 봄방학에 들어간 초등학생 딸아이의 첫 일정이 3D 애니메이션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을 보러가는 거라고 한다. 토종 애니메이션으로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이 영화는 교육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만족시킨 작품이라니 무얼 더 바라겠는가.

 



물론 어떤 교육성인지 따지고 들면 문제는 조금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젠 옛날 영화라고 해야겠지만 스필버그 감독이 기획한 <공룡시대>(1988) 같은 경우가 그렇다. 어미를 잃은 새끼 공룡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여정을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한데 이 영화를 두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패권주의적인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좀 거창한가? 패권주의적이란 말은 알다시피 지배적이란 뜻이니 제쳐놓으면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주의다. 그게 뭐가 나쁘다는 말일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힘과 덩치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태도다. <공룡시대>에서는 덩치 크고 못된 공룡들이 부르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들어 있다. “덩치가 크면 모두 밀어버릴 수 있지. 덩치가 크면 세상 살기가 편해.” 덩치가 크고 힘이 세기 때문에 규칙을 어겨도 되고, 작고 무력한 동물들을 맘대로 짓밟을 수도 있다는 게 큰 공룡들의 생각이다. 미국 사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선 떠올리게 되는 건 유사 공룡사회로서 한국사회다. 갖은 권력 남용과 부정 의혹 등에도 불구하고 법망을 피해가는 권력자들과 자잘한 사업에까지 영역을 확장해가면서 덩치만 불려가는 재벌기업들의 행보는 우리가 아직 ‘선사시대의 땅’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란 생각마저 들게 한다. <공룡시대>의 원제는 바로 ‘선사시대의 땅’(The land before time)이다.

 

 

물론 <공룡시대>의 메시지는 패권주의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큰 공룡들에게 시달리는 작은 공룡들은 큰 공룡들의 노래에 이렇게 답한다. “세상을 이루려면 모든 종류가 다 필요해. 키 작은 놈, 키 큰 놈, 덩치 큰 놈, 덩치 작은 놈.” 한마디로 관용적 포용주의다.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좀 더 재미있는 삶을 위해서는 똑똑한 놈도 필요하고 멍청한 놈도 필요하고 하여간 모든 종류가 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소위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다. 서로 다르지만 그런 차이 속에서도 협력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문제는 이런 믿음이 사회적 적대관계를 배제하거나 은폐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는 ‘수직적 적대’를 ‘수평적 차이’로 대체한다. 수직적 적대란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이 있는 현실을 가리킨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있고 이 관계가 고착적일 때, 그것을 수직적 적대관계라고 부른다.

<공룡시대>에서 선량한 공룡들은 그런 적대를 수평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차이 정도로 순화시킨다. 하지만 과연 잡아먹는 공룡과 잡아먹히는 공룡 간의 차이가 점이 있는 공룡과 없는 공룡 간의 차이 정도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일까. 고문 경찰과 고문 피해자가 다양성을 예찬하며 서로 사이좋게 합창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도 되는 것일까.

우리 ‘선량한’ 공룡들의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는 그런 점에서 미심쩍다. 패권주의에 맞서는 듯싶지만, 사회적 불평등을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포용하고 계속 보존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포용적 태도에 앞서야 하는 것은 ‘못된 종류들’에 대한 불관용이다. 상생의 전제조건은 “좋은 게 좋은 거지”가 아니라 과오와 기만에 대한 냉정한 심판과 척결이다. ‘한반도의 공룡시대’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 궁금하다.

12.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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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에 건네받은 책은 장동석의 <살아있는 도서관>(현암사, 2012)이다. '천천히 오래도록 책과 공부를 탐한 한국의 지성 23인, 그 앎과 삶의 여정'이 다소 긴 부제이고, 저자가 <기독교사상>에 연재한 인터뷰 코너 '이 사람의 서가 그리고 삶'을 단행본으로 다듬어서 펴낸 책이다. 기억엔 그 코너의 거의 마지막 인터뷰이가 나였다. 그래서 '23인'의 말석에 자리하게 됐는데, 저자는 인터뷰의 제목을 "신은 인간에게 책을 읽을 자유를 주셨다"로 잡았다.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에서 가져온 것으로 인터뷰도 그 책의 출간을 계기로 이루어졌었다. 기념삼아 책의 일부를 발췌해놓는다(인터뷰 내용을 저자가 재구성한 것이다).  

 

 

(...)

 

『형이상학 입문』이 던져준 숙제

이현우 교수는 스스로를 “문학전체주의자, 문학우월주의자, 문학극대주의자”라고 소개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세상사 돌아가는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능력이 닿는 한 모든 학문과 지식을 흡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인문학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문학 역시 인간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결국 문학은 다양한 영역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겸손한 문학주의’를 이현우 교수는 경계한다. 문학이 사회적 책임과는 무관한, 아울러 우리 생활과도 거리를 둔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이는 “러시아 문학이 대체로 그런 편인데, 그래서인지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영혼 구원에 대한 진지한 탐구에 마음이 간다”고 말했다. 그래서 “문학 전공자인데도 책은 다양하게 읽으시네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어떤 때는 정색을 하고 “문학이 전부인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현우 교수는 1994년 즈음에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을 자극적으로 읽었다. 투박하게 이야기하면 “왜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질문 하나로 한 권의 책을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인간이 그런 질문을 던지는 존재구나”라는 인식에 크게 고무되었다. 이것은 인간만이 묻는 고유한 질문으로, 인간은 특권적 물음을 갖는 존재다. “하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없는 듯하다”며 이 교수는 미소 지었다. 단지 답을 찾지 못해 시름시름 앓거나, 질문 자체에 고양되는 삶을 살 뿐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존재의 물음이 언어와 관계있다는 사실에 이현우 교수는 놀랐다. 여기서 언어는 그리스 기원의 언어로 인도유럽어족만이 갖는 ‘존재동사삼인칭단수형’에 관한 질문인데 우리말은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이다. 그래서 우리 철학에서 존재의 질문, 존재의 사유는 언어의 구속성과 제약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교수는 “형이상학적 질문이 언어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면서도 “하이데거 철학에서 언어 구속성 문제에 국내에선 사유가 부족한 듯해 아쉽다”고 했다.

 

사실 존재의 문제와 언어와의 관계성에 천착하는 책은 국내에 드물다. 하이데거 전공자들도 “하이데거가 얼마나 대단한가”라는 이야기만 할 뿐이며, 보편적 하이데거만을 이야기한다. 하이데거 철학의 힘과 깊이는 인정하지만 언어 문제가 극복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유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물음임에도 간과되고 있는 현실이 이현우 교수로서는 아쉽다.

 

 

 

책이 인간보다 위대하다

러시아 문학 전공자로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비중은 그이에게 남다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도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읽어볼 것을 권하는 목록 가운데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처녀작이면서 당시 최대 비평가였던 벨린스키로부터 극찬을 받아 작가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된 작품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작품. 이현우 교수는 한 인터넷 서점의 추천도서 코너에 이 작품을 소개하면서 “세상 모든 고민을 다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라고 소개했다. 이어지는 추천사가 재미나다. 

책을 가방에 넣는 순간, 당신은 그 고민들과 동행하는 것이 되고, 책을 펼쳐드는 순간 그 고민에 머리를 맞대는 것이 된다. 고민하지 않으려는 인간이라면 제일 먼저 내다버려야 할 책.

고민하는 인간, 다시 말하면 진정한 삶의 방향성을 묻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꼭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책을 읽을 자유』에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확장시키고 있다. 음미할수록 고개가 주억거려지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책을 읽을 자유였다. 그리고 분명 책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나는 가끔 책이 인간보다 위대해 보인다. 

(...)

 

12. 02. 15.

 

 

 

P.S.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문예출판사, 1994)은 현재 절판된 상태다. 다른 장소에 보관해오던 책인데, 오늘 몇몇 책들을 챙기러 갔다가 눈에 띄기에 가져다 지금 책상 위에 놓았다. 감회가 없지 않다. 하이데거 전집 제40권에 해당하는 책으로 최근에 나온 책으론 <근본개념들>(길, 2012)과 성격이 비슷하다. 이 책은 전집 제51권을 옮긴 것이다. 흠, 갑자기 <존재와 시간>을 완독하고 싶어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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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강의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어제오늘 주문한 책들이 와 있는데(사실 휴일을 빼곤 거의 매일 책들이 온다. 거의 매일 주문한다는 뜻이다!) 그중 하나는 기획회의(313호)다. '철학자 강신주' 특집에서 총론을 맡아 쓴 바 있다. 그걸 옮겨놓는다. 페이퍼 제목의 '적정인문학'이란 말은 '적정기술'에 빗대 만든 신조어다. 글의 제목과 소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기획회의(12. 02. 05) 인문학은 '사랑'이다

 

‘강신주와 인문저자’가 이번 특집에서 내게 맡겨진 꼭지다. 인문서의 동향에 조금만 밝은 독자라면 지난해 국내 인문저자로서 강신주의 두드러진 활약을 놓치지 않을 수 없다. 관계자에게서 들으니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인문분야 신간으로서 최대 베스트셀러였다(물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뿐인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의 후속작으로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도 출간했고, ‘제작백가의 귀환’ 시리즈의 첫 두 권 <철학의 시대>와 <관중과 공자>도 숨 가쁘게 펴냈다. 아니 숨이 가쁜 건 옆에서 지켜보는 독자의 몫이고, 그의 걸음은 더 빨라질 기세다. 유행하는 말로 ‘폭풍집필’ 모드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강신주와 인문저자’란 제목은 바로 그런 상황을 시각으로 재현하고 있는 듯싶다. 강신주가 앞서가고 다른 인문저자들이 뒤따라가는 현재의 상황 말이다(강신주 VS 인문저자들). 바야흐로 강신주가 대세다. 그는 편집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인문저자이면서 ‘우리시대 대표 인문학자’이다. 그의 비결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 인문저자와 인문독자, 인문편집자를 두루 묶어서 일단은 ‘우리’라고 해보자.   

 

 

 

그의 순정한 인문학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니 강신주와의 첫 만남은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부터였다. 2004년에 나온 책이지만 나는 몇 년 뒤에 읽었다. 일단 노자를 ‘제국의 형이상학자’로 읽는 그의 시각이 흥미로웠다. 과문한 탓에 나도 노자하면, 장자와 묶어서 ‘무위자연의 철학자’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1학년 때 <장자>를 읽고서 크게 감흥을 얻었던 터라 장자를 전공한 저자에게서 모종의 친밀감을 느끼기도 했다. 통념과 다르게 그는 단호하게 ‘노자와 장자’ 아니라 ‘노자 VS 장자’라고 주장했는데, 상당히 파격적이고 신선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장자의 철학>도 구하고 ‘지식인 마을’ 시리즈의 <장자 & 노자>도 연이어 읽었다. 그의 <장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태학사의 ‘중국철학 해석과 비판’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것인데, 강신주는 그 시리즈의 공동 편집위원이었다. 그는 아직 학계 안에 있었다. 그래서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장자로 박사학위를 받은 ‘동양철학자’라는 게 나의 머릿속 그의 분류 항목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양철학 전공자라고만 한정하기에는 좀 특이했다. 서양철학, 특히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에 대한 참조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도가철학회에서 엮은 <노자에서 데리다까지> 같은 책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놓고 장자와 들뢰즈를 왕복하는 동양철학자는 적어도 내 기억엔 없었다. 그래서 특이하다 싶었고, 동양철학이란 말이 은연중에 풍기는 ‘엄숙주의’와는 잘 맞지 않아 보였다. 그는 활달했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인상을 더 강하게 각인시켜준 책이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었다. 그는 장자와 함께 모든 차이를 횡단하고자 했고 그것은 ‘즐거운 모험’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범속한 범주들의 칸막이는 더 이상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대학 아카데미즘의 속박에서도 벗어났다. 그는 ‘동양철학자’가 아니라 그냥 ‘철학자’이고자 했다. 그냥 ‘인문학자’이고자 했다. 그리고 대학 강의실 바깥의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자 했다. 왜인가? 인문학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다

 

강신주는 <장자 읽기의 즐거움: 망각과 자유>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적었다. “장자는 우리에게 인문학의 정신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즐거운 삶을 긍정하고 옹호하려는 정신에서만 가능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인문학의 위기란 결국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위기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이렇듯 인문학의 위기를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위기’로 인식하는 태도는 그것을 인문학자들의 위기로 간주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그에겐 인문학자들의 생계보다도 ‘인간의 사랑과 연대’를 회복하는 일이 더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로 간주된다. 물론 그런 대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인문학자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강신주는 실제로 그걸 믿는다. 그리고 실천한다. “나는 장자의 정신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란 바람은 거기에서 나온다. ‘순정한 인문학’이란 게 있다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인문학의 정신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말은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인간이란 말이 추상적인 만큼 그런 주장 자체도 추상적인 구호에 그칠 수 있다. “여러분, 사랑해요!”란 말은 연예인들의 상투어가 아닌가.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말도 상투어의 혐의에서 아주 벗어나는 건 아니다. 순정한 인문학자라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더 구체적인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강신주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상처받기 쉬움’이다. 대학 바깥의 대중강연 활동을 통해서 인문학자의 자리와 역할을 새롭게 찾아간 그는 무엇이 사람들을 인문학으로 이끄는지 성찰한다. 삶에 대한 고민과 상처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지킴이를 자임하고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통해서 인문학 카운슬러로 나선 것은 그런 이들에 대한 고려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감성적 소통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보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를 먼저 고려한다. 우리가 상대를 눈앞에 두고 대화를 나눌 때, 우선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이 상대방의 표정이고 마음상태인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가급적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춰야 함은 물론이다. 그게 대화니까. 강신주에게 철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 건넴’이며 대화의 기술이다. 


<철학의 필요한 시간>에서 그는 처음 어떻게 말을 건넸던가. “지금까지 저는 수많은 유리병편지를 받았습니다. 발신자는 스피노자, 장자, 나가르주나, 원효 등과 같은 철학자였습니다. 매번 편지를 받아 펼쳐볼 때마다 저의 고독과 외로움은 경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저는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철학을 통해서, 많은 철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외로움을 견뎌왔다는 것이 그의 경험담이다. 그는 그렇게 전달받은 행운을 ‘유리병’에 담아 이젠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고 싶어 한다. “가끔 저의 책들이 서점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보곤 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저의 유리병편지를 꺼내 읽어볼까요?” 이런 것이 말하자면 그의 순정한 인문학이 갖는 감성코드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강신주를 ‘소통의 인문학자’라고 불러도 좋겠다. 아니, 이건 뒷북이다.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가 그의 박사학위논문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의 순정한 인문학적 태도나 감성코드는 어떤 전환이나 각성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기원을 갖고 있다. 아예, 장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자>에서 그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대목을 보자. “도(道)는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된 것이다.” 이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 강신주는 등산 애호가답게 등산로를 예로 든다. 깊은 산중에 난 구불구불한 산길이 애초에 길이었을 리 만무하다. 그 길은 무수한 사람들이 걸어 다녔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렇듯 장자에게서 ‘도’는 ‘관계의 흔적’이자 ‘소통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 이전에, 소통 이전에 도라는 건 없다. 강신주가 관계를 만들면서 소통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가 장자를 통해서 얻은 깨달음의 실천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컨대 인문학적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한 사례가 강신주 인문학이다.  
 

 

 

고민을 덜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주는

장자에 관한 책들에 이어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부터 ‘제자백가의 귀환’ 시리즈로 이어지는 그의 빠르고 너른 행보에 대해서는 이번 특집에서 따로 다뤄질 것이기에 나로선 특별히 <철학, 삶을 만나다>에 주목하고 싶다. 2006년에 나왔으니 그의 초기작이면서 강신주란 이름을 조금씩 유포시킨 책이다. 나는 입소문만 듣고 있다가 몇 년 뒤에나 구입을 하고 이후에도 그냥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철학과 삶의 ‘만남’을 주선한다는 책들, 빳빳한 철학을 좀 부드럽게 다림질해준다는 책들이 한때 유행하기도 해서 ‘그렇고 그런 책’ 가운데 하나로 치부했었다.


한데 다시 펴본 이 책에 강신주의 ‘오래된 미래’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놀랐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의 소통과정에서 겪은 당혹스런 경험을 이야기한 다음에 그는 이런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제 이야기가 농담이 되느냐 진담이 되느냐는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물론 장자의 “길은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다(道行之而成)”를 다시 반복해서 진술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만남’이란 화두이고, ‘타자와의 만남’이란 심급이다. 그런 관점을 조금 연장해서 말하자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인문학자들이 아무리 정의를 내려 봐야 그것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적어도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인문학이라면, 대중과의 만남 이전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한번 찍힌 발자국일 따름이지 아직 길이 될 수 없다. 사건이 될 수 없다. 그것이 길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이런 논리를 가장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는, 아니 체득하고 있는 인문저자가 강신주이다. 이미 <철학, 삶을 만나다>에서부터 그는 두 가지 만남을 꿈꾸고 기획했다. 하나는 철학과 삶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들(‘여러분’)과의 만남이다. 거기에 더 보태자면, 그의 철학 또한 만남들의 주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단 ‘동서양 철학이 모든 것’이란 부제 아래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자들을 불러다 맞세운 <철학 VS 철학>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까지 그의 책 대부분이 만남의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이 만남들은 물론 주선자의 속 깊은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각각을 따로따로 대면했을 때 보지 못한 부분들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더 편안하게 합석하여 이들이 대화와 논쟁, 혹은 밀어에 귀 기울이게 해준다. 그래도 만남의 자리가 어색하다 싶으면, 주선자가 아예 노골적으로 나서기도 한다.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 겁니다.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 같은 물음을 친근하면서도 자연스레 던질 수 있는 인문저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로선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와 <철학카페에서 시읽기>의 저자 김용규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동서양 철학 전공자로서 인문학 대중화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저자들이다.

 

 


‘적정기술’이란 말이 있다. 원래는 에른스트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1965)라는 책에서 ‘중간기술’이란 개념으로 처음 소개했다고 하는데, 첨단기술과 토속기술 사이를 가리킨다. 슈마허는 서구에서 필요한 기술과 달리 빈곤국의 자원에 필요에 적합하게 소규모이면서도 간단하고 돈이 적게 드는 기술을 중간기술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경제적인 기술이란 뜻으로 확장됐다. 이 중간기술, 혹은 대안기술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더 널리 쓰이게 된 게 적정기술이다. “적정기술은 기술이 아닌 인간의 진보에 가치를 두는 과학기술을 총칭한다.”(김정태‧홍성욱,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이 중간기술이나 적정기술이란 개념을 인문학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중간인문학 혹은 적정인문학. 그간에 ‘인문학 대중화’나 ‘대중인문학’이란 말이 ‘본격인문학’이나 ‘고급인문학’에 견주어 부당하게 폄하되거나 오해된 경우가 많았다. ‘대중 VS 엘리트’라는 대립적 구도의 산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 우리의 고민을 덜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인문학을 ‘중간인문학’ 혹은 ‘적정인문학’이라고 부르게 되면 좀더 상생적인 구도를 만들어볼 수 있을 듯싶다. 우리에겐 ‘첨단인문학’뿐만 아니라 ‘적정인문학’도 필요하다고 말이다. 강신주 인문학은 그 적정인문학의 유력한 사례다. 인문학을 위한 인문학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인문학으로서 적정인문학이 더 다양해지고 더 풍성해지길 기대한다.

 

12.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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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나온 가장 반가운 책은 재출간된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의 기억>(한길사, 2012)과 서인범 교수의 <명대의 운하길을 걷다>(한길사, 2012)이다. 브로델의 책은 품절됐다가 다시 나온 것이라, 서인범 교수의 책은 한창 명대사에 꽂혀 있는 터라 생각할 것도 없이 주문을 넣었다. 그렇게 주저없이 구입한 책에는 새로 번역된 <일반언어학 강의>(지만지, 2012)와 <초현실주의 선언>(미메시스, 2012)도 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이 두 권에 대해서만 컬렉터의 소감을 간단히 적는다.

 

 

먼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번에 처음 번역된 게 아니다. 역자 김현권 교수가 해설에서 적시한 대로 오원교본(형설출판사, 1973)과 최승언본(민음사, 1990)이 나와 있는 상태다. 오원교본은 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지만 최승언본은 아직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번역본이다. 개인적으론 번역용어 등에서 아쉬움을 갖고 있던 터라 이번에 대안이 될 만한 번역본이 나온 게 반갑다. 역자는 이미 발췌본 <일반언어학 강의>(지만지, 2009)를 펴내면서 완역본 출간을 예고한지라 나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아쉬운 것은 불어본의 편집자 마우로의 주해는 빠져 있다는 점. 이에 대해서는 역자 스스로도 이렇게 양해를 구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마우로(T. de Mauro)의 주해를 덧붙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본문의 분량만큼이나 많고, 다양한 원어 인용문의 번역에 시간이 다소 걸리기 때문이다.(543쪽)

그 주해를 빼고도 번역본은 본문만 477쪽이니까(해설까지 포함하면 545쪽) 주해를 포함하면 800쪽이 넘어간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쉽게 엄두를 내진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그 주해까지 포함한 '완벽한' <일반언어학 강의>를 구경할 수 있으면 좋겠다(편하게 구할 수 있는 영역본에도 주해는 빠져 있다).

 

 

 

<일반언어학 강의>와 같이 참고할 수 있는 책으론 <일반언어학 노트>(인간사랑, 2007)도 있다. 더불어 소쉬르의 생애와 그의 언어학에 대해선 김방한 선생의 <소쉬르>(민음사, 1998/2010)가 있다. 영어권의 입문서로는 조너선 컬러의 <소쉬르>(시공사, 1998)가 소개됐었다. 분량 대비로는 가장 요긴한 책이다.

 

 

불문학자 황현산 교수가 옮긴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도 예전에 <다다/쉬르레알리슴 선언>(문학과지성사, 1996)에 포함돼 일부가 번역된 바 있다. 이번에 나온 번역본에는 <초현실주의 제2선언>과 <초현실주의 제3선언 여부에 붙이는 전언>, 그리고 관련자료까지 모두 번역된 데다가 자세한 해설까지 첨부돼 있어서 더없이 유익한 초현실주의 자료집이 됐다. 시에서건 미술에서건 초현실주의를 이해하고자 할 때 제일 먼저 참고할 만한 책이 나온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초현실주의 관련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은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아트북스, 2005)인데, 포스터는 초현실주의론의 두 가지 유형으로 앙드레 브르통과 발터 벤야민을 든다. 벤야민의 <초현실주의>도 번역돼 있기에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와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초현실주의운동의 맥락에 대해선 <전후 유럽문학의 변화와 실험>(웅진지식하우스, 2011)도 참고할 수 있다...

 

12.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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