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빅토르 펠레빈(빅또르 뻴레빈)의 소설 <오몬 라>(고즈윈, 2012)가 번역돼 나왔다. 1992년에 나온 책이니 소련 해체 직후에 출간됐던 작품. 러시아에서야 워낙 유명한 작가이고 미국 잡지 '뉴요커'에서도 '세계의 젊은 작가 6인'의 한 사람으로 꼽은 적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는 작가다.

 

 

아마도 <공포의 헬멧>(문학동네, 2006) 정도를 읽은 독자가 있을까(실은 나도 아직 읽지 않은 책이지만). 그것도 작가보다는 출판사 때문에 고른 독자가 더 많을 것이다. 사실 <오몬 라>는 이미 <달의 뒤통수>(경남대출판부, 2000)란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다. '포스트모던한' 번역으로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본문보다 제목과 표지가 말해주는 책이었다. 새로 번역된 <오몬 라>의 책소개에 따르면 이런 내용의 소설이다.

 

 

막연히 '하늘에 대한 동경'에서부터 시작한 주인공 오몬의 어린 시절 꿈은 차차 '전투기 비행사'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다 우연히 '국민경제 달성 박람회장'에서 우주비행사가 그려진 모자이크화를 본 날, '우주비행사가 되어 달로 날아가고 싶은' 꿈을 가진 또래 친구 미쪽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우주비행사'에 대한 꿈을 본격적으로 키워 나간다. 이 소설은 일견, 우주여행과 달에 대한 순수한 동경을 품은 소년이 우주비행사가 되기까지의 역경과 시련을 다룬 성장소설 같아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이 살고 있는 시공간은 한 개인의 꿈이, 그리고 그 개인의 성장과 인생 이야기가 오롯이 그 개인의 서사로 포괄될 수 있는 녹록한 시공간이 아니었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위세를 떨치던 1960년대 쏘련, 그곳에서는 국가권력과 군부의 가이드라인과 추상적인 구호와 영웅화 작업 등으로 유지되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사생활은 물론 운명까지도 공공연히 침식하며, 그러한 침윤으로 인한 상흔을 '숭고한 시대적 과업'이라고 대중에게 주입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 분위기에서 주인공 오몬과 그의 친구 미쪽이 어린 시절부터 품은 '우주비행사 꿈'은 애초부터 개인의 순수한 꿈으로 남을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상황은 '소박했던' 꿈에 '영웅적 위업'이라는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지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일그러진다.

역자인 최건영 교수에 따르면, 러시아 환상문학의 계보에도 속하는 펠레빈은 고골이나 불가코프, 그리고 스트루가츠키(스뜨루가츠끼) 형제의 뒤를 잇는 작가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열린책들)의 저자가 스트루가츠키 형제다.

 

 

 

작가 자신은 '터보 리얼리즘'이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1992년 러시아 SF대회에서 그 자신이 명명한 용어라고. 호프만, 카프카, 고골, 불가코프, 마르케스 등의 작가로 이어지는 환상문학의 유산을 계승한 그룹을 지칭하는 말이라 한다.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이면서 환상문학이면서 SF문학이고 터보 리얼리즘으로 분류되는 것이 펠레빈의 작품세계다. 대표작은 <벌레들의 삶>인데, 놀랍게도 <벌레처럼>(책세상, 1998)이란 제목으로 번역됐다가 절판된 책이다. 그의 신작들과 더불어 이 참에 다시 나오면 좋겠다... 

 

 

12. 05. 20.

 

 

P.S. 표지의 작가소개를 보니 펠레빈은 불교에도 심취하여 이따금 한국의 절에서 동안거를 지내기도 한다고 한다. 오다가다 혹 이런 외모의 작가를 보시면 이 저명한 러시아 작가에 대해 아는 체를 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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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북리뷰에 소개된 단신기사를 보고 어제 구입한 책은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의 <불안의 책>(까치, 2012)이다. 생소한 저자이지만(그럴 만한 게 포르투갈의 대표시인이긴 하지만, '페소아'란 이름으론 처음 소개됐다) <불안의 책>이란 제목도 마음에 들기에.

 

 

역자 후기를 보니 이 시인은 여러 이명(異名)들을 사용한 모양인데(무려 70개가 넘는다 한다!), 그중 하나가 '알베르트 카에이루'이고 '알베르또 까에이로'란 이름으로 출간된 시집이 하나가 있긴 하다. <양치는 목동>(전예원, 1994). 18년 전에 나온 시집이지만 놀랍게도 아직 품절되지 않았다. <불안의 책>은 페소아의 대표작(해럴드 블룸에 따르면 페소아는 파블로 네루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출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일기로 평가받는" 책이기도 하다고. 그런 판단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의문이지만, 여하튼 포르투갈에 한정해서 '가장 아름다운 일기'라고 해도 한번쯤 읽어봄직하다.

 

 

47세에 사망했으니 좀 일찍 세상을 떠난 셈인데, 원인은 간경변이고 평생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한다. 그가 쓴 마지막 문장은 "I know not what tomorrow will bring(내일이 무엇을 가져올지 난 모르겠다)"란 영어였다고. 방대한 분량의 시가 사후에 <시집>으로 발간됐고, 일기도 예외가 아니다. 특이한 건 1982년에서야 포르투갈에서도 처음 출판되었다는 점. 거의 사후 반세만의 출간이다. 그러니 애초에 '확정본'이 있을 리 없고, 생전에 시인이 분류한 원고에다 연구자들이 관련 원고라고 판단한 텍스트들을 포함해서 편집한 것이 현재의 <불안의 책>이다.

 

그런데, 포르투갈 책이 바로 번역돼 나온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어서 역자는 이탈리아문학 전공자이고, 이탈리아어본과 영어본을 참고해서 옮겼다. 또 전권을 옮기지 않고 발췌해 옮겼다. 번역본이 역자 후기까지 포함해 248쪽인 데 반해, 영어본은 262쪽이고, 일어본은 649쪽이다. 짐작엔 일어본만 완역본이고 나머진 발췌본인 듯싶다. 해서 '맛보기'는 어쨌든 주어졌지만, 대체 어떤 작가이고 어떤 글을 쓴 것인지, 어떤 시들을 쓴 것인지는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 있을 듯하다(하긴 70여 개의 이명을 쓴 시인이라면 그 자신도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렸을 것이다). 그래도 '불안의 책'이란 제목으로 대체 어떤 책이 쓰여질 수 있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아래가 포르투갈어 원서 표지 가운데 하나다...

 

 

12. 0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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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보낸 원고이지만 게재는 이번주에 됐다.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에 대해 적었는데('슬라보이 지제크'는 '발터 베냐민'과 마찬가지로 한겨레의 표기방식이다), 지젝의 책으론 가장 먼저 번역됐고 가장 많인 팔린 책이지만 오역된 대목들이 계속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을 담았다. 혹시나 싶어 두어달 전에 다시 구입해봤지만 수정은 '쉐익스피어'를 '셰익스피어'로 고친 것 정도였다. 

 

 

 

한겨레(12. 05. 20) 오역 범벅 '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이 지제크의 <삐딱하게 보기>를 오랜만에 손에 들었다. 지금 가장 유명한 동시대 철학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도 불리지만, 20년쯤 전 이 책이 나왔을 무렵엔 40대 초반의 ‘뉴페이스’였다. 그의 이론적 기획은 헤겔철학과 라캉 정신분석을 결합하려는 것이었고, 책 부제도 ‘대중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다. 히치콕 영화부터 필름 누아르, 에스에프·탐정소설, 그리고 스티븐 킹을 통해서 라캉을 읽으려는 독특한 시도다. “고도로 정신적인 문화적 산물들을 통속적이고 평범하며 세속적인 문화적 산물들과 나란히 독해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생산적이고 전복적인 과정이라고 말한 발터 베냐민의 충고를 따른 것이다.

 

물론 전제가 있다. 지제크가 다루는 대중문화의 산물들이 독자에게도 친숙해야 한다는 점이다. 낯선 이론을 친숙한 작품들과 대질시키려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치콕 영화조차도 ‘고도로 정신적인 문화적 산물’로 간주되는 상황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혹 우리 처지가 그런 것은 아닐까.  

 

 

가령, 히치콕 영화 <사보타주>에 대한 그의 분석을 흥미롭게 읽으려면 영화에 대한 사전인지가 필요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는 남동생이 희생된 버스폭발 사고에 남편이 관여한 사실을 알게 된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자꾸만 식탁 위 칼에 손이 간다. 이 대목이 번역본에서는 “접시 위의 칼이 마치 자석처럼 그녀를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한다. 그녀의 의지를 꺾으려고 남편이 그 칼을 억지로 움켜쥐기라도 한 것인 양”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남편’(husband)은 ‘손’(hand)을 잘못 옮긴 것이다. 그녀의 손이 의지와 무관하게 칼을 손에 움켜쥐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남편은 그런 모습을 보고 식탁을 돌아 다가가며, 그들의 얼굴과 어깨만 보이는 대면 장면 뒤 칼에 찔려 쓰러진다. 아내가 찌른 것인지 남편이 자살하려는 의도로 찔린 것인지 모호하게 처리돼 있다.

 

지제크는 이 살인 장면을 두 가지 위협의 제스처가 만난 결과로 분석한다. “그것은 훼방된 제스처다. 즉 실행되도록, 완성되도록 의도된 제스처가 아니라 외적인 장애에 의해 좌절된 제스처”다. 하지만 여기에도 반전이 있다. 라캉이 정의한 위협의 제스처와는 정반대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라캉에 따르면, 위협이란 애초 완수되지 않도록 의도된 행위다. 문제의 장면에서 아내의 욕망은 남편을 찌르려는 욕망과 억제하려는 욕망으로, 남편의 욕망 또한 자기보존적 욕망과 마조히즘적 욕망으로 분열돼 있다. 이 두 분열된 욕망의 중첩과 일치에서 나온 결과가 살인이라는 게 지제크의 견해다.

 

<삐딱하게 보기>는 지제크의 저작 가운데 가장 먼저 번역됐고, 현재까지 가장 널리 읽힌다. 하지만 많은 오역들이 교정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다. 분석 대상인 대중문화를 참고하지 않은 것이 ‘외적 장애’라면, 애초에 다 읽을 생각이 없는 독자의 모호한 욕망도 한몫 거드는 게 아닌가 싶다. 널리 읽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책도 ‘고전’에 값한다.

 

12. 05. 18.

 

 

P.S. 실제로 <삐딱하게 보기>는 지난 2005년에 동아일보가 선정한 '21세기 新고전 50권'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어려운 이론과 복잡한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주 특별하다. 슬라보예 지젝은 영화와 소설을 통해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개념을 잘 드러내 준다. ‘대중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이를 ‘라캉을 통한 대중문화의 이해’라 불러도 무방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 자신의 정신세계나 심리적 자화상을 분석하고픈 독자에게 중요한 지침을 주는 책이다. 

참고로, 경향신문의 이번주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또한 지젝을 다루고 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181812485&code=900308). 

 

 

한편, 다음달 6월말에 지젝이 방한할 예정이라고 한다. 2003년 가을에 이어 두번째일 듯한데, 오랜만에 '실물'을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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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법학교수의 책,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창비, 2012)와 박경신의 <진실 유포죄>(다산초당, 2012)가 국내서로서는 '이주의 책'에 값하지만, 언론리뷰들에서 많이 다뤄질 듯해서 나는 들뢰즈의 처녀작 <경험주의와 주체성>(난장, 2012)을 이주의 타이틀 책으로 골랐다. 데이비드 흄에 대한 연구서로서 들뢰즈의 첫번째 책이지만 국내에서는 마지막으로 번역된 책이라는 게 흥미롭다. 영어본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아봐야 하지만 오래 기다린 책이다.

 

들뢰즈의 책을 고른 김에 이론서 범주에 속하는 책들을 같이 묶어놓는다. 찰스 더버의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책읽는수요일, 2012)은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내용을 상상해볼 수 있는 책. 원제는 <마르크스의 유령>이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홉스봄의 지적 여정을 다룬 그레고리 엘리어트의 <홉스봄, 역사와 정치>(그린비, 2012), 그리고 영국의 문화사학자 피터 버크의 <문화 혼종성>(이음, 2012)도 겹쳐 읽어볼 만하고, 새로 나온 '우리시대 고전읽기/질문총서'의 첫권으로 임옥희 <타자로서의 서구>(현암사, 2012)에도 눈길을 줄 만하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포스트식민 이성비판> 해설서이다. 시리즈의 책으론 문광훈의 <사무사>(김우창의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읽기)와 홍성민의 <취향의 정치학>(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읽기)이 같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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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주의와 주체성- 흄에 따른 인간본성에 관한 시론
질 들뢰즈 지음, 한정헌.정유경 옮김 / 난장 / 2012년 5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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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살아 있다면
찰스 더버 지음, 강정석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5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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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홉스봄, 역사와 정치
그레고리 엘리어트 지음, 신기섭 옮김 / 그린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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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혼종성- 뒤섞이고 유동하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
피터 버크 지음, 강상우 옮김 / 이음 / 2012년 5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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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배송받은 책 가운데는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슈스터만의 원서들도 들어 있다. 얼마전 그의 책으론 세번째로 번역돼 나온 <삶의 미학>(이학사, 2012)을 구입하고 번역본들과 짝을 맞추기 위해 그 세 권의 원서도 주문했는데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삶의 미학>보다 먼저 나온 책이 <몸의 의식>(북코리아, 2010)과 <프라그머티즘 미학>(북코리아, 2009)이다.

 

 

<삶의 미학>은 제목보다도 부제에 더 끌렸는데, 페이퍼의 제목으로 삼은 '예술의 종언 이후 미학적 대안'이 그 부제다. 한데 한국어판 머리말을 읽으니 번역본은 '영어판 원본'과 좀 다르다!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

프래그머티즘 철학자로서 나는 책이란 것이 사색을 위한 도구이지, 원본의 형식을 물신화하는 대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영어판 원본의 재생산이나 번역 또는 복제품을 한국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보다는 유용하고 상황에 맞게 갱신된 텍스트를 제공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7쪽)

허를 찔렸다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훌륭한 생각'이라고 인정해줄 만하다. 과연 얼마나 달라진 것인지는 비교해서 읽어봐야 알겠지만. 더불어 책이 놓인 전반적인 맥락에 대해 설명해주는 대목도 요긴한 참고가 된다. 그의 미학적 주장의 핵심은 '몸미학(somaesthetics)'으로 압축되는 듯하다.

 

 

이 책은 내가 <프래그머티즘 미학>(1992)과 <실천하는 철학>(1997)에서 탐구하기 시작했던 삶, 예술, 체화, 철학 그리고 문화라는 주제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 노선을 지속하면서 예술과 감정, 쾌, 지식, 엔터테인먼트, 문화 그리고 스타일의 본질적 관련성이나 미적 경험에 대한 훨씬 더 풍성한 구체적 분석을 제공한다. 이 책은 미학의 관례적 영역을 뛰어 넘어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들과 삶의 행위를 다루는 분야의 나의 몸미학 이론에 대한 해명을 더욱 발전시킨다.(8쪽)

그럼, 그의 기본 입장은 무엇인가?

나의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주된 목적은 순수예술의 영역을 넘어서서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미적 경험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예술과 삶을 더욱 밀접하게 통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양한 삶의 예술을 고양시킴에 있어서, 예술적 스타일의 가치를 더욱 깊이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프래그머티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시뮬라크르 또는 이미지보다 오히려 생생한 경험을 강조하고, 더욱 적극적이고 건강한 의식, 즉 윤리와 공적 삶이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의식을 갖고 삶을 미적으로 가꾸는 데 목적이 있다.(8쪽)

'프래그머티즘적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도 불렀지만, 저자는 '삶의 예술로서의 윤리학'이라는 이념이 훨씬 오래 된 뿌리를 갖고 있다는 걸 강조하다. 그 뿌리란 일단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윤리적-미적 이상이다. 이 그리스철학의 전통에 흥미롭게도 '동아시아 유가사상의 전통'에 더해진다. 서양 미학자의 책에서 <논어>의 많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좀 특이한 느낌을 갖게 하는데, 그 연결고리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유가철학은 나의 미학 이론이 서양의 동료 학자들로부터 쾌락주의적이라고 비난받았을 때, 예술에 대한 경험에 있어서 정감과 쾌의 가치를 옹호할 수 있도록 나에게 큰 용기를 안겨주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서양 미학자들이 예술의 지적 내용이나 예술의 형식과 해석적인 의미 또는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느낌과 향유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유가철학자들은 그 대신에 예술의 인식적이고 윤리적인 그리고 형식적인 가치와 모순되기보다 오히려 그것들을 심화시키거나 풍성하게 해주는, 예술의 정서적 측면이나 기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3쪽)

 

 

미학의 쾌락적 차원과 공자 사상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저자가 편집한 <프래그머티즘의 범위와 철학의 한계>에 실린 글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한다. 아무튼 저자가 이러한 이론적 관심과 문제의식에서 도달하게 된 것이 몸미학인데, "나의 가장 최근 저작인 <몸의 의식>(2008)은 이러한 개념들과 몸미학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이며, 심리적인 차원과 관련된 많은 논제를 다루고 있다."(17쪽) 이상이 프래그머티즘 미학에서 몸미학으로 이어지는 여정의 간략한 개요다.

 

 

 

'예술의 종말'이란 주제는 아서 단토란 이름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고 실제로 <삶의 미학>에도 자주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단토의 책의 어느새 절판된 것들도 있다). '예술의 종언 이후'란 주제에 늘 관심을 갖고 있던 차였는데, 그에 부합하는 책이 출간돼 반갑다. 조만간 시간을 내봐야겠다...

 

12. 0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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