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장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대표작 <체벤구르>(을유문화사, 2012)가 번역돼 나왔다(내가 알기엔 아직 영역본도 나오지 않은 상태다). 소개를 옮기면, "플라토노프의 대표작이자 유일하게 완성된 장편 소설 <체벤구르>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접해 보지도 못한 프롤레타리아들이 나름대로 혁명을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건설해 가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고 있다. 노동자들과 농민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들이 어떻게 혁명을 받아들이고 공산주의 이념을 실현하는지를 그들의 시선으로 그려 내고 있다." 이로써 플라토노프의 주요 중단편과 장편이 국내에 소개된 셈이다. 기념 삼아 리스트를 한번 더 만들어놓는다(2010년 가을에도 만든 적이 있다). 아래는 레프 도진의 연극 <체벤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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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벤구르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윤영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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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피판의 갑문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김철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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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틀로반 (무선)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김철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11,500원 → 10,350원(10%할인) / 마일리지 5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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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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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의 마지막 권 <희망의 배신>(부키, 2012)이 출간됐다. 서두에 붙인 추천사를 옮겨놓는다. '배신 3부작'의 한권으로 읽어도 좋고, 중산층 문제를 다룬 책으로 읽어도 좋겠다. '우리의 침묵을 깨우는 각성제'란 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여준 것이다.

 

 

 

우리의 침묵을 깨우는 각성제

 

‘워킹푸어 생존기’ <노동의 배신>에 뒤이어 ‘화이트칼라 구직기’ <희망의 배신>이 이번에 번역됨으로써 <긍정의 배신>을 통해 우리에게 처음 이름을 알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3부작’이 완결되었다.

 

 

원제와는 다르지만 ‘배신’이란 단어만큼 그의 책들이 전해주는 임팩트를 실감나게 전달해주는 말도 드물다. 이 세 권의 책과 함께 ‘1%를 위한 세상’을 비판하는 <오! 당신들의 나라>까지 포함하면 저널리스트 겸 원숙한 사회비평가로서 저자가 2000년대에 펴낸 대표작 대부분이 우리에게 소개되는 셈이다.

 

긍정적 사고가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지 여실히 보여준 <긍정의 배신>이 우리에게 던진 충격은 무엇이었나? 저자는 자칭 ‘긍정적인’ 사람들이라는 미국인들의 자화상을 신랄하게 묘사하고 미국식 낙관주의의 허상을 폭로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류의 자기계발서가 마치 복음서처럼 읽힌 연대가 우리의 2000년대 첫 10년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되던 시기에 우리는 온갖 성공신화의 중독자였다(결국엔 MB정권까지 탄생시킨!). 모든 문제의 원천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되뇌면서 “새로운 치즈를 마음속으로 그리면 치즈가 더 가까워진다.”거나 “과거의 사고방식은 새로운 치즈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다.” 등의 주문을 아침마다 주워섬겼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그러한 주문이 얼마나 허황한 것이었던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추락하는 삶에는 날개가 없다는 사실도.  

 

<노동의 배신>과 <희망의 배신>은 <긍정의 배신>의 전사(前史)이자 ‘에피소드’이다. <노동의 배신>은 저자가 50대 후반의 나이에 저임금 노동의 실상을 몸소 겪고 쓴 일종의 ‘체험 삶의 현장’으로서 저임금 노동의 열악한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임금은 너무 낮고 집세는 너무 높기에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숙식도 해결하기 벅찬 것이 오늘날 노동의 현실이다. 물론 그것은 미국만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노동의 배신>에 뒤이은 <희망의 배신>은 중산층 화이트칼라의 현실을 다룬다. 저임금 노동과는 달리 이 경우는 노동이 아니라 구직 자체가 문제다. 저자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위장하여 기업체 임원급으로 취업하려고 수개월간 유료 코칭도 받고 네트워킹 행사에도 참여하고 이미지 카운슬링도 받는다. 이 과정에서 구직자는 철저하게 자신을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기술과 노동을 파는 블루칼라 노동자와는 달리 화이트칼라는 ‘자기 자신’까지 팔아야 한다. “CEO가 바보일 수도 있습니다. 기업 행위가 불법의 경계선에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 해도 당신은 일체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몸 바쳐 일해야 합니다.”라는 한 카운슬러의 충고는 화이트칼라의 노동현실을 잘 요약해준다. 일자리의 안정성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희생되고 있는 것이 그 현실이다. 

 

저자는 온갖 노력에도 실패를 거듭하는데 바로 이 실패의 과정이 또한 우리 시대 중산층 화이트칼라가 처한 냉정한 현실이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기업 고위 경영자가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없앤 대가로 높은 연봉을 받는 추세가 뚜렷해졌다. 이것이 구조조정의 실상이다. 대량의 정리해고와 아웃소싱을 단행한 CEO가 그렇지 않은 CEO보다 더 많은 보수를 챙기는 것이 오늘날 기업의 현실인 것이다. 저널리스트 이전에 생물학 전공자답게 저자는 그러한 현실을 ‘포식자의 세상’이라고 표현한다.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없애야 경영자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소위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러한 현실의 필연적 귀결이 저자가 ‘중산층 대참사’라고 부른 중산층의 몰락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미국의 현실이라고만 치부하기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청년실업과 중장년층의 정리해고와 재취업난은 우리에게도 일상이 되었으니까. 어떤 해결책이 가능한가? 저자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뭉쳐 자신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희망의 배신>은 그런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우리가 적어도 생쥐보다는 더 나은 존재라는 각성 말이다. 

 

12. 10. 21.

 

 

 

P.S. '중산층 대참사'와 관련해서는 에런라이크의 책 외에도 톰 하트만의 <중산층은 응답하라>(부키, 2012), 그리고 조준현의 <중산층이라는 착각>(위즈덤하우스, 2012)을 더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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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10 그레이트 이펙트'란 시리즈가 출간돼 첫 세 권을 주문했다. 책은 어제 받았는데, 가장 먼저 펼쳐든 건 알베르트 망구엘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세종서적, 2012)다. 지난 학기에 원서를 구해놓았기 때문이다. 원서의 시리즈명은 '세계를 뒤흔든 책들(Books that shook the world)'이고, 각 책의 부제는 '전기(A Biography)'로 돼 있다. 책의 저자가 아닌 책의 전기가 이 시리즈의 컨셉이다(뭔가 임팩트 있는 제목을 고르다 보니 번역본 시리즈는 '이펙트'가 된 모양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필두로 토머스 페인의 <인권>까지 세권이 1차분으로 나왔는데, 나머지 일곱 권의 책은 <성서>, <꾸란>, <전쟁론>, <자본론>, <국가론>, <국부론>, <군주론> 등이다. 모두 저명한 학자들이 저자로 나섰기에 꽤 읽어볼 만한 교양서가 될 듯싶다. 역자들 또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맡았다. 완간을 고대하는 이유다.

 

 

그런 기대와는 별도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의 '들어가는 말'을 읽다가 '옥에 티'가 있기에 적어놓는다. 두 서사시의 저자 호메로스의 경우는 '호메로스 문제'라는 말이 있을 만큼 많은 논쟁의 대상인데, 망구엘이 그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그는 먼저 이렇게 전제한다.

하나의 책에 관한 전기는 그것을 쓴 사람의 전기가 아니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그의 두 시들의 경우에는 예외이다. 작가와 작품은 손을 맞잡고 함께 간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아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트로이아인들이 살던 도시의 멸망, 그리고 자신의 집을 향한 어느 그리스왕의 갈망에 관해 노래하는 눈먼 음유시인이 먼저인지, 아니면 전쟁을 향한 유혹과 평화를 향한 모색에 관한, 그리고 이런 일들이 실재했다고 입증해줄 하나의 작가를 요구하는 이야기들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16쪽)

보통은 작가가 먼저 존재하고 그가 쓴 작품들이 탄생하는 것이지만 호메로스의 경우에는 그가 정말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란 방대한 서사시를 직접 쓴 '저자'인지 불분명하기에(<일리아스>의 저자와 <오디세이아>의 저자를 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음유시인'이 먼저인지 '이야기들'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호메로스가 일례이지만 작가와 작품 혹은 그 주인공의 관계는 일률적이지 않다.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은 그것을 읽는 독자의 눈에 흥미진진한 관계를 형성한다. 책들 가운데는 작가가 영감을 불어넣은 언어를 통해 그 작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지 암시해주는 생생한 등장인물들을 마치 주문처럼 불러들이는 책도 있다.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 햄릿과 셰익스피어가 적절한 예다. 작가들 중에는 -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 자신에 관해 말했듯이 - 자신의 삶 자체가 자신의 천재성을 그릇처럼 담아낼 수 있는 작가도 있고, 책들이 곧 자신들의 재능의 생산품이 되는 작가도 있다.  

망구엘은 여기서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작품이 작가를 압도하는 경우, 다른 하나는 작가가 작품을 압도하는 경우다. 돈키호테와 햄릿은 전자의 좋은 사례다. 굳이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를 따로 참조하지 않더라도 돈키호테와 햄릿이란 두 주인공은 불멸의 생명력을 자랑한다. "작가가 영감을 불어넣은 언어를 통해 그 작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지를 암새해주는 생생한 등장인물들"인 셈인데, 여기서 '암시해주는'이라고 옮긴 동사는 'overshadow'이다. '가리다' '빛을 읽게 하다'란 뜻으로 '작가를 무색하게 하는 주인공들'이라고 하는 게 더 낫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스카 와일드처럼 작가가 작품을 무색하게 만드는 경우다. "자신의 삶 자체가 자신의 천재성을 그릇처럼 담아낼 수 있는 작가도 있고, 책들이 곧 자신들의 재능의 생산품이 되는 작가도 있다"라고 (마치 두 작가가 있는 것처럼) 옮겼는데, 원문은 "There are writers whose lives are the recipients of their genius, and whose books are only the product of their talent."이다. "자신의 삶 자체가 천재성을 담는 그릇이고 작품은 단지 그 재능의 산물인 작가들이 있다." 정도로 옮길 수 있다. 호메로스는 어느 쪽인가.

호메로스와 그의 작품들은 첫번째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그 작품들의 긴 역사 속에는 독자들이 그 작품들을 두번째 범주에 맡기기로 선택했던 때도 여러 차례 있었다.(16-7쪽)  

첫번째 범주라는 것은 작품이나 주인공이 작가보다 더 빛을 발하는 경우다.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는 저자와 무관하게 존재감을 자랑한다. 하지만 때로는 두 서사시를 '위대한 호메로스'의 천재성이 낳은 결과로 이해하던 때도 있었다는 애기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오뒷세이아) 원전 번역은 현재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 유일하다. 서양고전학자로서 역자는 새로운 번역본을 준비중인 듯한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의 작품 인용은 역자가 직접 번역한 것이라 눈길이 간다. 

 

 

아마도 다음 세대 번역으로는 이미 두 권의 해설서를 쓴 강대진 박사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번역과 함께 기대해봄직하다. 내년 1학기에는 두 서사시를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1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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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새로 나온 책들을 여러 번 훑어보았지만 가닥을 잡을 수가 없어서 시간이 좀 걸렸다. 고심 끝에 최근에 나온 한국사회비평/칼럼 분야의 책들로 채우기로 했다. 타이틀이 좀 긴데 최장집 교수의 칼럼집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폴리테이아, 2012)에서 가져왔다. “노동의 시민권이 노사 관계와 정당 체제에서 취약해질 때 그것의 부정적 효과는 사회 전반의 공동체적 결속을 해체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 노동이 배제되면 노동자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주요 이익 모두가 배제된다는 것,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여기에 있다.” 두번째 책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한 사건별 전담 변호사들의 증언을 묶은 <시민을 고소하는 나라>(스토리플래너, 2012)다. "이 책은 MB정부 5년 간 역사적 퇴행을 거듭한 표현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은 천안함 문자메시지, 조중동 광고불매운동, 국정원 손해배상청구소송, G20 쥐그림 포스터, 용산참사 대책위원회 기자회견,‘장자연리스트’, KBS 정연주 사장 해임 등 구체적인 사건의 전말에 대해 해당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들의 증언으로 이뤄져 있다."

 

 

세번째 책은 조윤호의 <보수의 나라 대한민국>(오월의봄, 2012)다. 청년 논객으로 활동하고 있는 알라디너 조본좌님의 새책으로 부제가 '박근혜로 한국 사회 읽기'다. "어쩌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서 살게 된 것일까? 대체 무엇이 한국 사회를 보수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만들었을까?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그들은 보수를 지지하고 동경하고 존경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점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그리고 나머지 두 권은 BBK 관련서들이다. 미국의 BBK 소송사건 담당 변호사인 메리 리의 <이명박과 에리카 김을 말한다>(진실, 2012)는 BBK 사건의 실체가 옵셔널 벤처스 코리아라는 금융 상장회사에서 벌어진 사기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건의 당사자로 현재 수감중인 김경준의 (비비케이북스, 2012)은 BBK 의혹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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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지음 / 폴리테이아 / 2012년 10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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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을 고소하는 나라- MB공화국 5년, 표현의 자유를 말한다
구영식 외 지음 / 스토리플래너 / 2012년 10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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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수의 나라 대한민국- 박근혜로 한국 사회 읽기
조윤호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10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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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과 에리카 김을 말한다- BBK 사건 진상 파헤치기 8년 여 변호사의 육성 증언
메리 리 지음 / 진실 / 2012년 10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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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프레시안 북스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민음사, 2012)에 대해 적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들에 비하면 다소 밋밋한 편이지만, 소설론이 나온 걸 계기로 파묵의 소설을 모두 구입했으니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책의 원서는 원고를 보낸 다음에 받아서 직접 참고하진 못했는데, 몇 대목은 비교해가며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프레시안(12. 10. 19) 노벨상 작가가 털어놓는 소설의 비밀은?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을 부제로 걸고 나온 <소설과 소설가>(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를 읽었다.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소설론이니만큼 자연스레 손이 가는 책이고 분량도 부담이 없다. 그렇다고 공개적인 서평까지 써야 하는가는 물론 별개의 문제다. 읽는 책마다 서평을 쓰는 건 아니니까. '프레시안 books'의 청탁을 받기 전에 이미 책을 구해놓고 읽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승낙하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다. 결정적으로 나는 파묵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노벨 문학상에 유감이 있어서도 아니고 유독 파묵을 눈밖에 내놓아서도 아니다. 유복하게 자란 모범적인 작가에 사감을 갖고 있을 리도 만무하다. 사실 에세이 <이스탄불>(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을 포함해서 <내 이름은 빨강>(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이나 <하얀 성>(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 같은 그의 작품을 구입해놓은 지 오래다. 다만 독서의 계기가 없었고, 이런저런 일정에 치이다 보니 억지로 계기를 만들 만큼 뭔가 끌리는 요소를 찾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같은 터키 작가로 아지즈 네신의 작품 몇 권을 읽은 걸 보면 '터키'가 걸림돌인 것도 아니다. 선배 작가이자 풍자 문학의 거장인 네신에 대해서 파묵은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아지즈 네신은 터키 문학에 유례없이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작가이다. 포복절도할 웃음과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로 성대한 만찬을 연상케 하는 그의 작품들은 항상 분노하는 동시에 미소를 짓는다."

 

그래, 이런 소개만으로도 나는 파묵보다는 네신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터키의 국민 작가였다고 하는 만큼 예우 차원에서라도 파묵은 네신 다음에 읽기로 하자고 언젠가 결정했던 것도 같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도 핑계로선 적절해 보인다. 파묵에게도 덜 미안하고.

 

잠시의 머뭇거림 끝에 그럼에도 서평 청탁에 응한 것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다. 파묵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작가가 러시아 작가들 가운데서도 특히 톨스토이라는 점을 책을 몇 쪽 넘기기도 전에 알게 됐기 때문이다. 가령 그는 소설 읽기를 이렇게 비유한다. "<전쟁과 평화>에서 피에르가 언덕에서 보로디노 전투를 바라보는 장면은 나에게 일종의 소설 읽기 모델과도 같습니다." (15쪽) 게다가 그가 소설론을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상 모든 소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한 장면을 읽겠습니다." (16쪽)

 
이 정도면 파묵의 소설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의 소설론에는 흥미를 가질 만하다. 게다가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소설을 읽고 소설론을 읽는 대신에 소설론을 먼저 읽고 소설을 읽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말하기를 배우기 전에 문법을 먼저 배우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파묵의 소설론 강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나? 몇 가지 요지를 정리하고 정산을 해보도록 한다.

 

번역본의 제목은 "소설과 소설가"라고 붙여졌지만, 원제는 "소박한 소설가와 성찰적 소설가(The nai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이다. 그리고 이 제목 자체가 파묵 소설론의 요체다. 즉 두 종류의 소설가가 있다는 것. 'sentimental'이란 단어를 "성찰적"이라고 옮겼는데, 원래는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용어이다.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1795년)이란 논문에서 개진한 유명한 구분을 파묵은 소설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독문학에서 실러의 논문은 보통은 "소박 문학과 감상 문학" 혹은 "소박 문학과 감상 문학에 대하여"라고 옮겨졌는데, 전공자의 정리에 따르면 실러는 "인간이 자연과 일치되어 있지 않고 분리되어 자연을 그리워하는 상태를 '감상적' 상태라고 한다. 반면에 자연과 일치한 상태를 '소박한' 상태라고 하였다. 그는 자연과 일치하는 작가, 즉 소박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는 고대 그리스의 호머와 현대의 셰익스피어와 괴테라고 하고, 자연과 분리되어 자연과 일치하도록 노력하는 작가로 자신을 비롯한 근대 작가를 들었다."(<프리드리히 실러>(김수용 지음, 고려대학교출판부 펴냄), 254쪽)

두 개념에 대한 파묵의 정리도 비슷하다. 실러는 'sentimentalisch'란 단어를 통해서 "자연의 단순함에서 멀어져, 자신의 감정과 사고에 지나치게 몰입한 어떤 정신 상태를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찰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실러의 구분은 소설 쓰기와 읽기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소설 읽기와 쓰기에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점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독자와 작가를 '소박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소설을 읽거나 쓸 때 텍스트의 인위성과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소설을 쓸 때 사용되는 방법과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독자와 작가"를 파묵은 '성찰적인 사람'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렇게만 구분한다면 소박한 구분이 될 것이다. '소박한 상태'와 '성찰적 상태'는 한 사람에게서 공존할 수 있다. "소설 읽기는, 마치 소설 쓰기처럼, 이러한 두 가지 정신 상태를 끊임없이 오가는 것입니다." (49쪽)

 

이 '양다리 걸치기'는 소설 읽기에서 필수적이며 권장할 만한 것이다. 파묵은 우리가 전적으로 소박하거나 전적으로 성찰적일 경우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망치게 된다고 주장한다. 전적으로 '소박한' 독자들은 "텍스트를 작가의 자서전 또는 경험담을 약간 고친 연대기"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전적으로 '성철적인' 독자들은 "모든 텍스트가 철저한 계산 아래 만들어진 허구"라고 믿는다. 하지만 작가의 경험담도 아니고 허구도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물론 모순이다.

 

가령 "파묵 씨,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파묵 씨, 당신이 케말인가요?"라는 독자들의 질문에(케말은 <순수 박물관>(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의 주인공이다) 파묵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답할 수 없다. 그는 주인공 케말이 아니지만 그런 사실을 독자들에게 확신시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이런 모순을 허용하는 것이야말로 소설의 특장이다. 파묵은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서로 모순되는 사고들을 우리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믿고, 동시에 이해하게 만드는 특별한 구조입니다." (39쪽) 소설을 '모순의 기예'라고 새롭게 정의할 수 있을까?

 

 

 

따라서 파묵에게서 좋은 작가가 '소박'하면서 동시에 지극히 '성찰적'인 작가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그러한 양면성은 소설가로서 파묵의 성장사이기도 하다. 에필로그에서의 고백에 따르면 1974년에 쓰기 시작한 첫 소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은 <안나 카레니나>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같은 19세기 사실주의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었다.

하지만 곧 의식적으로 모더니즘과 실험주의 소설을 지향했다. 소박한 작가가 되고자 했지만 그것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자 성찰적인 작가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그러한 모색의 과정 끝에, 혹은 35년 동안 소설을 써 온 끝에 파묵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영혼을 갖는 것이 작가에게 가장 이상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겸손하게도 파묵은 그 이상적인 작가가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소설과 소설가>의 내용을 '소박한 소설가와 성찰적 소설가'란 원제에 맞게 간추려 보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소설과 소설론을 많이 읽어온 독자들에겐 좀 무미하게 느껴질 것이다. '소박한' 소설론이란 인상을 주는 것이다. 책에서 파묵의 '메인 아이디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소박한 작가와 성찰적 작가라는 이분법보다 '단어적' 작가와 '시각적 작가'라는 이분법이다. "어떤 작가들은 주로 독자의 '시각적 상상력'에 호소하고, 어떤 작가들은 주로 '단어적 상상력'에 호소한다"(90쪽)는 것이 파묵의 아이디어다. 호메로스나 톨스토이가 시각적 작가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단어적 작가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문학"(92쪽)이라는 정의를 염두에 두면 파묵의 선호가 어느 쪽으로 좀 더 기울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파묵이 꼽은 가장 위대한 작가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그리고 토마스 만이다).

 

또 인상적인 다른 대목. "소설 쓰기란 세상 또는 삶에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어떤 중심부를 설정하고, 그것을 풍경 속에 숨겨 두는 것입니다. 소설 읽기는 같은 작업을 반대로 하는 것입니다." (165쪽) (그렇기에) "소설 읽기란 세상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믿는 노력입니다." (166쪽) 파묵이 보기에 위대한 걸작은 모두 "세상에 중심부와 의미가 있다는 희망과 생생한 환상"을 준다. 소설 읽기의 행복감은 그런 인상에서 비롯된다. 나로선 이런 주제들에 대한 탐구가 조금 더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소박하면서 성찰적인' 작가의 '소박한' 소설론을 읽은 소감이다.

 

1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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