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목전에 둔 11월의 마지막 주말, 이라고 해도 특별한 감회는 없고 오후에 일정이 있을 뿐이다. 외출하기 전에 '이주의 저자'를 골라놓는다. 국내 저자로만 골랐는데, 작고한 재일 은둔작가 손창섭을 머리에 올린 건 정철훈의 <내가 만난 손창섭>(도서출판b, 2014) 때문이다.

 

 

몇년 전에 <잉여인간> 등 손창섭의 대표작 몇 편을 강의한 적이 있고 그때 연구자료도 여러 권 구해 읽었었다. 그래도 <내가 만난 손창섭>이 미리 나왔더라면 아주 요긴했을 것 같다. 거꾸로 이제라도 손창섭을 읽어보려는 독자들에겐 유익한 참고가 되겠다. 부제는 '재일 은둔 작가 손창섭 탐사기'. 손창섭의 독자라면 자전적 단편 '신의 희작'이 얼마만큼 실제에 부합하는지 궁금할 텐데, 이 역시 탐사기에서 확인할 사항. 이 탐사기의 출간과정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손창섭(1922-2010). 전후(戰後) 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손창섭은 월북 작가도 아닌데, 생몰 연대 가운데 한쪽은 지난 30년 간 비어 있었다. 1973년 일본인 아내 우에노 지즈코와 딸 도숙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국내 문단과 소식을 끊고 있었던 재일(在日) 은둔 작가 손창섭을 찾아나선 이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면서 문학저널리스트인 정철훈(55)이다. 일찍이 단편 '신의 희작'(1961)에서 “껄렁껄렁한 시나 소설이나 평론 줄을 끄적거린다고 해서 그게 뭐 대단한 것처럼 우쭐대는 선민의식. 말하자면 문화적인 것 일체와 문화인이라는 유별난 족속 전부가 싫은 것이다.”라며 이 땅의 시인과 소설가들의 선민의식을 냉소했던 손창섭의 행방이 궁금했던 지은이는 2005년 <손창섭 단편 전집 1.2>(가람기획)과 장편소설 <유맹>(실천문학사)의 국내 출간을 계기로 “이 책들의 인세는 과연 손창섭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가?”라는 의구심을 품고 손창섭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손창섭을 아는 분 누구 없습니까?”라고 물은 지 4년. 아무 응답도 들려오지 않자 정철훈은 과거 손창섭과 알고 지냈던 국내 출판계와 문학계 인사들을 직접 수소문한 끝에 손창섭의 일본 주소를 손에 넣은 뒤 무작정 일본으로 향한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인 셈.

 

 

 

작가 황석영 선생의 <여울물 소리>(창비, 2014)가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초판을 읽지 않았기에 오히려 가뿐한 마음이다. 장편소설로 보자면 <바리데기>와 <강남몽>에 이어지는 작품. 작가의 말에서 "어쨌든, 나는 이 작품으로 한 시기를 끝내면서 새로운 들판을 찾아 떠나려 한다"고 적었다. 그렇게 읽어달라는 주문으로도 읽힌다.

시대의 거장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작가는 초판본(2012)의 오류를 바로잡고, 1년여에 걸친 치열한 퇴고를 통해 한결 정갈한 작품으로 <여울물 소리>를 재탄생시켰다. 1894년 사회적으로 고착된 부패와 외세의 내정간섭에 맞서 들불같이 타오른 혁명의 현장을 배경으로 작가는 피폐해진 민중의 삶과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소설은 '반동의 시대'인 19세기 후반부를 시대적 배경으로 이야기꾼(전기수)이자 혁명가인 주인공의 생애를 무게감 있게, 때때로 판소리처럼 구성지고 경쾌하게 그려낸다. 임오군란(1882)과 동학혁명(1894), 청일전쟁과 갑오개혁(1894)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전면과 배면에 등장함으로써 마치 대하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도 만든다.

올해 나온 황석영의 작품으론 한국문학전집판으로 다시 나온 <개밥바라기별>(문학동네, 2014)과 김석만 등이 각색한 <한씨연대기>(지만지, 2014)가 있다. 그렇게만 모아서 읽어봐도 좋겠다.

 

 

재일 지식인이자 저술가 서경식 선생의 <나의 조선미술 순례>(반비, 2014)가 출간됐다. '순례'로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2/2002), <나의 서양음악 순례>(창비, 2011)에 이어지는 것이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저자 서경식이 ‘조선 민족’ 미술가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토대로 묶은 미술 순례의 기록이다. 저자는 55세가 되었던 2006년부터 2년 동안, 연구를 위해 한국에 체재하게 되었고, 너무 늦어 때를 놓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참에 같은 민족의 언어, 습관뿐만 아니라 문화, 특히 미술에 대해 가능한 많이 알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그 바람을 조금씩 이루어나갔다. 조국의 민주화를 갈구하며 머나먼 이국에서 미술관들을 순례한 지 20년, 서경식은 먼 길을 돌아 마침내 ‘조선’의 미술, 미술가들과 만났다. 이 책은 그 길고 긴 여정의 중간보고다.

'중간보고'라고 하므로 저자의 순례는 앞으로 더 이어지는 모양이다. 서양미술과는 달리 '조선미술'은 비교적 쉽게, 그리고 가까이 접할 수 있을 듯싶어서 그의 순례기가 기대된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그랬듯이 미술을 바라보는 속깊은 눈을 우리는 조선미술에 대해서도 갖게 될 것이다...

 

14. 11. 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의차 지방에 다녀오는 기찻간에서 주로 졸거나 알라딘 북플을 들여다봤는데(북플이 '북'과 '피플'의 합성어라는 것도 오늘에야 알았다), 너무 시간을 낭비한다 싶어서 몇 페이지 읽은 책이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가의 신념>(은행나무, 2014)이다. 주문했던 원서를 엊그제 받은 터라 아침에 같이 가방에 넣은 책이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문학동네, 2014)과 겹쳐 읽으면 좋을 만한 책(작가 지망생이라면 두 권 모두 필독해 볼 만하다).

 

 

원서도 주문한 건 만만한 분량인데다 오츠의 문장을 좀더 정확하게 읽어보고 싶어서였는데, 역시나 도움이 된다. 번역이 모호한 대목이 있고, 예기치않은 오역도 나오기 때문이다. 대단한 건 아니므로 2쇄때는 교정되면 좋겠다 싶어 적는다. 먼저, 젊은 작가들에 대한 오츠의 충고.

젊거나 갓 시작하는 작가들은 끊임없이 고전과 현대 작품 양쪽을 광범위하게 읽어야 한다. 이 기술의 역사 속에 푹 빠져보지 않은 작가는 아마추어, 즉 '창조적 노력의 95퍼센트가 열정뿐인 개인'으로 영영 남게 되기 때문이다.(10쪽)

'기술의 역사'는 'history of craft'를 옮긴 것이다. 장인적 기예를 가리키며 오츠는 작가를 '기능공'이라고 부른다. 막심 고리키 같은 작가가 스스로를 일컬어 '숙련공'이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다(기능공이나 숙련공이나 영어 단어로는 'craftsman'을 옮긴 것이다). 이 숙련공이 전업 작가인 것. 반면에 아마추어란 열정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츠가 말한 건 창조적 노력의 '95퍼센트가 열정뿐인 개인'이 아니라 '99퍼센트가 열정뿐인 개인'이다. 'ninety-nine percent'를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95퍼센트'로 옮긴 것 같지는 않고, 선입견에 따라 잘못 본 게 아닌가 한다.

 

오츠의 에세이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읽은 건, 원서를 주문하기 전에 조금 들여다봤던 '작가의 독서: 기능공으로서의 작가'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독서가 빠진다면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오츠의 생각도 그렇다. "당신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작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작가가 되고 싶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142쪽) 에세이는 바로 그 작가의 독서 경험을 여러 다른 작가들과 오츠 자신을 사례로 삼아 다룬다. 가령 젊은 카프카의 경우는 어떤가.

 

"나를 찢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내가 머릿속에 갖고 있는 거대한 세계"를 산문으로 바꾸어 그 세계의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밤샘 작업하며 첫 소설 <소송>을 고투 속에서 쓰고 있는 젊은 프란츠 카프카를 생각한다.(123쪽)

얼핏 문제가 없는 듯싶지만, '첫 소설 <소송>'이라고 옮긴 건 'his first story, "A Judgment"'다. (장편)소설이 아니라 '선고' 또는 '판결'이라고 옮겨지는 단편을 가리킨다. 1912년 9월 22일 밤 10시에 시작해 아침 6시까지 꼬박 8시간 동안 매달려서 완성했다고 하는 단편으로 카프카로서는 창작에 결정적인 돌파구였고 가장 만족스러워 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역자가, 더구나 송경아 작가가 <소송>이라고 잘못 옮긴 건 의외다.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한 대목. 나도 강의에서 자주 언급하는 카버의 마지막 발표작 <심부름>을 언급하고 있어서 반가운데("체호프의 마지막 나날들과 죽음, 그리고 그의 죽음에 따른 사건에 대한 것") 이에 대한 오츠의 평은 이렇다.

그것은 실제로 체호프의 전기에서 고쳐 쓴 것이지만 카버의 특징인 스스럼없는 문체와는 달리 긴박하고 시적으로 추출된 문체로 쓰였다. 쉰 살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죽음에 다가가며, 레이먼드 카버는 마흔네 살에 폐결핵으로 죽은 그의 영웅 체호프의 요절 이야기를 위해 새로운 목소리를 만들어낸 것 같다.(139쪽)

이 단편이 <대성당>(문학동네, 2014)에는 빠져 있어서 아쉬운데, 단편집 <내가 부름 받고 있는 곳(Where I'm Calling From)>에 수록돼 있다. 그런데, '내가 부름 받고 있는 곳'이란 번역은 아무래도 오역이다. <대성당>에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이라고 번역된 작품이고, 내용상 그게 맞는 것 같기 때문이다. 수년 전 카버의 단편들을 읽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카프카의 단편이나 카버의 단편이나 많이 읽히는 작품이고 번역도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자나 편집자가 확인하지 않은 건 불찰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피할 수 있는 실수들이다. 작가의 독서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고...

 

14. 11. 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로 소개되는 카렐 차페크(1890-1938)의 미스터리 소설집 <주머니 이야기>가 번역돼 나왔다. <한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와 <다른 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두 권이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디선가(지젝이었던가?) 제목을 접하고 흥미롭겠다 싶었는데, 때마침 출간된 것. 반가운 마음에 주문을 넣으면서 차페크 읽기 리스트도 만들어놓는다(또 다른 미스터리로는 크누트 함순의 <미스터리들>도 번역되면 좋겠다).

 

1928년, 체코의 <민중신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던 카렐 차페크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을 신문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온갖 종류의 희한한 미스터리를 담은 이 소설들을 접한 차페크의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차페크가 미스터리 애독자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가 진짜로 미스터리 작가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 미스터리 소설들은 그 이듬해 <한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와 <다른 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이른바 훗날 <주머니 이야기>(Pocket Tales)라고 불리는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차페크는 특히 어쩔 수 없이 비정상적인 상황이나 환경에 처하게 된 보통 사람들을 우리가 왜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에 주목하면서, 독보적인 형식의 미스터리를 창조했다.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4년 11월 28일에 저장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4년 11월 28일에 저장

곤충 극장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11,800원 → 10,620원(10%할인) / 마일리지 59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4년 11월 28일에 저장

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13,800원 → 12,420원(10%할인) / 마일리지 69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4년 11월 28일에 저장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흥미로운 책이 한권 눈에 띄어서 '이주의 발견'으로 적는다. 마크 바우어라인의 <가장 멍청한 세대>(인물과사상사, 2014). '디지털은 어떻게 미래를 위태롭게 만드는가'란 부제에서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중요한 건 이를 입증할 만한 데이터인데, "국가 규모의 방대한 조사·연구 결과와 다양한 전문가 의견은 그의 논지를 견고하게 뒷받침해준다"고 소개돼 있어서 믿어보기로 했다. 저자는 에모리대학 영문과 교수이고, 책은 2009년에 나왔다.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청림출판, 2011)과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원서는 카의 책이 한 해 더 늦게 나왔다). 소개는 이렇다.

 

오늘날 젊은이의 지적 능력은 미디어나 전자 기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에 능통하고 정신없이 바쁜 고교 졸업반 아이들에게 몇 가지 지적인 질문을 던지면 어떨 것 같은가. 이들은 대체로 체크카드, 휴대전화, 마이스페이스 페이지, 파트타임 일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지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뭐든 잘 알 것 같은 당당함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 필립 로스가 2000년 <휴먼 스테인>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가장 멍청한 세대’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인류 역사상 물질적 조건과 지적 성취 사이에 이토록 깊은 골을 만든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이토록 많은 기술 향상을 겪고도 이토록 보잘것없는 정신 발전을 이룬 이들도 없었다. ‘가장 멍청한 세대’의 탄생과 특징을 지식, 독서, 영상, 학습, 전통, 미래 등 총 6장에 걸쳐 상세히 기술한다.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이 추천사에서 한 마디 거들었는데, "독서의 종말이라는 우울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우리가 시급히 생각해보야야 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안 그대로 독서를 주제로 강연을 할 때면, 나도 비슷하게 우울한 어조 내지 냉소적 어투로 말할 수밖에 없는데 '가장 멍청한 세대'는 과연 자신의 '멍청함'을 알까, 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상황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많은 걸 기대할 수 없지만, 책과는 담을 쌓은 젊은 세대가 좀 읽어봤으면 싶다...

 

14. 11. 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 강의차 전주에 내려갔다가 한옥마을에서 일박하고 오늘 오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귀경길에 버스에서 요즘 알라딘에서 화제인 '북플'을 스마트폰에 깔고 어떤 '물건'인지 살펴봤는데, 블로그에 좀 적응하나 싶었더니 적응할 게 하나 더 생긴 것 같아서 그다지 반가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최근 즐찾과 공감(좋아요)가 늘어난 원인이 북플 때문일 거라는 짐작은 들었다. 사실이 그렇다면, 뭐 굳이 기분 나쁜 일은 아니겠다. 다만 적응에 시간이 좀 걸릴 거라는 거. 나대로는 그냥 하던 대로 블로그 포스팅에만 주력할 참이다. 그리고 오늘의 일거리는 이번주 시사IN(376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 것. 듀런트 부부의 <역사의 교훈>(을유문화사, 2014)을 읽고 적었는데, 이 부부의 방대한 대작 <문명 이야기>(민음사)의 입문서로 읽어도 좋겠다 싶다. 아니, 그냥 역사 입문서로 읽어도 좋겠고. 그나저나 <문명 이야기>는 몇 권 구입하긴 했지만 섣불리 엄두를 못낼 분량이로군...

 

 

시사IN(14. 11. 29) 역사의 쓸모를 찾다 보니

 

<철학이야기>로 잘 알려진 미국의 저술가 윌 듀란트는 아내 아리엘 듀란트와 함께 총 11권의 대작 <문명 이야기>를 집필한 문명사가이기도 하다. 그만한 규모의 대작을 써낸 저자라면 소회가 없을 리 없다. 어떤 소회일까란 궁금하여 듀란트 부부가 쓴 <역사의 교훈>(1968)을 펼쳐들었다. 역시나 두 저자가 방대한 저술을 마치고 맞부딪친 질문은 이런 역사 연구가 어떤 쓸모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책에 들어 있다. 


두 저자는 전반부에서 역사와 지구와의 관계에서부터 생물학과 역사, 종족과 역사, 성격과 역사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서 역사 연구에서 얻은 교훈들을 제시한다. 삶이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 얽매이며 끊임없이 후손을 보아야 한다는 게 역사의 생물학적 교훈이라는 지적이 눈길을 끌지만 좀더 흥미로운 건 종교와 역사, 경제와 역사, 사회주의와 역사 등을 다룬 후반부이다.


저자가 보기에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은 타고난 것이면서 문명의 복잡성과 더불어 더 심화된다. 빈부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격차가 벌어지면 사회적 불안과 분노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막아주는 것이 종교다. 나폴레옹이 명쾌하게 정의내리길,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죽이는 걸 막아주는 게 종교다. 만약 종교라는 ‘초자연적 희망’이 절망의 유일한 대안이 되어주지 못하면, 계급투쟁은 더 격화되며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를 불러오게 된다. 종교와 공산주의는 마치 한 우물에 매달린 두 개의 양동이와 같아서 “하나가 아래로 내려가면 다른 하나가 올라온다. 종교가 쇠퇴하면 공산주의가 상승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가 빈곤을 없애려는 노력에 실패한다면 다시금 초자연적 신앙의 복구를 눈감아주는 수밖에 없다. 

 


듀런트는 사람들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부의 집중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고 본다. 이러한 집중이 ‘가난한 사람들의 수적인 강세’가 ‘소수 부자들의 능력의 강세’를 맞먹는 지점에까지 도달하면, 이는 필연적으로 부를 재분배하는 정권이나 가난을 재분배하는 혁명으로 이행한다. 역사에는 부의 재분배가 성공을 거둔 사례도 있는데, 고대 아테네에서 솔론의 개혁이 그런 경우다. 그는 모든 채무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부자에게는 가난한 사람보다 12배까지 많은 누진세를 물게 했다. 그리고 아테네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의 아들은 국가가 양육하도록 했다. ‘부자세’에 반대한 부자들과 토지 재분배를 요구한 과격파의 불만을 사긴 했지만 솔론의 개혁은 아테네를 혁명에서 구원하는 데 성공했다. 선제적 개혁이 혁명의 저지선이었던 것이다. 

 


솔론의 개혁과는 반대되는 사례가 로마 시절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다. 호민관에 당선되었던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1인당 토지 소유를 제한해 토지를 재분배하자는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원로원은 ‘재산 몰수’에 해당하는 조처라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티베리우스는 폭동에서 살해당하고,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형의 과업을 계승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실패한 뒤에 자살한다. 이어서 가이우스의 추종자 3000명도 원로원 법에 의해 사형 당했다. 개혁에 대한 이러한 비타협적 거부가 가져온 결과는 이후 100년 동안 지속된 계급 전쟁과 내전이었다.


듀런트가 보기에 부의 집중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하지만 이것은 주기적으로 폭력이나 평화적인 방법의 재분배 요구에 직면하게 한다. “모든 경제사는 사회 유기체의 느린 심장 박동이며, 부를 집중하고 억지로 재순환시키는 광대한 들숨과 날숨”이다. 그렇다면, 경제사가 보여주듯이 역사는 주기적인 반복에 불과한가? 진보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듀런트는 교육의 확산이란 점에서 진보의 의미를 찾는다. 문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로 새롭게 배워서 익혀야 하는 것이기에 교육은 문명에서 핵심적이다. 역사란 가치 있는 유산의 창조이자 기록이며 진보는 이런 유산을 잘 보존하고 전달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저자가 <문명 이야기>라는 방대한 저술에 몰두한 이유이면서, 우리가 그의 책을 읽어볼 만한 이유다.

 

14. 11. 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