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과학서로 조너선 실버타운의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서해문집, 2016)을 고른다. '문학, 신화, 역사를 관통하는 조너선 실버타운의 실버과학에세이'가 부제. 저자는 영국의 생태학자인데, 자신의 성(실버타운)에 딱 맞는 주제의 책을 펴냈다고 할까. 다른 책으론 <씨앗의 자연사>(양문, 2010)가 소개됐었다.

 

"생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조너선 실버타운이 수명과 노화, 죽음에 대해 위트 있게 해설한 교양과학 에세이. 지난 두 세기 동안 인간 수명은 극적으로 늘었는데, 왜 노화와 죽음은 멈추지 않을까? 저자는 이 만만치 않은 물음을 죽음, 수명, 유전, 진화, 식물 등의 영역으로 나누어 날렵하게 풀어낸다. 딱딱하게 느껴지기 쉬운 과학 지식에 문학과 신화, 유머를 버무려 놓았다."

 

 

노화/노년과 죽음에 관한 책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나올 텐데, 올 들어서만도 "영국의 전설적인 편집자 다이애너 애실이 90세에 쓴 노년과 삶에 관한 책", <어떻게 늙을까>(뮤진트리, 2016), 노화학 관련서로 레노어 슈츠만 등의 <노화, 그 오해와 진실>(시그마프레스, 2016), '노화에 맞서는 과학자들의 도전'을 그린 류형돈의 <불멸의 꿈>(이음, 2016) 등이 출간됐다. <불멸의 꿈>은 뉴욕대 의대 세포생물학 교수인 저자가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과학자로서, 많은 유명 과학자들과 직접 교류하고, 관련 주제의 심포지엄에 참석해서 직접 보고 들은 노화 연구의 내용들"을 전하는 책이다.

 

아직은 중년이라도 노년에 관한 책들이 예전보다는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주의 일'이라고 하니까 내가 더 보탤 일은 없을 테지만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야겠다...

 

16. 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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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강의 공지다. 봄학기 정기강좌로는 마지막 공지가 아닐까 싶다. 매주 수요일 오전(10시 40분-12시 40분)'책사랑'이라는 고전강좌를 10년째 진행해오고 있는데(<아주 사적인 독서>가 그 결과물이었다), 이번 봄학기(16주) 커리는 스탕달에서 프루스트까지의 프랑스문학이다(지난 학기 커리가 제인 오스틴에서 토머스 하디까지의 영문학이었다). 장소는 푸른역사아카데미(http://cafe.daum.net/purunacademy/)이며 강의 문의는 010-7131-2156(오유금)으로 하시면 된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1강 3월 02일_ 스탕달, <적과 흑>(1)

 

 

2강 3월 09일_ 스탕달, <적과 흑>(2)

 

 

3강 3월 16일_ 발자크, <고리오 영감>(1)

4강 3월 23일_ 발자크, <고리오 영감>(2)

 

 

5강 3월 30일_ 보들레르, <악의 꽃>(1)

6강 4월 06일_ 보들레르, <악의 꽃>(2)

 

 

7강 4월 20일_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8강 4월 27일_ 플로베르, <감정교육>(1)

 

 

9강 5월 04일_ 플로베르, <감정교육>(2)

 

 

10강 5월 11일_ 졸라, <목로주점>(1)

 

 

11강 5월 18일_ 졸라 <목로주점>(2)

 

 

12강 5월 25일_ 모파상, <벨아미>

 

 

13강 6월 01일_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14강 6월 08일_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

 

 

15강 6월 15일_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

 

 

16강 6월 22일_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전7권(아직 완간되지 않았다) 가운데 이번 봄학기에는 1권(스완네 집 쪽으로)과 2권(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까지만 읽는다.

 

16.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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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목요일 오전(10시-12시)에는 한우리독서토론논술 광명지부에서 강의를 진행해오고 있는데, 이번 3-4월 커리는 '한국문학'으로 정했다. 장기적으로는 현대문학까지 다룰 예정이지만 이번 봄에는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에서 이인직,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같은 근대 작가들까지 다루려고 한다. 중고교 교육과정에서 배우는 필독 작품이라는 것도 고려했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강의 문의는 02-897-1235/010-8926-5607).

 

1강 3월 10일_ <홍길동전>

 

 

2강 3월 17일_ <춘향전>

 

 

3강 3월 24일_ 이인직, <혈의 누>

 

 

4강 3월 31일_ 이광수, <소년의 비애>

 

 

5강 4월 07일_ 이광수, <무정>

 

 

6강 4월 14일_ 김동인, <감자>

 

 

7강 4월 21일_ 염상섭, <만세전>

 

 

8강 4월 28일_ 염상섭, <삼대>

 

 

16.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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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린 코리건의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책세상, 2016)는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의 독자라면 필독할 만한 책이다. 단순히 전공자가 쓴 책이라기보다는 <위대한 개츠비>를 '가장 위대한 미국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열독자가 쓴 찬가다. 저자가 영문학자에 문학비평가이기도 해서 이 찬가가 작품분석과 해석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는 게 여느 찬가와 다를 따름이다.

 

 

오랜만에 나도 문학 열강을 듣는 기분으로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감염이 되었는지 피츠제럴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구입했고, 심지어 이미 두어 권 갖고 있는 영어판 <위대한 개츠비>도 또 구입했다. 한데 좀 낭패다 싶은 대목과 만났다. 소설의 결말에 대한 해석 부분이다. 저자는 "이 소설이 물과 익사의 심상에 매달린다는 점"을 여러 근거를 통해 설득력 있게 주장하면서 그 피날레로 마지막 단락을 예로 든다.  

"개츠비는 녹색의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멀어지는, 절정의 순간과 같은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한테서 달아났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 내일은 우리가 더 빨리 달리고, 더 길게 팔을 뻗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64쪽)

정확하게는 소설의 끝에서 두번째 단락이다(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흐름을 거스르는 보트들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리면서도."인데, 피츠제럴드의 묘비에 새겨진 문장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은, 눈에 띄어야 하는 것은 마지막의 긴 줄표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마지막 문장의 불필요하게 긴 줄표에 충격을 받았다."고 할 정도다(인용문에서는 짧은 줄 세개를 붙여 놓았지만 하나로 이어진 것으로 봐달라). 이에 대해서 "몇몇 평론가는 이 터무니없이 긴 줄표가 개츠비가 소유한 선착장 끄트머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개츠비>의 독자라면, 그리고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눈썰미 있게 본 관객이라면 기억하듯이, 1장 끝 무렵에 개츠비가 해협 너머의 데이지의 저택 선착장(녹색의 불빛)을 향해 팔을 뻗던 장소가 바로 개츠비의 선착장이다. 모린 코리건도 이러한 해석에 가세한다. 익사하지 않기 위해 계속 헤엄을 친다는 것은 비단 이 작품에서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는 피츠제럴드 자신의 인생관이었다. 물론 그러다 언젠가는 기운이 빠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날'이 올 것이다. "개츠비가 수영장에서 죽은 바로 그날처럼 우리가 선착장에 끄트머리에 도달하고 떨어져 물에 빠져 죽는 그날이." 

"이런 독법에 따른다면, <개츠비>의 마지막 부분에 피츠제럴드가 선착장만큼이나 긴 줄표를 심어둔 것은 어쩌면 미국 문학사상 최초의 그래픽노블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64-65쪽)

 

전문가들의 과잉해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우리로선 그렇게 과잉해석할 여지도 없다는 점. 왜냐하면 이 긴 줄표가 번역본들에서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수조사는 하지 못하고 책장에 있는 <개츠비>들을 눈에 띄는 대로 확인해본 결과 대부분 긴 줄표를 평범한 말줄임표로 대체하고 있었다(문학동네판만은 못 찾아서 바로 확인하지 못했다). 이 '선착장'이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 내가 갖고 있는 몇 권의 영문판에서도 긴 줄표 대신에 짧은 줄표가 쓰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가 "그러다 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로 바뀐 것. 애초에 그렇게 된 판본을 우리말로 옮겼으니 한국어판 역자나 편집자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순전히 이 긴 줄표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영어판을 구해야 할까 잠시 생각해봤지만(이건 줄표 하나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선착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막상 긴 줄표로 되어 있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 채 책을 주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내가 염두에 둔 건 스크리브너판이다. 애초에 <위대한 개츠비>를 펴낸 출판사).   

 

여하튼 내가 비평을 가리켜서 '다시 읽게끔 하는 것'이라고 할 때 뜻한 바는 바로 이런 사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16. 02. 10.

 

 

P.S. 지나는 김에 번역서에서 누락된 곳 하나. "위대한 미국 소설의 지원자들을 한번 모아보자. <모비딕> <보이지 않는 인간>, <주홍글씨>, <허클베리 핀>, <앵무새 죽이기>."(21쪽) 무엇이 빠졌나?(말이 나온 김에 지적하자면, '지원자들'은 '후보자들'로, <주홍글씨>는 <주홍글자>로 옮기는 게 낫겠다.) 물론 이 목록만 가지고는 알 수 없지만, 같은 목록이 한번 더 나오므로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계급을 다룬 미국의 소설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 사실, 그 분야 고전들(<모비딕><허클베리 핀>, <앵무새 죽이기>, <보이지 않는 사람>, <빌러비드>) 가운데 인종 대신 계급을 중시한 작품으로는 유일하다."(26쪽) 

여기서도 '그 분야 고전들'은 '미국문학의 정전들'로 옮기고, <보이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통일시켜주는 게 낫겠다. 그렇다, 빠진 작품은 <빌러비드>다. 21쪽에서 <빌러비드>가 누락되었다. <보이지 않는 인간>이나 <빌러비드>나 모두 인종 문제를 다룬 대표적 작품이다. 반면 <개츠비>는 계급 문제를 다룬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게 저자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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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에 읽은 책 중 하나는 <한나 아렌트의 말>(마음산책, 2016)이다. 번스타인의 <악의 남용>(울력, 2016), 모린 코리건의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책세상, 2016) 등과 같이 읽기 시작했으나 아무래도 분량상 가장 먼저 완독했다. 읽기 전에는 가장 좋은 아렌트 입문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적었으나, 일단 그런 입문서로는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는 게 독후감이다. 아렌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예비 지식을 가진 독자에게 더 유익할 듯하기에. 가령 작년에 나온 소개서 가운데 나카마사 마사키의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갈라파고스, 2015)나 권정우, 하승우의 <아렌트의 정치>(한티재, 2015) 등을 예비적으로 읽어두는 게 좋겠다. 전체적인 조감도를 갖고서 인터뷰를 읽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다.  

 

 

생각해보니 아렌트의 인터뷰는 처음 읽은 게 되는데, 글보다는 역시 수월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명료하게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말은 말대로의 모호함을 갖고 있는데다가 아렌트의 어법은 다소 독특해서다(좀 익숙해지면 나아질지도). 그래서 생각만큼 편안한 독서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세계' 개념에 대해서, 그리고 평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성과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열네 살에 칸트를 읽었다는 애기, 자신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는 토로 등이 그에 대한 이해를 더 보강해주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읽으면서 손이 근질거렸던 책은 엘리자베스 영-브륄의 방대한 평전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2007)인데, 이 책의 부제가 바로 '세계 사랑을 위하여'다. 그리고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집도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인간사랑, 2009)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기도 하다. 영-브륄의 책은 원서와 번역본을 모두 갖고 있지만 아마도 서고에 있는 모양으로 책장에서 찾을 수 없었다. '도음이 안돼!'라고 투덜거리는 걸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밖에. 그런데 아렌트에게서 '세계 사랑'이란 어떤 의미인가? 인터뷰의 한 대목.

가우스: 당신은 '세계'라는 단어를 정치를 위한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아렌트: 맞아요. 세계는 정치를 위한 공간이에요.(59쪽)

군말이 필요없는 대목이다. 아렌트 철학, 아니 아렌트 정치사상의 핵심은 바로 '정치를 위한 공간'으로서 세계를 예찬하고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좀 유감스러운 것은 옮긴이의 말이었다.

정치는 혐오스럽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정치는 쉴 새 없이 곰팡이가 슬고 먼지가 쌓이는, 불결하고 악취 나는 안방과 비슷하다. 안방이 그렇다는 이유로 넓은 안방을 버려두고 비좁은 골방에 웅크린 채 구시렁거리며 사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상황이 그렇다면 먼지와 때를 묻힐 각오를 하고는 두 팔 걷고 안방에 들어가 곰팡이와 먼지를 제거해서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옳은 일 아니겠는가. 아렌트가 강조한 정치적 사유와 행위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198쪽)

그런 취지에서 옮긴이 말의 제목도 '정치는 안방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라고 붙여졌는데, 나로선 이런 '정치관'이 아렌트에 대한 오해로 여겨진다. 아렌트에게 혐오스러운 건 정치의 실종, 내지는 유사 정치이지 결코 정치 자체가 아니다. 

 

아무려나 그런 생각으로 아렌트의 말을 옮겼다고 하니까 좀 찜찜한 기분이 되는데, 결국 몇몇 대목에서는 불만도 갖게 되었다. 아렌트의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을 원어까지 병기하면서 '대중의 행복'(114쪽)이라고 옮긴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대중의 행복이란, 사람은 공적인 생활(public life)에 참여했을 때, 그러지 않았다면 그에게 닫힌 채로 남았을 인간적 체험의 차원을 혼자 힘으로 열어젖힌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여러 면에서 완전한 '행복'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뜻해요."(114쪽)라는 대목이다. 다른 모든 곳에서 'public'는 '공적' 혹은 '공공'이라고 옮겨놓고 이 대목에서만 '대중'이라고 옮긴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더구나 '공적 행복'이란 말은 학계에서도 통용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해제를 쓴 아렌트 전공자 김선욱 교수도 "가끔씩 대담의 생생함에 초점을 맞추려다 보니 일부 문장의 번역이 치밀하지 못한 부분들이 보이긴 하지만"(14쪽)이라고 지적하지만, '공적'을 '대중의'로 옮긴 건 '대담의 생생함'과도 무관해 보인다. 덧붙여, 내가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몇 대목을 적어둔다.

"그런데 내가 20대였을 때 그 질문은 어머니가 20대였을 때보다 당연히 훨씬 더 중요했어요."(35쪽)

원문은 "But the question was naturally much more important in the twenties, when I was young, than it was for my mother."(13쪽)이다. 여기서 '20대'로 옮긴 'in the twenties'는 '20년대에는'이다. 아렌트는 1906년생이므로 1920년에 열네 살이었고, 1926년에야 스무 살이 된다. 어렸을 때라는 건 20년대 초반을 뜻하는 것. "(그리고) 내가 철이 들었을 때"라는 말이 이어지는데, 그와 견주더라도 언급되는 시점은 20대 때가 아니라, 10대 때여야 한다.  

 

'정치와 혁명에 관한 사유'를 주제로 한 세번째 인터뷰에서 한 대목.

"오늘날 주요하게 대비되는 나라들은 사회주의국가 대 자본주의국가가 아니라,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들, 예컨대 스웨덴 대 미국이거나, 그렇지 않은 나라들, 예컨대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대 소련이죠."(131쪽)

이 부분도 부정확하게 옮겨졌는데, 번역문만 보면 '스웨덴 대 미국'과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대 소련'이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것처럼 읽힌다. 핵심은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 대 그렇지 않은 나라'의 대비다. 그리고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에 스웨덴과 미국이 속하고, 그렇지 않은 나라에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소련이 속한다. 다만 스웨덴과 미국은 '이런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의 스펙트럼에서 두 축을 구성하고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소련이 '그렇지 않은 나라들'의 두 축이다. 원문은 "The chief distinction today is not between socialist and capitalist countries but between countries that respect these rights, as, for instance, Sweden on one side, the United States on the other, and those that do not, as, for instance, Franco's Spain on one side, Soviet Russia on the other."(84쪽)

 

이런 대목에서도 아렌트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본질적으로 사회주의는 그냥 계속 지속돼왔고, 극단적인 곳까지 치달아 자본주의가 시작된 지점에 도달했어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 체제가 자본주의의 해결책이어야 하나요?"(131쪽)

원문은 "In essence, socialism has simply continued, and driven to its extreme, what capitalism began. Why should it be the remedy?"(84쪽) 역자는 이 문장을 연속적으로 해석했는데, 내가 보기에 'what capitalism began'은 has continued와 (has) driven이란 두 동사의 (공통) 목적절이다. 다시 옮기면 "본질적으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시작한 것을 그냥 지속해서 그 극단으로까지 몰고 갔다." 곧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극단화된 형태일 뿐이므로 결코 대안적 사회체제가 아니라는 얘기다(자본주의가 시작된 지점에 사회주의가 도달하다니?).

 

번역은 불가불 오역을 수반할 수밖에 없지만 평이한 문장에서까지 엉뚱한 실수가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옥에 티라고 하면 할 수 없지만, '대중의 행복'이란 말이 납득하기 어려워서 독후감에다 번역에 대한 불평도 같이 적었다...

 

16.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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