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제니친(솔제니찐)의 <수용수군도>(전6권)가 리커버판으로 재출간되었다. 오래 고대한던 일이라 반갑기 짝이 없다. 추천사 요청에 망설임 없이 응한 이유다. 알라딘의 이벤트 페이지에 실은 추천사를 여기에도 옮겨놓는다...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책들이 올해 다수 출간되었고. 나대로는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 20세기>를 통해서 내 몫의 입막음은 했다고 자부한다. 20세기 러시아문학 소개서를 쓰면서 내가 그린 그림은 ‘고리키에서 솔제니찐까지’라는 것이었다. 고리키의 <밑바닥에서>(1902)부터 솔제니찐의 <수용소군도>(1973)까지. 그러면서 유감스러워 한 것은 한때 완역되었던 전6권 가운데 1권만이 겨우 출간돼 있는 사실이었다.

언젠가 대학에서 이 작품을 강의하면서도 1권만을 읽힐 수밖에 없었는데, 딴은 학생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갈망하면 이루어진다던가. 무려 22년만에 전6권이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출간된다. ‘서프라이즈’한 일이자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마무리하는 멋진 피날레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내년에 탄생 100주년이 되는 작가 솔제니찐의 위업을 미리 기념하는 의미도 갖겠다. 

솔제니찐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중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로 기억된다.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수호프가 수용소에서 보낸 하루, 심지어 아주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를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데뷔작으로 솔제니찐은 당시 소련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겉으로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표방했지만 실제는 거대한 수용소 국가라고 폭로한 이 단 한 작품만으로 솔제니찐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부상한다.

그렇지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일종의 맛보기였다. 솔제니찐은 이 문제작을 발표하기 전부터 ‘수용소의 하루’가 아니라 ‘수용소의 모든 것’을 집약하는 대작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3년 프랑스의 파리에서 처음 출간되지만 실제로는 1958년부터 68년 사이에 집필한 <수용소군도>가 그것이다. 이 작품의 해외 출간이 결정타가 되어 솔제니찐은 결국 소련에서 추방당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솔제니찐 문학의 선발대였다면, <수용소군도>는 바야흐로 본진에 해당한다. 실제로 2차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사소한 빌미로 체포되어 8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던 솔제니찐은 이 부조리하고 야만적인 체제의 알파와 오메가를 모두 기록하기로 작정한다. 당대 사회의 거대한 벽화를 그리고자 했던 발자크적 기획의 솔제니찐판이라고 할까.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탄생했다가 1991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소련은 어떤 국가였던가.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두 권의 소설(이라기보다는 논픽션)을 지목하고 싶다. 솔제니찐의 <수용소군도>와 알렉시예비치의 <세컨드핸드 타임>이다. 현실 사회주의, 곧 실제로 존재했던 사회주의 체제의 실상을 그 두 작품은 여실히 증언한다. 문학이 언제 위대질 수 있는가. 나는 이런 작품들과 함께할 때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기록, 위대한 증언, 위대한 고투를 읽는 시간은 우리에게도 결코 사소할 수 없는 시간이다. 바야흐로 우리에게도 <수용소군도>를 읽는 시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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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부터 대구에서 세 차례의 강의를 마치고 귀경중이다. 강의와 관련한 책도 여러 권이건만 욕심을 부려서 읽을 책을 더 넣어 왔는데 그중 하나가 김한식 교수의 <고전의 이유>(뜨인돌)다. ‘고전이 된 소설은 저마다 이유가 있다‘가 부제.

특별한 순서 없이 15권의 고전소설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데 시대순으로 재배열하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부터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까지다. 15권의 작품 가운데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제외한 모든 작품을 강의한 적이 있기에 나의 견해와 비교해보고자 챙겨넣었던 것.

어제 강의를 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카프카의 <소송> 장을 먼저 읽었는데, 평이한 내용이어서 좀 아쉽다. 학생들에게야 참고가 되겠지만 이런 해설서를 많이 접해본 독자에게는 중복의 느낌을 줄 듯. 특히 <소송>을 다루면서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풍자와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정리하는데 작품에 대한 해설로는 미진하다. 작품에 대한 저자의 판단과 견해가 확실하지 않아 얼버무리고 있다는 인상이다. 카프카가 1924년 6월 3일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215쪽)고 하고서는 다시 ˝1926년 그가 숨을 거둘 때˝(232쪽)라고 무심하게 적은 것이 그 증상이다.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해설은 <소송>보다는 나은 편인데, 그래도 작품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좀더 많은 분량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정지우의 <고전에 기대는 시간>(을유문화사)도 12편의 고전에 대한 독후감을 적고 있는데, 먼저 읽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저자의 소개와 감상이 별반 인상적이지 않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독서에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란 게 작동해서 많이 읽다 보면 자연스레 만족감이 떨어지게 되는 것. 그나마 루이스 카우언 등의 <고전>(홍성사)은 좀 의미가 있는데 내가 안 읽은 고전들이 상당수여서다. 안 읽은 고전들에 대한 해설서! 앞으론 그런 책들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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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조선소설사>가 <김태준의 조선소설사>(필맥)로 다시 나와서 바로 구입했다. 한길사판으로 나온 <교주 증보조선설사>(1997)을 소장하고 있는지 불분명하고 소장하고 있다 한들 찾을 방도도 없어서, 게다가 어차피 안 읽었던 책이라 주저할 게 없었다. 이번 판은 한겨레신문 기자를 지낸 이주명의 교정과 주석이 붙어 있어서 읽기도 수월하다. 어떤 의의가 있는 책인가.

˝김태준의 <조선소설사>는 근대적 소설 개념에 입각한 한국소설사로 최초의 저작이다. 표제의 ‘조선’은 이성계가 세운 이씨 왕조가 아니라 우리 겨레의 역대 나라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김태준이 20대 중반에 경성제국대학 재학생 신분으로 1930년 10월 31일부터 1931년 2월 25일까지 68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소설사>가 애초의 원본이다. 이 책은 학예사판 <(증보)조선소설사>를 저본으로 하되 동아일보에 연재된 <조선소설사>와 청진서관판 <조선소설사>를 참고하면서 필요한 최소한으로 교정과 주석을 가해서 엮은 것이다.˝

한국문학 강의까지 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책이 좀 되는데 <김태준의 조선소설사>도 그러하다. 더불어 몇년전에 구입한 임화의 <신문학사>도 서고에 들를 때 찾아볼 참이다.

한편 김태준과 관련해서 고 김용직 교수의 <김태준 평전>(일지사)이 진작 나온 바 있는데 당시는 여유가 없어서 구입하지 못했다. 이제 시간을 내 읽어보려 하니 절판된 지 오래다. 도서관에 대출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책은 소장가치도 있기에 재출간을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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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는 알라딘에서도 <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책세상)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책의 이미지가 비로소 뜬다는 얘기인데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 20세기>(현암사)와 <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마음산책)에 이어서 올해 세번째로 펴낸 ‘문학강의책‘이다. 상시적으로 하고 있는 문학강의가 이렇게 하나둘 책으로 묶여서 나오고 있고 내년에도 여러 권이 더 나올 예정이다(이러다 이 분야의 기록을 세울지도).

이런 강의책에 대한 수요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결코 놀랄 정도는 아니다. 다만 현장에서 이런 종류의 강의를 접하기 어려운 분들에게 강의 대용으로서 의미가 있으면 좋겠다. 더불어 바란다면 10년쯤은 읽을 만한 책으로 남는 것이다.

이제 살펴보니 책소개가 아주 길게 돼 있다. 책의 내용을 편집자가 공들여 간추려 놓았는데 관심있는 분들은 미리 살펴보셔도 좋겠다. 다만 그만한 분량의 소개글을 읽느니 책을 한권 다 읽는 게 시간절약이 될 거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제는 열두번째 책으로 넘어갈 시간이다. 손은 더디고 눈은 침침하다, 라고 적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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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컬렉션을 번역해오고 있는 문학평론가 조영일의 신간이 나왔다. <직업으로서의 문학>(도서출판b). 기억에는 세번째로 펴내는 문학론인데 이번에는 다소 얇다. 평론집이 아니라 문학에세이집이라고 돼 있군.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한국문학과 그 적들>, <세계문학의 구조>라는 평론집과 가라타니 고진의 번역자로서 유명한 조영일이 6년 만에 발간하는 문학에세이집이다. ˝문학은 직업일 수 있는가?˝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늘날 문학가나 문학 지망생들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문학의 상품적 성격과 그것을 생산하는 주체(작가)가 괄호에 넣어져 있는 데에 반해, ˝문학은 직업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상품으로서의 문학‘이 가진 의미와 그것을 파는 작가에 대한 실존론적 물음이기 때문이다.˝

제목은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패러디한 것으로 보이는데, 베버의 직업이 ‘소명‘을 뜻한다면 조영일의 직업은 말 그대로 ‘밥벌이‘를 가리킨다. 저자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문학은 직업일 수 있는가?‘란 질문이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라고 보는데 그건 아렌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작품을 작업(work)이 아닌 노동(labor)의 산물로 보는 견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대표적으로 허먼 멜빌은 문학이 직업이 못된 경우다. 작품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상당 기간 동안 문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작가에게 문학이 직업이었느냐, 아니었느냐와 무관하게 작품은 존재한다. 단 한권의 시집도 생전에는 펴내지 못한 시인도 존재하는 것처럼. ‘문학이 직업일 수 있는가?‘가 그토록 중요한 질문인가에 대해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인데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논변이 궁금하다.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함이다. 저자의 주장 한 대목.

“작가들이 글을 써서 먹고살 만해진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즉 ‘직업으로서의 작가’(전업작가)는 언제부터 등장한 것일까요? 저는 그것을 1980년대라고 봅니다. 물론 이청준, 최인호, 황석영 등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1970년대가 되면 소위 문학으로 먹고사는 것이 가능해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의 성공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전업작가의 등장이 1980년대부터라? 흥미로운 견해라고 생각한다. 70년대 작가들의 성공이 제한적이었다고 보는데 80년대부터는 그런 제한이 풀렸다는 것일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자면 전업작가로서 먹고살 만한 작가는 요즘도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 아닌가? 1980년대라고 저자가 특정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읽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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