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누구를
은행나무 도열한 가로수길을 걸어서
안과에 왔다 지난 주말은 휴일이었지
어제보다 더 충혈된 눈으로 일어나니
한 대 맞은 사람 같다더군
나는 맞고 다니는 사람
시를 쓴다면서 맞고 다니나봐
누구한테
부은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도 부어 보이지 너도
그래서 조용하구나
눈이 부은 사람들과 부을 사람들이
모여 앉았지 만난 일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친구를 떠올린다
오늘은 멜빌과 마르크스의 전기가 온다
나는 죽은 친구들과 친하지
그들의 책을 읽고 그들의 생각을 얘기하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나는 그들의 생몰연대를 알지
가족사항을 알고 연애와 결혼도 알지
고뇌도 알고 의의와 유산도 알지
그만큼 아는 친구가 있던가
몇년 전 강남역에서 삼겹살을 같이
구워 먹은 친구는 대리운전을 한다지
사업을 벌인 줄 알았는데 우리는
아는 게 없어 멜빌과 마르크스만큼도
누구를 소개할까
최근에 사귄 친구는 헨리 소로지
마흔다섯에 세상을 떠나
나보다 어린 친구 그래도
배울 게 많은 친구 숲속의 생활과
불복종 전문가라네
게다가 혁명적 사상가라네
두 권의 전기를 어제 주문했다
소로의 인생 전체가 곧 배송될 테지
나는 더 깊이 사귈 수 있을 테지
나는 죽은 친구들과 주로 사귀지
너도 떠난 지 오래 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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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5-1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은 자는 편리하다
죽은 자와 사귀는게 산 자와 사귀는 것보다 편리하다
좀 비겁한? 친분쌓기를 저도 하고 있는 중이네요.

로쟈 2018-05-12 11:45   좋아요 0 | URL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은되죠.

2018-05-12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2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2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2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없다
언젠가 그렇게 쓰고 싶지
그건 시의 한 경지
허구한 날이 싫었던 날이어도
오늘은 특별히 싫었던 날이자
싫었던 날의 으뜸이어야지
오늘 아래 모든 날들이 무릎 꿇는 날
그날은 완벽한 날이어야지
아침부터 꼬이기 시작해서
포인트를 쌓기 시작해서
점심에 이미 기록을 갱신하고
저녁이 오기 전에 모든 정나미가 떨어져야지
그날은 기운나는 소식도 없어야 해
아니 혼자만 불행한 게 더 효과적일까
그날은 밧줄에 목을 매다는 일도 여의치 않아야지
성공이란 건 없어야지 되는 일이 없어야 돼
완벽하게 모든 일이 잘못 돼야지
그리고 비로소 쓰는 거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없다
그런데 그 시는 완성될 수 있는 걸까
완성되어도 되는 걸까
완벽하게 싫었던 날을 시가 구제해도 되는 걸까
시가 망쳐도 되는 걸까
그럼 나는 한 줄 더 적어야 할 테지
오늘처럼 시가 싫었던 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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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5-12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보다 더 싫었던 날이 분명 있었을거에요.
기억을 못(안)할 뿐!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오늘이 위로가 될듯.

로쟈 2018-05-12 11:10   좋아요 0 | URL
가장 싫었던 날을 상상해본 거예요.
 

행복한 가정은 무엇 하나
뾰족한 게 없어서 둥글고 둥글다
너무 둥글어 터지기 직전이다 행복은
폭발적이다 행복은 폭죽처럼 찬란하다
집이 다 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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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5-11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은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군요.
다 불사르고~~

로쟈 2018-05-11 23:39   좋아요 0 | URL
행복도 조심해야.~

모맘 2018-05-1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랫동안 둥근 것만이 좋은 건 줄 안거죠

로쟈 2018-05-12 10:34   좋아요 0 | URL
^^
 

이주의 마지막 일정으로 강의차 지방에 내려가는 중이다. 강의책과 함께 가방에 넣은 책은 지젝의 신간(Reading Marx)과 정한아의 시집 <울프 노트>(문학과지성사)다. 소설가 정한아와 동명이인.

첫시집으로 <어른스런 입맞춤>(문학동네)가 있고 이번이 두번째 시집. 간간이 시작 메모가 달려 있는 게 특징이고 대체적인 안정감이 장점이다. 안정감은 논리에서 나오는데, 아무 시나 들춰도 되지만 가령 마지막 시 ‘하느님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죽은 자는 편리하다
모든 책임은 그에게 떠맡기면 되니까
울부짖을 목구멍도, 송사를 제기할 손가락도 없으니까
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죄와 사랑은 이제 영원히
무저갱 속으로 침묵하고
침묵의 관은 넓고도 넓어
여차하면 삼라만상을 품을 수도 있으니까

‘죽은 자는 편리하다‘는 단언 이후에 그에 대한 해명이 따르는 것, 이런 게 이 시인의 시다. -하니까가 붙는 것이다. 내지 그런 게 붙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해명이 불필요하다고 보는 시인들도 있다. 그들은 뒤도 안 보고 질주한다. 반면에 정한아는 뒤돌아본다. 그렇다고 독자에게 철저하게 봉사하겠다는 건 아니다. 적당히 놀라게 하고 낯설게 하고 협박할 준비도 갖추었다. 그럼에도 문형 자체의 논리성은 견고하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은 ‘샬롬2‘에서도 마찬가지다.

웃지 않는 여자 거지 김태희가 나는 좋아
김태희는 만두가게 청년들이 붙여준 이름
밤새 축구 보고 감자탕집에서 나오다 만난 김태희는
역전 벤치에 양반다리로 앉아 해돋이를 보고 있었네
집이 없는 김태희
신들린 김태희
(...)

여기서도 ˝웃지 않는 여자 거지 김태희가 나는 좋아˝라고 쓰고 김태희가 누군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김태희는 만두가게 청년들이 붙여준 이름˝이라고 덧붙이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막상 요즘 시들이 이런 방식으로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정한아의 시가 논리적이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걸 해설에서 조재룡 교수는 ˝정한아의 시는 가식이 없다˝고 평한다. 가식적인 시들이 많기에 눈에 띈다고 읽힌다.

아직도 눈이 피로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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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8-05-11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담기는 것이 시집이어서 좋습니다^^

로쟈 2018-05-11 12:24   좋아요 0 | URL
읽기 편하기도 하고요.~

2018-05-11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1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이 싫어서 우주로 떠났다
우주가 싫어지면 어디로 떠날까
나무는 뿌리가 싫어지면 어디로 떠날까
새는 발밑이 싫어지면 어디에 앉을까
가수는 노래가 싫어지면 무슨 노래를 부를까
달팽이는 기어다니는 게 싫어져도 달팽이일까
망치는 못 박기가 싫어져도 연장함에 있을까
코 풀기가 싫어진 손은 지금도 주머니에 있을까
사랑이 싫어져서 당신은 우주로 떠났을까
떠나기가 싫어서 해는 아침마다 발돋음하고
어젯밤 꿈들은 서둘러 퇴장했다
분장을 마친 꽃들이 아침부터 즐비하다
우주가 싫어지면 어디로 떠날까
거기도 싫어지면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걸까

이제 외출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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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5-11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싫어지면 우주로 떠날수나 있지만
내가 싫어지면 어디로 가야할지~~

로쟈 2018-05-11 12:00   좋아요 2 | URL
딴데 정신파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