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과학서로 꼽음직한 스티븐 실버판의 <뉴로트라이브>(알마)의 부제다. 정확히는 부제의 절반이다. 전체 부제는 ‘자폐증의 잃어버린 역사와 신경다양성의 미래‘. 제목과 부제로는 독자가 한정될 듯싶지만 자폐증을 다룬 책으로는 최고라는 평판이다.

작고한 올리버 색스도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보기 드문 공감능력과 감수성으로 이 모든 역사를 넓고 깊게 그려낸다. 이 책을 읽는다면 자폐증에 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

자폐증에 관한 갖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봐야겠지만 여하튼 자폐증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도 하니까 한번쯤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몇년전인가 자폐증 관련서를 구한 적이 있는데 대개 전문서들이었다. 교양수준에서도 읽어볼 만한 책인 듯싶어 반갑다(저자는 의학자가 아니라 저널리스트다).

색스는 서문에서 자신의 책도 은근히 소개하고 있는데 회고록 <엉클 텅스텐>과 <화성의 인류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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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책장 공사를 하며 식당과 거실의 책을 얼추 정리했지만(그래도 거실 바닥에는 아직도 쌓여 있는 책들이 있다) 아직 서재로 쓰는 두 방의 책들은 철옹성을 자랑한다. 무질서하지만 빈틈없이 쌓여 있어서 터무니없는 비유를 쓰자면 마치 도요토미의 오사카성 같다. 강의에 필요한 책을 찾다가 이번에도 허탕을 치고 대신 <2018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을 손에 들었다. 기억에 대상작인 박민정의 ‘세실, 주희‘를 읽다 만 것 같다.

다시 손에 든 건 마저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 붙인 작가노트를 읽기 위해서였다. 어쩌다 연휴 초반에 손에 들게 돼 그럭저럭 읽어버린 게 박상영의 첫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문학동네)여서 일종의 디저트로 읽었다. 예상대로 그의 많은 이야기가 경험담으로 보이는데, 공식적인 분류는 아니지만 나는 이런 작가군을 자멸파라고 부른다. 자기 삶을 창작의 불쏘시개로 쓰는 작가들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가 다자이 오사무. 내 식으로 분류하면 박상영은 다자이과에 속한다. 하위분류로는 ‘퀴어 다자이‘.

<자이툰 파스타>의 첫 단편 ‘제제‘(제목이 너무 길어서 ‘제제‘라고만)에 이끌려 한편 더 읽어보자는 계산으로 읽어나갔는데 나로선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와 그 짝이 되는 ‘부산국제영화제‘까지가 재미있었고 ‘자이툰 파스타‘에 이르러서는 벌써 물린다는 느낌이 들었다(뒤에 이어지는 단편들은 현저하게 힘이 빠졌다). 작가 자신의 토로대로 감정 과잉은 독자를 오래 붙들지 못한다. 술 마시고 택시를 탈 때마다 울었다는 고백도 두번, 세번 듣다 보면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소설집 이후에 발표된 작품으로 <자음과모음>(2018 겨울호)에 실린 ‘재희‘가 나로서는 박상영의 한 시기를 결산하는 것으로 읽힌다(대학시절 특별한 절친이던 재희의 결혼식에 참석한 ‘나‘가 그들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되돌아보는 이야기인데, 현재 시점의 ‘나‘는 갓 등단한 신인작가로 나온다). 믿거나 말거나 그 자신의 민낯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편인데, ‘패리스 힐튼‘과 ‘부산국제영화제‘와 3종세트로 따로 묶어도 좋겠다 싶다.

한번 적었지만 문제는 이 작가에게 더 쓸 거리가 있을까, 라는 것. 자멸파 작가들은 자기 생을 탕진해가며 쓰기에 소재가 한정될 수밖에 없다. 다작이 가능하더라도 대개 반복이고 재탕이다. 다자이 오사무가 몇몇 작품으로만 기억되는 이유다. 이런 작가가 무얼 취재해서 3인칭 시점의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얼른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건 다른 종류의 작가에게 기대해야 하는 것이리라. 두번째 소설집에는(짐작컨대 2-3년 안으로 나옴직한) 어떤 작품들이 실릴지 궁금하다. 작가로서의 생산력을 가늠하게 할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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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함께 요즘 강의에서 다루는 작가는 미국 작가 이디스 워튼(1862-1937)이다. <순수의 시대>(1920)로 여성작가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또 국내에서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순수의 시대>(1993)로 새삼 이름이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

다작의 작가이지만 워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건 <기쁨의 집>(1905)과 <그 지방의 관습>(1913), <순수의 시대> 등의 장편과 <이선 프롬>(1911) 같은 중편이다. 강의에서는 <그 지방의 관습>만 다루지 못했는데, 학술명저번역으로 출간돼 책값이 너무 비싼 것이 이유다(그런 이유에서 강의에서 읽지 못하는 작품이 여럿 된다. 디킨스의 <작은 도릿>이 대표적이다. 번역본으로는 네 권짜리에 책값이 6만원에 이르니 ‘디킨스의 이 한권‘이라면 모를까 <전쟁과 평화>만큼 중요한 작품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워튼을 읽는 맥락은 여러 가지인데, 나는 강의에서 1)100년전 작가로 여성의 결혼 문제를 주로 다룬 제인 오스틴과 워튼, 2)뉴욕 상류사회 출신으로 20년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분이 깊었던 작가 헨리 제임스와 워튼, 3)동시대 작가로 미국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그렇지만 발자크의 영향도 두드러진다) 시어도어 드라이저와 워튼, 4)그리고 탁월한 심리묘사의 선구적 작가 스탕달과 워튼 등을 주요한 맥락으로 다룬다. ‘사교계 소설‘이라는 면에서는 톨스토이의 작품들과도 비교할 수 있는데, 쓰인 시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안나 카레니나>나 <순수의 시대> 모두 187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순수의 시대>는 좀더 긴 시간대를 배경으로 갖지만).

대단히 자세한 세부묘사와 섬세한 심리묘사가 강점이라고 생각되는 워튼은 작품 말고도 생애 자체가 전범으로서 의미가 있다. 여성작가로서만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주체적인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 전력으로 모색한 대표적인 사례여서다. 작품뿐 아니라(주요작은 번역돼 있다) 자서전과 평전이 번역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영어로는 몇권의 평전이 나와있고(일부는 절판되었다) 나는 버지니아 울프 평전을 쓰기도 한 허마니오니 리의 평전을 주문해놓은 상태다. 그녀의 자서전은 진작 구입했었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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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마지막날에 대부분 느끼는 침울함과 함께 동네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가방에는 내일 강의할 책들을 넣어 왔다. 즐거운 연휴가 끝나서 침울한 게 아니라 늘 그렇듯이 해야 할 일들을 끝마치지 못해서 침울한데, 매번 연휴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니 이 또한 습관이다. 휴일이 아닌데 휴일로 시간을 보낸 데 대한 습관적 괴로움이라니.

연휴에 무얼 했던가. 박상영의 소설집을 읽고(나는 그가 3인칭 소설을 쓸 수 있을지 궁금하다. 혹은 홍상수 영화가 그렇듯이 술먹고 섹스하는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쓸 수 있을지도), 하라리의 책을 절반 정도 읽고(하라리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안도감이다. 이걸 전세계적으로 수백만의 독자가 읽는다는 안도감. 그럼에도 역부족인 것인지 궁금하다. 하라리는 책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늠해보는 척도다. 혹은 대중독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그의 예측대로 ‘대중‘의 시대도 이제 서서히 힘을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잠시 들춰본 여러 권의 책.

연휴에는 책주문을 자제하는 편이지만 이번 연휴에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외서는 일단 (개인적인) 주문제한이 적용되지 않는 데다가 내달 독일여행을 앞두고 이래저래 챙겨볼 책들이 생겨서다. 여행서가 대표적인데, 론리 플래닛 베스트 시리즈 몇권을 주문한데 이어서 이다혜의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나 오지은의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등의 책이 장바구니에 들어가 있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는 물론 보들레르의 인용일 텐데, 오늘처럼 흐린 날 침울한 기분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더욱 절감하게 된다. 언젠가 적은 대로 시는 인식이 아니라 기분의 권력에 봉사한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그 권력의 순종하는 신민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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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인디고유스북페어 강연에 뒤이은 질의응답이다. 사회자의 질문에 이어서 청중들의 질문이 이어졌고 그에 답했다. 지면에 정리된 원고를 그대로 옮기되 일부 수정했다. 



인간의 가능성을 찾아서


사회자    문학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을 해주셨고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의 지평을 넓혀주시는 말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먼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인간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번 행사의 큰 주제이기도 한데요. 선생님이 쓰신 『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에 소개된 많은 작품들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선한 인간, 악한 인간, 고뇌하는 인간, 슬퍼하고 고통받는 인간, 추악한 인간, 우스꽝스런 인간 등등. 저는 문학을 읽으면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마주하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인간의 본성에 관해 생각해보게 하는 여러 사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인류는 지금껏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대규모 학살과 전쟁을 경험하였고, 한편으로 평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선한 개인들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때로는 악랄하고 이기적이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여 삶을 내던지는 인간이라는 모순적인 존재를 과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선한 의지와 가능성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과연 문학을 읽는 행위가 우리를 인간답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현우   너무 큰 질문이긴 하죠. 인간이라는 가능성과 인간에 대한 신뢰가 과연 가능한가, 어떻게 가능할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볼테르가 이야기한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5분 만에 3만 명이 희생된 대참사였어요. 볼테르를 포함해서 당시 기독교 신자들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신앙인이건 아니건 모두 희생자가 되었다는 거죠. 지진이 신의 분노라고 생각했는데,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악인들만 처벌해야 하죠. 그런데 무차별적으로 땅이 다 갈라져 버리고 그냥 다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는데, 주인공 캉디드는 그런 현실 속에서도 모든 것은 최선의 선택으로 이루어졌다는 라이프니츠적인 낙관주의를 계속 유지하는 인물로 나옵니다. 그런 낙관론을 희화화하는 것으로 많이 읽히는 작품이 『캉디드』이기도 합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란 책에서도 흥미로운 생각이 소개됩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상상을 세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는데 하나는 유일신이면서 선신에 대한 믿음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선신과 악신이 존재하고 세계 역사는 두 신의 투쟁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류가 배제하는 한 가지가 가능성은 유일신이 있고 그 신이 악신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다 이해가 돼요. 세계의 온갖 미스터리를 다 이해할 수 있죠. 지진이 왜 일어나는가, 악신이 있어서 그렇죠. 생각해볼 이유가 없어요. 근데 선신이 있다고 믿으면, 우리의 생각이 곡예를 해야 해요. 더 다른 뜻이 있는 거다, 섭리가 있는 거다, 인간인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같은 작품에도 나옵니다. 신부가 등장하는데, 처음에 페스트가 퍼지니까 신의 심판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요. 너희가 지은 죄가 크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페스트가 좀 더 진행되니까 순진무구한 어린이들까지도 무차별적으로 희생이 됩니다. 그러니까 신부가 설교 도중에 입을 다물어요. 신의 뜻을 인간이 알 수 없다, 이렇게 해요. 굉장히 곤혹스럽습니다. 선신이라서 그렇습니다. 소설 속 신부가 믿는 신이 악신이었다면 '원래 짓궂으시잖아요'라고 이야기하면 모두 이해가 돼요. 맞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신에 대한 관념은 긴 인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들이 있습니다. 신석기 혁명 이후에 정착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이전하고 이후하고 공동생활의 규모가 현격하게 달라집니다. 수렵채집단계에서는 무리의 규모가 수십 명에서 많아야 150명 그 이상 넘어가질 않아요. 지금 영장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천만 마리의 원숭이가 떼 지어 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전에 여러 군집이 나뉩니다. 그런데 인간이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공동체의 규모가 비대해지고, 그때 등장하게 된 것이 종교입니다. 이렇게 대규모로 함께 살면 예전에는 발생하지 않았던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급이 분화되고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생기게 됩니다. 수천, 수만 명씩 모여 살게 되면 안면 공동체가 될 수가 없어요. 현대 사회에는 이것이 일반적입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 변화된 환경 속에서 요구된 게 종교입니다. 절대적인 존재자, 신을 가정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를 덜게 됩니다. 약간 모순적일 수도 있는데, 신을 믿음으로써 이웃사랑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많은 경험을 통해 신을 믿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상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라든가 온갖 종교전쟁은 그래서 일어났습니다.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게 명분이 돼서 죽이는 겁니다. 내가 인간적으로는 너랑 원수진 게 전혀 없지만 그런데 나는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 말하지요. 󰡒너는 신교를 믿고 나는 구교를 믿잖아󰡓, 종교 전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맨정신에 이웃을 죽일 수가 없어요. 신을 사랑해야 죽이는 겁니다. 즉, 신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알 수가 있어요. 


신에 대한 사랑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회복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저는 그게 정치적 이념으로서 박애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혁명 이념이긴 한데 자유․평등․박애라는 이념이 있어요. 오늘 주제가 󰡒문학은 자유다󰡓이지만, 저는 이 말 세 가지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은 자유다, 문학은 평등이다, 문학은 박애다. 자유․평등․박애는 동시적인 것이 아니고 순차적인 이념이에요. 그러니까 프랑스 혁명 이후에 시민 계급이 자유를 쟁취하게 됩니다. 근데 그게 민중계급으로까지 확산되어가는 것, 그게 평등입니다. 그리고 그런 권리가 보편화되는 것, 그게 박애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지막 단계에서 저항이 많아요. 난민문제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지요. 그들은 남인데, 어떻게 동등하게 대할 수 있냐는 것이에요.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국민들이나 챙겨요, 난민들 챙길 생각하지 말고"라는 장벽이 있어요. 


그런데 박애라고 하는 것은 그 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자세로 포용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직 우리는 그런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그걸 극복하고 더 나아가는 것, 그게 박애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설 때, 국민국가적 경계를 넘어설 때 세계가 탄생합니다. 저는 먼 훗날 인간이 더 진화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근데 그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우리가 기다리기는 어렵고, 좀 빨리 뭔가를 바꿔보려고 한다면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바뀌는 걸로 충분한가, 하는 것도 확실하진 않아요. 그렇지만 해볼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일단 생각을 바꿔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세계에 대한 관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우리의 유전자 본성 안에 없어요. 우리가 따로 입력해야 하는 겁니다. 주입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주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은 나하고 가족을 챙기는 것입니다. 그건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이에요. 동물들도 그래요. 근데 나하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타인에게까지 도움을 주는 것,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해요. '의인'이라고 부르는 건 드물어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데 다른 사람을 구하는 사람들이 높이 칭송받는 그런 게, 우리 DNA 안에 없어서 그래요. 그런 사례를 들을 때마다 혹시 그들의 판단에 착오가 생겼거나 아니면 실수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죠. 물론 흡혈박쥐들도 동료 박쥐들에게 자신이 먹은 피를 나눠주기도 합니다. 순번이 있지요. 가족이나 가장 가까이 사는 이웃부터 나눠줍니다. 그런 본성을 우리도 갖고 있어요. 그런데 박쥐처럼 고정적 규모에서는 이게 가능한데 문제는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하고 전혀 낯선 사람들과 공존한다는 겁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자 한다거나 그들을 돕고자 한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 안에 없다고 봐야 합니다. 본성 안에 없으면 문화로 취득할 수밖에 없어요. 강제적으로 주입받아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그래요. 


세계라는 것은 새로운 겁니다. 새로운 것이고 탄생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요. 지리상 발견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세계라는 걸 갖게 됩니다. 전혀 새로운 환경이고 새로운 조건입니다. 거기에 맞는 사고, 감정 이런 게 만들어져야 해요. 몸의 변화는 더디겠지만, 사고는 유연하게 변할 수 있어요. 그게 우리가 기대해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의 관행적인 생각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 시대에 문학을 읽는 방법


사회자    지난 8월, 제주도에서 찍힌 한 장의 사진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된 비자림로의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삼나무숲에서 마치 면도기로 민 듯 900여 그루의 나무가 잘려나갔기 때문입니다. 도로확장 공사를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인간의 편리함과 경제발전을 위해서 자연을 훼손해온 지금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가 너무도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릴 때, 그 숲길과 숲에 살고 있었을 생명의 권리에 대해서, 그 숲길을 달리며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을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숲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릴 수 없는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명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는 새로운 가치와 문화가 창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문학은 언제나 가장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으로 세계를 끌어안고 세계의 문제를 말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학이 그 힘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시대의 문학은 그 사회에 어떠한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이 한 사회의 문화와 가치를 바꾸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현우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기준, 가치관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저도 동감합니다. 거기에 문학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라 생각하는데요. 제가 2015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내한했을 때 했던 질문이었어요.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여쭸더니 "성경도 인간을 바꾸지 못했다. 뭘 기대하느냐"라고 답하셨지요.(웃음) 그게 일단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대단히 타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오늘 제가 말씀드린 것들이 집에 가면 다 기억 안 날 거예요, 아마. 망각기제들이 제대로 다 작동하기 때문에 보통 듣고 싶은 말만 우리는 듣고 기억하죠. 다시 말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은 우리 의식과는 매우 다르게 굉장히 급속한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지금 여러분 다 갖고 있는 스마트폰이 발명된 지 불과 10년이 채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사용해요. 우리 몸이 변하는 건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근데 기술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속도로 가고 있기 때문에 이 간극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이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역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때 해야 해요.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몇 가지 사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8세기에 감상주의 문학이 있었는데 인간의 감정을 중요한 것으로 다루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어요. 그것이 인권에 대한 관념을 갖게 했다고 평가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랑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나요? 관심법으로 아나요? 이게 감상주의 문학의 중요한 기여이기도 한데, 인물들이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감정이입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게 문학의 중요한 역할이고, 분명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높이 평가할 순 있지만, 동시에 과대평가해선 안 됩니다. 독일의 경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수용소의 관료들이 저녁이면 클래식을 듣고, 괴테 시를 읽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사람을 죽였어요. 학살에 부역했습니다. 그렇지만 수준 높은 교양인이었어요. 예술적 교양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예술적 감수성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악행을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죠. 그러나 또 과소평가할 순 없어요.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확실한 긍정적인 답변을 드릴 수 없어 안타까운데,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진 말자는 겁니다. 그렇지만 희망을 버리진 말자는 것이구요. 만약 작품을 더 읽었더라면 환경 파괴, 나무들이 개발에 베어나가는 일은 좀 덜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기대를 걸어보는 겁니다. 그렇지만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인간의 악의에 대해서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희망을 버리진 말되 너무 큰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거기까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문학을 사랑하기 위해서


청중    저는 문학과 교육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저는 문학이 신념과 철학을 전달하는 매개체이자 세상의 시선을 담아내는 눈, 그 외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우리나라 국어교육이 시간 내에 지문을 해부하는 걸 중점으로 두고 있어 큰 실망감을 느꼈고, 그 때문에 많은 친구가 문학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청소년이 어떻게 문학을 바라봐야 할지에 대해서 개인적인 조언과 앞으로 우리나라의 문학 교육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이현우   저도 작품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 있으니 문학 교육에 종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 불만은 다들 품고 있더라고요. 예민한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못 견뎌 하는 수준인 것 같아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문학이라곤 거들떠보지 않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교육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개선이나 변화를 시도해봐야 하는데 시간이 문제입니다. 오래 걸려요. 희생하는 셈 치고, 후배들, 후배들의 후배 정도에 가면 뭐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계속 애를 써야 달라질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제도나 교육에 대해서 빨리 포기해야 해요. 그게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하나는 좀 희생하더라도 제도의 변화를 위해 애를 쓰는 것, 그것이 문학에 대한 사랑을 지킬 첫 번째 방법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부딪치는 겁니다. 학교에서 뭐라 가르치든 간에 나는 다르게 읽겠어요, 하고 배짱을 부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야 자신을 잘 보존할 수가 있어요. 그렇게 조금만 참으면 잘 이뤄집니다. 중․고등학교는 특별히 애쓰지 않는 이상 6년이면 끝이 납니다. 그러면 자기 시간을 가질 수가 있어요. 그 동안 문학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국어 선생님이 아무리 나무라더라도 상처받지 말고 잘 간직하고 있다가 대학에 가서 자유로워진 다음에 그 사랑을 자유롭게 표현하면 됩니다. 시험문제는 그냥 그렇게 해줘요. 그런 걸 요구하니까 그렇게 해주는 거죠.(웃음) 시험문제와 자신의 신념을 일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스트레스를 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세계문학이어야 하는 이유


청중    세계문학을 통해서 세계시민의식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다는 부분에서는 동의하지만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도약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어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사람마다 취향과 감정선이 다 다르듯이 문학의 묘미는 읽는 사람에게 달린 것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계문학이라는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현대소설이나 현대의 시를 통해서 인간의, 혹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 아픔을 사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이나 보편이 정해진 게 아니고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이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세계문학의 정의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현우   당연히 문학을 보는 여러 관점이 있어요. 그리고 그 관점 간의 어떤 차이가 해소 가능한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생깁니다. 말씀하셨듯이 복수의 문학관이 있기 때문이죠. 말씀드린 건 제가 보는 문학입니다. 제 견해를 참고만 하시면 됩니다. 고정불변의 진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저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드렸다기보다는 어떤 요청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문학이 필요하다는 제 바람이고 주문입니다. 



어떤 문학 작품들은 별도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감동이나 공감을 줄 수 있다는 견해에도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항상 의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생각하는데 베스트셀러를 보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예를 들어 파울루 코엘류의 『연금술사』라는 작품이 있어요. 저는 그런 작품을 세계문학하고는 다른 지구문학이라고 부르는데, 저 혼자 그렇게 불러요.(웃음) 지구문학은 전 지구적 문학시장에서 상품으로 널리 유통되는 문학인데,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가 그렇습니다. 그런 문학가들의 탄생 시기는 80년대 말부터예요. 그 이전에는 탄생할 수가 없어요.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에 비로소 전 세계적인 문학시장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구문학을 세계문학과 구별을 두는 건 세계문학으로서 역할에 미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구문학이 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줬기 때문에 많이 읽힌 거라고 생각해요. 근데 왜 문제적으로 보느냐 하면 세계에 대한 관념을 새롭게 갖게 하고 확산시키는 데 도움을 안 주기 때문이죠. 『연금술사』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런데 산티아고라는 양치기가 보물을 찾는 이야기에요. 그사이에 연인도 만나게 되는데 결말에 보물도 찾고 사랑도 찾고 그래요. 『인어공주』 같은 유명한 작품이 있잖아요? 그런 동화만 하더라도 다리를 얻기 위해서 목소리를 잃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동화는 아이들에게 현실은 냉정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게 해줘요. 그런데 『연금술사』는 완벽한 판타지 세계에요. 간절히 바라면 원하는 걸 모두 얻을 수 있다,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과 세계관이죠. 그런 시각으로 독자들을 현혹하고 감동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감동했다고 한다면 자기를 개조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자신에게 좀 냉정해야 해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다 좋은가요? 우리의 욕망과 욕심을 날것으로 보면 너무나 위험합니다.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도 있어요. 한편으론 이기적이고 가짜 만족감일 수도 있습니다. 그로부터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반성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작가 밀란 쿤데라가 강조한 것이기도 한데, 인식적인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래서 시보다는 근대문학의 중심이 산문 소설이 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 재현하고 그로 하여금 현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끔 해주는 것. 그런 점에서 여타 장르에 비해서 소설문학이 우월성을 갖고 있어요. 저는 정서나 감정도 중요하긴 하지만 인식적 깨달음이라는 게 중요하고 문학을 판단할 때 그런 부분을 많이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서 과정은 고통이에요. 책장도 잘 안 넘어가고 잘 안 읽히고.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뭘 깨닫게, 인식하게 해줍니다. 우리를 너무 만족스럽게 하는 건 다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를 만만하게 보는 겁니다. 쉽게 감동해선 안 됩니다. 


18. 0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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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2018-09-25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후에 책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게 경계심을 가져야되고 문학에 대한 -도서선택- 책임의 무게가 무겁네요

canon 2018-09-26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에 대한 인간의 비판은 유일신이 있는데 그 신이 악신이고, 그 신의 더 다른 뜻은 없는거고, 섭리도 없는거고, 인간인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면 거짓이라는 그 오래된 주장을 또 사용하는것이지요.

two0sun 2018-09-29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문단이 가슴에 와서 얹히네요.
어쩌면
쉽게 편하게 만족해하고
정작 불만족스러워해야 할것엔 눈을 감아버리고
무엇이 감동인지도지도 모르면서(모른척하면서)
살고 싶었는지도.

한발한발 내딛을수록 고통인걸 알면서도 이젠 되돌아 갈수도 없는 길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그저 주저앉지 않고 느리게라도 나아갈수 있길~~


김건우 2018-09-29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 되어버렸다고요. 다른 분야가 그렇게 되었듯이, 경계에 놓인 것들이 수없이 많이 생겨버렸습니다. 한때는 비극만이 예술이라 주장하던 시절도 있었고, 행렬이 ‘순수한‘ 수학이 될 것이라 믿던 사람도 있었어요. 누군가는 전기와 자기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외치기도 했죠. 그러나, 그 모든 분야들은, 범주는 하나로 뭉쳐져서 거대한 혼돈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어떤 정의를 들고 나온다고 한들 그 반례를 제시하는 것은 대단히 간단한 것이 되었고, 이제는 모든 정의가 잘못된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세상에 대한 관념을 새롭게 가지게 하는 것을 기준으로 나누려고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나 싶습니다. 공장과 같은 곳에서 만들어내는 소설과 정식절차를 제대로 밟은 사람이 쓰는 소설은 사실 본질적인 곳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