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차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리시올)을 읽었다. 피셔는 영국에서 2000년대 이후 가장 주목받은 비평가였다는데 ‘K-punk‘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블로그 지식인이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2009)이 그가 펴낸 첫 책이고 이후 <내 삶의 유령들>(2014)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2016) 등을 펴냈다. 201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유작으로 <K-PUNK>가 나왔다. 이 책들을 모두 주문했으니 나로선 ‘전작 작가‘의 한 명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피셔는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상상마저 봉쇄한 자본주의의 위세를 인정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그렇지만 19세기에 마르크스가 그랬듯이 그는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한 체제라고 보지 않는다. 포스트자본주의에 대한 상상과 모색은 그래서 필연적인 과제가 되지만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 슬라보예 지젝과 마찬가지로 먼저 요구되는 것은 현 시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피셔는 이 인식을 문화비평의 형태로 제시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좋은 문화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그의 작업 전반을 따라가 보려고 나머지 책들도 주문한 것인데 마침 지난주에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구픽)도 출간되었다.

원저에는 들어있지 않은데 한국어판 <자본주의 리얼리즘>에는 부록으로 조디 딘과의 대담이 실려있다. <지젝의 정치학>이란 책의 저자로 접했는데 여러 권의 흥미로운 책을 더 썼고 최근에 <공산주의의 지평>(현실문화)이 번역돼 나왔다. 피셔는 ‘포스트자본주의‘라고 부르지만 딘은 전통적인 용어로 공산주의란 말을 계속 쓴다. 그렇지만 슬라보예 지젝에게서도 그렇듯이 이 공산주의는 새롭게 발명되어야 할 공산주의다. 딘의 책도 이번에 몇 권 주문했다. 지젝 이후 좌파이론의 향방에 대해서 두 저자를 참고해보려 한다...

PS. <자본주의 리얼리즘> 80쪽에서 ˝이것이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소비에트 국가의 실패를 ‘인정했던‘ 1965년 연설이 그토록 중대했던 이유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연도 표기가 잘못되었다. 확인해보니 원저에서부터 1965라고 잘못 표기되었다. 흐루쇼프(요즘 표기)의 유명한 연설은 1956년 제20차 전당대회에서의 비밀연설을 가리킨다. 1964년에 실각한 그가 1965년에 무슨 연설을 했다는 것부터가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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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3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강의에서 읽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에 대해서 적었다. 대략 2000년대 이후 2012년 절필하기까지의 작품들이 그의 말년작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싶다. 케페시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죽어가는 짐승>(2001)부터가 되는지. 그의 마지막 작품은 <네메시스>다...



 













주간경향(19. 06. 24) 죽음을 앞둔 보통사람의 보편적 운명


지난해 세상을 떠난 필립 로스는 생전에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간판 작가였다. 2016년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오히려 문학독자들의 시선은 필립 로스를 항하기도 했다. 밥 딜런이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수상자였다면 필립 로스는 누구라도 동의할 만한 수상 후보였다. 미국 최고의 작가라는 평판과 30여편의 소설을 발표한 다작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필립 로스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오래되지 않는다. 처음 정식 판권계약을 맺고 출간된 <에브리맨>(2006)이 신호탄이었다. 2012년 절필을 선언한 그에게는 말년작의 하나다.

노년에 이른 작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필립 로스의 말년작들은 노년과 죽음을 주제로 다룬다. <에브리맨>도 마찬가지다. ‘보통사람’을 뜻하는 ‘에브리맨’은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가게의 이름이지만 죽음을 주제로 다룬 이 작품에서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의 주어를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구체적인 한 인물의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운명을 환기시켜준다는 점에서는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도 비교하게끔 만든다(‘이반’이라는 이름 역시 러시아에서는 가장 흔한 이름이다). 

이반 일리치의 부고와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에브리맨>도 이름 대신에 ‘그’라고만 지칭되는 주인공의 장례식으로 시작해 그가 살아온 생애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으로 따라간다. 광고회사의 아트디렉터로서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삶을 산 축에 속하지만 그는 사생활에서는 그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 끝에 혼자서 은퇴자 마을에 살다가 심장수술 중에 사망한다. 그렇지만 공적인 경력에서나 사생활에서 그의 삶이 특별하거나 도드라진 것은 아니다. 가족과 일부 지인만 참석한 장례식도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하게 치러진다. 오히려 인상적인 것은 그런 평범함이다.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라는 토로는 작가의 육성으로 들린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일리치는 의문의 병으로 죽어가면서 마지막까지 죽음에 대한 의식으로 고통받는다. 죽음이 그가 살아온 삶과 성취를 무효로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중시킨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 전체가 기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는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주인공 일리치는 죽으면서 죽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란 존재가 부정된다면 그의 죽음이란 사건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에브리맨>에서는 그러한 회심과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부정하는 이반 일리치와 달리 <에브리맨>의 주인공은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을 좌우명으로 여긴다. 비록 후회할 만한 짓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을 되물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는 수용적 태도만 가능한 것일까. 소설의 결론은 아니지만 필립 로스는 젊은 시절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주인공의 생각에 슬쩍 끼워넣는다. 그것은 죽음의 부당성에 대한 생각이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필멸적 존재가 갖는 반항의 최대치다. <에브리맨>은 그 반항을 주제로 삼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보통사람들을 위한 ‘보통사람’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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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말년작들을 읽으며 자연스레 노년과 늙어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10년 뒤 이야기들임에도 그렇다). 더이상 노년이 강건너 일만은 아닌 나이가 되니 늙어감을 주제로 한 책들에까지 눈길이 멈춘다(늙어감 혹은 죽어감).

최근에 영어판으로 첫 비평판이 나왔기에 톨스토이의 <인생론>을 다시 구입했는데, 그가 58세에 쓴 책이다. 노년의 문턱에서 쓴 것이라고 할까. 인생론을 쓰고픈 충동을 느낀다면 그때가 바로 노년의 기점인지도 모른다.

노년 역시 죽음과 마찬가지로 다섯 단계의 반응태도를 갖게 하는지. 부정과 거부에서 체념과 수용까지 말이다. 죽음과의 차이라면 어떤 포즈(허세)가 그래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꽤 유지될 수 있다는 점. 물론 방심은 금물이고 언제든지 탈락자의 대열로 옮겨갈 수 있다.

책을 읽는 독서가들에게는 아마도 노안이 충격의 시작이리라. 나는 아직 시력에 불편을 느끼지는 않지만 조만간 시력이 아니더라도 지력이나 체력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그런 게 늙어감의 문제다).

방과 현관에 쌓여있는 책들을 보다가 이제는 정말다 읽을 수 없겠다는 실감이 들었다. 갑자기 무연한 상태가 된 것. 책을 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찾는 게 더 큰 문제가 된 이후로 책과의 관계도 많이 데면데면해졌다. 책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다.

늙어감을 주제로 한 책 몇 권도 찾아서 모아두어야겠다.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자진해서 노년의 수감생활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 묘한 선택장애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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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2022-07-30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
 

프랑스 제2졔정기를 다룬 역사서로 가시마 시게루의 <괴제 나폴레옹 3세>(글항아리)가 출간되었다. 저자는 이제 보니 <백화점의 탄생> 같은 책으로 소개된 바 있다. 졸라의 소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을 강의에서 읽을 때 구입한 책이었다. <괴제>도 마찬가지인데 졸라의 소설들을 읽을 때 유익한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한다. 프랑스 제2제정기를 자세히 다룬 책이 상대적으로 희소하지 않았나 싶다. <괴제>의 부제는 ‘현대 프랑스를 설계한 막후 실력자‘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위대한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오명으로부터 제 위치로 복권시킨 책이다. 심모원료의 정치, 노동자에 대한 관심, 파리 개조와 만국박람회 등 업적 재조명하였고, 나폴레옹 3세가 이끈 제2제정의 역사를 다시 읽어내 19세기 프랑스사를 재인식한다.˝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에서도 재평가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시대에 프랑스사회가 대대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사실이다. 도시계획에 따라 파리가 오늘날의 파리로 재탄생한 것도 바로 그 시대이기 때문이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를 다룬 것으로는 데이비드 하비의 책과 함께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떠올릴 수 있다. 벌써 언제적인가 싶을 정도로 지나간 시절의 책이야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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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상태에서 하루를 보내다(요즘 흔히 말하는 남성 갱년기에 접어든 것인지도) 요시모토 다카아키(책에는 ‘타카아키‘로 표기. 여성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다)의 신간을 펼쳤다. <진짜와 가짜>(서커스). 일본의 대표 사상가의 한 명으로 꼽히지만 주저들은 번역되지 않았고 이번 책처럼 몆 권의 가벼운 책만 소개되었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일본 근대명작 24>(새물결) 정도.

첫 머리에 실린 글이 ‘선악 이원론의 한계‘인데 다자이 오사무 얘기여서 눈길을 끈다. 밝음과 어두움의 이분법에 대해서 재고해봐야 한다면서 다자이의 예민한 통찰을 예로 든다. 단편 ‘우대신 사네모토‘에 나오는 사네모토의 대사를 가장 좋아한다고 밝히는데 이런 대사다. ˝헤이케는 밝다. (중략) 밝음은 스러짐의 모습일까. 사람도 집안도 어두울 때는 아직 멸망하지 않는다.˝

이 역설적인 표현에서 다자이다운 감각을 읽어내는데, 알려진 대로 그것은 다자이의 불행한 유년기에서 왔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하녀와 유모 슬하에서 자란 과정에 그런 날카로운 감각이 몸에 배었다는 것. ˝하지만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에게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그만한 작품을 쓸 감성이 갖춰지지 않았을 거라는 견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 주로 <인간실격>과 <사양>을 읽기에 다자이의 단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단펀집 <만년>은 강의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다카아키 덕분에 ‘우대신 사네모토‘에도 흥미가 생겼다. 찾아보니 도서출판b의 다자이 전집 가운데 <인간실격>에 수록되어 있다(유일한 수록본 같다). 소장도서이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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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7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