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 저술가 톰 홀랜드의 신작이 번역돼 나왔다. <도미니언>(책과함께). '기독교는 어떻게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는가'가 부제다. 기독교 세계의 형성과 그 유산을 다룬 책. 톰 홀랜드의 그리스와 로마사 분야의 책들을 주로 펴냈는데, 그 연장선상에 놓인 책이겠다. 


 











"세계적인 역사 저술가 톰 홀랜드는 이 책에서 기독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서구 사회와 서양인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로 세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과감하면서도 우아하게, 역설적이면서도 균형 있게 다룬다. 고대 로마부터 비틀스와 메르켈 총리까지 2500년을 연대순으로 '혁명', '육체', '우주'와 같은 핵심 키워드가 담긴 21개 장으로 묶어 흥미진진한 대서사시를 이룬다."
















초점은 다르지만 자연스레 비교해볼 수 있는 건 기독교 역사에 관한 책들이다. 다수의 책들이 소개돼 있고, 나도 여러 권 갖고 있다. 그래도 홀랜드의 책으로 중심을 잡는 게 좋을 듯싶다. 
















그리고 기독교의 교리와 관련해서는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책들이 나오고 있어서 이 자리에서 적어놓는다. <정통>은 몇 번 번역됐지만, <영원한 사람>은 처음 나온 것으로 안다(시리즈의 다음 책은 <이단>인가?). 에세이집 <못생긴 것들에 대한 옹호>도 다시 찾아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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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분야의 신간이다. 김성민의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다반). 네이버 블로그 '시간의 기록'을 운영하고 있는 저자의 독서 기록이다. 오래전 알라딘의 글들을 묶어서 첫 책을 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블로그+북이란 뜻으로 '블룩'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름답고 쓸고없는 독서>도 그런 의미에서 '블룩'에 해당한다.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는 책과 함께한 시간을 담은 독서 기록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사용가치, 소비가치로 즉시 환원되지 않는다. 새로움보다는 오랜 시간동안 천천히 스미는 지속성을 지향한다. 쓸모를 의미하는 ‘쓸 만한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에, 책보다 더 효율적인 매체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어쩌면 독서는 쓸모없다. 그러나 독서가 삶의 구원이자 단단한 동아줄이 될 수 있다면 독서는 아름답다."


몇년 전 도서관 강의에서 서평에 관해 질문을 받고서 저자가 지속적으로 독서 기록을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꾸준히 책을 읽고 기록하는 모든 이들이 내게는 친구이자 동료다.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의 추천사도 기꺼이 적었다.  


"나의 독서가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쓸모없다는 푸념도 하지 않았다. '독서인' 혹은 '읽는 인간'이란 말에 기대면 내게 독서는 일상이자 나의 존재 자체다. 김성민의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를 읽으며 또 다른 독서와 마주한다. '아름답지만 쓸모없는' 독서가 아니다! 아름다운 독서와 쓸모없는 독서는 분명 대립적이지만 저자에게는 절실함에 있어서 대등하다. 독서를 통해서 삶을 되돌아보고 흩어져가는 시간을 한데 모으면서 자신을 굳건히 세우려는 의지가 그의 책을 관통한다. 독서가 취미나 장식이 아닐 때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와 만난다는 걸 덕분에 깨닫는다. 그 독서가 아니라면 초생달과 바구지꽃도, 그리고 우리 자신도 빛을 잃을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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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94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멜빌의 <모비딕>(1851)에 대해서 적었는데, 예전에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우정에 대해서 한 차례 쓴 적이 있고 그 후속편에 해당한다. 원고에는 (번역본들에 따라) 에이해브라고 적었는데, 지면에는 특히하게도 '에이하브'라고 나갔다. 이유는 알지 못하겠다...


 














주간경향(20. 09. 14) 마침내 침몰한 피쿼드호는 어떤 국가일까


토머스 홉스가 국가라는 시민공동체를 거대한 바다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멜빌이 <모비 딕>의 서두에 놓인 발췌록에서 홉스의 말을 인용한 것은 거대한 고래가 리바이어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겠다. 그렇다고 흰고래 모비 딕이 ‘국가’를 상징하지는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작품에서는 에이하브 선장의 ‘피쿼드’호가 국가를 연상하게 한다. <모비 딕>이 고래와 포경업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고래학 책이면서 동시에 국가론으로 읽힐 수 있는 이유다.


국가론이라면 으레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탐색하지만 때로는 반면교사를 제시한다. 복수의 일념으로 모비 딕을 뒤쫓은 피쿼드호가 마침내 침몰하면서 끝나는 결말을 고려하면 이 경우는 반면교사에 해당한다. 피쿼드호는 어떤 국가였던가 따져보자. 먼저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에이하브 선장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는 ‘아합’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악한 짓을 가장 많이 저지른 왕이다. ‘사악한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해도 나름대로 인간미 있는 사람이라고 처음에 소개된다.



일등 항해사 스타벅에게 토로하는 바에 따르면, 에이하브는 열여덟 살에 처음 작살을 잡고서 40년의 시간을 바다에서 보냈다. 그 가운데 육지에서 지낸 날은 3년도 되지 않는다. 쉰 살이 넘어서 아내와 자식을 얻었지만 공연히 가엾은 처녀를 생과부로 만들었다고 탄식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다리 한쪽을 앗아간 고래에 대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집념과 결연한 의지는 출항 이후 뒷갑판에 선원들을 모아놓고 하는 연설에 잘 드러난다. 그는 흰고래에게서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보며 그에 맞서고자 한다. “태양이 나를 모욕할 수 있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공격하겠어”라고 그는 말한다. 에이하브의 자아는 신적인 자아, 신과 대등한 자아로 격상돼 있다.

에이하브에게는 조력자로 스타벅을 포함해 세 명의 항해사가 있고 그들에게는 각각 종자가 따른다. 일반 선원들은 항해사의 지휘를 받고, 항해사들은 다시 에이하브에게 복종하기에 피쿼드호는 마치 에이하브의 지체처럼 움직인다. 복수에 대한 에이하브의 광기를 납득하지 못한 스타벅이 흰고래가 고작 “말 못 하는 짐승”일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에이하브의 고집을 꺾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항해사를 포함한 모든 선원은 에이하브의 의지에 복속된 노예적 존재로 전락한다. 국가에 비유하자면 피쿼드호는 민주정이 아닌 참주정 국가에 가깝다. 문제는 에이하브의 독단과 광기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데 있다. 모비 딕과의 격렬한 추격전 끝에 결국 피쿼드호는 박살이 나서 가라앉고 에이하브와 선원들은 수장되는 운명에 처한다.

피쿼드호의 난파에서 단 한 명만이 구조되는데 또 다른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슈메일이다. 이슈메일이 구조될 수 있었던 건 식인부족 출신의 작살잡이 퀴퀘그가 미리 짜놓은 관을 구명부표로 이용한 덕분이었다. 중요한 것은 에이하브와 이슈메일의 대립이 아니다. <모비 딕>에서 핵심적인 대비는 두 개인 간의 대비가 아니라 두 가지 인간관계의 대비다. 즉 한쪽에는 수직적 관계로서 에이하브와 스타벅이 있고, 다른 쪽에는 수평적 관계로서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있다. 이 두 유형의 관계는 국가를 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서 비교된다. 어떤 인간관계를 근간으로 국가를 구성할 것인가. 국가론으로서 <모비 딕>을 읽으며 음미해야 할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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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한번 공지를 했는데, 니콜라이 고골의 희극 <결혼>이 대전예술의전당에서 어제 무대에 올려졌다. 코로나 상황 때문에 무관중 공연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번주 일요일(오후3시)에 대전예당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통해서 공연 편집본을 관람할 수 있다. 공연 프로그램북에 실은 원작 소개글을 옮겨놓는다. 작품 <결혼>의 번역은 <고골의 희곡 '구혼' 연구>(신생)와 <결혼>(교원)에 실려 있지만 모두 절판된 상태다. 


















고골과 결혼


니콜라이 고골은 1809년 4월 1일, 우크라이나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독립국가로서 분리돼 있지안 우크라이나는 당시 러시아에 복속된 상태였고 ‘소러시아’라고도 불렸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작가이지만 고골이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의 언어는 러시아어였으며 러시아의 장래를 염려한 러시아 작가로 생을 마쳤다. 비록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분리된 지금은 고골의 국가적 소속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고골은 시골 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고골을 낳기 전 두 차례 사산(死産)을 경험한 어머니는 독실한 러시아정교회 신자였다. 어렵게 얻은 맏아들의 이름을 다니던 교회의 이름을 따서 ‘니콜라이’라고 지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늘 기도를 드리던 어머니의 신앙은 미신적인 성향이 강했다. 아들을 각별히 사랑하면서도 어린 고골에게 입버릇처럼 들려준 이야기는 주로 최후의 심판과 지옥의 고통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광신적인 신앙은 고골에게도 각인되어 그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골의 아버지 바실리는 아마추어 극작가이자 연극 애호가였다.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고 배우로 무대에 서기까지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고골은 연극에 대한 관심과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 나갔다.고골 자신도 아마추어 배우로 무대에 서고는 했는데 특히 여장 연기를 잘했다고 알려진다. 그렇지만 김나지움(우리의 중고등학교 과정)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미래 러시아 문호의 모습을 예견하기는 어려웠다. 작가가 되겠다는 그의 포부를 동창들은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교를 마친 고골은 청운의 꿈을 품고서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상경했다. 배우나 작가보다 더 우선했던 관심사는 어엿한 관리가 되는 것이었지만 여의치 않자 작가로서 이름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한스 큐헬가르텐>이라는 발라드 시를 자비로 발표하는데(당시 유행하던 독일풍 발라드를 흉내낸 것이다) 예상치 못한 혹평을 받게 되자 낙심하여 도망치듯 러시아를 떠난다. 미국에까지 가려뎐 고골은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뤼벡에서 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민담들을 제재로 한 <디칸카 근촌 야화>라는 소설집을 발표하는데 뜻밖의 대성공을 거둔다. 1830년대 초반의 일로서 고골은 일약 러시아문학계의 명사가 된다. 당대 러시아 최고 시인 푸시킨과의 교분도 자연스레 이루어지며 고골은 자신의 최고작을 연이어 발표한다.


















고골의 대표작들은 중단편과 장편소설, 그리고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다. '광인일기'와 '코', '외투' 등이 대표 단편들이라면, 중편 <타라스 불바>는 유명한 역사소설이고, 그가 서사시라고 부른 <죽은 혼>은 미완의 장편 걸작이다(당초 3부작으로 기획했지만 고골은 1부만을 완성했다). 희곡 가운데 최고 걸작은 1836년에 초연된 <검찰관>으로 고골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19세기 러시아 희극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고골은 <검찰관> 외에도 몇 편의 희곡을 더 시도하는데 완성작으로 무대에까지 올려진 작품은 <검잘관> 외에 <결혼>이 유일하다. 최초의 희곡 <블라디미르 3등훈장>과 <도박꾼들> 등이 그가 남긴 미완성작들이다.


1842년에 초연된 <결혼>은 <검찰관> 이후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앞서 쓰였다. 1833년 쓰기 시작하여 대략 1835년에 완성한 초고의 제목은 '구혼자들'이었지만 고골은 작품을 발표하지도 무대에 올리지도 않은 채 수정을 거듭한다. 10년에 걸친 창작기간은 고골의 작품 가운데 최장에 해당한다. 그만큼 오래 붙들고 있었다는 것은 작품이 잘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작품에 대한 그의 애착을 짐작하게 해준다.


최고의 사회풍자극으로 평가되는 <검찰관>에 견주자면 <결혼>은 사실 소품적인 성격의 작품이다. 문제는 <검잘관>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발표되고 무대에 올려졌다는 점이다. 고골 창작의 전환점이 된 <검찰관>은 지방 여행 중에 돈이 떨어져 여관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한 하급 관리 흘레스타코프가 검찰관으로 오인되는 바람에 벌어진 한바탕 '오인 소동극'이다. 비록 초연 당시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논란만을 낳았지만 <검찰관>의 메시지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에피그라프로 쓰인 “제 낯짝 비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힌트가 되기 때문이다.


고골은 연극무대를 일종의 ‘거울’로 간주했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보면서 마음껏 웃음과 조롱을 퍼붓는다. 하지만 <검찰관>의 마지막 정지 장면(새 검잘관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무대 위 배우들이 모두 얼어붙은 듯이 정지한 상태에서 막이 내려간다)에서 관객은 무대-거울을 통해서 자신들의 속악한 모습을 발견하고 경악하게 된다. 이제까지의 조롱이 자기 자신에 대한 조롱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고골은 그러한 경악이 도덕적 참회의 눈물로 이어지기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고골은 낙심하여 한번 더 러시아를 떠난다.


1837년 초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결투로 세상을 떠난다. 고골은 충격 속에서 이제 러시아문학을 혼자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다. 러시아 사회의 속물성과 추악함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서 긍정적인 비전도 제시해야 한다는 게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역할이었다. 치치코프라는 사기꾼의 행각을 다룬 <죽은 혼>은 그런 기획하에 구상한 작품이다.


1842년, 수년간의 공백 끝에 어렵사리 <죽은 혼> 1부를 발표함으로써 고골은 독자들의 기대를 잔뜩 끌어올린다. 그런 상황에서 그해 말에 무대에 올려진 <결혼>은 관객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예기치않은 '구혼 소동극'을 단순한 소극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뭔가 진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 이해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다수 평론가가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을 때, 가령 젊은 도스토옙스키는 <결혼>을 뭔가 심오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 높이 평가했다). 이 당혹감은 오늘날 이 작품을 읽거나 무대에 올릴 때도 여전히 감수하게 되는 느낌이다. 고골은 대체 어떤 작품을 쓴 것인가.


<결혼>에 대해 고골이 붙인 설명은 '2막으로 이루어자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주인공 포드콜료신과 아기피야의 결혼 성사과정이 믿기지 않을 뿐더러 신랑 포드콜료신이 창문을 뛰어내려 도망친다는 결말도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이다. 관객으로선 두 가지 궁금증을 갖게 된다. 중매쟁이와 함께 한꺼번에 들이닥친 구혼자들이 벌이는 해프닝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더불어 마땅한 신부와의 결혼이 성사되었는데도 도망친 포드콜료신의 선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막이 열리면 '혼자 사는 남자의 방'이 나온다(젠더 스와프룬 시도한 이번 공연에서는 주인공과 구혼자들의 성별이 바뀌었다. 고골 원작에서 포드콜료신은 7등 문관 남성이다). 그는 다짜고짜 햄릿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쨌든 결혼은 해야 돼. 하지만 정말로 해야 한단 말인가?" 요컨대, 포드콜료신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민하는 구혼 소동극의 햄릿이다. 모든 준비는 갖춰진 상태이고 중매쟁이는 석달째 드나들고 있다. 그럼에도 결혼이 지연되는 건 순전히 그의 의지와 결단이 결여된 때문이다. 즉 그는 결혼에 대한 내적, 자발적 동기를 갖고 있지 않다. 결혼을 포기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결혼이 사회적 관습이자 요청이라는 데 있다. 결혼에 대해선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지 않지만 포드콜료신은 고골의 여느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평판에 민감하다('외투'의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예외다). 자신의 신분과 관등에 맞게 품위 있는 검정색 연미복을 갖춰 입어야 하고 구두는 늘 광이 잘 나야 한다. 적당한 신부는 연미복이나 구두와 함께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돋보이게 하고 더 나아가 완성시켜줄 것이다. 그에게 적당한 신붓감이란 높은 지위와 재력을 배경으로 갖추고 있는 여자를 가리킨다. 요컨대 결혼에 대한 개인적 동기는 약하지만 강한 사회적 동기를 갖고 있는 인물이 포드콜료신이다. 그의 햄릿적인 머뭇거림은 그러한 상반된 조건에서 비롯한다(포드콜료신이란 이름은 '바퀴에 깔린'이란 뜻이다).


포드콜료신에게 중매쟁이 표클라가 돈많은 상인의 딸 아가피야를 소개하는데 포드콜료신은 '장군의 딸'이 아니라는데 불만을 갖고 머뭇거린다. <결혼>의 배경이 되는 것은 서로의 조건을 따져서 거래하는 전형적인 결혼시장이다. 이 시장에서 핵심적인 거래 품목은 지위(귀족인가 상인인가)와 재산, 그리고 외모와 교양 등이다. 결혼에 대한 내적(감정적) 동기를 깆고 있지 않은 포드콜료신은 더 나은 조건에 대한 기대 때문에 머뭇거리고 그에 따라 혼담은 잘 진행되지 않은 터였다.


<결혼>의 특이한 설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두 명의 중매쟁이가 등장하여 경합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혼자들이 한꺼번에 신붓감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우선 표클라와 경합하는 중매쟁이로 등장하는 인물은 포드콜료신의 친구 코츠카료프다. 코츠카료프는 표클라의 중매로 잘못 결혼했다고 불만을 품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표클라를 대신하여 포드콜료신을 독려하고 적극적으르로 결혼 중매에 나선다. 같은 중매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표클라와 코츠카료프는 분신적 관계이지만, 포드콜료신을 조종하고 한편으론 대리한다는 점에서 포드콜료신과 코츠카료프도 분신적 관계에 해당한다. 코츠카료프의 손에 이끌려 포드콜료신은 아가피야를 방문하는데, 공교롭게도 여러 명의 구혼자가 동시에 아가피야를 찾는다. 이들은 야이치니차(회계검사관), 아눗츠킨(퇴역 보병), 제바킨(퇴역 해군), 스타리코프(시장 상인) 등이다.


한꺼번에 들이닥친 구혼자들 가운데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아가피야를 잘 구슬려서 코츠카료프는 포드콜료신이 가장 적합한 신랑감이라고 믿게 한다.  아카피야가 다른 구혼자들을 모두 거절하면서 아가피야와 포드콜료신은 유일한 짝이 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결혼에 머뭇거리는 포드콜료신의 등을 코츠카료프는 강제로 떠밀어서 구혼한 당일에 결혼식까지 치르게 한다. 전적으로 친구 덕분에 결혼하게 된 포드콜료신은 인생에 대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감격한다. 그렇지만 그의 선택은 창문을 뛰어내려 도망치는 것이었고, 코츠카료프가 그를 다시 데려오겠다고 떠나면서 막이 내린다.



고골의 <결혼>은 무엇에 관한 희극인가? 가장 단순하게 보자면, 결혼을 둘러싼 속물적인 거래와 우유부단한 처신을 풍자한 가벼운 소동극이다. 작품이 처음 쓰인 1833년 시점에서라면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작품이다. 하지만 1842년이라면 의미가 달라진다. <검찰관>의 뒤를 이으면서 <죽은 혼>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심오한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1833년의 고골은 포드콜료신과 비슷하게 여성과 결혼에 대한 공포감을 가졌고 <결혼>은 그런 감정을 희극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반면에 1842년의 고골은 작가로서의 과도한 사명감에 짓눌리던 상황이었다. 결혼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는 포드콜료신의 대사는 그런 의미에서 다른 울림을 던져준다.


러시아를 이끌어야 한다는 무거움 책임감 속에서 고골은, 포드콜료신의 대사대로 "너무나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인간"을 넘어선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세계이기도 했다. 창문 넘어 도망친 포드콜료신의 모습에서 '작가적 사명'과 '평범한 인간' 사이에 낀 고골의 고뇌를 읽게끔 한다는 점에서 <결혼>은 심오한 희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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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희망은 무산계급에만 있다”

8년 전에 쓴 리뷰다. <문학에 빠져죽지 않기>에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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