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94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멜빌의 <모비딕>(1851)에 대해서 적었는데, 예전에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우정에 대해서 한 차례 쓴 적이 있고 그 후속편에 해당한다. 원고에는 (번역본들에 따라) 에이해브라고 적었는데, 지면에는 특히하게도 '에이하브'라고 나갔다. 이유는 알지 못하겠다...


 














주간경향(20. 09. 14) 마침내 침몰한 피쿼드호는 어떤 국가일까


토머스 홉스가 국가라는 시민공동체를 거대한 바다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멜빌이 <모비 딕>의 서두에 놓인 발췌록에서 홉스의 말을 인용한 것은 거대한 고래가 리바이어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겠다. 그렇다고 흰고래 모비 딕이 ‘국가’를 상징하지는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작품에서는 에이하브 선장의 ‘피쿼드’호가 국가를 연상하게 한다. <모비 딕>이 고래와 포경업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고래학 책이면서 동시에 국가론으로 읽힐 수 있는 이유다.


국가론이라면 으레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탐색하지만 때로는 반면교사를 제시한다. 복수의 일념으로 모비 딕을 뒤쫓은 피쿼드호가 마침내 침몰하면서 끝나는 결말을 고려하면 이 경우는 반면교사에 해당한다. 피쿼드호는 어떤 국가였던가 따져보자. 먼저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에이하브 선장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는 ‘아합’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악한 짓을 가장 많이 저지른 왕이다. ‘사악한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해도 나름대로 인간미 있는 사람이라고 처음에 소개된다.



일등 항해사 스타벅에게 토로하는 바에 따르면, 에이하브는 열여덟 살에 처음 작살을 잡고서 40년의 시간을 바다에서 보냈다. 그 가운데 육지에서 지낸 날은 3년도 되지 않는다. 쉰 살이 넘어서 아내와 자식을 얻었지만 공연히 가엾은 처녀를 생과부로 만들었다고 탄식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다리 한쪽을 앗아간 고래에 대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집념과 결연한 의지는 출항 이후 뒷갑판에 선원들을 모아놓고 하는 연설에 잘 드러난다. 그는 흰고래에게서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보며 그에 맞서고자 한다. “태양이 나를 모욕할 수 있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공격하겠어”라고 그는 말한다. 에이하브의 자아는 신적인 자아, 신과 대등한 자아로 격상돼 있다.

에이하브에게는 조력자로 스타벅을 포함해 세 명의 항해사가 있고 그들에게는 각각 종자가 따른다. 일반 선원들은 항해사의 지휘를 받고, 항해사들은 다시 에이하브에게 복종하기에 피쿼드호는 마치 에이하브의 지체처럼 움직인다. 복수에 대한 에이하브의 광기를 납득하지 못한 스타벅이 흰고래가 고작 “말 못 하는 짐승”일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에이하브의 고집을 꺾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항해사를 포함한 모든 선원은 에이하브의 의지에 복속된 노예적 존재로 전락한다. 국가에 비유하자면 피쿼드호는 민주정이 아닌 참주정 국가에 가깝다. 문제는 에이하브의 독단과 광기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데 있다. 모비 딕과의 격렬한 추격전 끝에 결국 피쿼드호는 박살이 나서 가라앉고 에이하브와 선원들은 수장되는 운명에 처한다.

피쿼드호의 난파에서 단 한 명만이 구조되는데 또 다른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슈메일이다. 이슈메일이 구조될 수 있었던 건 식인부족 출신의 작살잡이 퀴퀘그가 미리 짜놓은 관을 구명부표로 이용한 덕분이었다. 중요한 것은 에이하브와 이슈메일의 대립이 아니다. <모비 딕>에서 핵심적인 대비는 두 개인 간의 대비가 아니라 두 가지 인간관계의 대비다. 즉 한쪽에는 수직적 관계로서 에이하브와 스타벅이 있고, 다른 쪽에는 수평적 관계로서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있다. 이 두 유형의 관계는 국가를 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서 비교된다. 어떤 인간관계를 근간으로 국가를 구성할 것인가. 국가론으로서 <모비 딕>을 읽으며 음미해야 할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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