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마지막날에 이르니 긴 터널을 지나온 것 같다(실제 매주 지방강의에 가고오는 길에 터널을 통과했다. 그 터널을 이어놓으면 ‘긴 터널‘이 되겠다).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시집 코너에서 제법 서 있다가, 이성미 시집을 손에 들었다. <다른 시간, 다른 배열>(문학과지성사). 문지시인선으로는 551번째. 이 또한 돌이켜보면 처음이 안 보일 정도다(기억에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가 첫 시집이었지. 그 바퀴가 아득하다). 시집의 두번째 시가 ‘터널과 터널‘이다.

가을로 들어가서 겨울로 나왔어. 길고 긴 기차처럼.

터널은 달리지 않는 기차인 것처럼, 있었지. 서 있는기차에서 나는 달렸어. 기차처럼.

풍경을 뒤로 밀었지. 달리는 것처럼, 의자를 타고 달렸어. 잠깐이라도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이 어둠에 끝이 있을까. 라는 문장 같은 것. 그런 순서로 불안을 배열하면 안 됩니다. 기차는 기차니까 길고, 나는 그전에

늦가을 비를 맞았다. 어쩌면 겨울비. 옷은 늦가을 비에 젖어 축축했고 무거웠고.

겨울비 내리던 날이라는 노랫말이 있었지. 가을비가 아니라 이건 겨울비. 그렇게 생각하면 겨울비 노래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이렇게 흘러나와서 흘러가는 시다. 말도 심정도 복잡하지 않다. 기차가 있고 기차를 흉내내는 말의 배열이 있고 적당한 감상이 있다. 축축하고 무거웠다는 말도 그렇게 축축하지 않고 무겁지 않게 느껴진다. 말을 이기려고 하거나 말에 휘둘리는 시집들 틈에서 상쾌하게 느껴져(상큼하게라고 적을까 했다) 구입하고서 검색해보니 시인의 세번째 시집이다. 2001년등단. 20년째 몰랐던 시인이라니.

앞서 나온 두권도 주문했다. 이 정도로 취향에 맞는 시를 만나는 일도 드물어졌기에. ‘터널과 터널‘은 처음 네 연이 경쾌하고 좋다. 다시 읽으니, 늦가을 비를 맞았다는 건 좀 생뚱맞다. 절반이라도 맘에 드는 시가 드물어졌으니 이 정도도 오늘의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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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우리는 러시아와 얼마나 다를까

7년 전 리뷰다. 안나 폴릿콥스카야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녀의 마지막 책(기사 모음집)을 구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까지 건 기자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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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양천도서관 주관으로 5월 17일부터 6월 7일까지 4회에 결쳐서 매주 월요일(오후3시-5시)에 독일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실시간 온라인(줌강의)으로 진행되는 강의이며 5월 7일부터 에버러닝을 통해 신청하실 수 있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로쟈와 함께 떠나는 독일문학여행


1강 5월 17일_ 클라이스트, <미하엘 콜하스>



2강 5월 24일_ 호프만, <모래사나이>



3강 5월 31일_ 슈티프터, <늦여름>



4강 6월 07일_ 슈토름, <백마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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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2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12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주간경향(1425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독재자 소설이자 총체 소설로 분류되는 바르가스 요사의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창비)에 대해서 적었다. <녹색의 집>과 함께 바르가스 요사의 초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현대소설의 걸작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독재자 소설로 <족장의 가을>과도 비교해봄직하다...
















주간경향(21. 05. 03) 라틴아메리카 ‘독재자 소설’의 모범작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탄생한 특별한 장르가 ‘독재자 소설’이다. 과테말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앙헬 아스투리아스의 <대통령 각하>를 포함해 이 지역의 걸출한 작가들이 각자의 독재자 소설을 갖고 있다. 자기 시대의 충실한 재현이 현대소설의 몫이라면 강압적 독재 시대의 경험이 독재자 소설로 표현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페루의 간판 작가이자 노벨상 수상작가 바르가스 요사도 독재자 소설에서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는데, 국내에는 먼저 소개된 <염소의 축제>(2000)를 통해서도 그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다. 도미니카공화국을 30년간이나 철권 통치했던 트루히요의 암살사건을 계기로 그의 시대를 되돌아보는 소설이다.


















흥미로운 것은 페루 작가가 도미니카의 독재자를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다. 같은 스페인어권이라 그런 ‘품앗이’도 가능한 것인가 싶었는데, 초기작인 1969년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이하 <까떼드랄>)를 읽으며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작가가 30대 초반에 쓴 <까떼드랄>은 독재자 소설의 모범이면서 현대소설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손색이 없어서다. <염소의 축제>는 <까떼드랄>에서 보여준 역량을 한 번 더 확인시켜준 작품이라고나 할까. 작품의 주된 배경은 1950년대의 페루다. 1948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마누엘 오드리아의 집권기로 독재는 1956년까지 이어진다. 작가는 그 8년의 시간을 억압적이었던 ‘어둠의 시대’로 기술한다.


독재정권의 각종 범죄와 인권유린도 문제였지만, 작가가 더 심각하게 본 것은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였다. 권력의 상층부부터 밑바닥까지 해묵은 부패로 조국 페루는 만신창이가 돼갔다. 소설의 주인공 산티아고 사발리타가 서두에서 던지는 질문이 ‘언제부터 페루가 이 꼴로 변해버린 걸까?’인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동시에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그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그의 방법은 당대 페루 사회 전체의 모습을 소설에 담아내는 일종의 ‘총체 소설’을 발명하는 것이다.

기본틀은 페루 부르주아 가정의 차남이자 신문기자인 산티아고와 그의 집 운전기사였던 암브로시오가 우연히 재회해 그들이 지나온 시대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산티아고의 아버지인 사업가 돈 페르민은 독재정권의 유력한 협력자로서 정권의 보위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보안총국장 베르무데스와 거래한다. 그리고 하층계급에 속하는 암브로시오는 처음에는 베르무데스의 운전기사였다가 나중에는 돈 페르민의 기사가 된다. 돈 페르민과 베르무데스가 권력층의 시점과 이해관계를 대표한다면, 대학생이 돼 반독재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기자가 되는 산티아고는 지식인을, 암브로시오는 민중을 대표한다. 이러한 기본 인물 구성과 그에 따른 연결망 그리고 실험적인 서사기법을 통해 작가는 오드리아 정권기 페루 사회의 전모를 그려내고자 한다.

기획에서만 보자면 <까떼드랄>은 작가가 모범으로 삼은 발자크의 ‘인간극’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인간극’은 당대 프랑스 사회의 전체 모습을 담은 거대한 벽화를 그리고자 한 시도였다. 19세기 소설의 충실한 계승자이기도 한 바르가스 요사는 리얼리즘적 세계관과 모더니즘적 서술기법의 이상적인 결합으로 읽히는 <까떼드랄>을 통해 그러한 총체성의 구현이 현대소설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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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슈미트의 햄릿론은 번역본이 나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번역돼 나와야 동기부여가 된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려니 사전에, 혹은 병행하여 참고할 책들이 있다. 슈미트가 언급하고 있는 책들 가운데 벤야민만 번역돼 있다. 그래도 도버 윌슨의 책은 갖고 있고 윈스탠리의 책은 인터넷에서 참고할 수 있다. 그렇게 준비를 갖추게 되면, 이제 떠나는 일이 남는다. 어떤 책들의 독서는 등정과 같아서 맘먹고 결행해야 한다. 5월의 휴일 가운데 하루 날을 잡아야겠다...

이 자리에서 세 권의 책을 우선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셰익스피어 애호가와 셰익스피어 전문가에게는 일차적으로 방향감각을 잡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도 귀중한 정보와 핵심적 통찰을 얻는 과정에서 이 책들에 큰 신세를 졌다. 릴리언 윈스탠리 Lilian Winstanley의 [햄릿과 스코틀랜드 왕위계승Hamlet and the Scottish Successi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21)과 뷔르템베르크주 풀링겐의 귄터네스케 출판사에서 펴낸 이 책의 독일어 번역본 「햄릿,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그리고 존 도버 월슨John Dover Wilson 의 햄릿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What happerns in Hamlet] (Cambridge University Press, 초판 19351 3판 1951), 끝으로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 (Berlin: Ernst Rowohlt Verlag, 1928)이 그 책들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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