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429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봄학기 톨스토이 강의가 오늘로써 종강하게 되는데, 지난번에 <인생론>(<인생에 대하여>)에 이어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서 다뤘다(강의하면서 두 편의 리뷰를 쓴 셈).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선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에 대한 리뷰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얼마 전에 강의차 다시 읽은 <미국의 목가>에서도 <이반 일리치의 죽음> 얘기가 나왔다. 톨스토이와 필립 로스를 연결시켜주는 작품(주제)이기도 하다...


 














주간경향(21. 05. 31) 죽음이란 공포에 시달렸던 톨스토이


청년시절에 발표한 자전소설 <유년시절>에서부터 죽음은 톨스토이 문학의 주요 주제였다. 삶에 대한 긍정과 예찬으로 마무리되는 대작 <전쟁과 평화>를 완성한 직후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던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한 이후 다시 한 번 심각한 회의에 봉착한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죽음이 인간의 불가피한 운명이라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것이 고뇌의 내용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덜미를 잡히는 물음이지만 톨스토이의 경우 누구보다 철저하게 그 물음에 답하고 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그가 그토록 집착했던 죽음과 인생의 의미, 그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참회록>이 성찰적 에세이라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중년의 판사로 재직하다가 죽음을 맞은 이반 일리치를 주인공으로 한 중편소설이다. 이름부터가 흔한 러시아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반 일리치의 삶은 평범함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런데 이 ‘평범함’이 문제다. 이반 일리치의 부고가 직장 동료들에게 전달되고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가 대표격으로 장례식에 참석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친구는 물론 이반 일리치의 아내에게서도 그의 죽음은 관심사가 아니다. 직장 동료들은 그의 죽음이 가져올 자리이동이나 승진에만 관심을 두며, 장례식에 참석한 친구도 불편한 자리에서 벗어나자마자 카드놀이판으로 달려간다. 게다가 아내의 관심은 남편의 사망으로 인해 받을 수 있는 국고 지원에만 쏠려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그렇듯 누구에게도 진지한 애도와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반 일리치 자신도 살아 있을 때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그랬던 이반 일리치도 결국 마흔다섯의 나이에 불치의 병에 걸려 죽고 만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삶을 평범하지만 끔찍한 것이었다고 말하는데, 뒤집어보자면 평범함이 면책사유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죽음에 대한 다수의 무사유와 편견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고위관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반 일리치는 ‘집안의 자랑거리’로 똑똑하고 예의 바른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한때 역겨운 행동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남들도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라는 걸 알고는 금방 잊는다. 노는 걸 좋아하는 편임에도 업무에 있어서는 지극히 관료적이고 엄격한 태도를 취했고, 언제나 상류 사교계의 규칙에 따랐다. 사교계의 평판에 맞춰 귀족 가문의 여자와 결혼하고 결혼생활이 예상과 달리 틀어졌을 때도 기대를 재조정해 적응했다. 승진에서 한 번 밀려나기도 했지만 운 좋게도 곧 더 좋은 자리로 부임했다.


모든 일이 만족스럽게 진행되는 것 같던 시점에서 이반 일리치는 새로 이사한 집 장식을 위한 커튼을 달러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이후에 차츰 건강이 악화된다. 그를 끝까지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자신의 인생이 정당했다는 인식이다. 마지막 사흘 밤낮의 고통 속에서 이반 일리치는 “그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깨달음에 이르고 비로소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이지만 그 공포로부터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 시사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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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헨리 소로의 자기해방

3년 전에 쓴 리뷰다. 평전을 포함해 소로의 책들도 잔뜩 쌓여 있는데 언제쯤 다시 읽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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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문학강사들을 위한 책

3년 전 페이퍼다. 미국문학을 본격적으로 강의에서 다루기 시작한 게 불과 3년 전부터인데, 어느새 20세기 주요 작가들을 거쳐서 가을학기에는 2000년대 작가들까지 읽을 예정이다. 세부적인 보완이야 끝이 없는 일이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만족스럽다. 3년 안으로 세계문학 강의는 대략 갈무리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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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에 '노블레스'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리처드 도킨스의 <신, 만들어진 위험>(김영사)에 대한 리뷰를 청탁받고 쓴 것이다. 지난달에는 <리처드 도킨스의 영혼이 숨 쉬는 과학>(김영사)까지 출간되었는데, 진화론에 관한 책과 무신론 책으로 대략 양분해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신, 만들어진 위험>은 도킨스의 무신론 압축판으로 읽을 수 있다... 
















노블레스(21년 5월호) 리처드 도킨스의 과학적 무신론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저명한 과학 저술가 리처드 도킨스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저자다. 대표작 <이기적 유전자>(1976)를 시작으로 그의 저작 대부분이 번역되었고, 다윈의 진화론에 관한 가장 명쾌한 해설가로 찬양받는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악명도 높은데, 주로 <이기적 유전자>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은 <만들어진 신>(2006) 때문이다. 그로부터 13년 뒤(번역서는 15년 뒤)에 나온 <신, 만들어진 위험>은 <만들어진 신>의 속편이면서 보급판이다. 


<신, 만들어진 위험>의 독자는 두 부류로 나뉘는데, <만들어진 신>을 이미 읽은 독자와 그렇지 않은 독자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고려해 내용을 되짚어보면 <만들어진 신>은 종교, 특히 인격신에 대한 신앙을 근거 없는 망상으로 비판함으로써 도킨스를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로 만들어준 책이다. 비종교인은 그의 거침없는 종교 비판에 환호했고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은 그의 비판이 너무 거칠거나 독선적이라고 생각했다.
















도킨스의 도발적인 과학적 무신론은 자연스레 그의 지지자와 반대자를 낳았다. 학자 중에서 꼽자면, 도킨스를 포함해 '무신론의 네 기사'로 불릴 만한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등이 그의 강력한 동료들이고(네 사람은 <신 없음의 과학>을 공저했다), 존 레녹스와 알리스터 맥그래스 등의 신학자가 단호한 비판자들이다. 쟁점은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부터 '우리가 도덕적으로 선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이 필요한가'까지 여러 문제에 걸쳐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지적 설계론과 그 비판이다.


흔히 도킨스를 비롯한 일군의 '전투적 무신론자' 입장을 신무신론(새로운 무신론)이라 부르는데, 신무신론의 특징은 종교적 신앙을 과학이라는 척도로 재단하고 그 비합리성을 가차없이 폭로하는 데 있다. 사실 과학과 종교가 반드시 대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과 종교가 각각 사실의 세계와 의미(구원)의 세계에 관여하고 각기 다른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라면 둘의 공존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그런데도 과학자들이 정색하고 종교 비판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변형된 창조론으로서 지적 설계론의 등장과 득세가 있다.
















지적 설계론은 생명 현상이 너무도 복잡하기에 무작위적인 우연의 결과로는 탄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마치 시계처럼 복잡한 기계장치가 시계공이라는 창조자 없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복잡다단한 생명 현상도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갖춘 설계자를 가정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킨스는 이것이 틀린 주장이며, 다윈의 자연선택론이 실제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의 진화과정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예증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진화생물학자들은 인간의 종교가 어떻게 해서 진화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까지도 제시하려 한다 예컨대 종교가 진화적 적응이라는 설과 진화의 부산물이라는 설, 그리고 종교가 문화적 복제자로서 하나의 밈(meme)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사실 생명의 진화에 관한 진화론의 설명은 매우 강력하고 설득력이 있기에 지적 설계론이 충분한 반론을 제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신학자와 일부 과학자는 다시 생물학 대신에 우주론을 주제로 끌어온다. 중력상수(G)를 포함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힘과 그 상수의 값이 왜 그렇게 매겨졌는지 현재의 과학은 아직 알지 못한다. 하지만 도킨스는 그것이 신이라는 설계자를 다시 끌어들이는 명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내기를 건다면 단연코 신이 아니라 과학에 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그 내기판이 독자 앞에 놓여 있다. 당신이라면 어디에 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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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자는사람 2021-05-25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신, 과학과 물질이 종교가 되고 신이 되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무언가 모아서 흔들어대면, 충분히 긴 시간만 흐르면 그것들이 시계부품이 되고, 또 시계가 된다는 과학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궤변을 구사하는 도킨스는 한때 나도 그러했지만 무신론자들만을 위한 아이콘인 것같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그는 목록에서 지워버릴 정도로 가벼워지더군요. 힘이 들고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궁핍해지면 사람들은 아무래도 신을 찾게 마련이라는 생각입니다. ^^

로쟈 2021-05-26 08:49   좋아요 0 | URL
종교는 인간적인 현상이죠. 과학과 경쟁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독선을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허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말씀대로 인간은 나약하니까요..

2021-05-26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26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26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24-03-17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은 과학주의자이신가요? 신학과 과학이 경쟁관계는 아닌데 과학주의자들은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신간이 나왔다. <불만 시대의 자본주의>(열린책들). '공정한 경제는 불가능한가'가 부제다. 원저의 제목이 '국민, 권력과 이익'이고, 부제가 '불만 시대의 진보적 자본주의'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불평등을 양산하고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책으로 보인다. 
















""우리 시대는 너무 많은 이들이 다른 이의 몫을 빼앗음으로써 부를 쌓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컬럼비아 대학교 석좌 교수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신간 <불만 시대의 자본주의>에서 미국식 시장 경제는 실패했다고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는 금융화, 세계화, 기업의 독점화(스티글리츠의 3가지 핵심 연구 주제)가 거대한 불평등을 낳고 있으며, 금융 산업과 몇몇 기업이 경제 전반을 장악하고 불공정한 규칙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정부의 강력한 개입만이 국가의 진정한 부(富)를 늘리고, 오늘날 자본주의가 처한 위기를 풀 수 있다고 강조한다."


뉴요커의 요약: "스티글리츠는 잘못 관리된 세계화, 금융의 자유, 불안정한 기술 변화가 불러온 불평등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한, 가짜 특효약을 팔아 대는 정치 선동이 또 다른 말 잘듣는 청중을 찾아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일관된 문제의식은 어떤 책을 보더라도 확인할 수 있어서, 한권만 손에 들어도 좋을 듯싶다(<세계화와 그 불만>도 개정판이 나왔다). 서평도서로 다룸직한지(분량과 가격, 난이도 등) 고려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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