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그렇다. 데버러 로드의 <대학이 말해주지 않는 그들만의 진실>(알마, 2011). 원제는 <지식의 추구(In Pursuit of Knowledge)>(2006). 저자는 스탠퍼드 법과대학 교수로 오늘날 대학의 임무와 지식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금 성찰의 도마에 올려놓는다. 엊그제 구입한 책인데, 마침 자세한 서평기사가 올라왔기에 챙겨놓는다. 미국 대학의 실상에 대한 폭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경향신문(11. 12. 24) 미국 대학은 세계 최고라는 신화…그 허구를 벗긴다

 

적어도 겉에서 보자면, 오늘날 미국의 대학들은 역사상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고 있다. 전 하버드대 총장인 데릭 복은 “연구조사의 역량, 전문교육의 질, 교육프로그램 혁신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고 자평한다. 런던타임스에 게재된 조사결과에 따르자면, 세계 최상위 10개 대학 중 7개가 미국 대학이다. 75년 전 미국에서 학사 학위 보유자는 25명 중 1명 미만이었지만, “지금은 역사상 가장 많은 젊은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하는 상황”이다. 대학교수들의 만족감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최근 총체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90%에 가까운 교수들이 만족한다고 답변”했으며, “다시 기회가 주어져도 교수라는 직업을 택하겠다고 밝힌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80%”에 달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데버러 로드(60)는 그 모든 현상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한다. 그가 보기엔 오히려 모든 것이 그와 반대다. 일단 “대학 소비자들”로 불리는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등록금”이다. 오늘날 미국 대학에서 “지식의 추구라는 본래적 가치”는 가차없이 무너졌으며, 경쟁과 성장의 바이러스가 대학사회를 파고들면서 “대학들 사이의 순위 경쟁이 극에 달해 갖가지 부정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학은 화려하고 호화로운 전시행정”을 펼치면서 “명성을 끌어올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을뿐더러, 교수들조차도 이러한 대학 문화를 내면화하면서 “개인적 명성을 쌓는 일에 빠져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대학교수로 25년의 세월을 살아왔다”는 저자가 오늘날 미국 대학들의 불편한 속내를 털어놓고 있는 책이다. 이를테면 대학과 교수 집단에 대한 내부자의 고발인 셈이다. 저자는 “고발이라기보다 성찰”이라고 표현하면서 신중하고 온건한 문체를 구사하지만, 행간에 숨은 비판의 칼날은 예리하다. 게다가 그의 논지는 ‘한국인 저자의 책’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만큼 미국의 대학구조를 수입·추종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이 빠져있는 현실과도 거의 오차 없이 겹친다.

 

저자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대학들 간의 순위 매기기다. 그것은 유럽의 문화와 아주 다른 “미국적 특징”이다. 저자에 따르자면 “대학 순위를 발표하는 자료집의 연간 판매부수는 약 650만부”다. “무료로 배포되는 부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순위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최고 행정가들의 주관적 소견,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명성, 예전의 순위 기록에 따른 후광효과 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순위에 따라 대학에 주어지는 이익 요소들로 인해 “여러 가지 부정 행위들”이 빈번할뿐더러 “일부 기관은 사실을 날조”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정해진 순위는 결국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응시생의 수에 영향을 미치고 기관의 의사결정, 정부 지원에서의 우선 순위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순위 경쟁은 “성장주의”와 동행한다. 이제 “성장은 미국에서 대학행정의 기본 원칙”이다. “거대한 건물, 도서관 및 연구실 증축, 예산 확대, 홍보 캠페인의 확장 등”은 “대학의 힘이 커졌다는 환상”을 부여하고 “성취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거대한 제국주의적 건물 증축은 그 자체로 대학의 목적”이 된다. 그런 대결에서 밀려 서열이 낮아진 대학들은 “혁신보다는 모방에 열중하며, 스스로의 장점을 특화시켜 발전하기보다는 명성이 높은 대학을 따라하기”에 급급해진다.

거기에 “미국인이 학교에서 얻는 배움보다 지위에 더 가치를 두는 풍조”가 결합한다. 그것은 200년 전부터 이어져온 “미국의 문화”다. 고등교육을 족보나 혈통의 확보 같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얘기다. 저자는 “‘대학에 다닌다는 것에 미국만큼 중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나라는 없다”고 단언한다. “미국에서는 대학에 다니는 것이 과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대학의 명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그런 관습에 물든 “고등교육 소비자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최첨단 시설 등, 대학에 과도한 서비스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저자는 미국 주간지 뉴요커에 실린 만평을 사례로 든다. 여고생이 상담교사와 대학 진학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이렇게 말한다. “(제가 갈 대학은) 라커룸이 넓어야 해요.” 그러다보니 대학은 “구내식당의 메뉴 개선과 개인 운동 트레이너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려고 경쟁”한다. 최상위권 학생들을 유치하려는 대학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울 정도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학 간의 서열을 매기는 데 직결되며, 궁극적으로는 “대학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장학금 제도는 “점점 더 성적 중심으로 운영”된다. “장학금이 절실하게 필요한 학생들에 대한 지원은 축소되고, 소득계층의 밑바닥에 속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교육의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교수생활을 해온 25년 동안 “대학 교육과 입학에 들어가는 비용은 현저히 증가한 반면, 정부 지원은 크게 감소한 것”에 주목한다. 미국의 전체 예산에서 “고등교육에 할당되는 재정 비율은 3분의 1이나 줄어들었지만, 수업료는 두 배로 뛰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위 25%의 3분의 2가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데 반해, 최저임금 생활자 25%의 집단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생의 5분의 1만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연수입 20만달러가 넘는 가정의 자녀 중 약 40%가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학에 진학”하는 모순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입법자들은 그들만의 십자포화에 갇힌 채” 이 문제의 해결에 등한하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가 보기에는 대학교수들도 점점 더 “명성의 추구”에만 매달리고 있다. 물론 “인지도를 향한 욕구는 학문적 생산성의 증대”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긍정적이지 못한 부산물”만 잔뜩 쌓여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저자는 “겉멋만 부린 문체, 난해한 주제, 과도한 인용과 참조”에 눈살을 찌푸린다. 이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교수들의 행태는 대학 콘퍼런스, 대담, 토론회 등과 같은 사실상 모든 형태의 교류와 모임”에서 드러나는데, “이목을 끌려고 애쓰는 그들의 행동은 마치 공작새의 구애의식과도 같다”고 조롱한다. “지적 깃털을 한껏 부풀려 과시”하면서 “최고 실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애쓰거나, 그 세계에 발을 디디기 위한 정치적인 행동을 고민하면서 주변을 탐색한다”는 것이다.

지위와 명성을 향한 추구에는 “필수불가결하게 결핍”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구조적 필연이다. “신진 교수의 대다수를 공급하는 주요 대학에는 그들이 배출한 교수들이 들어설 자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다수의 신진 교수들은 “애초에 지원했던 곳보다 명성이 떨어지는 기관에 자리를 잡거나 겸임교수로 전락”한다. 그래서 “자기과시를 향한 집착은 종종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상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알력 싸움에서 승리자는 극히 드물고, 패배자는 사방에 즐비”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적) 자본이 자본을 낳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교수들이 명성과 지위를 향한 추구에 점점 더 매달리는 악순환이 거듭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지식인의 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지만, 제대로 된 ‘공적 지식인’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그 모든 것을 “지나친 실용주의” “과도한 자본의 지배”로 아우른다. 물론 미국 사회에서 대학의 실용성은 20세기 초반부터 “필요한 것”으로 제기돼왔다. 예컨대 철강왕 카네기는 “학생들이 졸업 후에 물질적 부를 좇는 데 필요한 교육을 대학이 효과적으로 제공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 전역에 수천개의 도서관을 기부한 그조차도 “대학의 실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미국 대학의 목표는 여전히 “학생의 정신적, 윤리적 역량을 키우는 것”이었다.

이제 대세는 바뀌었다. 저자는 “오늘날 대학은 실용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방향으로 변화”했으며, “전례없는 수준에서 대학의 자본화”가 이뤄졌다고 진단한다. “명예와 지위만을 추구”하는 교수들은 이런 문제에 저항하기보다는 포섭돼 있다. 그들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공적인 영역의 일들에 영 무심하다. 그들은 다만 “지원비가 현저히 깎인다거나 의무사항이 늘어나는 등 자신의 이해가 직접적으로 위협받을 때에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많은 대학에서 나타나는 이 “끈질긴 개인주의는 자기 영속화”하면서 “지적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책임감을 지닌 교수는 점점 줄어들고 대학에서의 양질의 교육도 붕괴”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대학사회를 비판의 시선으로 더듬은 저자는 “해결책은 원칙적으로는 분명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요원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다. 그는 대학과 교수사회를 향해 윤리의식과 책임감을 주문한다. “대학기관과 교수협회, 재단 및 비영리 단체는 기존의 순위 체계를 개선하고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면서 “특히 교수들은 특정 지위에 대한 욕구를 버리고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가 강조하는 요체는 “지식의 추구”라는 대학 본연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노력해야 “어느 정도의 방향 수정”이 가능해지며, 실용만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대학 현실과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다는 고언이다. 저자는 현재 스탠퍼드대 법과대학 교수이며, 같은 대학 윤리센터의 소장으로 있다.

 

11. 12. 23.

 

 

P.S. 기사를 읽다 보니 생각나는 책은 강준만 교수의 <아이비리그의 빛과 그늘>(인물과사상사, 2011)이다. 특이하게도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책인데(저자가 너무 다작이어서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중앙일보만 예외적으로 비중있게 다뤘다. 참고삼아 스크랩해놓는다.

 

중앙일보(11. 12. 03) 세계의 권력 모이는 미국 그 권력 좇는 아이비리그 학생들

 

세계 대학의 경쟁력 순위를 보면 상위권은 대개 미국 차지다. G2로 불리는 중국에서의 조사도 그렇다. 2011년 8월 중국 상하이교통대 발표를 보면 미국 대학 17곳이 ‘톱20’에 들어 있다. 미국 경쟁력의 근원은 대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중에서도 핵심이 아이비리그다. 국내 지식인 엘리트의 위선을 줄곧 비판해온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이번엔 아이리비그의 내막을 들여다봤다.

저자는 아이비리그를 중심으로 미국 대학의 역사와 명암을 두루 재조명했다. 문헌과 언론보도를 골고루 섞어 인용·분석하는 ‘강준만식 글쓰기’가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이비리그는 하버드·예일·펜실베이니아·프린스턴·컬럼비아·브라운·다트머스·코넬대 등 미 동북부에 있는 여덟 개의 명문 사립대를 가리킨다. 조지아대에서 석사를, 위스콘신대에서 박사를 받은 저자는 올해 초부터 컬럼비아대에서 교환교수를 지내며 이 책을 구상했다. 아이비리그에 대한 동경이 심한 한국의 현실을 되돌아보기 위한 작업이라고 했다.

아이비리그를 보면 미국이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비리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선망과 숭배는 대단하다. 작은 지역으로 갈수록 더한데, 자식을 아이비리그 대학에 보내면 축하 파티를 여는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에 그 대학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집에 그 대학 깃발을 내걸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름만으로 ‘최고’를 상징하는 아이비리그. 스카이(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의 영문 이니셜)를 갈망하는 한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등록금 고민하는 대학생, 우리의 입시과외학원을 닮은 사설 컨설팅업체, 자녀 교육에 올인하며 헬리콥터처럼 아이를 곁을 맴돈다고 해서 붙인 ‘헬리콥터 부모’ 등도 우리 현실과 유사하다. 한국과 다른 게 있다면 미국의 평범한 서민층은 자식을 아이비리그에 보내려고 그리 심하게 애쓰지 않는데 비해 한국의 서민층은 ‘처절한 교육 투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일방적으로 미국 대학을 비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몰리는 배경에 주목한다. 영어는 물론 그 이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데 세계의 문제를 직접 다뤄본 당사자에게서 경험을 직접 전수받는 것이야말로 미국 대학의 강점이다. 국제사회의 뉴스 메이커들에게서 직접 얘기를 듣는 이점도 있다. 당장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살아있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장점으로 꼽으면서, 저자는 이 같은 아이비리그의 매력을 ‘권력 감정’과 연관 지었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각종 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이 세계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아이비리그는 세계 인력의 양성소로 자리매김된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공정성이다. 엘리트 권력 구조와 직결되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신입생 충원 관련 시비가 왕왕 벌어진다. 입학사정관 제도의 주관적 요소가 문제가 되는 것인데, 아이비리그에서 실시하면 무조건 다 좋다는 식으로 우리 대학들이 흉내내기 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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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아침에 보낸 원고인데 헨리 데이비드 소로(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은행나무, 2011)을 거리로 삼았다. 표제글 자체는 50여 쪽 정도의 짧은 글로 <월든>(펭귄클래식코리아, 2010)에도 부록으로 수록돼 있다. 인용문은 두 번역본 모두에서 가져왔다. 덧붙여 참고한 책은 박홍규 교수의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필맥, 2008)이다.

 

 

한겨레(11. 12. 24) 양심에 따라 살고 있는가? 아니라면 노예일뿐

 

“왜 당신네 미국인들은 돈 많은 사람들이나 군인들 말만 듣고 소로가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거요?”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말이다. 그가 격찬한 소로는 물론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이다. 살아서는 거의 무명인사였고 사후에도 문명에 반대한 자연주의 작가, 그래서 ‘숲 속의 로빈슨 크루소’ 정도로만 알려진 소로는 톨스토이의 말을 통해서 비판적 사상가이자 저항적 지식인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월든 호숫가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생활한 경험을 적은 <월든>의 저자로 이름이 높지만, 톨스토이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그보다 먼저 발표된 <시민의 불복종>(1849)이었다. 애초엔 32살의 소로가 한 잡지에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이다. 소로는 무엇을 말했나.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금언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소로는 당시 멕시코 전쟁(1846~1848)에 나선 미국 정부를 맹렬히 비판한다. 영토 확장에 욕심을 부린 미국이 텍사스를 합병하면서 벌어진 이 침략전쟁에 대해 소로는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 상설 정부를 자신의 도구로 사용한 결과”로 일어났으며 국민들은 이런 처사를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고, 그다음에 국민이라는 게 소로의 기본 입장이다. 그가 보기에 법을 존중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어떤 권리인가.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의무”가 소로가 말하는 권리다. 법이 인간을 더 정의롭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존중할 가치가 없는 법을 존중하다 보면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불의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이 소로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식과 양심에 반하여 참전하게 된 대령, 대위, 하사, 사병, 탄약 운반 소년병 등의 행렬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만약 그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행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스로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그림자이자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이 된다. 즉 “육신은 살아 있어도 이미 몸의 절반 이상이 땅속에 묻힌 채 장송곡을 듣고 있는 인간”이나 다를 바 없다. 그것은 기계이고 또 노예이다.

그런 신념을 가진 소로가 노예제에 반대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는 대놓고 말한다. “나는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정치적 조직을 한순간도 나의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고. 그는 자유의 피난처임을 자임해온 나라의 국민의 6분의 1이 노예이고, 그 나라가 침략국이기도 하다면 정직한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저항이고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만으론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허다한 사람들이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는 소신을 갖고 있더라도 실질적으로 그것들을 종식시키기 위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소로는 꼬집는다. “기껏해야 그들은 선거 때 값싼 표 하나를 던져주고, 정의가 그들 옆을 지나갈 때 허약한 안색으로 성공을 빌 뿐이다.”

투표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옳다는 쪽에 표를 던지지만 옳은 쪽이 승리를 해야 한다며 목숨을 걸지는 않는다. 정의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가볍게 표시하는 정도다. 소로는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수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그가 납세를 거부하다가 투옥당한 일은 한 가지 사례다. 단 한사람의 시민이라도 부당하게 감금하는 정부하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역시 감옥이라고 소로는 말했다. ‘꿈꾸는 자’와 ‘달리는 자’가 잡혀가는 나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11. 12.. 23.

 

 

 

P.S. 글의 말미에서 '꿈꾸는 자'와 '달리는 자'란 말이 염두에 둔 건 물론 송경동 시인과 정봉주 전 의원이다. '시민 불복종'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되는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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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리해야 할 원고를 보내고 잠시 포털을 둘러보다가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나꼼수 신드롬'과 함께 2011년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안철수 현상'에 대해서 중앙일보가 진중권 씨에게 촌평을청탁한 모양인데, '안철수 현상의 역설들'로 답해왔다. '나꼼수'에 대한 견해와는 달리 많은 부분에서 동의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다. 

 

 

중앙일보(11. 12. 23) 안철수 현상의 역설들

 

‘올해의 인물’이 아니라 차라리 ‘내년의 인물’이라 해야 할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안철수는 전혀 정치적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서울시장 출마선언과 더불어 갑자기 한국정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가 출마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시장이 되어 있을 게다. 하지만 압도적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원순 후보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이 시민운동의 대명사는 아름다운 양보에 멋진 승리로 보답했다.

가장 비정치적인 인물이 외려 가장 정치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는 흥미로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유력한 후보의 자리를 턱 없이 낮은 지지율을 가진 후보에게 양보했고, 그 행동을 통해 박근혜 대세론을 무너뜨리며 일거에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그에 대한 열광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지금, 여론조사에서 그는 여전히 박근혜 후보에게 10% 포인트 정도 앞서고 있다.

흔히 김영삼, 김대중을 “정치 9단“이라 부르나, 안철수의 행보는 이 노회한 이들의 계산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정치적으론 어리숙해 보이는 그에게서 어떻게 그런 묘수가 나올 수 있었을까? 아마 안철수는 자신의 후보 사퇴가 가져올 효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사퇴는 그야말로 아무 계산이 없는 순수한 희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수함이 정치9단의 노회함을 뛰어넘는 정치적 효과를 낳았다.

꼰대와 멘토
안철수 현상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다. 한국은 이미 산업화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변모했다. 하지만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낡은 산업사회의 삽질 경제 리더십. ‘CEO 대통령’을 자처하는 그 분은 사실 공사판 현장감독에 가깝다. 이를 시대착오라고 느끼는 대중은 정보화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영웅을 원한다. 그리고 그 영웅을 IT산업에서 배출된 디지털 유형의 CEO에서 찾았다.

 

‘롤 모델‘이라는 말이 있다. 이념의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롤 모델이 사회주의적 ’전사’였다면, 탈이념의 시대에 젊은이들의 롤 모델은 자본주의적 영웅이다. 안철수는 IT 분야에서 성공한 CEO이고, 그와 단짝을 이루는 시골의사 박경철은 주식투자의 전문가다. 한 마디로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삶의 목표는 곧 안철수 혹은 박경철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형상을 닮으려 한다.

취업난의 시대에 가장 불안과 절망을 느끼는 것은 젊은 세대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고민을 들어줄 사람을 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제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고민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낡은 산업사회의 ‘꼰대’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에어컨 바람 쐬며 일하려고만 한다.” 이와 달리 안철수는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기꺼이 그들의 ‘멘토’가 되어 준다.

복지에서 시장개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메시지는 나쁘게 보면 허무한 위로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철수는 다르다. 그는 지금 젊은이들이 겪는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짚어주며, 추상적으로나마 문제의 해결방향을 지시한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 그 속에서는 거대기업의 횡포로 인해 중소기업이 발전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고용의 대부분을 창출하는 것은 중소기업. 이러니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현 정권은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 덕분에 대기업들은 하나 같이 잘 나가고 있으나, 현 정권이 약속했던 떡고물(이른바 ‘낙수효과’)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떡을 먹으면서 고물 하나 안 흘리나?” 성장에 대한 기대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성장도 제대로 안 되고, 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지도 않는,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 찾아 왔다. 그럼 이제 방향 전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성장정책에서 비롯된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저마다 ‘복지’를 떠든다. 복지를 늘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나, 그보다 시급한 것은 시장개혁, 즉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철수가 던지는 메시지다. 이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다. 안철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시장주의자, 이 사회에서 보기 드문 상식적 보수주의자다.

대안정당이냐 정당대안이냐
역설은 그의 보수적 메시지가 이 사회에선 졸지에 급진적 목소리가 된다는 것. 시장개혁을 하려면 대기업에 칼을 대야 하는데, 그 일을 누가 맡겠는가? 대기업이라는 고양이 앞에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은 그저 겁먹은 쥐에 불과하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에 대한 대중의 혐오는 그저 그들이 보여주는 구태에 대한 불신이 아니다. 두 정당이 결코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주제가 못 된다는, 근원적 절망이다.

일찍이 진보정당은 그 절망에서 만들어졌으나, 그들은 제 존재의 의의를 증명하는 데에 실패했다. 한때는 그들도 참신하여 10석의 의석과 14%의 지지율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시대의 이념을 정체성으로 가진 진보정당은 정보화 사회 속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산출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중에게 접근할 적합한 소통(채널)의 문제 이전에 그들에게 던질 메시지(콘텐츠) 자체의 한계다.

한때 안철수를 중심으로 한 대안정당(“제3정당”) 얘기가 떠돌았으나, 안철수 자신이 부정함으로써 논의는 짧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안철수는 ‘대안의 정당’이 아니라, ‘정당의 대안’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 없이 통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안철수는 아직 신기루에 불과하다. 정치를 하려 한다면, 그 역시 어떤 식으로든 정당과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역설
제대로 된 보수가 없고, 진보마저 ‘대안’이 못 되는 상황에서 ‘정당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안철수라는 이름의 상식적 보수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 역시 대중이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보고 싶어 했으나, 그들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보수의 미덕(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이다.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고, 정당하게 획득한 재산을 정의롭게 환원한다.’ 이처럼 비정치적이면서 고도로 정치적인 메시지가 또 있을까?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안철수를 즐겨 ‘또 다른 이명박’이라 부른다. 그들의 말대로 안철수 열풍은 디지털 버전으로 진화한 이명박 신화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안철수의 ‘상식’은 그 어떤 진보적 구호보다 급진적이다. ‘시장의 개혁.’ 거기에는 엄청난 저항과 반발이 따르지 않겠는가? 물론 그가 이 일을 제대로 해낼 것이라 믿기는 힘들다. 하지만 보수주의자의 관점에서 적어도 그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짚었다.

안철수가 진보적이지 않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지적은 옳다. ‘분배’의 정의로움이 아니라 ‘시장’의 공정함을 요구하며 재산을 ‘기부’하는 것. 이는 철저히 보수주의의 스탠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그것은 보수의 승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엉터리 보수가 미덕과 가치를 가진 합리적 보수로 변모하는 것. 한국 사회에서 그처럼 커다란 진보가 또 있을까? 이것이 안철수 현상의 마지막 역설이다.(진중권_시사평론가)

 

11.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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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오후 늦게까지 고심하다가 마감시간에야 보낸 글이다. 애를 먹은 건 BBK 사건과 관련하여 정봉주 전 의원이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하고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맥이 풀려서 손을 놓는 바람에 늦어진 것인데, 여하튼 이 정부의 '말로'는 모두가 두 눈 다 뜨고 지켜봐야겠다. 안철수 교수의 나눔 이야기는 오전에 잠깐 읽은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던 나눔에 관한 열 가지 질문>(김영사, 2011)에서 가져왔다.

 

 

 

경향신문(11. 12. 23) [문화와 세상]MB정부 ‘파 한 뿌리’는 뭘까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걸작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제목은 많이들 알지만 완독한 사람은 드문, 그래서 ‘고전’이란 말에 값하는 소설이다. 그렇게 제목만 아는 분들을 위해 ‘읽은 척 매뉴얼’ 차원의 정보를 알려드리고자 한다. 이 대작의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이다. 멀리 가진 않는다. 책장을 열자마자 나오는 제사에 들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요한복음의 구절이 그것이다. 자기 혼자 살겠다고 하면, 그저 밀 ‘한 알’일 뿐이지만 자신을 기꺼이 내던지면 그것은 ‘많은 열매’가 된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멘토’ 안철수 교수가 사회적 나눔의 새로운 형태로 드는 예 가운데 ‘키바(KIVA)’라는 시민단체가 있다. 돈 빌리기를 원하는 기업가나 학생들을 돈을 빌려주고 싶은 일반 시민들과 연결해주는 인터넷 사이트이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얼마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올려놓고, 세계 각지의 시민들은 그걸 보고 돈을 빌려준다. 무이자로. 다시 돌려받으니 기부는 아니다. 하지만 돈을 돌려받는 것은 빌린 사람이 자립했다는 의미가 되니 그게 보람이다. 그래서 돌려받은 돈을 또다시 빌려주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키바는 만들어진 지 5년 만에 2000억원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아직 한국에는 없다지만 이런 것을 ‘많은 열매’의 새로운 사례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밀알 한 알’ 이야기와 함께 ‘파 한 뿌리’ 이야기도 나온다. 아버지 표도르와 맏아들 드미트리 사이의 쟁탈전을 낳은 여주인공 그루셴카의 이야기이기에 ‘그루셴카의 테마’라고도 부른다. 어떤 이야기인가. 옛날 옛적에 아주 못돼먹은 아줌마가 있었다. 평소에 착한 일을 단 한 가지도 하지 않고 죽은 탓에 악마들은 그녀를 불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래도 이 아줌마의 수호천사는 뭔가 구제할 거리가 없나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한 가지를 기억해내고 하느님께 고했다. 텃밭에서 양파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한 번 있다고 말이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 양파를 들고 가서 불바다 속의 여인을 구해보라고 한다. 천사는 아줌마한테 달려가 붙잡고 올라오라고 파 한 뿌리를 내밀었다. 천사가 아줌마를 불바다에서 거의 다 끌어올리려는 참에 다른 죄인들이 같이 좀 나가보겠다고 그녀에게 매달렸다. 아주 못돼먹은 아줌마는 죽어서도 자기 성질을 죽이지 못해 그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러자 양파가 툭 끊어져 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다시 불바다 속으로 떨어져버렸고, 천사는 울면서 떠나갔다.

 



인간은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가란 거창한 문제를 다룬 이 이야기를 그루셴카는 알료샤에게 전하면서 자기 또한 못된 여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파 한 뿌리를 준 적은 있다고 말한다. 겸손한 말이지만 동시에 자부심의 근거이다. 분명 지옥의 불바다에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구원의 기회가 한 번은 주어질 거라고 그녀는 믿는다. 아무리 못돼먹은 영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파 한 뿌리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아니 사소하지만 위대하다. 위대할 수 있다.

이런저런 만감을 갖게 되는 연말이다. 더불어 우리에게 ‘밀알 한 알’과 ‘파 한 뿌리’가 어떤 것인지 정산해보는 시간이다. 이런 정산은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정권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은 북한의 절대 권력자로서 무엇을 남겨놓았는지 돌이켜보게 한다. 그의 파 한 뿌리는 무엇이었을까. 아직 1년여의 임기를 더 남겨놓고 있지만 이명박 정부도 마찬가지다. 설마 파 한 뿌리조차 건넨 일이 없겠는가.


11.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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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56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하세가와 에이스케의 <일하지 않는 개미>(서울문화사, 2011)에서 일부 내용을 정리하고 소감을 붙였다. 잡지는 강의차 대구에 내려가면서 KTX객차 안에서 읽었는데, 어느덧 '송년호'였다(주간경향이 꼽은 올해의 인물은 '안철수'이다). '일하지 않는 개미'로 한해를 보낼 순 없을까 잠시 공상해본다...

 

 

 

주간경향(11. 12. 27)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사회는 여력이 없다

 

‘개미에게 배우는 지혜’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이솝의 우화 ‘개미와 베짱이’다. 부지런한 개미와 게으른 베짱이의 ‘말로’를 교훈적으로 전해주는 감동적인이면서도 ‘무서운’ 우화 말이다. “너네 그렇게 공부 안하고 놀기만 하면 나중에 거지 된다!”고 했던가. 조금 유식한 독자라면 한걸음 더 나아가 파레토의 법칙이란 걸 떠올릴지도 모른다. 부지런하다고 하는 일개미들을 자세히 관찰했더니 실상 80%는 놀더라는 데 착안하여 경제학자가 내놓은 것이 ‘20:80 법칙’이다. 은연중에 ‘20 대 80 사회’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개미에게 배우는 ‘두 번째’ 지혜라고 할까.

 

 

일본의 진화생물학자 하세가와 에이스케의 <일하지 않는 개미>는 파레토의 법칙에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세 번째’ 지혜를 알려주는 책이다. 물론 제목만으로는 별로 놀랍지 않다. “개미가 부지런하다고? 80%의 일개미는 논다!”라는 표지 문구도 게으른 독자들을 확실히 잡아끌 만한 독서의 유인으로는 약해 보인다. 핵심은 다른 데 있다. 저자 또한 개미의 종류와 무관하게 70% 일개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는 관찰결과를 보고한다. 일하지 않는 일개미는 먹이를 모으거나 유충을 보살피거나 여왕의 시중을 드는 것과 같이 군락을 위한 뭔가 생산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자기 몸을 핥거나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식으로 노동과 전혀 무관한 활동만 한다.

 

좋다, 타고난 천성이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런 게으름뱅이가 절대 다수인 집단이 좀 더 부지런한 집단과의 경쟁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약 진화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거라면 일개미들의 게으름은 분명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개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하지 않는다’는 뜻을 조금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미 군락의 일 가운데는 단기간이라도 멈추게 되면 군락의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것이 있다. 특히 알을 보살피는 그런 일에 속하는데, 개미의 알은 몹시 약하기 때문에 일꾼 개미가 늘 곁에서 핥아주어야 한다. 침에 함유된 항균물질을 계속 발라주는 것이다. 땅속이나 썩은 나무 안에서 서식하기에 개미들에게 방균은 중차대한 문제다. 일꾼을 알에서 하루만 떼어놓아도 대부분의 알에 곰팡이가 슬어 죽어버린다고 할 정도다. 이런 조건에서라면 군락 내에 노동력이 제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먹이를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모든 개미 전체가 먹이 찾기에 동원될 수 없는 이유다.


게다가 갖가지 돌발적인 사태에도 대비해야 한다. 심술궂은 꼬마가 개미집에 흙을 끼얹는 것 같은 예기치 않은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여력’이라는 게 필요하다. 예비 노동력을 남겨놓지 않고 모두가 한꺼번에 일을 한다면 결국 다들 지쳐서 아무도 일을 할 수 없는 때가 올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미 군락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게 된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시스템이야말로 파국적인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미들의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개미’는 잉여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군락이 존속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한 존재다. 다르게 말하면 ‘일하지 않는 개미’는 예비 노동력으로서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존재’다. 얼핏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일하지 않는 개체들을 갖고 있는 개미들의 시스템이 결국 오랜 진화의 압력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음미해볼 만하다. 모두가 부지런한 시스템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80%가 게으른 시스템이었다.


<일하지 않는 개미>를 통해서 ‘멍청함’에 대해서도 재평가하게 된다. 개미들은 페로몬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는데, 그 흔적을 따라 앞서 간 개미를 정확하게 추적하는 ‘똘똘이’ 개미 말고도 항상 잘못 추적하는 ‘멍청이’ 개미들이 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똘똘한 개체만 있을 때보다 조금 멍청한 개체가 섞여 있을 때 조직이 더 잘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먹이를 찾을 때 멍청한 개미들은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매다가 오히려 지름길을 발견하곤 해서다. ‘부지런한 개미’라는 환상은 벗어던지게 됐지만 아직 우리가 개미에게 배울 수 있는 지혜는 더 남은 듯싶다. 

 

11. 12. 20.

 

 

P.S. <일하지 않는 개미>의 추천사는 최재천 교수가 썼는데, 개미 관련서로 대표적인 책이 그의 <개미제국의 발견>(사이언스북스, 1999)이다. 최재천 교수의 지도교수이자 개미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 에드워드 윌슨이 베르트 휠도브러와 같이 쓴 <개미 세계 여행>(범양사, 2007)과 함께. 윌슨의 <사회생물학> 개정판은 올해 고대하던 책 가운데 하나였는데, 해를 넘기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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