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오후 늦게까지 고심하다가 마감시간에야 보낸 글이다. 애를 먹은 건 BBK 사건과 관련하여 정봉주 전 의원이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하고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맥이 풀려서 손을 놓는 바람에 늦어진 것인데, 여하튼 이 정부의 '말로'는 모두가 두 눈 다 뜨고 지켜봐야겠다. 안철수 교수의 나눔 이야기는 오전에 잠깐 읽은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던 나눔에 관한 열 가지 질문>(김영사, 2011)에서 가져왔다.

 

 

 

경향신문(11. 12. 23) [문화와 세상]MB정부 ‘파 한 뿌리’는 뭘까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걸작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제목은 많이들 알지만 완독한 사람은 드문, 그래서 ‘고전’이란 말에 값하는 소설이다. 그렇게 제목만 아는 분들을 위해 ‘읽은 척 매뉴얼’ 차원의 정보를 알려드리고자 한다. 이 대작의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이다. 멀리 가진 않는다. 책장을 열자마자 나오는 제사에 들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요한복음의 구절이 그것이다. 자기 혼자 살겠다고 하면, 그저 밀 ‘한 알’일 뿐이지만 자신을 기꺼이 내던지면 그것은 ‘많은 열매’가 된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멘토’ 안철수 교수가 사회적 나눔의 새로운 형태로 드는 예 가운데 ‘키바(KIVA)’라는 시민단체가 있다. 돈 빌리기를 원하는 기업가나 학생들을 돈을 빌려주고 싶은 일반 시민들과 연결해주는 인터넷 사이트이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얼마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올려놓고, 세계 각지의 시민들은 그걸 보고 돈을 빌려준다. 무이자로. 다시 돌려받으니 기부는 아니다. 하지만 돈을 돌려받는 것은 빌린 사람이 자립했다는 의미가 되니 그게 보람이다. 그래서 돌려받은 돈을 또다시 빌려주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키바는 만들어진 지 5년 만에 2000억원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아직 한국에는 없다지만 이런 것을 ‘많은 열매’의 새로운 사례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밀알 한 알’ 이야기와 함께 ‘파 한 뿌리’ 이야기도 나온다. 아버지 표도르와 맏아들 드미트리 사이의 쟁탈전을 낳은 여주인공 그루셴카의 이야기이기에 ‘그루셴카의 테마’라고도 부른다. 어떤 이야기인가. 옛날 옛적에 아주 못돼먹은 아줌마가 있었다. 평소에 착한 일을 단 한 가지도 하지 않고 죽은 탓에 악마들은 그녀를 불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래도 이 아줌마의 수호천사는 뭔가 구제할 거리가 없나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한 가지를 기억해내고 하느님께 고했다. 텃밭에서 양파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한 번 있다고 말이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 양파를 들고 가서 불바다 속의 여인을 구해보라고 한다. 천사는 아줌마한테 달려가 붙잡고 올라오라고 파 한 뿌리를 내밀었다. 천사가 아줌마를 불바다에서 거의 다 끌어올리려는 참에 다른 죄인들이 같이 좀 나가보겠다고 그녀에게 매달렸다. 아주 못돼먹은 아줌마는 죽어서도 자기 성질을 죽이지 못해 그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러자 양파가 툭 끊어져 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다시 불바다 속으로 떨어져버렸고, 천사는 울면서 떠나갔다.

 



인간은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가란 거창한 문제를 다룬 이 이야기를 그루셴카는 알료샤에게 전하면서 자기 또한 못된 여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파 한 뿌리를 준 적은 있다고 말한다. 겸손한 말이지만 동시에 자부심의 근거이다. 분명 지옥의 불바다에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구원의 기회가 한 번은 주어질 거라고 그녀는 믿는다. 아무리 못돼먹은 영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파 한 뿌리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아니 사소하지만 위대하다. 위대할 수 있다.

이런저런 만감을 갖게 되는 연말이다. 더불어 우리에게 ‘밀알 한 알’과 ‘파 한 뿌리’가 어떤 것인지 정산해보는 시간이다. 이런 정산은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정권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은 북한의 절대 권력자로서 무엇을 남겨놓았는지 돌이켜보게 한다. 그의 파 한 뿌리는 무엇이었을까. 아직 1년여의 임기를 더 남겨놓고 있지만 이명박 정부도 마찬가지다. 설마 파 한 뿌리조차 건넨 일이 없겠는가.


11.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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