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어 책 홍보만 되는 듯싶어서 별로 끼어들고 싶지 않지만 새움판 <이방인>에 대해서 한마디만 보탠다. 어제 경향신문 기자와 전화 인터뷰한 것이 기사화됐기 때문이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4152119195&code=960205). 기사 내 사진은 오마이뉴스에서 가져왔다.

 

 

카뮈의 <이방인> 번역을 둘러싸고 번역자의 도덕성 논란이 일고 있다. 익명으로 원문 번역자를 과도하게 비판해 노이즈 마케팅이란 지적을 받기도 했던 <이방인>(새움출판사·사진)의 번역자 이정서(익명)가 책을 출간한 새움출판사의 이대식 대표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프랑스어 원문의 오독과 오역을 비판해온 이 대표가 정작 자신은 영어판 <이방인>을 갖고 번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대식 대표는 15일 새움출판사 블로그에 글을 올려 “이정서와 새움출판사 대표 이대식이 동일인인 것이 맞다”고 인정했다. 그는 “필명을 써서 번역서를 낸 일을 두고 언론이 ‘도덕적 해이’라고 하는 이유를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들다”며 “같은 출판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출판사의 번역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우려스러워서였다”고 해명했다.

 

그는 또 “(필명을 사용한 이유는) 모든 선입관을 버리고, 이 책 <이방인>이 제대로 번역되었는지 아닌지 전문가들이 살펴달라는 취지였다”며 “우리 사회 문화계에 음으로 양으로 큰일을 해주신 김화영 교수님을 욕보인 결과가 되었고, 교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던 많은 후학들의 가슴에도 상처를 드리게 되었다. 그 점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썼다. ‘김화영의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고 했던 기존 태도와는 달리 “김화영 교수님의 <이방인> 번역이 없었다면 정말이지 이러한 미묘한 차이들을 찾아내면서까지 재번역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번역자가 실명을 밝혔지만 도덕성 논란은 더 커지는 분위기다. 이 대표가 번역 과정에서 프랑스어판이 아니라 영어판을 번역했다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새움출판사 블로그 연재와 이를 묶은 <이방인> ‘역자노트’에서 프랑스어 원문을 제시하며 김화영 교수의 오독과 오역을 비판해왔다. 그러나 복수의 출판계 관계자들은 이날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이 대표가 영어판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 번역을 한 다음 새움출판사 편집자들이 프랑스어판과 대조하는 작업을 했다”고 주장했다. 서평가 이현우씨는 “같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이라면 사기 번역”이라며 “언제까지 비밀이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편집자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은 이 대표도 인정한 부분이다.

 

 

이 대표는 지난해 8월부터 6개월 동안 이정서라는 필명으로 김화영 교수의 <이방인> 번역을 비판하는 연재글(경향신문 1월25일자 17면 보도)을 올렸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후 문학계에서는 출판사의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어났다. 최근에는 이 출판사가 기존 번역들을 “왜곡과 난삽”이라고 매도하는 출간 기념 고사를 지낸 사실까지 알려지며 논란이 증폭됐다. 급기야 서평가 이현우씨가 13일 밤 자신의 블로그에 이 대표의 정체를 폭로하며 논란은 정점에 달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책 판매를 위해 원로학자를 공격한 것”이라며 “상식에서 벗어난 마케팅”이라고 말했다.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은 알라딘 고전분야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2주 연속 2위를 지키고 있다.(경향신문)

다른 건 차치하고, 번역자를 자임한 이정서는 자신이 영어판도 참조했지만 그것도 일개 '번역판'에 불과하기에 그에 따르지 않았다고 하면서 영어판의 오류들까지 들먹였었다. 영어판을 같이 껴서 판매한 '더클래식'판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난센스"라고 일갈하면서 영어판 중역의 문제를 이렇게 꼬집었다(http://saeumbook.tistory.com/429).

그건 원본 번역이랄 수 없습니다. 그건 아마 역자가 자신이 번역에 정확성을 기했다는 걸 내세우기 위한 장치로서 사용한 것일 수도 있고, 불어를 모르는 독자들이 더 많을 테니 영어 원본이라도 참고하라는 좋은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하긴 내가 번역을 잘 몰랐을 때는 그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는데 실제 번역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되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불어 소설은 불어 원본을, 독어 소설은 독어 원본을 실어줘야 그나마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 다만 불어 번역을 말하면서 그에 실린 영어 문장을 가져다 설명하려다 보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자신은 영어본을 대본으로 번역했지만 편집자들이 불어본과 대조했기 때문에 '원본 번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낭패'에서 벗어낫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이휘영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덧붙이자면, 일전에 <이방인> 마지막 대목에서 사이렌 소리와 뱃고동 소리, 두 가지로 번역된 걸 제시하자(http://blog.aladin.co.kr/mramor/6966576) 이렇게 반응했다.

김화영의 이 오역의 시발은 어디서부터일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그건 로쟈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휘영 교수의 번역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소린가, 하면 김화영 교수 역시 자신의 스승인 이휘영 교수의 번역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나는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았다.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다. 거기까지 가면, 정말이지 이 나라의 도제 시스템이 만들어낸 학문 체계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밝히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  로쟈라는 젊은 후학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보고 싶지 않았던,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이휘영 교수의 <이방인>을 끝내 보게 하고 말았다.

이런 반응에서 나는 역자가 얼마나 자기도취적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방인>의 최초 번역자인 이휘영본이 문제의 시발점이라면 애초에 김화영본이 아니라 이휘영본을 문제삼았어야 논리에 맞다. 도제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기에 김화영본도 이휘영본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게 하고 싶은 말 아닌가(지나는 김에 말하자면 나는 이정서라는 선학을 둔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전 페이퍼에서 내가 인용한 대로 사이렌 대목은 이휘영본과 김화영본이 다르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는 영원히 관계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이휘영본, 문예출판사)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김화영본, 민음사)

이정서의 근거 없는 예단에 어긋나게도 이 대목에서 김화영은 스승의 번역을 무시하고 감히 반역을 시도하고 있다. 내 식으로 분류하면 '사이렌파'와 '뱃고동파'가 그렇게 갈라졌던 것이다. 이정서가 이 대목의 '뱃고동 소리'를 '사이렌'으로 다시 번역한 건 사실 전혀 새롭지 않다. 맨 처음 번역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거기에 얹어 '밤의 경계'라는 어색한 말로 얼버무린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데, 이 문제 제기에 답하면서 이정서는 엉뚱하게도 거기에 이어지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김화영)는 문장에 대한 시비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내가 그 대목을 빼먹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서문(역자의 말)에 무얼 적어놓았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걸까? 그가 8-9쪽에서 문제삼은 건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두 문장이다. 반복이지만,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보다시피 김화영은 여기서 limite를 '끝'으로, sirènes를 '뱃고동'으로 보고 저렇게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 하여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린" 게 아니라, "한밤의 경계선에서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울린"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다.(새움판, 8-9쪽)

이정서의 주장에 따르면 이 대목이 김화영 오역의 화룡점정이자 피날레다. 애초에 내가 이 대목을 문제삼은 건 그 때문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결정적인 오역이라고 서문에서부터 표나게 윽박지르고 있는 이 대목이 사실은 오역이 아니라는 것. 마무리에서 이렇게 적었다.

정리하자. 새움판 새 번역 <이방인>에서 역자는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는 문장을 근거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라고 '탄핵'했지만, 나는 '사이렌 소리' 대신에 '뱃고동 소리'라고 옮길 만한 근거도 있으며 그렇게 옮긴 번역본도 적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서만큼은 '뱃고동파'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번역은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고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 <이방인>의 인용 준거가 되려는 번역이라면, 좀더 많은 걸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더러 불어와 전공인 러시아어판을 비교해보라고 충고까지 했지만(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이런 거 비교한다고 '세계적인 대학자'의 반열에 오르거나 하지 않는다. 매우 단순한 일이라서), 그 페이퍼는 이미 러시아어판 외에 몇 개 국어판을 살펴본 다음에 쓴 것이다. 러시아어판에서도 '뱃고동 소리'(пароходные гудки)라고 옮기고 있어서 더 확신을 갖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옮긴 영어판이나 러시아어판 모두 엉터리이며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사례일까? 하긴 <이방인>을 유일무이하게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자임하는 역자에게 이런 식의 방증이 통할지는 의문이지만, 다른 이들이 그런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하하거나 모욕할 권리는 없다...

 

 

 

단순한 역자이기를 넘어서 야심찬 출판사의 대표이기도 하니까 이 정도 '스캔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스캔들은 언제나 매출에 도움이 되므로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독자도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는 않는다. 이번 번역에 잔뜩 고무돼 <마담 보바리>까지 손봐주려는 듯한데, 이번 일로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면, 건투를 빈다! <이방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간의 허접한 엉터리 번역본들을 '싹쓸이'해줄 명번역을 기대한다...

 

14.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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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논쟁에 관한 페이퍼 탓인지 오늘 하루 방문자가 많다. 하지만 나로선 충분히 '마케팅'에 일조했다고 생각하고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 고전 번역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시리즈가 새로 나왔는데,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1차분을 펴낸 고전 논픽션 시리즈 '위대한 생각'이다.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 졸라의 <전진하는 진실>, 에머슨의 <자연>, 디킨스의 <밤산책>, 보들레르의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등 다섯 권이 1차분 리스트인데, 추가 리스트를 보니 다시 번역되는 책도 있지만 대부분 초역이다. 현대문학사에서 나오는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현재 일곱 권이 출간됐다)와 함께 고전 번역 시리즈로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응원하는 의미에서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가장 먼저 독서목록에 올려놓은 건 역시나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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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움판 <이방인> 번역으로 불거진 논란이 확산되는 모양새다. 역자나 출판사가 바라는 바였는지 모르겠지만(이 번역은 현재 알라딘의 고전분야에서 베스트셀러 1,2위를 다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좀 유감스럽다. 새움판의 역자는 김화영본의 오역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 자신의 번역은 오역에서 면제된 듯한 (위압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무슨 '번역 무오류설'의 신자라도 되는가?), 모든 번역은 오류(오역)에 열려 있다(역설적이지만 원작보다 나은 번역본이 나오기도 하는 건 이런 개방성 때문이다). 자기 번역에 대한 자부와 독선은 별개의 문제다.

 

 

 

오역에 대한 논란과 함께 익명 비판이 갖는 문제도 따져볼 문제다.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가 ‘이방인’ 번역 논란에 뒷북을 치면서 이렇게 적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32481.html).  

새움판 <이방인> 번역본은 ‘이정서’라는 필명 뒤에 번역자의 정체를 감추고 있다. 그가 역시 같은 필명으로 얼마 전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라는 소설을 낸 것 이외에 다른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계급장 떼고 붙어 보자’는 식의 도전 정신으로 이해되지만, 어쩐지 찜찜하다. 비판 대상은 벌거벗겨 광장에 내다놓고 비판의 주체는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꼴이 공정해 보이지는 않는다.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는 국문학자 이명원이 원로 학자 김윤식의 표절 사실을 들춰냈다가 학교 사회에서 쫓겨난 일을 소재로 삼았다. 이명원은 어디까지나 제 이름을 걸고 원로를 비판했다. ‘이정서’ 역시 신분을 드러내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불필요한 익명 처리가 ‘노이즈마케팅’ 혐의를 자초하는 건 아닐까.

'다른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고 했지만 약간의 정보는 주어져 있다. <이방인>의 옮긴이 소개에 보면 "대학 시절 여러 문학상을 받고, 학보에 소설을 연재할 만큼 열정적인 문청이었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글쓰기를 접고 회사를 경영했다"고 돼 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이방인>의 오역 문제를 발견하고 뛰어들었다는 것. 그러면서 <이방인>과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새움, 2014)를 거의 동시에 출간하는데, 김윤식 교수의 표절 문제를 다룬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는 십수 년 전 일을 소재로 한 것이라 지금에야 출간된다는 게 다소 의문이었다(이제는 물론 눈치챌 수 있다. 김화영에 대한 이정서의 오역 시비를 김윤식에 대한 이명원의 표절 시비 연장선상에서 정당화하려는 프레임이었던 것. '권위에 대한 약자의 의로운 도전'으로 동일시하려 했던 것이다).

 

 

한데, 책에 실린 작가의 말에는 아무 언급이 없지만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는 '개정판'이다(출판사 홈피에서는 이를 밝히고 있다). 2001년에 같은 제목의 책이 나왔었기 때문이다. 차이라면 2001년판에서는 '김지윤 교수'라고 가명으로 썼다가 이번에는 '김윤식 교수'라고 실명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 '이정서'의 해명은 이렇다.

이 소설에는 실명과 허구의 이름이 동시에 쓰였습니다. 소설에 실명을 등장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나, 언론에 이미 발표된 이름들은 그것을 숨기는 것이 오히려 더 불필요한 상상을 초래할 수 있을 것 같아, 경우에 따라서는 실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차이라면 2001년판의 저자는 '이환'으로 표기돼 있다는 점. "2000년 단편소설 <케네디를 찢다>(비평과전망 제2호)로 작품 발표 시작. 장편소설 <너를 부르마>가 있다. 현재 DESIGN NAMU를 운영하고 있다"가 당시 소개된 약력이다(<비평과 전망>이란 잡지도 새움에서 펴내던 것이다).

 

절판됐지만 <너를 부르마>(새움, 2000)는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보다 조금 앞서 나온 소설이다. 이환=이정서와 새움과의 긴밀한 관계가 눈에 띄는데, <이방인> 번역이 출판사 홈피에 파격적으로 연재됐던 것도 고려하면 이정서는 출판사 대표와 아주 막역한 사이이거나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추정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새움출판사 대표와 편집부 직원들이 합작해서 쓴 <출판24시>(새움, 2013)의 첫 대목은 이렇다(여담으로 적자면 이 책은 작년에 출판사에서 보내온 것이다).

이정서 수비니겨 출판사 대표는 어제 신입사원이 치르고 간 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험지는 곧 출간될 원고에 일부러 오자와 비문을 만들어 넣어 출제해둔 것인데, 응시자는 생각보다 문장을 매만지는 솜씨가 괜찮았다.(9쪽)

<이방인> 역자의 이름으로도 쓰인 '이정서'는 새움출판사의 거의 '간판' 같은 이름인 듯싶다. 이미 트위터상에 떠 있으므로(https://twitter.com/socoopbooks/status/455288254867054592) 에둘러 말하지 않도록 한다. 출판계에서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 <이방인>의 역자 이정서는 새움출판사의 이대식 대표다(그는 서울시립대 국문과 출신으로 이명원 평론가의 선배다). 아마도 본인이 밝히길 꺼려 하기에 (이미 알고 있을 법한) 기자들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새움출판사 홈피에는 한겨레 고나무 기자의 인터뷰와 기사 내용에 대해 반박하는 역자의 글이 올라와 있는데(http://saeumbook.tistory.com/430) 모순적이게도 모두가 엉터리인 다른 <이방인> 번역에 대해 자신의 번역본이 완벽하게 옳은 번역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불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불어는 한마디도 못한다고 천연스레 적어놓고 있다(불어 원전만 보았지 다른 건 참고하지 않았다는 사람의 말이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실제 번역자가 따로 있어서 이정서는 '편집자' 역할만 했거나 아니면 역자가 주장하듯 카뮈와 접신을 했거나...  

 

 

 

개인적으로 새움출판사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랬다면, 다시 나온 이명원의 <타는 혀>와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를 구입하지 않았을 테고, <이방인> 번역서와 함께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도 주문하지 않았을 것이다(출판사에서는 <이방인>을 내가 알라딘에서 구입한 다음주에 보내왔다). 하지만 이번 논란을 보면서 그들의 가면 놀이가 불쾌하고 위험하게 여겨진다. '노이즈마케팅'도 정도껏 하는 게 좋다. 알라딘의 닉네임을 빗대자면 그러다 '외롭고웃긴출판사' 된다. 오랜 경구대로 일부의 사람을 영원히 속이거나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14.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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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을 한권 적는다. 사실은 지난달의 발견이라고 해야 하는데, 책은 진즉 구해놓고 방치해놓았다가 책정리 중에 다시 발견했다. 제임스 V. 워치의 <보이스 오브 마인드>(학이시습, 2014)다. '매개된 행위에 대한 사회문화적 접근'이 부제.

 

 

 

제목이나 부제로는 어떤 책인지 알기 어려운데, 키워드가 '비고츠키'와 '바흐친'이라고 하면 좀 관심이 생길지 모르겠다. 내가 그런 경우다. 소개에 따르면, "북미의 대표적인 비고츠키 학파 중 한 명인 제임스 V. 워치의 국내 첫 번역서다. 사회문화심리학을 펼치기 위해 러시아의 언어철학자인 미하일 바흐친의 이론을 핵심 보조선으로 채용하고, 비고츠키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인간 정신(마음)의 사회문화역사적 접근의 심리학 이론 및 실천의 확장을 시도했다." 역자는 <비고츠키, 불협화음의 미학>(에듀니티, 2013)의 저자이기도 한 박동섭 교수. 교육학 쪽에는 비고츠키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좀 된다.

 

 

 

개인적으로는 비고츠키보다 바흐친에 관심이 있어서 원서까지 대출했지만 아직 펴보진 못하고 있다. 사실 비고츠키만 하더라도 엄두가 잘 안 날 정도로 읽을 책이 많고, 국내에도 대표 저작들이 소개돼 있는 형편이다. 올초에 <어린이의 상상과 창조>(살림터, 2014)까지 나온 '비고츠키 선집'이 대표적이다.

 

 

특히 주저인 <사고와 언어>의 경우는 번역본이 세 종이나 된다(선집판 제목은 <생각과 말>). 나 역시 (찾아보면) 영어와 러시아어판까지 갖고 있기 때문에 번역본들을 대조해가며 읽어볼 수 있지만, 아쉽게도 그런 여유를 부린다는 게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이런 페이퍼를 통해서 상기만 해둔다.

 

 

 

한편 마인드(마음)에 대한 최근 신간으로는 로저 펜로즈의 <마음의 그림자>(승산, 2014)도 빼놓을 수 없다. "<황제의 새 마음>의 저자 로저 펜로즈의 또 한 권의 명저. 물리학, 수학은 물론이고 괴델의 논리학과 튜링의 컴퓨팅 기술, 생물학, 그리고 서양 철학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까지 전방위 학문들을 어렵지 않게 거론하고 서술하면서 두뇌와 의식에 대한 탐구를 이끌어나간다."

 

욕심이 나는 책이긴 하지만, 동시에 욕심을 버려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고급 수준의 수학과 양자이론을 동원하고 있는지라 매우 '하드'한 책이기 때문이다. 모든 교양과학서가 소프트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경우는 따로 번역자나 중개자가 필요할 정도다. 우리로선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로저 펜로즈의 마음'을 읽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14.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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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독서인'에 실은 독서칼럼을 옮겨놓는다. 존 그레이의 <동물들의 침묵>(이후, 2014)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저자의 몇 가지 주장과 함께 적었다. 개인적으로 그레이의 책들을 애독하는 편인데, 칼럼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늘 생소한 저자와 책들을 다룸으로써 지적인 계몽과 자극을 제공한다. 매번 한 수 배운다고 할까. 그는 아주 성실한 독서가이기도 하다.  

 

 

 

독서인(14년 4월호) 휴머니즘과 동물들의 침묵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 카라마조프는 휴머니즘을 일컬어 ‘멀리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멀리 있는 인간이란 직접 눈으로 보거나 부대끼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다. 그런 추상적 인간이라면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인간을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토로다. 아니 이반은 오히려 그런 사랑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반문한다. 이반의 태도는 거꾸로 서구식 휴머니즘의 한계에 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예리한 통찰과 비판을 반영한다. 그들은 휴머니즘을 외치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말하지만 정작 가까이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사랑은 외면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한 외면 자체가 휴머니즘의 전제이자 성립조건이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폭로한다.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사상가 존 그레이의 <동물들의 침묵>을 읽으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떠올린 건 서구문명의 핵심적 가치로서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도 분명하다. 러시아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이 ‘바깥으로부터의 비판’이라면 그레이의 비판은 ‘안으로부터의 비판’이다. 게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 정교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고유한 정신이 서구 합리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반면에 그레이는 기독교적 휴머니즘 또한 무신론적 휴머니즘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신화이자 환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말의 통상적인 의미에서 그레이는 허무주의자이고 염세주의자이다. 그는 인간이 동물과는 다른 존재이며, 우월한 존재라는 통념적 믿음을 부정하고 거부한다. 그에게 휴머니즘이란 오만한 환상에 불과하다.


무엇이 휴머니즘인가. 그레이에 따르면 휴머니즘은 세 가지 연속적인 믿음으로 구성돼 있다. 기본이 되는 믿음은 인간 동물이 ‘세상에서 유일한 가치를 담지하는 장소’라고 보는 견해다. 무엇이 특별한가. 인간은 여느 동물들에게는 없는 이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런 믿음을 전제로 하는 한, 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이자 인간우월주의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인간의 정신이 우주의 질서를 반영한다고 보는 또 다른 휴머니즘으로 이어진다. 이 두 가지 믿음이 고대 그리스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근대에 새롭게 등장한 휴머니즘은 거기에다 인간의 역사란 이성이 점점 증가하면서 진보해가는 이야기라는 믿음을 추가했다. 과학과 역사가 말해주는 바는 “인간은 부분적으로만, 그리고 가끔씩만 이성적이라는 사실”이지만,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이 미래에는 틀림없이 더 이성적이 될 수 있다고 믿어버렸다. 하지만 그레이가 보기에 ‘진보에 대한 믿음’은 터무니없는 낙관이며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맹신에 불과하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 신화에 대한 비판은 단골 메뉴다.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이 신화 없이 살 수 있으며 이를 부인하는 것은 염세주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염세주의자’로서 그레이가 보기에 그것은 착각이다. 언어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이 가진 가장 독특한 점이 바로 신화를 만든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휴머니스트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이 신화를 대체하려고 하는 건 또 다른 신화일 따름이다. 즉 우리의 선택지는 신화들 가운데 놓여 있지, 신화냐 과학이냐는 이분법에 놓여 있지 않다. 그레이가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나 <추악한 동맹>, <불멸화위원회> 등의 전작들을 통해서 줄곧 비판해온 것은 과학과 진보에 대한 휴머니스트들의 오만한 맹신이다. 그들이 간과하는 건 진보의 신화조차도 ‘이성’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신화와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신화를 합쳐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근대 과학은 신화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과학을 통한 구원’이라는 신화를 새로 만들어냈을 따름이다.


인간의 역사는 과연 진보해왔는가. 그레이는 부정적이다. 가깝게는 21세기 초 미국의 불평등이 노예제 사회였던 2세기 로마제국보다 심하다는 역사학자들의 견해도 참고할 수 있다. 이미 경제위기는 세계경제가 더 발전할 것이라는 장기적인 전망에 회의를 갖게 한다.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노동자계급은 할 노동이 없어지고 중산층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있다. 호황이 가져온 최종 결과는 저축 고갈과 전문직 중산층의 몰락이었다.” 그레이는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고 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호황기에는 경제가 영원히 팽창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팽배했고, 불황으로 접어들자 다시금 성장신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주문이 쏟아진다. “진짜 부는 유한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행복이나 자아실현의 허구성도 마찬가지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가는 구불구불한 길일 따름이고,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인간은 많은 허구를 동원한다. 행복 추구라는 신화도 그런 허구 가운데 하나다. 프로이트의 충고에 따르면, 행복을 추구하는 건 삶에서 곁길로 새는 것이나 마찬가지며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게 훨씬 더 낫다. 무엇이 ‘충족’돼야지만 행복하다는 환상은 만성적인 비참함으로 우리를 이끌기 십상이다. 자아실현의 신화도 마찬가지다. 19세기 낭만주의 운동에 많은 걸 빚지고 있는 이 신화는 우리에게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으라고 말하지만 그런 자아는 없다.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그 자아대로 되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건 말 그대로 믿음일 뿐이다. 그레이의 제안은 이런 것이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살아갈 방법을 더 잘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행복을 간접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예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게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일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레이는 우리가 진보의 신화, 행복의 신화에서 벗어나길 권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화가 아닌 진짜 현실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레이가 도저한 허무주의자인 것은 그 때문이다. 다만 그와 함께 아무런 가감 없이 우리의 현실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무의미하지 않다. 바로 동물들의 침묵에 대해서. “동물에게는 침묵이 자연적인 휴식의 상태이지만 인간에게는 내면의 소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라고 그는 말한다. 휴머니즘이 이 침묵보다 대단한 것인지 숙고해볼 일이다.

 

14.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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