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독서인'에 실은 독서칼럼을 옮겨놓는다. 존 그레이의 <동물들의 침묵>(이후, 2014)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저자의 몇 가지 주장과 함께 적었다. 개인적으로 그레이의 책들을 애독하는 편인데, 칼럼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늘 생소한 저자와 책들을 다룸으로써 지적인 계몽과 자극을 제공한다. 매번 한 수 배운다고 할까. 그는 아주 성실한 독서가이기도 하다.
독서인(14년 4월호) 휴머니즘과 동물들의 침묵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 카라마조프는 휴머니즘을 일컬어 ‘멀리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멀리 있는 인간이란 직접 눈으로 보거나 부대끼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다. 그런 추상적 인간이라면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인간을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토로다. 아니 이반은 오히려 그런 사랑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반문한다. 이반의 태도는 거꾸로 서구식 휴머니즘의 한계에 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예리한 통찰과 비판을 반영한다. 그들은 휴머니즘을 외치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말하지만 정작 가까이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사랑은 외면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한 외면 자체가 휴머니즘의 전제이자 성립조건이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폭로한다.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사상가 존 그레이의 <동물들의 침묵>을 읽으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떠올린 건 서구문명의 핵심적 가치로서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도 분명하다. 러시아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이 ‘바깥으로부터의 비판’이라면 그레이의 비판은 ‘안으로부터의 비판’이다. 게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 정교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고유한 정신이 서구 합리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반면에 그레이는 기독교적 휴머니즘 또한 무신론적 휴머니즘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신화이자 환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말의 통상적인 의미에서 그레이는 허무주의자이고 염세주의자이다. 그는 인간이 동물과는 다른 존재이며, 우월한 존재라는 통념적 믿음을 부정하고 거부한다. 그에게 휴머니즘이란 오만한 환상에 불과하다.
무엇이 휴머니즘인가. 그레이에 따르면 휴머니즘은 세 가지 연속적인 믿음으로 구성돼 있다. 기본이 되는 믿음은 인간 동물이 ‘세상에서 유일한 가치를 담지하는 장소’라고 보는 견해다. 무엇이 특별한가. 인간은 여느 동물들에게는 없는 이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런 믿음을 전제로 하는 한, 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이자 인간우월주의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인간의 정신이 우주의 질서를 반영한다고 보는 또 다른 휴머니즘으로 이어진다. 이 두 가지 믿음이 고대 그리스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근대에 새롭게 등장한 휴머니즘은 거기에다 인간의 역사란 이성이 점점 증가하면서 진보해가는 이야기라는 믿음을 추가했다. 과학과 역사가 말해주는 바는 “인간은 부분적으로만, 그리고 가끔씩만 이성적이라는 사실”이지만,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이 미래에는 틀림없이 더 이성적이 될 수 있다고 믿어버렸다. 하지만 그레이가 보기에 ‘진보에 대한 믿음’은 터무니없는 낙관이며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맹신에 불과하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 신화에 대한 비판은 단골 메뉴다. 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이 신화 없이 살 수 있으며 이를 부인하는 것은 염세주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염세주의자’로서 그레이가 보기에 그것은 착각이다. 언어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이 가진 가장 독특한 점이 바로 신화를 만든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휴머니스트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이 신화를 대체하려고 하는 건 또 다른 신화일 따름이다. 즉 우리의 선택지는 신화들 가운데 놓여 있지, 신화냐 과학이냐는 이분법에 놓여 있지 않다. 그레이가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나 <추악한 동맹>, <불멸화위원회> 등의 전작들을 통해서 줄곧 비판해온 것은 과학과 진보에 대한 휴머니스트들의 오만한 맹신이다. 그들이 간과하는 건 진보의 신화조차도 ‘이성’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신화와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신화를 합쳐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근대 과학은 신화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과학을 통한 구원’이라는 신화를 새로 만들어냈을 따름이다.
인간의 역사는 과연 진보해왔는가. 그레이는 부정적이다. 가깝게는 21세기 초 미국의 불평등이 노예제 사회였던 2세기 로마제국보다 심하다는 역사학자들의 견해도 참고할 수 있다. 이미 경제위기는 세계경제가 더 발전할 것이라는 장기적인 전망에 회의를 갖게 한다.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노동자계급은 할 노동이 없어지고 중산층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있다. 호황이 가져온 최종 결과는 저축 고갈과 전문직 중산층의 몰락이었다.” 그레이는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고 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호황기에는 경제가 영원히 팽창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팽배했고, 불황으로 접어들자 다시금 성장신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주문이 쏟아진다. “진짜 부는 유한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행복이나 자아실현의 허구성도 마찬가지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가는 구불구불한 길일 따름이고,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인간은 많은 허구를 동원한다. 행복 추구라는 신화도 그런 허구 가운데 하나다. 프로이트의 충고에 따르면, 행복을 추구하는 건 삶에서 곁길로 새는 것이나 마찬가지며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게 훨씬 더 낫다. 무엇이 ‘충족’돼야지만 행복하다는 환상은 만성적인 비참함으로 우리를 이끌기 십상이다. 자아실현의 신화도 마찬가지다. 19세기 낭만주의 운동에 많은 걸 빚지고 있는 이 신화는 우리에게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으라고 말하지만 그런 자아는 없다.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그 자아대로 되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건 말 그대로 믿음일 뿐이다. 그레이의 제안은 이런 것이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살아갈 방법을 더 잘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행복을 간접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예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게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일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레이는 우리가 진보의 신화, 행복의 신화에서 벗어나길 권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화가 아닌 진짜 현실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레이가 도저한 허무주의자인 것은 그 때문이다. 다만 그와 함께 아무런 가감 없이 우리의 현실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무의미하지 않다. 바로 동물들의 침묵에 대해서. “동물에게는 침묵이 자연적인 휴식의 상태이지만 인간에게는 내면의 소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라고 그는 말한다. 휴머니즘이 이 침묵보다 대단한 것인지 숙고해볼 일이다.
14. 0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