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책&(419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주제는 '디지털 치매'인데, '로그아웃' 혹은 '디지털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다룬 책들을 같이 골랐다. '디지털 치매'에 대해서는 만프레드 스피처의 <디지털 치매>와 함께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청림출판, 2011)이 기본서이다.

 

 

 

책&(13년 6월호) 디지털에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비디오게임, 텔레비전과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있을까. 세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어려워질 법한 상상이다. 길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미디어는 우리의 일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기술혁신이 가능하게 만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박수를 치며 환영해야 할까. 그럴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하지만 스마트한 일상의 도래와 함께 우리의 뇌는 점점 퇴화하고 있다는 것이 디지털화된 세상의 불편한 진실이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대책이 필요한가.


먼저 독일의 뇌과학자이자 정신의학자 만프레드 슈피처의 <디지털 치매>(북로드, 2013)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보는 게 좋겠다. 사실 디지털 치매에 대한 경고는 멀리에서 찾을 것도 없다. “세계적으로 정보기술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의 의사들은 이미 5년 전에 기억력 장애와 주의력 결핍 장애는 물론, 감수성 약화를 겪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발표했다”는 게 저자의 인용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치매’란 말의 원산지가 한국인 셈이다.


교육당국에서는 흔히 ‘교실에서의 디지털 혁명’을 주창하면서 전자교과서를 사용하는 ‘교과서 없는 교실’이 미래의 학교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컴퓨터 중독과 인터넷 중독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이들을 새로운 미디어에 적응시키려고 하는 것은 마치 알코올과 니코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길러주기 위해서 유치원에서부터 이에 노출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디지털 환경에 일찍 접근하는 것이 왜 디지털 치매를 유발할 정도로 부정적인가. 그것은 우리 뇌의 신경세포가 학습을 통해서만 효과적으로 기능하지만, 디지털 환경은 이에 필요한 자극과 부하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사하기와 붙이기가 읽기와 쓰기를 대신하고 뇌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클라우드에 옮겨놓는 식이라면, 스마트해지는 환경과 정확히 반비례하여 우리는 ‘머리를 쓰지 않는 똑똑한 바보’가 되어갈 뿐이다.


존 팰프리와 우르스 가서의 <그들이 위험하다>(갤리온, 2010) 역시 디지털 시대의 그늘을 폭로하는 책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디지털 세대’의 그늘을 염려하는 책이다. 어떤 세대인가. “지하철에서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미친 듯이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날리는 십대 소녀”와 “모든 종류의 비디오 게임은 물론, 키보드 타이핑 속도에서도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는 여덟 살 난 꼬마”가 바로 새로운 세대, ‘디지털 네이티브’다. 디지털 혁명은 분명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시켰지만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게 저자들의 우려다. 표류할 수 있는 디지털 환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생활을 보호하며 필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일이 디지털 네이티브에게 떠안겨진 과제다.


가령 교육에 한정하자면 디지털 네이티브의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라 정보 과부하이다. 매년 1인당 6톤의 책에 해당하는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디지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일상은 분명 인류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저자들은 아이들이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과 함께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고 집중할 경우 멀티태스킹을 했을 때보다 효율성을 더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떻게 하면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는지 배우는 것이 디지털 네이티브에게는 오히려 더 중요한 공부다. 더불어 디지털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뇌만 둔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도 정신없이 흘러간다면 말이다.

 

 


<두 남자의 미니멀 라이프>(책읽는수요일, 2013)의 공저자 조슈아 필즈 밀번의 적절한 비유를 인용하자면, “사탕을 먹는 게 죄악이 아니듯, 인터넷을 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고 오로지 사탕만 먹는다면 그건 문제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목적이 분명할 때만 인터넷을 한다는 원칙을 세운다. 집에서까지 인터넷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인터넷 회선을 끊은 그는 유튜브 동영상, 영화 예고편, 우스운 사진 등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흘려보냈던 시간을 되찾는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알렉스 뮐레의 <달콤한 로그아웃>(나무위의책, 2012)의 주제도 ‘인터넷 없이 생활하기’와 ‘진짜 인생 되찾기’다. 하루 평균 60-80통의 이메일을 받고, 50통을 보내는 전형적인 인터넷과 이메일 중독자였던 저자는 6개월간 인터넷을 끊는 실험을 해보기로 하고 그 과정을 일기로 적어나간다. 여느 중독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금단 현상으로 고통 받았지만 아날로그적 삶의 ‘평온한 느낌’을 회복하는 데는 성공한다. 그리고 디지털 세상을 다스리는 내면의 힘은 그런 금단의 경험을 통해서 길러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잔 모샤트의 <로그아웃에 도전한 우리의 겨울>(민음인, 2012) 역시 한 가족이 6개월간 전자 매체의 플러그를 뽑은 경험담이다. 무엇을 배웠을까? 저자가 얻은 십계명 가운데 제1조는 “따분함을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이다. 하긴 따분함이 없다면 우리의 뇌는 아무런 흥미로운 것도 고안해내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정작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온갖 재미와 정보로 인해 심심하거나 따분하지 않은 삶이라고 해야 할까.

 

13. 06. 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주간경향(103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위르겐 오스터함멜과 닐스 페테르손의 <글로벌화의 역사>(에코리브르, 2013)가 다룬 책이다. 평소보다 훨씬 부족한 시간에 읽고 쓰느라 분량도 짧아졌다. 최근에 다시 나온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1,2,3>(까치, 2013)과 같이 읽어도 좋겠다 싶다.

 

 

 

주간경향(13. 06. 18) ‘세계경제’는 어떻게 출현했나

 

글로벌화란 무엇인가. “세계적 범위로 연결되는 관계의 팽창과 집중화, 그리고 가속화”라는 일반적 정의를 수용하면, 즉각적으로 찬반 양론이 제기된다. 지지하는 쪽에서는 글로벌화가 성장과 번영의 새시대를 뜻한다면, 그 비판자들이 보기에는 서구 거대 기업에 의해 주도되는 지배체제의 출현과 그에 따른 민주주의와 노동권의 침해, 생태계의 파괴 등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반 양론과도 비슷하다. 글로벌화란 곧 ‘글로벌 자본주의화’로 이해하는 게 우리의 통념일 듯싶다.

하지만 독일의 역사학자들이 쓴 <글로벌화의 역사>에 따르면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일단 제목에서도 암시되지만 ‘글로벌화’는 ‘글로벌 자본주의’와 구별된다. 중복될 수는 있지만 포함관계로 치자면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글로벌화가 글로벌 자본주의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글로벌 자본주의는 글로벌화의 한 단계 내지는 한 양상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글로벌화의 역사에 대한 ‘짧은’ 소개를 목표로 하면서 저자들은 네 가지 시기 구분을 제시한다. 첫 번째 시기는 18세기 중반까지로 제국의 건설, 무역, 종교적 결속 등이 규모의 팽창과 함께 대륙간의 교환을 촉진했다. 두 번째 시기는 1750∼1880년의 시기로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일어난 정치혁명이 제국주의 경쟁을 격화시켰고 교통과 통신, 이주, 상업 따위의 네트워크를 창출했다.

세 번째 시기는 1880년대에서 1945년, 곧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로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은 글로벌화의 정치화이다. 제국주의 강국들의 패권 경쟁이 결국 세계 분할로 나타나고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글로벌화가 파멸적 붕괴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거꾸로 이러한 위기는 말 그대로 세계적 규모로 전개됐다는 점에서 글로벌화의 힘을 보여준다. 1918∼1919년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보다 더 많은 인명을 앗아간 인플루엔자는 글로벌화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다.

글로벌 역사는 세계사와 어떻게 다른가. 저자들에 따르면 세계사는 “문명의 내적인 역학과 그것을 상호비교하며 기술하는 다양한 문명에 관한 역사”인 반면에 글로벌 역사는 “문명간의 접촉과 상호작용에 관한 역사”다. 그러한 글로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부추긴 것은 미국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론이다. 1500년 전후 유럽에서 글로벌 자본주의 경제가 발생했다고 보는 그의 관점은 민족-국가 단위의 역사가 아닌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게 했다.

<글로벌화의 역사>의 저자들은 기본적으로 글로벌화가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는 있지만 16세기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식민제국의 출현과 함께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는 점에서는 월러스틴과 의견을 같이한다. 이 시기의 탐험과 정규무역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의 직접적인 접촉을 역사상 처음으로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게 대륙간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서 ‘세계경제’도 출현하게 된다. 동시에 민족-국가라는 형태를 포함한 유럽식 제도와 서구사상이 세계 전역에 수출된다.

1945년 이후 대량생산, 대량소비, 그리고 대중매체의 글로벌화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과연 글로벌화는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는가? 저자들은 1965년 베트남 전쟁이 글로벌화에 대한 반대, 곧 로컬화에 대한 요구를 결집시킨 계기였다고 본다. 글로벌한 환경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도 60년대 저항문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글로벌화의 미래를 점쳐보기 위해서라도 음미해볼 만한 견해다.

 

13. 06. 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가 출간됐다. 1차분으로 네 권이 나왔는데, 첫 권은 로버트 영의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현암사, 2013)다. 포스트식민주의 입문서인데, 저자의 책으론 <백색신화>(경성대출판부, 2008)과 함께 포스트식민주의의 역사 개관,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털리즘>(박종철출판사, 2005)가 먼저 소개된 바 있다. 이번에 같이 나온 책으로는 <유럽을 떠나라: 파농과 유럽의 위기>, <경계에서 만나다: 디아스포라와의 대화>, <팽창하는 세계> 등이 포함돼 있다.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를 사고하려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극과 성찰을 제공해줄 듯싶다. 로버트 영의 책들과 함께 1차분 네 권을 리스트로 묶어 놓는다...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로버트 J. C. 영 지음, 김용규 옮김 / 현암사 / 2013년 5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3년 06월 12일에 저장
절판
유럽을 떠나라 : 파농과 유럽인의 위기
루이스 R. 고든 지음, 하상복 옮김 / 현암사 / 2013년 5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3년 06월 12일에 저장
절판
경계에서 만나다 : 디아스포라와의 대화
서경식 외 지음 / 현암사 / 2013년 5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3년 06월 12일에 저장

팽창하는 세계
마이클 크로닌 지음, 이효석 옮김 / 현암사 / 2013년 5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3년 06월 12일에 저장
절판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공부하는 사람들>(라이팅하우스, 2013)이란 책이 눈에 띄어 최근에 나온 '공부'를 주제로 한 책들을 한데 모아놓는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부제는 '놀이하듯 공부하는 새로운 인류의 탄생'인데(원제는 New Culture of Learning), 말 그대로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물론 기본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일 것이고...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들- 놀이하듯 공부하는 새로운 인류의 탄생
더글라스 토마스 & 존 실리 브라운 지음, 송형호 외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3년 6월
12,500원 → 11,250원(10%할인) / 마일리지 620원(5% 적립)
2013년 06월 10일에 저장
절판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 우리가 교육에 대해 꿈꿨던 모든 것
살만 칸 지음, 김희경.김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4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17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3년 06월 10일에 저장

최고의 공부- 창의성의 천재들에 대한 30년간의 연구보고서
켄 베인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3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3년 06월 10일에 저장
품절

공부하는 인간
KBS 공부하는 인간 제작팀 지음 / 예담 / 2013년 2월
16,800원 → 15,120원(10%할인) / 마일리지 840원(5% 적립)
2013년 06월 10일에 저장
품절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지지난 주부턴가 한겨레의 북섹션이 월요일로 옮겨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해변의 카프카>(문학사상사)와 그에 대한 신랄한 비판서인 고모리 요이치의 <무라카미 하루키론>(고려대출판부, 2007)을 읽고 적은 것인데(고모리 요이치의 책은 부제가 '<해변의 카프카>를 정독하다'인데, 주로 가출 소년의 사적인 이야기를 군국주의 전쟁이라는 공적인 과거사와 무매개적으로 병치시켜놓고, 결과적으론 역사/기억을 소거시키는 텍스트 운동을 문제 삼는다), 분량상 '복잡한 내용'은 생략하고 간단한 얼개만 언급했다. 현재 대학로에서는 연극 <해변의 카프카>가 공연중이기도 한데, 관람 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한겨레(13. 06. 10) 복잡하여 거부감도 드는 ‘카프카’

 

“내가 지닌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가장 만족스런 작품이다.” <해변의 카프카>를 두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일독한 독자라면 또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넘나드는 이 복잡한 이야기에 매혹과 불만을 동시에 느낄지도 모른다. 굉장히 길고 현란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불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다시 읽거나 내던지거나 둘 중 하나다. 하긴 ‘일독’은 문학작품을 읽는 올바른 방식은 아니다. 나보코프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선택지는 ‘읽고 또 읽기’이거나 ‘읽고, 읽고 또 읽기’여야 하니까.

 

복잡해 보이는 소설을 읽는 한 방법은 단순하게 읽는 것이다.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이 나온다고 믿기에. 다시 하루키를 인용하면 그는 열다섯 살 소년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아직 변화할 가능성이 많고 정신상태가 고착되어 있지 않다는 데 주목해서란다. 작품에서 그 소년의 이름이 ‘다무라 카프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 되기 위해 열다섯 번째 생일날 가출한다. 한때의 치기는 아니다. 그에겐 남다른 동기가 있다. 어머니가 네 살배기 자신을 남겨둔 채 누나만 데리고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어머니한테 버림받은 것도 외상적 충격인데, 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누나가 양녀라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그런 누나만 데리고 가출했으니 그는 철저하게 버림받은 게 된다. 따라서 주인공이 떠안게 되는 물음은 “왜 어머니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을까? 나에겐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일까?”일 수밖에 없다. 그 의문이 그의 영혼을 좀먹으며 그를 속이 텅 빈 껍데기로 만든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만한 무엇도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공허한 인간’이다.

 

 

다무라 카프카는 어떻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공허한 인간’에서 ‘터프한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해변의 카프카>에서 그것은 그가 어머니로 설정한 사에키를 용서한다고 말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사에키는 스무 살에 연인을 잃은 상처와 죄책감을 평생 떠안고 살아온 여성이다.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지만 용서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존감을 회복할 수는 있다. ‘용서의 주체’가 됨으로써 다무라 카프카는 공허한 인간에서 탈피한다. 그리고 비로소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된다. 터프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터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루키는 이러한 성장소설적 골격에 신화와 역사를 덧입힌다. 다무라 카프카는 아버지로부터 “너는 언젠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누나와 육체관계를 맺는다”는 예언을 주입받으며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겹쳐놓은 것이다. 게다가 태평양전쟁의 상흔이 각인돼 있는 나카타 노인의 이야기를 다무라 카프카의 이야기와 병치해놓았다. 그리고 상처를 입은 영혼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또 다른 세계를 현실 세계에 인접시켜놓았다. 이러한 인위적 설정이 <해변의 카프카>를 복잡하게 만들면서 흥미를 끌게 하지만, 동시에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모든 걸 쏟아붓지 않아도 만족스런 작품을 써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13. 06. 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