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철학자 나카마사 마사키의 강연록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아르테)이 출간되었다. 지난봄에 나도 강의를 진행한 적이 있기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다. 차근히 짚어가면서 내가 강의에서 놓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보려 한다.나카마사의 책으론 이미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가 출간된 터라 <인간의 조건> 강의록을 펴낸 것도 어색하지 않다. 저자는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과 <칸트 정치철학 강의>를 일어로 옮겼다고도 하니까 아렌트 전문가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그밖에 다른 책으로는 <현대 미국사상: 자유주의의 모험>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역자는 <인간의 조건> 인용시에 일본어판을 따르면서도 한국어판(한길사)의 쪽수도 병기했다. 나처럼 한국어판 대조해가며 읽으려는 독자에게는 적절하면서 요긴한 배려다. <인간의 조건>을 혼자서 독파하려는 독자에게도 유용한 참고서가 되겠다...
얼마전에 위아래가 잘린 파본 형태의 황석영 중단편전집 중고본을 구입했다가 반품처리하지 않고 폐기했는데 두 권을 재구입해서 짝을 맞추었다. <몰개월의 새>는 아직 품절되지 않아서 새책을 구입했더니 출판사 표기가 차이가 난다는 게 옥에 티라고 할까(창작과비평사가 창비사로 바뀌었다). 그렇더라도 책 사이즈는 맞으니까 장서용으로 하자가 있는 건 아니다. 이제 <객지>부터 다시 읽어볼 참이다...
강연 공지다. 11월 24일과 12월 8일, 두 차례에 걸쳐서 대구의 동네책방 두 곳에서 강연 행사 겸 독자와의 만남을 갖는다. 두 권의 책, <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마음산책)와 <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속의 철학>(책세상, 근간)을 거리 삼아 진행하는데 구체적인 건 아래 포스터를 참조하시길(참가비는 강연당 2만원이며, 문의는 오은아 010-5365-1125/ 김정희 010-5005-0912).
저녁을 일찍 먹은 날은 밤참을 먹게 된다. 밤참용 책이 따로 있지 않지만 오늘은 오은의 시집 <유에서 유>(문학과지성사)를 읽었다. 읽다 말았다. 단숨에 읽기에는 분량이 좀 되는 시집이어서다. 그래도 ‘읽다 만 책‘까지는 읽었다. 사다 만 책은 없다빌리다 만 책이나 버리다 만 책은 없다읽다 만 책만 있다이런 게 오은 시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다 알고 읽은 터에 시비를 걸 수는 없다. 말장난도 상습이면 심지가 굳은 말장난이다. 다만 그의 시가 무얼 생산하는지는 의문이다. ‘유에서 유‘로 가는 여정은 제자리 걸음의 여정이어서다.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다처음 보는 개개도 나를 처음 보았을 것이다 내가 개를 스쳤다개가 나를 훑었다 (‘계절감‘)그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또한 오은의 시다. 이 시집이 최소한 세번째 시집임에도 그러하다. ˝오은의 시는 현대의 도시락폭탄이다˝는 평도 재미있지만 올드하다. 도시락폭탄은 현대적이지 않다. ‘시인의 말‘도 저렴하다.꿀맛이 왜 달콤한 줄 아니?꾼 맛도 아니고 꾸는 맛도 아니어서 그래.미래니까, 아직 오직 않았으니까.이런 게 오은의 오원 짜리 유머다. 그대로 반복하지면 오은의 시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의 시는 미래에 속한다. 그는 오다 만 미래파다. 온 것 같잖은 미래파다. 그래서 뭔가 기대하면 읽을 수 없는 게 오은의 시다. 기대를 접으면 터진다.터진 수도관은 분수도 모르고분수를 내뿜었어시원한 것은 순간이었어그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시원시원한 고통이었어 (‘폭우‘)권혁웅 시인은 해설에서 ˝오은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오, 에, 그건 원 없이 읽은 다음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내가 가장 많이 강의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새 번역본이나 새 해설서가 나오면 뭔가 다른 얘기를 하나 궁금해서 펴보게 된다(예상밖의 내용과 만나는 일은 드물다. 나대로 요즘 추가한 레퍼토리는 스탕달의 <적과 흑>과 비교하는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고전 해설서로 나온 수경의 <죄와 벌, 몰락하는 자의 뒷모습>(작은길)도 그런 관심 때문에 가방에 챙겼다. 내일도 <죄와 벌> 강의가 있어서다. 수경의 책으론 <비참함으로부터 탄생한 위대한 벽화 레미제라블>도 <레미제라블> 강의 때 참고한 듯하다. 그리고 이 시리즈(‘고전 찬찬히 읽기‘)의 책 가운데서는 오선민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죄와 벌>의 부제가 ‘몰락하는 자의 뒷모습‘인 건 의외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라스콜니코프의 어떤 모습과도 맞지 않아서. 새로운 해석인가? 새로우면서 말이 되는 해석이라면 충분히 의의가 있다. 과연 그런지는 내일 확인하기로. 오늘은 오늘의 할일도 아직 많이 남았다. 내일로 넘어간다고 해도 안 하면 그대로인. 나는 무슨 죄를 저지른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