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공지다. 알라딘 인문학스터디의 하나로 12월 15일(금) 저녁 7시 30분에 프란츠 카프카 특강을 진행한다. 이번에 출간된 게르하르트 노이만의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 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에디투스)을 중심으로 카프카 문학의 의미와 의의를 짚어보는 행사다.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포스터를 참고하시길(신청은 알라딘의 ‘작가와의 만남‘ 페이지에서 하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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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폭우중에도 일정이 있어 이동중이다. 북플 글쓰기를 하려 했더니 임시저장된 글이 뜨는데, 어젯밤에 쓰려다 만 것이다. 지울까 하다가 몇마디 적기로 한다. 최승자 시인의 가장 최근 시집인 <빈 배처럼 텅 비어>(2016) 소개글에서 전문이 인용된 시 몇 편 읽고서 느낀 점을 적으려 했다.

어지간한 시집은 갖고 있는 걸로 생각했는데 이 시집을 포함해 <쓸쓸해서 머나먼>(2010)과 심지어 분명히 읽은 기억이 있는데 <내 무덤 푸르고>(1993)까지 구매내역에 뜨지 않는다. 설사 <내 무덤 푸르고>를 읽었다 하더라도 <빈 배처럼 텅 비어>까지는 23년의 간격이 있다. 1952년생인 시인의 나이를 고려하면 40대 초반부터 60대 중반까지의 간격이다. 그럼에도, 시집 제목에서 이미 눈치챌 수 있지만, 최승자를 식별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1981)고 이미 서른 전에 적어놓은 최승자 말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비롯되는데, 이후에 이 시인이 어떤 시를 더 쓰더라도 이미 읽은 시로 생각된다는 점. 혹은 느껴진다는 점. 진작에 늙었던 시인이기에 장년의 시나 노년의 시가 따로 있을 리 없다. 고로 ‘최승자는 최승자다‘만 반복할 수 있을 뿐.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살아왔나
“보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아으 비려라/ 이 날것들의 生) (‘얼마나 오랫동안‘ 전문)

너의 존재를 들키지 마라
그림자가 달아난다
(내 詩는 당분간 허공을 맴돌 것이다) (‘내 詩는 당분간‘ 전문)

최승자 투는 이런 시들에서 고스란히 확인된다. 삶에 대한 신랄한 냉소와 풍자, 자조, 독설 등은 최승자 시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런 만큼 너무 익숙한 세계다. 그런 대로 재밌다고 느낀 건 ‘우리는‘ 정도.

우리는 쩍 벌리고 있는 아구통이 아니다
우리는 人도 아니고 間도 아니다
우리는 별다른 유감과 私感을
갖고 사는 천사들일 뿐이다
우리가 천사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세상 환영에 속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게 전문이고 전부다. 그 이상을 보여줄 거라는 기대감이 없어서 시집은 장바구니에 묵혀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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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으로 스티븐 슈워츠의 <분석철학의 역사>(서광사)를 고른다. 전문서 범주에 속하지만 (원제대로 하면) ‘간추린 역사‘라는 말에 현혹되어 덜컥 주문학 책이다. 492쪽이면 간추렸다는 말이 좀 무색하지만, 정평 있는 소개서로 뮤니츠의 <현대 분석철학>(서광사)이 752쪽에 이르는 것에 견주면 ‘짧은‘ 편이다.

˝<분석철학의 역사>는 영미 분석철학의 모든 주요 측면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해 포괄적으로 개관하고 있다. 고틀로프 프레게, 버트런드 러셀, G, E. 무어의 씨 뿌리는 작업에서 시작함으로써 스티븐 P. 슈워츠는 이미 언급한 인물들 외에 비트겐슈타인, 카르납, 콰인, 데이비드슨, 크립키, 퍼트넘, 롤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을 포함하여 분석철학의 주요 인물들과 학파들을 망라해 다룬다.˝

원저가 2012년에 나왔음에도 책의 부제는 ‘러셀에서 롤스까지‘다. 롤스 이후의 분석철학의 흐름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다뤘다는 뜻도 된다. 철학 전공자나 영미의 현대철학사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그래도 심도 있는 안내서로 의미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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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소설의 제목이다.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문학과지성사). 짐작엔 이인성의 소설 가운데, 가장 편하게, 그리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낯선 시간 속으로>를 강의하게 된 김에 다시 읽어보려 오랜만에 재구입했는데, 다시 읽는다고 한 건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 잡지에 발표되었을 때 읽었기 때문이다.

단행본은 1995년에 나왔는데, <낯선 시간 속으로>(1983)와 <한없이 낮은 숨결>(1989)에 이은 것이니 6년만에 나온 작품. 그 뒤에 소설집 <강 어귀의 섬 하나>(1999)가 추가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먼저 절판된다(공식적으론 품절이지만 다시 나올지 의문이다). 현재로선 80년대에 나온 작품집 두 권이 이인성의 대표작이고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이 보너스로 덧붙여진 듯한 모양새다.

잡지에서 읽었다고는 하지만 다 읽은 것 같지는 않고 다 읽는 게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한 장면만으로도 책값은 충분히 하는 소설이어서다. 문제의 장면은 주인공 화자가 시집을 라면과 같이 끓여먹는 대목으로 ‘나‘는 좋아하는 시를 주저없이 뜯어내 갈기갈기 찢어서는 코펠에 뿌려넣는다. 그러고는 걸죽하게 되도록 끓인다. 그렇게 끓인 다음에 라면과 양념수프를 털어넣고 4분. 언젠가 따라서 해볼지 모르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묘사가 자세하다. 이 대목을 다시 읽는 걸로 오늘의 밤참을 대신한다.

˝뜨거운 김에 눈을 찔끔대며, 뜨거운 맛에 혀를 휘두르며, 김치를 말아 라면을 먹는다. 가끔, 충분히 섞이지 못한 밍밍한 종이 맛이 이물스럽게 목에 걸린다. 꿀꺽 삼킨다. 그래, 내가 너희를 먹는다. 너희를 모두 먹고, 너희 모두만한 시인이 되겠다. 나는 맹세했었다. 오래 전에, 그녀에게. 나는 혼자서라도 그 맹세를 지키겠다. 미치기 전에, 내가 미쳐 사라지면 그녀가 죽는 날까지 울, 그런 미침의 기록인 시를 쓰겠다. 맹세를 위해, 나는 국물 위에 뜬 작은 종이 섬유질 덩어리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 안에 쑤셔넣는다. 꿀꺽 삼키고. 손가락을 빨고. 손가락을 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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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 19세기와 20세기 러시아문학 강의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데, 19세기 작가로는 레스코프와 살티코프-셰드린, 20세기 작가로는 알렉시예비치를 남겨놓고 있다(20세기는 가을학기 강의다). 이전에 다루지 않아서 이번에 일부러 집어넣은 작품도 있는데, 레스코프의 <왼손잡이>나 살티코프-셰드린의 <골로블료프가의 사람들>이 그에 해당한다.

반면에 분량 때문에 중요한 작품임에도 빼놓은 경우가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1859)다. 발표시기를 고려하면 투르게네프보다 먼저 다룰 수 있는 작가다. 분량이 부담스럽다는 건 두 권짜리여서인데, 최소한 두 주 정도는 할애해야 한다. 오래전 대학 강의에서 한번 다루고 나도 읽은 지 오래 돼 문득 생각이 났다. 러시아 지주계급의 습속을 다룬 점에서는 고골의 <죽은 혼>(1842)과도 비교해서 읽어봄 직하다. 시기적으로는 투르게네프의 <귀족의 둥지>나 <전야>와 비교될 수 있다.

<오블로모프>는 1980년 니키타 미할코프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매우 뛰어난 영화다. 오블로모프 역은 러시아의 국민배우 올렉(올레그) 타바코프가 맡았다. 국내 출시 제목은 <오브로모브의 생애>다(아마도 일역된 제목을 옮겨서 표기가 그렇게 된 듯싶다). 유튜브를 통해서도 관람할 수 있는 영화. 책이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영화를 통해서도 어떤 작품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특히 앞장면만 20여분 정도 봐도 오블로모프란 인물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작품의 핵심도 오블로모프란 인물, 내지 오블로모프적 기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오블로모프적 기질의 일례는 침대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는 습성이다.

번역본은 현재 두 종이 나와 있는데, 욕심으로는 하나 더 추가되도 좋지 않을까 싶다. 과도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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