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에 안착해서 아쉬운 작별인사를 뒤로 한 채 귀가중이다. 공항리무진을 타고 한 시간 가량 간 이후에 종점인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려 한다. 표를 끊고서 기다리다가 10시 50분차를 탔다.
오늘 아침 호텔을 체크아웃하며 가방에 넣은 책은 시바타 쇼지의 <무라키미 하루키 & 나쓰메 소세키 다시 읽기>다. 저자는 일본의 문학연구자이고 소세키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주장하는 책이다. 특히 <그후>(<그리고 나서>), <문>, <마음>, <행인> 등의 삼각관계에서 주인공과 그에 맞서는 인물이 각각 일본과 한국(조선)을 대신한다는 알레고리적 해석은 과도해 보이면서도 흥미를 끈다. 중요한 것은 소세키에게서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인데, 그것이 이중적 양상을 가지며 그에 대한 섬세한 읽기가 소세키 이해의 관건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필히 참고할 책은 소세키의 <나의 개인주의>(책세상)다. 더불어 그의 <문학예술론>과 <문명론>도 중요한 참고자료. 이런 자료까지 일반 독자가 모두 챙겨서 읽기는 어려울 테지만 주요 평문과 강연문을 옮긴 <나의 개인주의>는 필독할 필요가 있다.
소세키의 개인주의를 집약하는 표어는 ‘자기본위‘다.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하는 영국 유학시절(1900-1902), 그나마 그를 버티게 해준 것이 자기본위의 발견이고 그것이 소세키식 개인주의의 바탕이다. 그런데 그 자기본위의 ‘자기‘는 소세키를 뜻하면서 동시에 메이지유신 이후 탈아입구(脱亜入欧) 에 나선 근대 일본도 가리킨다. 소세키의 딜레마는 이렇듯 개인과 국가가 은유적 동일시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대립적 관계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자기본위‘의 이중성이 거기에서 비롯되며 소세키의 만년의 세계관을 집약하는 ‘칙천거사(則天去私)‘는 이 딜레마에 대한 출구모색으로 보인다(나를 버리고 하늘을 따른다는 뜻이다. 연구자에 따라서 ‘즉천거사‘로도 읽는다). 소세키 산방 기념관 앞 동상에 ‘칙천거사‘만 새겨져 있어서 내 딴에는 ‘부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기본위‘에 대한 설명을 빠뜨렸다. 귀가길에 생각이 나서 적어놓는다. 곧 터미널에 도착할 듯싶다...



